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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1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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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 러브레터 쓰는거 좋아하는 이유가 있을거 같다. 집에 전화도 없고, TV도 없는데 그림책이 몇 권 있음. 중학교때 호열이랑 백호군단이 생일선물로 뭐 줄까 물어보니까 그림책 사달라고해서 처음엔 막 배잡고 웃다가 곧 정색하고 알았다고 했겠지.

"이사하기 전에... 엄마가 나 유치원 다니기 전에 읽어주던 책, 그림책 있었는데 다 없어졌어. 그게 갖고 싶어. 근데 제목을 몰라. 내가 기억해내면 그거 사줘."

호열이가 어린이도서관 가면 사서선생님이 알 수도 있다고해서 백호가 찾아가보겠지. 머리가 빨갛고 키는 훌쩍 큰데, 얼핏 사나워보이지만 눈빛이 슬퍼보이는 학생이 계속 말을 걸려다가 망설이길래 나이가 지긋한 사서 선생님이 먼저 말 걸어줌. 애들이랑 애기엄마들이 자꾸 흘낏거리길래 한적한 로비로 데려와서 물어봤겠지.


"저... 선생님... 그림책인데... 전에 엄마가 애기들 읽어주던 그런 책인데요... 제가 제목을 잊어버렸어요. 그럼 못찾겠지요?"
"찾을 수도 있지요. 어떤 내용이었을까요?"

백호가 기억을 더듬어서 이런 저런 내용을 말해보는데 도중에 자기도 모르게 울었겠지. 내용이 점점 생각이 안나서. 엄마가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서. 사서선생님이 신중히 듣고 괜찮으면 이틀 뒤에 한 번 와보라고 함. 학생, 내가 최선을 다해볼게요.



"어, 이거 맞아요!"

사서가 흐뭇해서 대출해줄까요?하니까 그때 도서대출증도 첨 만들고 그림책들 대출해오는 백호였음. 그길로 백호군단한테 찾았다고 자랑했겠지. 애들이 서점가서 그 그림책들 사고 포장도 예쁘게 해달래서 선물해줌. 그게 백호 보물임. 그 뒤로도 그림책, 아동도서, 사서 선생님 추천도서 가끔 빌려다 읽을거 같다. 오히려 한자가 많이 없어서 백호가 더 잘 읽을 수 있었겠지. 싸워서 얼굴에 흉진 날은 도서관에도 안감. 사서쌤 걱정할까봐.

백호가 50통의 러브레터를 쓸 수 있었던거, 거절은 하지만 여자애들이 백호한테 친절하게 이래서, 이래서 네 마음은 받아줄 순 없지만, 하고 거절하면서도 진심으로 대해준 이유는 편지가 정말로 순수하고 동화감성이라서 그랬을거 같다. 얘는 사나운 얼굴을 하고 그 속은 진짜 아기같은 면이 있다는걸 아니까.


















1
[어린왕자의 여우같다. 너 말고 내가. 재활병원의 해변산책로에서 가만히 기다리면 네 자전거가 보일때가 있다. 그럼 많이 기쁘다. 말로는 표현 못하지만 나는 널 기다려.]



2
[날 좋아한다고 했던 눈에 흔들림이 없어서 나도 장난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마음은 소중한 거니까. 나는 다 나으면 대답하고 싶었는데, 너는 같이 낫는 걸 기다리고 싶다고 한다. 같은 마음으로 기다리면 더 빨리 나을까?]



5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편지가 조금씩 쌓여간다. 널 생각하는 시간도 쌓인다. 내 안에 네 자리가 생겼다.]



9
[오늘 치료는 많이 아팠다. 우는 걸 보여주고 싶지않아서 내가 침상에 얼굴을 묻었더니 네가 손을 넣어주었다. 눈물이 네 손에 묻었다. 네가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내게 묻었다.]



16
[네 자전거 뒤에 재활원을 남겨두고 온다. 내일은 농구부에 가겠지. 네 라커에 편지들을 넣으면 너도 내 마음을 알거야. 나도 좋아해.]











백호가 태웅이 가방에다 16통의 편지를 넣어놨는데 엄마가 빨래감 꺼내다 봤겠지. 우리 아들 러브레터 받아왔나보다. 곱게 잘 추려서 태웅이 책상 위에 올려놨는데 태웅이가 처음 발견했을때는 누가 무단으로 라커룸까지 들어와서 넣어놓은 줄 알고 불쾌해했다가 편지봉투마다 🦊여우가 그려진거 보고 곧 숫자대로 읽어보겠지. 태웅이를 여우라고 부르는건 멍청이뿐이잖아.










백호가 엄마 그림책 읽으면서 자려고 누워있는데 창문에 뭔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겠지. 작은 돌같은거 던질때 나는 그런 소리. 어떤 놈이야!! 어, 여우다. 얼마나 자전거를 밟았는지 태웅이 머리가 다 뻣쳐 있었지.

"늦었는데 뭐하냐? 밤 늦게 다니면 엄마 걱정한다."
".....내려와."
"몇 시간 뒤면 학교에서 보잖아. 빨리 가서 자."
"당장."


백호가 내려가자마자 태웅이가 가로등 밑에서 팔을 꽉 잡았겠지.

"편지, 그거 넣어놨다고 말했으면 더 빨리 왔어."

백호가 볼을 긁적거리면서 다른 데를 보니까 태웅이가 아예 자기를 보도록 백호 얼굴을 잡고 돌렸겠지.


"...편지 또 써 줘."
"또 써 달라는건 네가 처음이야."
"나는 다 네 처음이고 싶어. 이것도."


태웅이가 가로등 밑에서, 밤바람을 거슬러 타고 온 자전거 위에서, 몸보다 급하게 먼저 와 있던 마음을 담아 키스했지. 백호의 손이 갈 곳을 몰라 하는걸 태웅이가 붙잡아서 자기 목에 둘러줬을 거야. 백호가 숨이 막혀 버둥댈때까지 그렇게 서툰 키스를 하다가 또 말하겠지.


"계속 써 줘."
"답장은 안 주고?"
"널 그만큼 더 좋아할게. 마음이 막 풀어져. 이제 내가 멈출 수가 없어. 답장만큼 내가... 내가 더 좋아할게."
"그런건 별로야. 같이해. 네 마음이 더 크지 않게... 내 마음도 그만큼 커지게... 편지 써줄게."
"...어."

허름한 집의 가로등 밑에서 풋풋한 키스를 나누던 두 사람의 마음이, 사막의 우물처럼 반짝이던 그런 밤이 내일이면 또 동화처럼 편지에 담기겠지.







탱백 재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