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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2 23:56
어두운 골목의 작은 선술집이 파한건 정각을 꼬박 넘긴 직후였다. 그 작은 술집 구석에 방석으로 탑을 쌓고 머리를 뉘인 정우성은 평소 볼 수 없을 정도로 허리를 굽힌채 새우잠을 자는 중이었다. 맥주만 마실 줄 알고 소주는 입도 못 댄다는 그 순진하기 짝이 없는 발언 탓이었다.

짜기라도 한듯 그의 고등학생 선배들은 소주만을 줄창 시켰다. 영악한게 첫 병은 달달한 향이 첨가된 과일소주로 시켜서 첫입을 대게 만들었다. 쓰다. 쓴데 묘하게 달아서-돌이켜보면 순전히 향 때문이었다-정우성은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꼴딱 소주잔을 비웠다.

억압된 청소년기의 첫 일탈을 술로 배운 어른들은 그런 우성이에게 웃어주며 자꾸만 술을 권했다. 분위기 타는 법을 영 모르던 정우성조차 술자리의 왁자지껄한 공기를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두잔, 세잔 네 병 다섯 병을 꼴딱꼴딱 비워져갔다. 그 결과 정우성은 완전히 잠든 것도 깬것도 아닌 혼몽한 상태로 술집 구석에 구겨넣어졌다.

“…속이 안 좋아요.”

누군가 널부러진 몸뚱이를 추스러주는게 느껴졌다. 박 달린 동앗줄을 잡는 나무꾼의 심경으로 우성이 웅얼대며 자신의 상태를 어필해왔다. 속이, 속이 안 좋은거 가타여. 과연 알코올은 혀의 근육까지 마비시키는가. 이 질문에 대답 정우성의 답은 yes 였다. 그러나 당장 취한줄 모르는 그는 자신을 엎어드는 누군가에게 자신이 꽤 정중하게 요청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현실은 190이 넘는 체구를 들어 나르느라 빡이 친 누군가가 닥쳐 정우성 하고 제 입을 틀어막았다. 속이 안 좋은데…. 그러거나 말거나 우성은 발이 땅에 끌려도 안 좋다 징징 대다가 차에 구겨넣어지자 입을 싹 다물었다. 본능적으로 안전벨트를 매고 차창에 고개를 박더니 이내 술집보다 더 편하게 곯아떨어진 탓이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까 우성은 미묘한 쿨민트 향에 슬슬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아 시원하다. 느글거리는 속이 좀 진정되는 냄새였다. 푸, 푸- 한숨과도 같은 숨을 몰아쉬다가 자신을 더듬어오는 손길에 반사적으로 손을 쳐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크고 두툼한 손바닥이 우악스럽게 우성의 어깨를 흔들었다.

술로 뇌가 절여진 상태에서 우성은 그 손의 주인이 여자는 아니란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세달 전 헤어진 여자친구 소피아는 아닌가보다. 알쓰까진 아니더라도 술이 썩 쎄다고 자부할 수 없는 우성을 소피아는 몇번 챙겨준적이 있었다. 그게 타국 타지 타인종에게 받은 몇번 안 되는 친절이었던터라 우성의 마음 깊숙한 곳에 그 기억이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흔들지마 자기야….”

아까 박하 특유의 시원스러운 향기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멀어진다. 아, 진정되고 좋았는데. 코 밑에서 머무르는 향이 떠나감과 동시에 우욱 하고 목구멍 저 아래에서 역한 구역질이 촛구쳐올랐다. 이게 다 술 마신 사람을 흔드니까 일어나는 일이다. 우성은 손을 뻗어 아직 옆에 있는 사람을 끌어당겼다. 애x타임 뺨치는 시원시원하고 속이 뻥 뚫리는 향이 다시금 힘에 이끌려 되돌아온다.

우성은 당장 게워낼거 같은 속을 다스리면서 옆에 있는 사람을 강하게 끌어안아 품에 가뒀다. 아 죽겠다. 근데 살것도 같았다. 세달 전 헤어진 소피아는 우성에게 잘 살라고 말했다. 다른 연인들은 그의 뺨을 때리거나 욕을 하거나 저주하거나. 아무튼 영화 뺨치게 헤어진 전적이 있던 정우성은 처음으로 애틋한 이별을 경험했다. 실연의 상처사 채 아물기 전에 그는 술을 들이부었고 옆에서 전처럼 다정하게 챙겨주는 연인이 있자, 다시금 눈물이 차오르는걸 느꼈다.

“…내가, 다시 잘 할께 돌아오면 안돼?”

품에 가뒀다가 이제는 상대의 품에 파고드는 기행을 벌이며 우성은 자신이 눈물이 터져 흐르는지도 모른채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내가 어리다는 이유는 납득이 되질 않아.”

어린애 뺨치게 울면서 상대의 가슴팍을 꽈악 옥죄던 정우성은 울다가 속이 안 좋아지는지 우욱 헛구역질을 했다가 상대가 말이 없자 엉엉 울던걸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슬슬 눈이 떠지질 않았다. 피부가 약해서 울거나 하면 금방 발갛게 눈가에 열이 오르고 붓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눈을 뜨니 저를 내려다보는 얼굴의 윤곽이 희미하게나 보인다.

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처절하게 매달려본 경험이 없어서 이런 상황에 어떻게 해야하는지 감이 서질 않았다. 그나마 소피아는 제 눈물에 약해서 위기 때마다 어물적 그렇게 넘어갈 수라도 있었는데. 우성은 주저하다가 큰 손으로 뒷목을 확 잡아채 제쪽으로 끌어당겼다.

적당히 살집있고 미적지근한 입술이 느껴진다. 쪼옥. 우성은 요란하게 키스를 끝내고 난 뒤 무어라 할 새도 없이 알코올이 혈관을 타고 팔딱거리는게 느껴졌다. 머리가 핑그르 돈다. 맥주만 홀짝이며 정직한 생활을 지키며 살았던 몸이 한계를 외친다. 뇌가 보다못했는지 전원 플레그를 꺼버리며 시야가 암전되고 그는 픽 쓰러졌다. 하필 앞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상대가 우성의 큰 몸을 받아내야 했다는게 문제였다.

쿵.

누군가 차 창문에 뒤통수를 박는 소리가 났다. 고로롱. 이건 이미 블랙아웃이 와버린 정우성의 단잠소리였다.



“왐마야.”

신현철의 걸죽한 감탄사가 정막만이 가득한 차 내부를 나즈막히 울린다. 시발. 김낙수는 차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가 뒤에서 빵빵 울리는 클락션 소리에 험악한 인상을 한 채 출발시켰다. 엑셀을 밟는 발이 곱지 못했다.

대형 suv 맨 뒤에 탄 성구는 입을 틀어막고 쓰러진 고목나무 같은 우성이의 뒤통수를 바라본다.

“명헌아 너…”

“입 열면 정대만처럼 만들어 버리겠어 최동오.”

알아주는 알쓰인 최동오는 기절해있다가 자기야 소리에 살아난 뱀파이어처럼 벌떡 일어난지 오래였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쥐어 뜨더니 기어코 일어난 사단을 모두 직관한 뒤였다. 입을 가린 성구보다도 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명헌을 바라보았다.

본능적으로 최동오 입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 이명헌은 무력을 행사하려고 했으나 제 위로 대차게 뻗은 한살 후배가 그걸 방해했다. 이빨이 뽑힐 위기에 처했거나 말거나 최동오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너 우성이랑 그렇고 그런 관계였던…. 너, 너 그래서 애인이랑 깨진거야?”

하필 대학리그 시즌 내내 룸메를 했던 둘이라 성구가 화들짝 놀라며 동오와 명헌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리액션만 따지자면 당장 방청객 알바를 뛰어도 손색없을 수준이다. 동오는 한층 심각한 얼굴이었다. 진작 범상치 않은 이명헌의 연애경력을 모두 알기 때문이었다.

“연하게 취향이라며….”

그건 니네 안심시키려고 한 말이고뿅발!! 이명헌은 제 위에서 꿈쩍하지 않는 정우성을 노려보다가 이내 허벅지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래뵈고 하체힘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미국물을 마시면 괴수가 되는지 조금씩 뒤로 밀린 정우성은 눈을 번쩍 뜨더니 꿈틀꿈틀 기어오기 시작했다. 호러가 따로 없다. 텅 빈 자아가 없는 눈은 동물적인 이유에서 떠진듯 했다. 그렇게 기어오더니 기어코 이명헌의 허리를 꽉 붙잡고 배에 고개를 묻더니 다시 자기 시작한다.

공교롭게 농구선수 이명헌 또한 연인과 깨진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딱히 취향까진 아니었지만 그의 전 애인은 그보다 연하였다. 남들만큼 알콩달콩하게 연애하다가 그의 꿈과 미래를 생각해 먼저 이별을 고했다. 그걸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지막 룸메인 최동오는 알고 있었다.

“그… 연하가 우성이었어?”

이제야 퍼즐이 맞춰졌다는 셜록홈즈 같은 최동오의 말에 옆에 있는 정성구는 어머! 하고 퍼드득 놀란다. 왓슨이 따로 없었다.

“아니, 아니야뿅.”

포커페이스의 이명헌은 침착하게 반론한다. 이럴 때일수록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됐다. 말도 안 되는 산왕농구부 18기의 연애치정현장을 타파해야했다.그러나 이성적으로 논리적인 반박을 하려던 때 차가 끼이익-! 하고 급정거를 했다. 정우성과 함께 나란히 굴러떨어질뻔한 이명헌이 본능적으로 우성을 팔로 보호했다. 얘 몸값이…. 그런 생각이었으나 직후 마주친 신현철의 묘한 눈빛에 바로 손을 뗐다.

“내려.”

살벌한 김낙수의 목소리에 그제야 창문으로 시선을 주자 불이 드문드문 켜진 아파트 단지 내였다.

“정우성도 들고 내려.”

반박할 새도 없이 컴컴한 아파트 인도 위에 둘은 버려졌다. 그 표현이 옳다. 어떻게든 버텨 해명할 생각이었으나 현철의 내일 술 깨고 이야기하자 이 소리에 힘이 턱 풀려버렸다. 나무늘보처럼 이명헌을 품에 꼬옥 껴안은 우성은 음냐음냐 소리를 내며 단잠에 빠져있었고 명헌은 힘이 풀려 인도에 주저앉아있는 상태였다. 빈 주차공간에서 방향을 돌린 낙수의 suv가 다시 명헌의 앞에 멈췄다.

창문이 내려가고 낙수가 고개를 내밀었다. 친구와 후배의 치정보다 술주정뱅이 둘은 치워냈다는 사실에 만족해보인 그는 야, 하고 운을 뗐다. 너만큼은 날 믿지? 간절한 눈으로 낙수를 보는 이명헌의 볼에 무언가 쪽 하고 붙었다가 떨어졌다. 굿나잇 키스. 헤헤 하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쇄기를 박은 우성이 인도 한가운데 널부러지고 표정을 싹 바꾼 낙수는 말 없이 창문을 올려버린 뒤 그대로 출발했다.

우성명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