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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0 02:19
ㅇㅌㅈㅇ ㅅㅅㅊㅈㅇ


바다를 끼고 있는 마을은 십 여년 전이나 평소에도 딱히 조용하진 않았지만 최근 들어 유난히 소란스러워졌다.
이유야 여러 개가 있지만 게 중 가장 큰 것을 꼽아보자면 하나는 전국 유소년 농구 캠프가 이 마을에서 개최중이라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이 캠프를 위해 마을의 최고 유명인이 고향을 다시 찾을 예정이란 것이다.
그리하여 십 여년 전에도 평소에도 바람 잘 날 없던 마을은 태풍의 전조 증상마냥 기묘한 열기에 들떠 있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 모르냐?"
그보다 앞서 은퇴한 업계 선배이자 고교 선배인 정대만은 옛날보다 왕성해진 농구계에 비해 후임 양성이 부족하다 느껴 직접 발로 뛰는 중이었다. 은퇴 이후 곧장 유소년 선수 양성에 뛰어든 정대만은 유소년 선수 육성 환경을 정비하느라 선수 시절보다 더 바쁜 주제에 그를 볼 때마다 후임 양성에 힘 쓸 생각이 없는지 떠보아 댔다.
은근하던 그의 요구는 날이 갈수록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특히나 해외서도 이름을 날리는 후배들이 늘어난 상황에서 이렇다 할 유소년 선수 감독이 없는 데에 적잖은 섭섭함을 토로했다.
"야, 태웅아. 우리 세대에만 반짝하고 그치면 NBA며 메달이며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
서태웅도 인정하는 바 이긴 하였으나 정대만과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유소년 클럽에 돈이나 농구공 따위를 기부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유소년 농구 캠프에 재능 기부를 하겠단 후배의 발언은 정대만을 3점슛 버저비터만큼이나 기쁘게 했다.

오랜 선배의 충동질에 움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고교 선배를 따라 유소년 육성에 관심이 생긴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일년에 한 번은 얼굴을 비추라는 가족의 닥달을 마침 들었을 뿐이고 또 운이 좋게 이동 할 필요가 없는 고향에서 캠프가 열린다길래 동네 마실을 나간다는 느낌으로 선뜻 수락한 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귀찮은 가족의 닥달과 선배의 부추김을 한 번에 해결 할 요량으로 서태웅은 오랜만에 고향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바다를 건너는 동안 한 번도 잠에서 깨지 않았던 태웅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눕기는 커녕 시차를 맞춰 놓으라는 어머니의 잔소리에 찌뿌듯한 몸을 이끌고 산책을 나섰다.
오랜만에 밟은 고향 땅은 무언가 많이 바뀐 것 같으면서도 여전했다. 바다는 늘 그랬듯 눈이 부시게 푸르렀고 젊은 혈기에 제멋대로 자전거를 올려 달리던 방파제도 여전했으며 간만에 찾은 모교 또한 페인트칠을 달리 했을 뿐, 외관은 옛날과 똑같았다.

정규 수업 시간은 끝난지 오래였는지 하교 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고 남은 학교는 동아리 활동을 하는 소리로 요란했다.
반쯤 빈 학교를 멍하니 둘러보던 태웅의 검은 눈동자 위로 옛 기억이 차차 덧씌워졌다. 영사기가 돌아가며 차르르 필름이 쏟아지는 소리 대신 농구공이 나무바닥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시야는 십여 년 전으로 뒤바뀌었다.
학교 외벽의 페인트 색깔이 달라지고 교정을 채운 나무의 키가 반쯤 줄어들었다. 햇빛은 오늘보다 더 뜨거웠고 공기는 조금 더 맑아졌다. 그리고 붉은 머리카락.
시간에 풍화되어 묘하게 잿빛을 띄는 기억 속 유난히 빛나는 색 하나가 있다. 태웅은 무심코 붉은 머리카락의 기억을 좇았다.
안개가 끼듯 과거의 풍경에 잠겨가던 태웅의 시야에 새로운 움직임이 끼어들었다.
"하나, 둘, 하나, 둘!"
구보 소리와 함께 강당이 있던 곳에서 체육복을 입은 학생들이 달려나오기 시작한다.
그 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멀리서 보느라 흐릿한 학생들의 모습이 태웅의 기억 속 동료들의 모습과 오버랩 되었다.

태웅은 강당을 나온 동아리 부원들이 운동장 다섯 바퀴를 돌고 다시 강당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다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유소년 캠프는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로 나뉜다. 태웅은 그 중 고등부를 맡았다.
모교의 후배들을 보고 온 것이 인상 깊어 자진하겠단 말에 그의 선배, 정대만은 그런 제 후배가 기특한 지 등을 연신 퍽퍽 쳐댔다.
"나는 초등부니까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러 와라."
이미 유소년 캠프의 이름난 인사였던 정대만은 자신을 둘러싸는 소년들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다. 태웅은 선배가 난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교 선수들이 모여있다는 강당으로 갔다.


강당 안은 벌써부터 열기로 뜨거웠다. 혈기 왕성한 어린 선수들끼리 만나 뿜어내는 기운이라기엔 공기는 미묘하게 분홍빛을 띄었다.

태웅은 들어가자마자 쏟아지는 시선을 익숙하게 흘려보내며 강당의 무대 위로 올라갔다.
태웅이 별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흩어져 있던 선수들이 일제히 무대 앞으로 달려와 일사분란하게 줄을 맞추어 섰다.
태웅은 지나칠 정도로 반짝이는 눈빛들을 고스란히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잠시후, 강당에서는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캠프 첫 날이 끝났다.
바로 집으로 퇴근하려던 태웅은 대만에게 걸려 근처 이자카야로 끌려갔다. 이미 예정된 자리였는지 좁은 가게의 손님 절반이 캠프 감독이며 관계자였다. 학생들보다는 노골적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따라붙는 시선에 대만은 태웅을 데리고 카운터석에 앉았다.
태웅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테이블은 음식으로 가득찼다.
"요새 식단 하냐?"
태웅은 닭의 염통 꼬치를 집어 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고교 선배와의 술자리는 그럭저럭 즐거웠다. 비시즌의 은혜를 받아 태웅은 거리낌없이 목구멍을 기름칠하고 탄산 가득한 맥주로 씻어내길 반복했다.
태웅이 500cc 맥주 한 잔을 비워냈을 때, 대만은 이미 얼큰하게 취해있었다.
"기특한 짜식! 선배 말에 바다를 다 건너오고!"
벌겋게 달아오른 대만이 태웅의 결좋은 머리카락을 북북 문질렀다. 태웅은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으며 우설 구이를 입에 밀어넣었다. 따지자면 캠프는 덤이었으나 굳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느라 간지러운 손길이 억세게 변하는 일은 없었다.

술기운을 빌려 인사를 나누러 온 캠프 관계자들도 제자리로 돌아가고 하나 둘 거나하게 취한 사람들이 나오자 이자카야는 아까보다 조용해졌다.
어수선한 가게에 앉아 태웅은 얌전히 감자 고로케를 쪼갰다. 애당초 술을 즐기지 않는 성정인지라 태웅은 시즌 중 미뤄둔 미각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미 인사불성이 된 것 같은 대만을 데려다 주는 건 아무래도 자신의 몫일 것 같으므로 태웅은 맥주를 추가하는 대신 닭날개 교자를 주문했다.

간장 종지에 담긴 케챱에 고로케를 찍던 태웅을 풀린 눈으로 보던 대만이 불쑥 물었다.
"태웅이, 너...... 미국 생활은 어떠냐?"
"그럭저럭이요."
"그럼 친구도 많이 사겼고?"
"없진 않아요."
"애인은?"
짓궃음이 담긴 질문을 고로케와 함께 우물우물 씹어 삼키자 대만이 술기운을 뿜어내며 킬킬 웃었다.
한참 웃던 대만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럼...... 백호 소식은 "
대만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태웅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몰라요."
술에 젖어 살짝 느슨해져 있던 목소리와 다르단 걸 느꼈는지 대만이 부스스하게 일어났다.
"야, 태웅아."
대만이 나직하게 그를 불렀으나 태웅은 단칼에 잘랐다.
"그 녀석은 그 때 이후로 연락 한 적 없어요."
대만은 무언가 말하려는듯 입을 벙긋거리다 다물었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대만이 그래 라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태웅은 남은 잔에 있는 맥주를 들이켰다. 탄산이 아프게 목을 긁었다.



평소보다 과음을 한 탓인지 잠자는 숲속의 왕자란 별명이 무색하게 태웅은 침대 위에서 멀쩡히 눈을 뜨고 있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침대 옆 시계를 보니 잠자리에 누운 지 1시간 반이 지나고 있었다.
태웅은 눈을 꿈뻑이다 결국 몸을 일으켰다. 가족들이 본다면 필시 병에 걸린 게 틀림없다며 난리가 날 것 같아 태웅은 1층으로 내려가 우유를 데우는 대신 창문을 열었다.
건조한 미국의 여름과 달리 습기가 빽빽하게 들어찬 고국의 여름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시원건조한 에어컨 바람이 성을 내듯 태웅의 목 뒤를 간질였지만 태웅은 멍하니 뜨뜻미지근한 밤바람을 맞았다.



강백호가 사라진 지 벌써 9년째다.
9년 전, 미국 보스턴 태웅의 아파트, 비시즌 중 잡힌 미팅에 미적미적 나가던 자신을 아무렇지않게 배웅하고 강백호는 사라졌다.
조금 더 경기가 남아있는 팀이 있는 곳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이 움직이는, 두 사람이 미국에 온 뒤로 정한 암묵적 룰에 따라 강백호가 태웅이 있는 동부 보스턴으로 온 지 한 달 째 되는 날이었다.
이상 징조는 없었다. 파이널 진출에 실패한 태웅을 실컷 놀려대다가 진지하게 비디오를 보며 팀의 플레이를 분석하고 태웅의 CD 플레이어를 제멋대로 재생해놓고 그의 취향에 대해 고약한 말을 해대거나 잡지를 뒤적여 어떤 옷이 낫냐고 묻는 등 이전 비시즌의 나날들과 다를 바 없는 휴가의 초입부였다.
기껏 시킨 피자의 치즈가 딱딱하게 굳도록 내버려두고 소파에서 몸을 섞기도 했고 세차를 한답시고 잔뜩 낸 거품을 온 몸에 뒤집어 쓰는 바람에 태웅이 달려들게 만들기도 했다.
징조라면 그 날 아침따라 조금 더 키스를 보챘던 것일까. 아침부터 입술이 붓도록 키스를 나누는 바람에 가뜩이나 짜증나는 비시즌 중의 미팅을 엎어버릴 뻔 했다. 돌아오면 두고보자는 말에 그녀석은 웃었던가.
태웅은 제 머리를 장난스럽게 헝클이는 밤바람 속 야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잘 다녀와, 마지막 말이 붉은 머리카락만큼이나 선명하다. 그런 말을 남겨두고 강백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기상천외한 짓을 저지르는 녀석이니 옷가지가 없어진 것 정도는 이상타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집안 살림을 반이나 덜어낸듯한 느낌, 거의 다 닳아가던 칫솔과 쓰레기조차 없어진 데에서 태웅은 가위로 도려내듯 제 존재를 완전히 지우려 애쓴 강백호의 의지를 엿보았다.
하룻밤을 꼬박 지내고 수십통의 발신 기록을 뒤로 한 채 태웅은 강백호의 아파트가 있는 서부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그러나 이틀동안 눈을 붙이지 못한 태웅을 비웃기라도 하듯 강백호의 아파트는 비워져 있었다.
그의 구단을 찾아가보기도 했지만 구단은 태웅에게 말해줄 것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3개월이 지나, 강백호의 재계약 불발 소식과 은퇴 소식이 동시에 스포츠 신문의 한 켠을 채웠다.
수백통이 넘는 부재중 전화의 답은 그렇게 돌아왔다.

불쾌한 향이 코 끝을 간질였다. 시선을 내리자 집 앞 골목 전선주 옆에서 빨간 불빛이 어른거렸다. 태웅은 창문을 닫는 대신 폐를 좀먹는 연기를 들이마셨다.
그 정대만이 방황하던 시절에도 입에 대지않았던 게 담배라고 했는데, 태웅은 폐 깊숙한 곳까지 타르 섞인 공기를 쑤셔넣는 걸 그만두지 못했다.

놀라움은 두려움으로, 두려움은 슬픔으로, 슬픔은 원망으로. 바뀌어간다기 보다 감정은 쌓여갔다. 놀라움과 두려움과 슬픔과 원망은 끈끈한 타르가 묻기라도 한듯 제멋대로 뒤엉켜 태웅의 가슴을 짓눌렀다.
강백호가 떠난 해, 태웅은 난생 처음 시즌 아웃을 당했다. 갑작스레 무너진 태웅을 두고 온갖 말들이 날아들었다. 대서특필된 동양인 선수를 두고 갖은 소리가 날아들었다. 그러나 쏟아지는 악담과 걱정과 비웃음보다 쌓여가는 전화 기록들 사이에 그의 이름 석 자가 없는 게 더 아팠다.
미국에 있든 고국에 있든 자신의 소식을 들었을텐데 전화도 이메일도 편지도 없다.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게 무엇인지 알면서, 반년도 채 되지 않아 삶의 목적이자 즐거움을 두 개나 뺏겨 가슴이 뻥 뚫려버렸단 걸 누구보다 잘 알거면서, 심지어 뺏어간 장본인이면서 강백호는 기어이 나타나지않았다.

서태웅은 다음 시즌이 시작되기 직전, 가까스로 복귀에 성공했다. 다행히 기복이 없던 선수라는 평가 덕분에 계약 문제까지 가진 않았다.
의심과 비웃음을 짊어지고 복귀한 코트에서 태웅은 그 해 최다득점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긴 슬럼프를 이겨냈다고 여겼으나 기실 태웅은 강백호가 없는 삶에 적응한 것이었다.
거진 1년이 걸린 일이었다.

잊었다고 하진 않겠다. 태웅의 삶에서 그를 지운다는 것은 그의 인생에서 농구를 뺀다는 것과 같은 말이니.
대신 태웅은 묻었다. 다람쥐가 겨울잠을 위해 도토리를 묻듯, 태웅은 강백호와 관련된 기억을 묻었다.
그렇게 9년이 흘렀고 여전히 강백호는 보이지 않는다.

태웅은 이제는 옅어진 담배 냄새를 한 번 더 크게 들이 마시고 문을 닫았다. 후텁지근한 여름의 밤공기는 에어컨의 서늘한 공기에 잊혀진듯 했다.




캠프 이틀째에도 태웅에게 쏟아지는 관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태웅이 한 번씩 시범을 보일 때마다 소년들의 눈에 담긴 분홍빛이 한층 더 짙어졌다.
태웅은 민망해하지도 우쭐해하지도 않은 채 소년 선수들을 대했다. 그 점이 선수들을 더욱 자극했는지 넓은 체육관 강당 안에는 소년 특유의 풋내 섞인 시큼한 땀냄새와 더불어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한 페로몬이 어리숙하게 풍겼다.
운동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제어하지 못한 선수들이 있는가 하면 대놓고 태웅이 지나갈 때마다 페로몬을 푸는 선수들도 있었다.
서른을 넘긴 태웅은 무심함을 매너이자 대답으로 쓸 줄 알았다.
태웅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오메가 선수는 실망한 티를 감추지 않았고 알파 선수는 그런 오메가를 비웃었다. 그 바람에 체육관이 조금 시끄러워졌지만 다른 코치가 제지한 덕분에 다시 연습이 재개되었다.
태웅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나서봤자 득될 것이 없다는 걸 알기에 전체적인 연습을 관전하는 척 구석으로 갔다.
태웅이 어릴 때만 해도 스포츠부에는 알파만 들어오는 분위기였는데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많은 것이 바뀌었다.
아닌가. 십 년전에도 운동하는 오메가는 있었다.
물을 마시느라 움직이던 태웅의 목울대가 일순 멈췄다. 깊숙한 곳에 묻어두었다고 생각한 기억들이 새순처럼 마음을 헤집고 슬금슬금 기어오른다.
태웅은 기억은 쓸어내리듯 물을 거칠게 삼켰다.

그 때 체육관의 문이 사납게 열렸다.
체육관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오래된 기억을 누르느라 정신없는 태웅 마저, 한 곳에 쏠렸다.
문을 부술 기세로 열어젖힌 건 작은 꼬마였다. 갑작스런 등장에 얼어버린 체육관을 한바퀴 훑는 소년의 눈동자는 고양이처럼 날카로웠다.
당황에 막힌 입을 먼저 연 건 근처에 있던 코치였다.
"초등부는 노란색 지붕이 있는 강당이란다."
코치의 말에 소년이 눈을 꿈뻑였다. 다시 체육관을 한 번 더 훑어본 소년은 허리를 꾸벅 숙이고 옆으로 달려나갔다.
소년이 사라지자 마법이 풀린 것처럼 체육관은 움직임을 되찾았다.
공을 튀기는 소리 사이로 코치가 허허 웃으며 다가왔다.
"가끔 저런 아이들이 있지요. 길을 잘못 들어서..."
코치는 아이가 있던 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태웅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아이가 있던 자리에 시선을 두었다. 문을 닫지도 않고 가버린 터라 시원스레 열린 문 너머로 매미 울음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방금 그 아이 서태웅 선수와 조금 닮았더군요."
눈매가 날카롭고 잘생긴게......농담 삼아 던진 말이었지만 돌아오는 말이 없자 코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코치가 떠나고도 태웅은 여전히 빈 자리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꼬마 아이를 본 시간은 10초 남짓했을까. 그러나 태웅은 그 십 초 남짓한 시간이 마치 십 분처럼 느껴졌다. 쏜살같이 사라진 아이의 움직임이 배속을 느리게 한 비디오처럼 길게 늘어졌다.
날카로운 눈매가 당황으로 부드럽고 풀리고 아이다운 뺨이 태웅을 향해 돌아선다. 아이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 달려간다. 한낮의 바람이 아이의 머리카락을 길게 빗어주었다.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긴 머리카락은 붉은빛이었다.


태웅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