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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8 03:03
그러니까 대학교에서 이명헌과 최동오를 만날을 때만해도 이럴거라고 생각 못했지.

코트에서 적으로 만나던 빡빡이놈들이랑 동료로 뛸 줄도 몰랐고, 같은 집에 살 줄도 몰랐고, 친구가 될 줄도 몰랐고, 이렇게 될 줄도 몰랐지

어쩌다 정신 차리니 예민한데 순진한 최동오랑 어딘가 나사 빠진 이명헌은 이 정대만의 친구 바운더리에, 그것도 꽤 안쪽에 들어와버리고 만거야

이러려고 한 건 아닌데 이게 다 시간이 문제지. 같이 기강 잡히면서 빠따도 맞고, 공도 닦고 술도 마시고, 같은 팀이였다가 다른 팀이었다가, 또 적으로 동료로 만나다가. 같이 보낸 시간이 각기 다른 셋을 친구로 붙이고 말야

그러니까 시간이 문젠데

쟤는 왜 시간이 지나도 똑같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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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만은 이명헌을 안다.

술마시는 이명헌도 알고 이상한 말꼬리 붙이는 이명헌도 알고, 선배들에게 맞을때도 표정 변화 하나 없는 그 얼굴도 알고, 인형뽑기 하면서 낄낄 거리는 얼굴도, 8세 아동 야니메이션 보면서 줄줄 우는 이명헌도 안다. (강아지가 할머리를 찾아가는 그 애니메이션은 정대만 이명헌 최동오 셋 다 울렸다)

그리고 멍청한 이명헌도 안다. 외로운 얼굴도. 떠나보낸 첫사랑을 못잊어 족족 소개팅을 겆어차던 이명헌. 그러다 사람은 사람으로 잊으라고 소개시켜 준 송태섭이랑 사귀던 이명헌. 또 혼자가 됐다가, 또 건조해지고 외로워진 이명헌. 그래도 국대에서 서태웅 옆에 있을 때는 꽤 진심으로 웃었는데... 어쨌든 지금은 아니다.

걔는 이상한 애라는 별명 답게 이상했다. 받는 것도 없이 자꾸 기다렸다. 뒤도 안돌아보고 떠난 첫사랑도 기다리고, 기다리라곤 안할게요 하던 첫애인도 기다리고. 그래도 서태웅은 안기다렸다. 자긴 형들과 다르다고 꼭 기억해달라던 서태웅의 편지는 오는 족족 최동오가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이명헌은 편지 같은 건 온 줄도 모르는 사람처럼 굴다가도, 최동오가 다 차지도 않은 쓰레기봉투 내다버리는 걸 한번씩 봤다.

정대만은 그게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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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좋은 기회니까 잘 생각해보고 얘기해 대만아. 알겠지?"

"네 감사합니다."

"그래 그래 꼭 연락줘라 알겠지?"


정대만은 운전해 집으로 돌아가는는 내내 어떤 저울을 잰다. 저울에는 둥근 주황색 공도 올려놓고 이명헌도, 최동오도 올려놨다가 내려놓는다. 열에 세 번은 서태웅도 올려놨다가, 송태섭도 한 번, 스물에 한 번은 정우성도 올려본다.


정대만은 오늘 미국 구단 제의를 받았다.

작년 정대만이 날아다니던 국가대표 경기를 관심 있게 본 스카우터의 제안이다. 아마 바로 주전은 아닐거고 벤치겠지만 그래도 꽤 좋은 기회임을 부정할 순 없었다. 스카웃이면 보여주기식이라도 한두번은 주전으로 설 경험이 있을거였다. 아니면 그냥 공부로 1년만 있다 와도 되고 또......

그러는 와중에 최동오에게 문자가 온다. 식단 끝나신 이명헌씨가 저녁으로 치킨 먹고싶다는 내용이다. 아 이명헌, 자기 생각 하는 걸 어떻데 알았는지 기가 막히기도 하지. 누가 PG 아니랄까봐

아마 이명헌은 오늘 치킨을 먹지 못할 것이다. 첫번째로는 정대만이 사가지 않을 거라서고, 두번째로는 이명헌도 먹을 기분이 아닐거라서다. 그리고 세번째로는... 정대만은 세번째 이유를 만들지 말지 가는 내내 고민한다. 작년 아시안게임 준결승전 27점 득점의 슈터는 날카롭게 벼려진 감각을 발휘한다. 정대만은 라인에 서있고 손엔 공이 있다. 넣을지 말지에 대한 문제다. 선택권은 정대만에게 있다.

정대만은 어느새 현관에 서있다. 버선발로 달려나온 이명헌이 치킨을 받아들려다 빈 손을 보고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든다. 저 뒤에 최동오도 빼꼼 방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정대만은 이명헌의 갈색 눈동자를 본다. 정대만의 골대다. 그리고 이건 넣을지 말지에 대한 문제다. 하지만 만약 던진다면 득점이다. 던진 사람이 정대만이므로.

그리고 정대만은 골을 넣기로 한다.
그는 일평생 득점을 포기해본 적이 없는 남자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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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웅이에게

이번 드래프트에 지명 받았다는 얘기는 들었다. 진심으로 축하한다. 드래프트로 바쁜데 1년 넘게 꾸준히 편지하느라 고생 많았다. 네가 보낸 수많은 편지에 한 번은 답장해야할 것 같아 쓴다.

네가 보낸 생일선물은 잘 받았다. 봤는데 예쁘더라. 그런데 알러지 때문에 니트는 안입어서 다시 돌려 보낼게. 색이 환하니 너한테도 잘 어울릴 거다. 만약 사이즈가 안맞으면 송태섭에게 줘.

태웅아

나랑 이명헌 사귄다.

벌써 두 달 됐어. 오늘 걔 생일이라 저녁도 같이 먹으러 갔다 왔다. 아마 내 생일도 내년 걔 생일도 같이 저녁 먹을 것 같다. 그 이후로도 계속.

태웅아 이제 이명헌에게 편지는 그만 보내도 될 것 같다. 니트도. 선물도. 그 밖의 다른, 같이 저녁 먹어주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보내지 않아도 된다.

물건 뿐만의 얘기는 아니다.


너무 길어 이만 줄인다. 늘 건강하고 잘 지내라
다시 한 번 드래프트 축하한다.

네가 자랑스럽다.

- 정대만


P.S 네 드래프트 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이번에 우승해서 사진을 보낸다. 주장인 이명헌이 너무 많이 울어 우승컵은 내가 들었다. 축하는 안해줘도 된다. 그럼 정말 잘 지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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