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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4 18:00
결과만으론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정말 모든 힘과 능력치를 짜내서 여기까지 달려왔기에 후련한 것도 사실이다.
지금까지는 연습을 이유로 교내 행사에 거의 불참으로 일관했던 3학년 농구부원들도 고등학생으로서의 마지막 추억이 될 졸업여행에 전원 참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원정 경기나 타 지역 학교의 전력 확인을 위한 경기 참관, 혹은 합숙이란 이유가 아니라 오로지 휴식과 관광을 목적으로 한 여행이란 것도 낯설 만큼 오랜만인데, 심지어 친구들과 우르르 가는 단체여행이라니.
게다가 당일치기도 아니고 2박 3일이나 되는 긴 기간에 기대감에 들뜬 채 하루하루 달력의 날짜에 X표를 그리다 드디어 맞이한 여행일의 버스 안.

누군가 휴대폰으로 틀어 놓은 음악에 맞춰 떼창을 부르는 무리가 있는가 하며, 자기들끼리 끝말잇기니 눈치게임이니를 하는 친구들도 있다.
트럼프 세트, 휴대용 게임기, 영화를 가득 다운받아 둔 노트북에 수십 권에 달하는 만화책의 전 시리즈까지 무슨 도라에몽 주머니같은 반 친구들의 가방을 신기한 시선으로 두리번대던 수겸은 정말 정직하게 옷과 지갑, 세면도구에다가 마지막까지 넣을까 뺄까 고민하다 결국 들고 온 농구공 말곤 아무 것도 없는 가방을 의자 아래 밀어넣고는 손 안의 휴대폰을 켰다.

[적응 안 돼]

가장 오래 부대끼며 친근감이 남달라진 농구부 3학년 주전들만 모아 만든 단톡방에 메시지를 올리자마자 여기저기 흩어져 각자의 학급 버스에 타고 있을 부원들의 답장이 올라왔다.

[얘들 술마셨나봐]
[다들 눈빛이 이상해]
[내리고싶다]
[가방에 뭘 넣고 다니는거야]

긴장감에 가득찬 무거운 공기만 감돌던 원정 버스에 익숙한 농구부에게 이곳은 마치 전쟁터 한복판 같았다.

"수겸아."

누가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뒷자리의 친구가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과자 먹을래?"

무릎 위로 툭 떨어진 초콜릿 과자와 자신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수겸의 맹한 눈빛을 본 친구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 단 거 싫어하나? 너 1년 내내 교실에서 볼 일이 거의 없었더니 취향을 몰라서.
"...아냐, 고맙다."

박스를 뜯어 과자를 한 개 입에 넣자 달콤한 맛이 입 안에 번져든다.
보통 애들은 이러고 지내는구나.
왠지 다른 세상을 살다 온 것만 같은, 실제로 다른 세상에 살다 이제야 돌아온 세상 속 풍경에 수겸은 다시 한 번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그래도 재미있어]

"야, 김수겸! 사람 모자라는데 너도 와서 끼어!"

맨 뒷좌석에서 트럼프 카드를 흔드는 친구의 부름에 수겸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쪽으로 다가갔다.

"머릿수는 채울 수 있지만, 룰 하나도 모르는데 괜찮냐."
"넌 농구 말고 아는 게 뭐야? 가르쳐 줄게 와서 앉아."

뒷좌석의 친구들 사이에 끼어 앉던 수겸의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맨 앞자리로 향했다.
지금까지 원정 버스에서 수겸의 지정석이었던 문 바로 앞자리.
하지만 더이상은 저기에 혼자 앉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어색하면서도 즐거웠다.



죄 벗은 남자애들로 복잡하다는 것만은 공동샤워실과 마찬가지였지만, 술래잡기를 한다고 뛰다 자빠지는 녀석들부터 바가지로 물싸움을 하는 녀석들까지, 숙소의 노천온천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최대한 구석진 자리를 택했는데도 몇 번인가 물벼락을 맞은 다음에야 깔끔하게 온천은 포기하고 샤워만 마친 다음 후다닥 도망쳐 나온 수겸이 휴게실 한쪽에서 젖은 머리를 털고 있을 때, 탁구대 앞에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었다.

"음료수 내기 탁구 한 판 칠래?"

도대회를 휩쓸며 탁구 특기생으로 일찌감치 프로 진출이 결정된 친구의 도발에 수겸은 푸하핫 웃음을 터뜨리더니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나 농구공 가져왔는데 탁구공 대신 농구공으로 붙을 거면 해 보고."

말은 그렇게 하고도 결국 순순히 응한 음료수 내기에선 수겸이 졌지만, 이런 식의 패배는 싫지 않았다.



저녁 식사 자리의 아수라장은 흡사 아귀떼의 전쟁 같아서 젓가락을 드는 것조차 무서웠다.
남의 반찬을 빼앗아 먹겠다고 테이블 위로 뛰어올라가는 친구들을 서커스 보듯 구경하던 수겸의 눈에 덩치에 맞지 않도록 제일 구석진 자리에 숨듯이 앉은 농구부원들이 띄었다.

"어떻게 살아는 있구나."

마음이라도 통한 걸까.
비슷한 타이밍에 고개를 돌려 서로를 확인한 농구부 다섯 명이었다.



저녁 식사 뒤의 자유시간에야 뒤늦게 한산해진 노천온천을 느긋하게 즐기고 나온 수겸이 지정된 방으로 돌아와 보니 방 안에는 먼저 온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너 왜 여기 있냐?"

분명 같은 반끼리 방을 배정해 줬는데, 혹시 방을 잘못 찾았나 하고 문 앞을 확인해 봤지만 역시나 자신의 방이 맞다.
턱과 어깨 사이에 얼린 물병을 끼고 있던 현준이 다시 방으로 돌아온 수겸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저쪽 방 베개싸움 시작했다. 최대한 피했는데 이것들이 베개에 뭘 숨겨넣었는지... 딱딱한 거 보니 음료수 캔이나 책 모서리 같던데, 거기 맞아서 안경 부러지고 얼굴에 상처난 거 핑계로 치료한다며 도망쳤지."
"다른 애들은."
"창석이네 방은 현금 걸고 내기화투. 택중이는 지하 게임센터 노래방. 권혁이네는 애들이 어떻게 들고 들어왔는지 아까 전부터 술판이야. 이 방만 텅 비어 있더라."
"여긴 교사용 층이니까."

학생들끼리만 같은 층을 쓰는 다른 방과 달리 딱 하나 교사용 숙소와 같은 층을 쓰는 이 방은 방에 딸린 개인 정원과 그 한가운데의 노천탕이 있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모든 학생들의 기피대상 1호였다.

덕분에 아수라장을 벗어난 수겸은 현준의 앞에 수그리고 앉아 현준의 몰골을 살폈다.

"다친 덴."
"멍만 좀 들었다."

얼음물로 식혀 벌개진 광대 언저리를 확인한 수겸이 에휴 하는 한숨과 함께 현준의 곁에 앉아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평소의 저지나 교복 셔츠가 아닌 유카타의 낯선 감촉에 뺨을 비비던 수겸은 고개를 돌려 현준을 위아래로 훑고는 작게 웃었다.

"너 안경 없이 그 차림으로 있으니 되게 이상하다."
"뭐가?"
"다도나 서예 선생님 같기도 하고, 하이쿠 시인 같기도 하고. 어찌됐건 농구선수로는 안 보여."

수겸의 말에 현준도 피식 웃으며 수겸의 옷깃에 손을 뻗었다.

"너도 그래. 교토나 나라 같은 곳에 있는 고급 료칸 홍보모델 같네. 옷 잘못 입은 것만 빼고."

자신을 일으켜 세우더니 허리끈을 풀어 오른쪽과 왼쪽의 순서가 바뀐 옷깃을 바로잡아 제대로 여며 주고는 다시 허리끈을 단단히 매 주는 현준을 올려다보던 수겸은 정원이 보이는 창가 쪽으로 눈을 돌렸다.

"둘이서만 여행 온 것 같네. 밀월여행."
"다음에 시간 내서 둘이서만 가자."
"약속 지켜라."

달달한 눈맞춤으로 약속을 대신하고 방 한가운데에 서서 말없이 끌어안고 있다가 다시 한 번 눈빛이 뒤얽힌 순간.

"졸려. 몇 시지?"

하루 종일 시달린 정신에 뜨거운 물에 잠겨 노곤하게 풀어진 몸에다 초 단위의 스케줄에 정확히 맞춰 둔 규칙적인 체내 시계까지 합쳐지고 나니 무드 따위 침범할 자리가 없었다.
이미 수마에 반쯤 삼켜져 풀린 눈을 느릿하게 꿈벅이던 수겸이 한쪽에 쌓여 있던 이불을 당겨내리자, 현준이 한쪽 구석에 반듯하게 잠자리를 보았다.
푹신한 이불 위에 털썩 드러누운 수겸은 두 팔을 쫙 펴 이불 사이즈를 가늠해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너한테는 짧을 것 같은데. 있는 거 다 넓게 깔아 버릴까?"
"다른 애들은 어디서 자라고. 거기다 여긴 내 방도 아닌데."
"먼저 자리잡은 사람이 이기는 거지. 돌아갔다 봉변당하지 말고 그냥 여기서 자."

수겸의 말에 아직도 욱신대는 광대를 만지작댄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누구 더 올지 모르니까 그냥 네 옆에 끼어서 잘게."
"그러던지."

하지만 현준은 벌렁 드러누워선 옆자리를 내어준 수겸의 옆에 눕는 게 아니라 다시 일어나서는 방 안을 두리번대기 시작했다.

"뭐 찾아? 전등 스위치?"
"너 가방 어디 놨어?"

손가락으로 가리킨 벽장 안에서 눈에 익은 더플백을 꺼낸 현준이 지퍼를 열고 가방 안을 뒤적이는 걸 본 수겸은 고개를 갸우뚱 했다.

"왜?"
"그거 벗고 옷 갈아입어. 가뜩이나 잠버릇 험한 애가 그 차림새로 잠들면 얼마 안 지나 다 벗고 있다. 누가 들어왔다 그 꼴 보면 어쩌게."
"속옷 입었잖아."
"그 정도면 남들 눈엔 충분히 벗은 거야."

바늘 끝도 안 들어갈 단호한 태도로 트레이너세트를 꺼내온 현준에게 수겸이 불평을 시작했다.

"너는."
"난 가만히 자잖아."

수겸이 내민 트레이너를 받는 대신 팔짱을 끼며 거부 의사를 밝히자, 현준은 자리에 앉아 트레이너를 내려놓고 수겸의 옷깃을 잡아벌렸다.

"이거 봐라. 이렇게 쉽게 벗겨지는 옷이 네 몸부림에 견딜 것 같아?"
"어어? 이 손 놔라. 안 놔?"
"얌전히 팔 들어 봐. 입혀 줄게."
"됐다고오!"

결국엔 완력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려는 현준과 그에 맞서는 수겸의 팽팽한 대치가 이어졌지만, 역시나 수겸이 단순한 힘만으로 현준을 이기는 건 아직 무리였다.
지쳐서 헐떡대는 수겸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낀 현준이 한 손으로 수겸의 손목을 틀어쥐고 옆에 둔 트레이너를 집어들려 할 때.

"아 진짜 쟤들 제정신... 응?"

신나게 쥐어뜯긴 몰골로 이 방의 또다른 주인이 벌컥 문을 열자마자 목격한 것은 두 손목이 머리 위로 붙들린 채 전라로 보이는 차림새로 이불 위에 누워 헐떡이는 수겸과, 역시 옷이 다 풀어헤쳐져 방금 난 손톱자욱이 즐비한 등을 절반 이상 드러내고선 수겸의 위에 덮치듯 엎드려 거친 숨을 몰아쉬는 현준이었다.
둘의 관계를 안다고는 해도 설마 여기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 상상조차 하지 못한 데다가, 심지어 한 명은 이 방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이니 본 사람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보여진 사람들 또한 마냥 태연할 수 없으니.
허겁지겁 벗겨진 이불을 당겨 몸을 가린 수겸과 엉망이 된 옷을 추스른 현준이 변명을 위해 문 쪽을 쳐다보자.

"좋은 시간 보내라!!"

콰당, 하고 부서져라 닫힌 문 안에 또다시 둘만이 남겨졌다.



결국 수겸의 말대로 이 방에선 그날 밤 두 사람 외에 아무도 묵지 않았다.
그리고 현준의 말대로 자기 전 단단히 고쳐 입었던 수겸의 옷은 아침에 일어나니 방구석을 구르고 있었다.
그 반면 정말 어제 잠든 자세 그대로 자고 있는 현준을 내려다보던 수겸은 혹시 죽었나 하는 합리적 의심으로 자는 현준의 코 아래 손을 갖다대 생존 여부부터 확인했다.

수겸은 아직 잠이 덜 깬 눈으로 어제와는 달리 햇살이 가득한 정원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조용하던 문 너머 복도를 간간히 지나는 소음을 배경음악처럼 듣고 있었다.
시간대를 생각해 보면 하나 둘 잠에서 깬 사람들이 조식을 위해 식당으로 향하고 있는 모양이다.

원래 하던 대로 현준을 깨워서 시간에 맞춰 식사를 해야 할지, 아니면 오늘 하루는 그냥 잠을 택할지 생각에 빠진 수겸은 곧 후자를 택하기로 마음먹고는 길게 하품을 했다.

이대로 2차취침에 들어간 뒤, 다음 일정 시간에만 맞춰 나가면 되겠지.

그러나 이 계획에 생각지 못한 변수가 생겨났다.

"뭐야, 방해금지? 여기도 숙취냐? 왜 아무도 안 나오고..."

술에 뻗어 못 일어나는 방, 내기도박을 하다 싸움이 난 방, 밤새 만화책이나 영화를 보다 방금 전 잠든 방,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다 민원이 들어온 방 등등.
밤새 일어난 가지각색의 사고 처리로 골치가 아파진 주임교사는 마지막 방문을 여는 순간 머릿속에 죽기 직전에나 본다는 삶의 주마등이 스치는 기분이었다.

8인실이었음에도 단 둘뿐인 방.
그 중 눈이 마주친, 양 손목에 시퍼런 멍이 든 채 죄 벗은 꼴로 앉아 있는 사람이 수겸임을 확인한 순간에는 마치 들이치던 햇볕마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다른 한 사람도 보이는 건 뒷모습 뿐이긴 했지만 이불 밖으로 한참은 삐져나온 발 하며 너른 등에 이름이 쓰여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 뒷덜미에 아무리 봐도 손톱자욱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벌건 선이 선명하다.

졸업이 코앞인 애들에게 부모님을 불러오라고 할 수도 없고.
심지어 그 사고의 당사자가 저 둘이면.

"......방에 상 들여 줄 테니 너희는 집합 시간까지 절대 나오지 마라."

조식은 패스하려던 계획이 제3자의 손에 의해 룸서비스로 변경되었다.



단 둘이 느긋하게 식사를 마치고 개별실에 딸린 노천온천에 한 번 더 들어갔다 나온 뒤 개운한 기분으로 짐을 챙겨 나오던 수겸은 문을 닫으려다 말고 눈을 의심해야 했다.

'방해하지 마시오'

문고리에 걸어 둔 기억이 없는 표지판이 떡하니 걸려 있다.
카드키를 챙겨 뒤늦게 나온 현준도 역시 방해금지 표지판을 확인하고 수겸을 돌아보았다.

"네가 걸었어?"
"난 넌 줄 알았는데."
"어제 네가 나보다 늦게 들어오고, 그 뒤로 난 안 나갔잖아."
"나도 안 나갔다."

이래서 이 방에 아무도 안 들어왔구나.
그런데 대체 누구야?

이런 얘길 나누며 밖으로 나와 각자 정해진 버스에 오르려는 순간, 두 대의 차에서 동시에 야유와 함성이 터져나왔다.

"넌 저쪽 차로 가!!!!"




슬램덩크 상양 하나후지 현준수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