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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브백호





그애를 처음 본 건 동네 개울가에서였다. 어느 마을에나 있는 제방이 쌓여있는 하천이지만 우리 동네는 유독 정비도 어설프고 관리도 잘 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그래서인지 풀도 많이 자라고 물도 졸졸 흘러서 고기가 제법 있었다.
초등학교는 일찍 마친다.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오늘은 뭐하고 놀지 이야기를 나누며 둑을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다 빨간 머리를 발견했던 것 같다. 좀처럼 보기 힘든 머리색이었기에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우리는 나름 학교에서 알아주는 노는 놈들이었기에 쪼끄만 또래 하나 괴롭히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랬다. 그때의 백호는 작았다. 아마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이마를 맞대면 같은 위치에서 코가 닿을 정도로. 물론 내가 또래에 비해 조금 큰 편이긴 했지만 특출나게 큰 것은 아니었고 녀석도 그랬다.
야! 너 뭐냐! 하고 우리가 괜히 험악한 목소리로 불렀지만 녀석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볼 뿐 놀라거나 무서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리고 가까이서 본 붉은 머리카락은 무서울 정도로 선명해서 오히려 이쪽이 자각하지 못한 채 압도되고 말았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모두 비슷한 생각이었다. 저런 건 처음봐. 불러 놓고는 막상 말이 없는 우리를 보며 먼저 입을 연 건 백호였다.

- 야, 나 물고기 잡을건데 도와주라.

그 말에 우리는 홀린 것처럼 녀석을 따라 하천 가운데로 걸어들어갔다. 누군가는 몰이를 하고 누군가는 어디선가 주워온 쓰레기로 그물을 만들어 길목을 막았다. 겨우 손가락 두개를 합친 듯한 크기의 고기를 잡고나서 백호는 바보같을 정도로 웃으며 좋아했다. 그곳은 조어가 금지되어있는데다 고기를 잡는 놀이부터도 애초에 무척 유치했지만 온통 옷을 적시고 나서는 간만에 재미있게 놀았다며 다같이 낄낄거렸다. 그렇게 백호와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백호는 우리 학교에 초딩 졸업을 앞둔 전학생의 신분으로 입성했다.

백호는 멍청할 정도로 순진했다. 우리는 원래 애들 삥을 뜯은 돈으로 간식거리를 사먹었고 비디오방을 갔으며 형들에게서 얻은 빨간 딱지가 붙은 비디오를 틈만 나면 시청했다. 덕분에 우리는 여자의 생김새에 대해 은밀한 곳까지 빠삭하게 알고 있었고 또래 여자애들 중에서 깔을 만들고 싶어서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백호를 알게 된 후로는 어쩐 일인지 그런 생각을 잘 하지 않았고 어느새 그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어울려 놀았다.
물론 함께 어울리다가 백호에게 비디오를 들킨 적이 있었다. 백호는 재미있는 것이냐며 물었고 이상하게도 우리는 백호에게 그 비디오를 보여주는 것을 꺼렸다. 그러고 보면 삥을 뜯는 것도 백호가 싫어하는 것을 알고 나서는 몰래 뜯었다. 우스운 일이다. 그렇다고 삥을 뜯지 않을 순 없었다. 그럼 유흥비를 어디서 충당하겠는가. 그렇게 벌어들인 돈의 상당한 비율이 백호에게 들어갔지만 태평하게도 놈은 아무것도 모른채 잘도 받아먹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데 그때는 그게 무척 재미있었다.

그렇게 몇번 백호의 눈을 속였지만 그것을 계기로 한동안 잊고 있었던 비디오가 땡겼던 우리는 어느날 백호 몰래 모여서 형들을 통해 구한 야한 비디오를 오랜만에 보았다. 열심히 감상하며 적당히 딸을 치는데 비디오의 신음소리만 조용히 울리던 그때

- 야! 모해!!

갑자기 쳐들어온 백호에 우리는 기함할 듯이 놀라 펄쩍이며 바지춤에 넣고 있던 손을 호다닥 뺐다. 백호는 나만 빼놓고 뭐하냐아!! 이러고 성질을 부렸지만 곧이어 재생중인 화면을 보고는 놀라 눈동자를 크게 뜨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재빨리 백호를 끌어다 옆에 앉히며 속삭였다.

- 닥치고, 볼거면 너도 같이 봐.

질퍽하게 입술을 부벼대며 몸을 딱 붙이고 있는 이름모를 남녀의 노골적인 살색의 향연에 백호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그리고 예상했던대로 나,난 갈게 하고 일어나려는 걸 붙잡아 도로 앉혔다. 조금 끙끙거리며 눈치를 보다가 결국 주저앉은 백호는 어울리지 않게 다리를 모아 감싸안았다. 몇분 되지 않은 영상이었지만 좁은 방 안을 후끈하게 달아오르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재생이 끝났을 때 우리는 비디오에 대한 감상보다도 백호의 감상이 무엇보다 궁금했다. 백호는 그때까지도 무릎을 풀지 않고 쭈그려 앉은채였다. 아마도 저 다리 사이에 부풀어 올라버린 것을 감추려던 것일 터였다. 얼굴은 머리색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고 거의 울음을 터트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 야, 키스해봤어?

그때 그 질문을 한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현명하고 용감했던 행동일 것이다.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백호의 엉덩이가 불에 데인 것처럼 펄쩍 뛰었다.

- 아, 아니!! 아,안해봤어....
- 해볼래?
- 뭐,뭐???!!!

기겁을 하는 백호의 곁에 바짝 붙어 앉은 나는 백호의 입술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녀석의 목뒤로 손을 얹어 천천히 끌어당겼다. 물론 순순히 허락할 리가 없었다.

- 야, 아,안해!
- 엄청 기분 좋대. 너도 봤잖아.
- 그치만 여자랑 해야지...넌 남자잖아
- 그러니까 하는거지 바보야. 여자랑 하면 첫키스게?

백호가 유치할 정도의 순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 쯤은 이미 모두 알고 있었다. 녀석의 로망을 직격한 나의 대답에 백호는 우물쭈물했다. 역시 아직 영상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가 분명했다. 나는 천천히 녀석의 턱을 잡아당겼고 결국 입술을 부딪히는 데 성공했다. 나라고 누군가와 해봤겠는가 여자애 몇명과 뽀뽀는 해봤지만 좋아하던 애들은 아니었어서 감흥도 기억도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백호의 입술과 맞닥뜨렸을 때 나는 온몸의 털이 수직으로 곤두 서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영상에서 본 것처럼 입술을 벌려 혀를 밀어넣으면서 질척하게 물듯이 빨아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아니 사실 너무 흥분했던 터라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백호의 모습은 기억이 난다. 눈을 꼭 감고 있다가 내가 입술을 떼자 그제서야 하아~ 하고 눈을 뜨는데 발갛게 물든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숨죽이고 그 모습을 보던 다른 녀석들 중 한명이 벌떡 일어나더니 백호 비어있는 옆으로 와서 앉았다.

- 야, 나랑도 하자.

그리고는 백호에게 입을 맞추었다. 백호 당황한 듯 했지만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애를 밀어내지 않았다. 역시나 한참동안 쪽쪽거리고 났더니 다른 놈이 다음 순번을 자처하며 나섰다. 그렇게 한놈, 또 한놈 차례대로 백호와 키스를 했고 백호는 그 역겨운 짓거리들을 다 받아주었다. 모두가 한번씩 욕구를 채우고 났을 때 번들거리는 입술이며 팽팽하게 부푼 아랫도리며 아주 가관이었다. 그리고 겨우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하면서 모두가 좆됐다는 생각을 했다. 백호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

- 기분...좋은거 같아.

조금 쑥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뱉은 말에 지옥에서 천당으로 직행한 우리들이었다. 하지만 우리들과는 달리 백호의 앞섶은 처음 영상을 본 직후와 달리 조금 사그라져 있었다. 나는 모른척 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우리는 더이상 영상을 보지 않았다. 야한짓이 하고 싶은 날에 모여서 그때 그 날처럼 백호에게 입을 맞추었다. 백호 녀석도 입술을 부비는 일이 꽤 좋았던지 기꺼이 입을 열어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고 그사이 백호는 키가 무척 많이 자랐다. 녀석에게 입을 맞추기 위해서는 까치발을 들거나 꼭 녀석이 앉아주어야 했다. 그애의 키만큼 그애를 향한 마음도 커졌다.




균열이 온 것은 전혀 생각지도, 예상치도 못한 순간이었다. 백호에게 다른 친구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녀석이 그 놈과 꽤 길게 친분을 쌓고 난 뒤였다. 백호는 그동안 우리와 어울리면서 의도치 않게 평범한 다른 학생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뭐, 잘된 일이었다. 백호는 영문을 잘 몰라서 서운해했지만 녀석이 어울리고 싶어했던 그 애들의 대부분이 우리한테 몇번 돈을 뜯긴 적이 있거나 얻어맞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백호는 본인은 활발한 성격이면서 얌전하고 차분한 스타일을 선호했다. 친구로 호감을 느끼는 것도 그런 부류가 많았다는게 유감이었다. 그 부류들은 우리의 삥땅 대상으로도 적격이었던 탓이다. 그렇게 고립된 백호는 우리의 소유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무척 태평한 생각이었음을 이제서야 반성한다.

그러니 백호가 우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입을 맞추고 있는 장면을 보았을 때 우리가 얼마나 놀라 자지러질뻔 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석도 남자였고 윤기나는 단정한 흑발에 얌전하고 차분해 보였다. 키가 큰 백호가 기꺼이 그 친구를 위해 의자에 앉았고 그친구는 고개를 숙여 백호의 양 뺨을 감싸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너무 진지하고 애틋해보여서 우리는 감히 둘 사이에 끼어들지 못했다. 달리 백호에게 따질 명분도 없었다. 이미 우리같은 친구끼리는 키스도 하는거라고 알려준 상태였으니까.
그제서야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백호가 다른 일이 있다며 혹은 누구를 만난다며 우리와의 모임에 오는 텀이 조금씩 길어지던 이유를. 그 와중에 용케 이름표를 본 녀석이 있었다. 양호열이라고 했다.





- 니가 양호열이냐?
- 뭐야?
- 뭐긴 씨발롬아.

우리는 놈의 신병을 확인하고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주먹부터 날렸다. 그래서 놈이 내 주먹을 턱 맞잡았을 때 꽤 놀라고 말았다. 양호열은 우리가 누군지 알아본 듯 했다. 그리고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잘됐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호열의 주먹이 내 안면을 강타했다. 고등학생 형들한테서도 그렇게 강한 주먹은 맞아본 적 없는듯 했다. 끼엑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나자빠진 나를 보고 친구녀석이 재차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양호열의 주먹이 더 빨랐다. 그렇게 나와 친구와 또 다른 친구와 친구...차례차례 양호열의 주먹에 코피를 터트리며 넉다운이 되었다. 우리는 나름 복싱 도장에도 출입하면서 어깨너머로 배울건 배운 상태였는데 놈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우리가 모두 꼴사납게 비틀거리면서 우왕좌왕하는 사이 양호열이 한번씩 더 발길질을 먹여 아예 쓰러트려버렸다. 그리고는 경고했다.

- 니네 더이상 백호한테 가까이 가지 마라. 말도 섞지 마. 알겠어?

양호열에게 멱살을 잡혀 끌어올려진 놈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찔찔거렸다. 양호열은 바닥에 침을 퉤! 하고 뱉고는 등을 돌려 가버렸다.




그렇다고 순순히 놈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백호를 불렀고 백호는 별일 없으면 놀러 나와주었다. 다 좋아보였다. 백호가 더이상 키스를 하지 않으려든다는 것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 친구끼리 키스 하는거 아니래.

백호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씨발 어떤 개새끼가 그런 소리를 해 라고 묻고 싶었지만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놈은 하나였다. 하지만 그럼 왜 그놈과는 키스했냐고 그놈은 친구가 아니냐고는 차마 물을 수 없었다.

- 그럼 누구랑 해야 되는데?
- 그....특별한 사람?
- 시발...우리는 안특별해?
- 아니 특별하긴 한데...친구니까.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대답에 화가 벌컥 났다.

- 지금까지 잘만 해 놓고 왜 안돼? 장난까냐?
- 왜 화를 내! 암튼 이제 안할거라고. 너네도 특별한 사람이랑 하는게 맞아. 나랑 하면 안돼.

이가 부서져 나가버릴 것처럼 아득 물었다. 치미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차라리 그때 나한텐 네가 특별하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면 양상이 달랐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백호는 호의와 기대를 거절하는 법을 몰랐다. 우리한테 네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했다면 녀석은 다시 마음을 바꾸어 입술을 벌려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렸다. 기가 차서 백호의 멱살을 부여잡고 윽박질렀다. 내가 하겠다면 어쩔건데? 그러자 백호가 당황하며 동시에 화가 나는듯 보였다. 하지만 우리는 눈이 돌아가 있었다. 내가 녀석의 멱살을 잡았을 때 다른 놈들이 달려들어서 백호의 양 팔다리를 하나씩 붙들었다. 그새 백호는 또 자라있었기 때문에 그러지 않으면 제압할 수 없었다. 친구들과 내가 신기할 정도로 합이 잘맞았던 순간이었다. 그리고는 팔다리가 붙잡혀 벌러덩 누워버린 백호의 위로 올라타서는 녀석의 머리통을 감싸고 억지로 입을 맞추었다. 녀석이 피한답시고 고개를 이리저리 힘껏 돌렸지만 기어코 따라가며 입술을 쪼아댔다. 잘 잡고 있어라 나 다음엔 니차례니까. 나는 친구들에게 텔레파시를 보냈고 그애들 역시 잘 수신한 듯 했다. 하지만 백호가 그 파장을 끊어버렸다.

- 이익!

백호가 팔 하나를 휘두르자 그 위에 올라타 있던 놈이 맥없이 뒤로 떨어져나갔다. 그리고 한쪽 다리를 들썩이자 그 위에 체중을 실어 누르던 놈이 또 벌러덩 자빠졌다. 순식간에 제 몸을 붙들고 있던 넷을 다 치워버린 백호가 배 위에 앉아있는 나까지도 저 멀리 던지다시피 밀어버렸다. 그리고 뒤이어 놀라 달려드는 놈들까지 박치기 한번씩 쾅 쾅 먹이며 쓰려트려버리고는

-이제 안놀아!

그렇게 가버렸다. 우리는 쓰러져서 낑낑대기만 할뿐 떠나가는 백호를 잡을 수 없었다. 나는 울었던것 같다.




그 후로 백호를 만나지 못했다. 사실 부를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백호가 무척 힘이 강하다는 사실은 차치하고 그래도 친구로서, 인간으로서의 염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녀석에게 강제로 그런 짓을 할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미스테리다. 그렇게라도 녀석과 입술을 맞대고 싶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걸 실제로 저지른 것은 분명히 미친짓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녀석을 포기할 순 없었다. 특히 이런 식으로 백호를 그 허여멀건한 놈에게 뺏기는 것은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데 언젠가 다시 백호를 찾아가려던 찰나에 놀랍게도 그 양호열이란 놈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그리고는 어디어디에서 몇시에 보자고 했다. 모두 다 나오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우리는 내심 기뻤다. 놈이 무슨 제안을 하든 우리는 그새끼를 개박살내고 백호를 되찾아 오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착실하게도 시간맞춰 아니 조금 이른 시간에 놈이 만나자고 한 장소로 몰려갔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니 놈이 슬렁슬렁 걸어오는 것이었다. 놈은 혼자였고 우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우리쪽 두 명이 없었다. 오늘은 있었고 기다란 각목도 하나씩 챙겨왔다. 한명을 상대하기엔 조금 과한 숫자에 과한 장비였지만 지난번에 호되게 당한 탓에 방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 결판을 내야지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날것이다.

- 야, 백호 만나지 말라고 했잖아.

놈이 우리를 보자마자 살짝 숙인 고개 위로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기가 찼다. 차마 대꾸할 가치도 없었기에 우리는 짧게 허! 하는 콧방귀를 뀌며 주먹부터 날렸다. 다행히 이번에는 주먹이 먹혔다! 양호열은 내 주먹 한방에 고개가 휙 돌아갔다. 하지만 곧 다시 고개를 돌리고 노려보며 웃는 것이었다. 그 입꼬리가 너무 기분이 나빠 나는 다시 한번 더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두번째는 놈에게 막혔고 대신 되돌아오는 주먹을 광대뼈로 맞이했다. 놈의 반격을 시작으로 우리 일행의 나머지들이 모두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역시나 양호열은 몹시 재빨랐고 그 와중에 묵직한 주먹을 날릴 줄 알았다. 그리고 양상은 곧 놈의 우세로 빠르게 정리되기 시작됐다. 주먹을 주고받은 지 불과 몇 번 되지도 않았는데 놈은 싸움에 이골이 난 꾼처럼 우리를 두드려 패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도 쉽게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어찌됐든 놈은 하나고 우리는 여럿이니까 조금만 버티면 기회가 올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조금만을 외치며 겨우겨우 맞서고 있는데 어느 순간 기회가 온 것 같았다. 놈의 움직임이 무뎌졌다. 분명했다. 그리고 그 찰나에 우리는 힘을 얻어 거세게 놈을 몰아붙였다. 손도 못대던 놈들도 한방씩 먹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이긴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야, 이 나쁜 놈들아!!!

귓가를 때리는 낯익은 음성. 놀라 고개를 돌리니 저 쪽에서 달려오는 빨간 머리가 보였다. 어…. 우리는 당황해서 할말을 잃고 순간적으로 뚝딱거렸다. 그런 우리에게 정의의 주먹을 날리는 것은 검은 머리가 아닌 백호였다. 마침 내가 양호열의 멱살을 쥐고 있었기에 백호의 첫 타격도 내가 대상이었다. 나는 백호의 주먹에 나자빠지면서 양호열을 놓쳤고 놈의 몸이 뒤로 주춤거리다 풀썩 주저앉는 것이었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백호가 내 멱살을 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 비겁하게 이게 뭐하는 짓이야? 어째서 호열이는 혼잔데 이렇게 많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호열이 괴롭히지 마!

나는 맞은데가 아파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백호가 양호열을 감싸는 소리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지금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거기다 지금까지 맞은게 누군데, 그것보다 우리가 너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

- 이새끼야, 니가 우리한테 이러면 안되지…!
- 뭐?
- 이 개새끼…너, 너… 이 씨발!!

나는 백호를 향해 마음을 실어 주먹을 날렸다. 그래 차라리 여기서 백호를 때려 눕히고 데려가자. 그것도 나쁘지 않잖아. 나는 정신이 나가 있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 주먹은 녀석의 턱에 닿지도 못하고 빗나가면서 몸만 휘청거렸다. 내 뒤를 이어 다른 놈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백호를 향해 억울하고 서러운 표정으로 덤벼들기 시작했다. 백호와 우리들로 시작된 이차전은 백호가 먼저 선빵을 날린 상황이라 거리낄 것도 없었다. 하지만 말이 싸움이지 백호의 일방적인 구타에 지나지 않았다. 양호열의 주먹은 그래도 버틸만 했는데 백호는 달랐다. 한 방 한 방이 천근추를 단 것처럼 묵직해서 무섭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순간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세상 처음 느껴보는 울분에 몸서리치던 내 모습이나 맞는 건 난데 때리는 주제에 맞은 것 마냥 울어대는 백호가 아니었다. 저쪽 뒤에 느긋하게 주저 앉아서 이쪽의 싸움을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감상하던 양호열의 모습이다. 무표정해 보였지만 나는 놈이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래 산 것은 아니어도 깨나 많은 놈팽이들과 붙어봤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비열한 미소는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놈이 이 모든 상황을 계획했다는 것을. 놈은 성공적으로 우리를 최악의 악당으로 만들어 백호에게 전시했다.

그렇게 게임이 완전히 끝났다. 그날 백호는 울면서 호열을 부축해서 돌아갔다. 아프지도 않으면서 힘들어 죽겠다는 듯 절뚝거리는 연기를 기똥차게 해서 백호의 부축을 받는데 성공한 양호열은 그 와중에 우리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냥 보고 말았던가? 아니 웃었던 것 같다. 씨발새끼…웃은게 맞는 것 같다.




그 후로 정말로 백호를 만날 수 없었다. 백호는 어느새 양호열 말고도 다른 세 놈팽이를 더 불러들여 같이 어울렸다. 질투도 나고 화도 나고 억울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더는 백호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녀석의 친구를 자처한 놈들 때문이다. 백호에게 다가가려고만 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뭘 하기도 전에 먼저 와서 두드려 패고 가버렸다. 꿈도 꾸지 말라는 경고를 남기고. 하는 짓이 기가막혀서 니네가 백호 꼬봉이냐고 비웃으면 마주 비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하고는 더 세게 주먹을 날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몇 번 더 시도했지만 역시 놈들한테 쥐어터지기만 했다. 중학교 내내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결국 백호와는 단절이 되는가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녀석이 농구를 시작했다는 얘길 들었다. 워낙 유명한 인간이라 모를 수가 없었다. 우리는 다른 학교였지만 녀석의 경기를 보러 찾아다녔다. 어느새 백호군단이라는 이름까지 생긴 꼬봉새끼들이 무서웠지만 평범하게 농구경기를 보는 것 까지는 어쩌지 못하는 듯 별다른 액션이 없었다.

우리는 백호를 알던 때보다 더 백호에게 몰입했다. 그리고 전국 고교대항전 경기를 보았다. 32강에서 전국 최강자를 만났다고 했다. 우리는 괜한 심술로 잘됐다며 킬킬거렸다. 하지만 북산은 이겼고 심지어 마지막 승리의 키를 북산으로 틀어버린 것은 백호의 투혼이었다. 그 경기는 꽤나 많은 것을 남겼다. 백호의 이름이 전국에 알려진 것, 그리고 녀석이 등부상으로 재활치료를 받게 된 것 같은 흥미롭고 드라마같은 스토리 덕분에 신문에까지 실렸다.

하지만 내가 발견한 것은 그딴 것들이 아니다. 나는, 아니 우리는 그날 백호가 마지막 슛을 넣고 패스를 한 녀석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의 손바닥이 맞닿았을때 함께 전율을 느끼며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바보같이 실실 웃었다.

- 양호열…하하하.

백호의 경기를 쫓아다니며 하이파이브를 한 상대의 이름이 서태웅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우리는 백호를 너무 잘 알기에 녀석의 행동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특별한 사이에서 비롯된 교감이었다. 어떡하냐 양호열? 너도 좆됐구나!
우리는 그날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살면서 그렇게 즐거운 순간이 또 있었을까.


그리고 우리는 농구를 하기로 결심했었다. 막상 농구부에 입단하겠다고 쳐들어갔을때 백호와 그 태웅이란 놈이 미국에 가고 없어서 바로 도로 나와버렸지만. 웃기지..양호열 좆됐다고 좋아할게 아니었는데.
그리고 양호열도 얼마 안있어 어떻게 했는지 미국을 가버렸다. 백호를 따라.


그렇게 백호와의 모든 연결점이 완전히 사라졌다. 좆됐다. 허무하게도 진짜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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