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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6 08:33
어느 날 문득 태섭이가 깨닫는 거야. 대만이가 자길 보는 시선이 달라진 걸. 처음에는 이 선배가 왜 그러나 싶었어. 문득문득 고개를 돌리면 대만이와 눈이 마주치는 일이 늘었거든. 그러면 멍하던 대만이의 얼굴이 갑자기 옅은 미소와 함께 풀리는데, 태섭이에게는 낯선 표정이었어. 사람을 상대로 그런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짓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니까. 아, 뭐, 그래. 대만이가 볼 때는 신기할 수도 있겠지. 지나가듯이, 그것도 악의를 담아서 한 말이기는 했지만 태섭이가 농구를 하기에는 체구가 작긴 하잖아. 자신과 다른 스타일의 농구를 하니까, 그런 시선으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시일이 지날수록 그게 아닌 거야. 돌아볼 때마다 눈이 마주치는 빈도는 늘어나고. 잔잔히 미소를 짓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는 걸 보고 알아차린 거야. 이게 그냥 호기심은 아니었다는 걸. 이건 분명 호감의 연장인 거야. 어떤 계기로 대만이가 그런 감정을 갖게 됐는지 알 수는 없더라도 말이지. 그것도 처음에는 동료애라고 생각했어. 같은 코트 위에서 공을 주고 받으며 미리 짠 듯이 합이 맞아서 움직일 때는 태섭이도 짜릿할 정도의 흥분을 느꼈으니까. 마치 태섭이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거기 있어주는 대만이가 어떻게 싫을 수가 있겠어. 태섭이가 하고 싶던 바로 그 스타일의 농구를 하게 해주는데.

하지만 대만이의 감정은 조금 더 무거웠지. 눈이 마주칠 때 조금 붉어지던 얼굴이, 스친 손을 의식적으로 거두던 일이, 그리고 같이 있으면 흥분한 듯 빨라지던 말까지 전부. 타인의 감정에 예민한 태섭이는 금방 알아차렸어. 대만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그것도 동료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더 많은 것을 바라는 감정이라는 걸 말이야. 그런데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하지만 그리 싫지만은 않았어. 구역질이 난다든가 소름끼친다든가. 그런 거부감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받아줄 생각도 없었어. 지금은 오직 농구뿐이고 농구 외에 다른 건 생각할 겨를이 없었거든. 무엇보다도 이제 가족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으니까, 대만이와의 연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 그럴 때는 차라리 모른 척하는 낫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그런 태섭이의 마음을 눈치챈 걸까. 최근 들어 대만이가 주변을 서성이는 거야.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태섭아, 부르고는 한참이나 말이 없어. 그러면 태섭이는 알면서도 왜요? 패스 해요? 하고 태연히 물었어. 그러면 대만이는 아... 응. 하고 결국 말을 못하고 넘어갔어. 이게 몇 번이나 반복되자 태섭이도 짜증 아닌 짜증이 났어. 차라리 고백이라도 하면 시원하게 걷어 차주기라도 할 텐데. 이도저도 아니고. 하긴 계속 농구부 안에서 얼굴 봐야하는데 불편해지고 싶진 않겠지. 그래서 태섭이도 끝까지 모르는 척해주기로 했어. 그러면 이 평온한 일상이 계속 될 것 같았으니까.

어느 날 밤이었어. 전화벨이 울리고 아라가 뛰어가서 먼저 받았어. 그러더니 짜증스럽게 태섭이를 불렀어. 오빠! 학교 선배래! 칫. 나도 친구한테서 전화올 거니까 짧게 해! 그리고는 자기 방으로 뛰어갔어. 선배...? 이 시간에 전화 할 사람이 있나? 주장인가? 그러면서 전화를 받았지. 송태섭입니다. 그러자 반대편에서 바람새는 웃음 소리가 들렸어. 태섭이는 직감적으로 이게 대만이라는 걸 알아차렸지.

대만 선배...? 의문형으로 끝난 그 말에 또 웃음이 돌아왔어. 어떻게 말 안 했는데도 아네. 잔뜩 혀가 풀려서 제대로 발음도 되지 않는 것을 보니 술이라도 마신 듯 했어. 아, 뭐야. 선배 술 마셨어요? 대답 대신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가 기침과 함께 섞여 들렸어. 이러지 말고 집에 들어가요. 저 길게 통화 못해요. 동생도 전화 온대서. 그렇게 냉정히 말하고 끊으려는데 대만이가 주절주절 떠드는 거야. 태섭아... 보고 싶어... 네가... 나 싫어하는 거 아는데... 그래도 보고 싶다... 이런 말 맨정신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술 취해서 하는 주제에. 짜증과 함께 안쓰러움도 몰려왔어. 그 정대만이 취해야 겨우 할 수 있는 말도 있다니.

저 선배 안 싫어해요. 그리고 뭐가 보고 싶어요. 아까도 연습 같이 하고 헤어지고선. 까칠한 그 말에 대만이는 또 힘겹게 웃었어. 싫어하지 않는다니... 그건 다행이네. 그리고 한참 숨 쉬는 소리만 들렸어. 거기다 바로 옆에서 아라가 빨리 끊으라고 독촉했지. 대만이도 더 할 말이 없어 보이고 태섭이도 이 통화가 불편해서 끊고 싶었어. 그저 대만이를 받아줄 수 없는 것뿐인데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송태섭... 미안하다... 그래도 보고 싶어... 좋아한다고도 못하고 보고 싶다는 말만 하는 대만이에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어. 그런데 대만이 목소리가 너무 애절하고 안타까워서 그냥 끊을수도 없었어. 뭐야. 그렇게 보고 싶으면 내일 연습이나 잘 나와요. 또 볼 거면 뭐가 자꾸 보고 싶대. 그리고 끝일 줄 알았는데 대만이가 사과했어. 미안해... 내일 연습은... 못 갈 거 같아... 그리고 멀리서 대만이를 다급하게 부르는 영걸이의 목소리가 들리며 전화가 끊어졌어.

순간 애틋하던 마음도 싹 사라졌어. 그러시겠지. 그렇게 술에 취했으니 연습은 어떻게 나오겠어. 아라에게 전화를 넘기고 방으로 돌아오니 화도 나는 거야. 이제 정신차리고 농구나 할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보지. 정대만에게 나는 그거밖에 안 됐나. 아니, 여기서 내가 왜 나와. 정대만에게 농구는 그 정도였나. 그렇게 다시 하고 싶다더니 고작 이 정도였어? 외면하고 싶은데 이 배신감과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 건지 알 수 없었어. 한 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스치는 걸 막을 수가 없었지. 날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거기가 아니라 코트로 와야지. 나하고 같이 농구해야지. 다른 사람들 곁에 있을 거면서 날 좋아하긴 하는 건가. 이러니까 꼭 자신도 정대만을 좋아하는 것 같잖아. 태섭이는 생각을 떨쳐내려고 이불을 뒤집어 썼어.

다음 날 학교에 가니까 영걸이 패거리가 태섭이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뭐야, 대만 선배 찼다고 때릴 셈인가? 좀 긴장해서 보고 있는데 태섭이를 발견한 영걸이네가 갑자기 뛰어왔어. 짐짓 태연하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 태섭이와 달리 영걸이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어. 같이 병원 좀 가자고. 병원엔 왜요? 되묻는 태섭이에게 거기 대만이가 있다는 이야기가 돌아왔어. 술 좀 마셨다고 병원까지... 생각하는 태섭이에게 영걸이가 그랬어. 어제 대만이가 연습 끝나고 집에 가던 도중에 다른 학교 학생들에게 붙잡혔다고.

그동안은 영걸이네나 철이가 있으니까 건드리지 못했는데 이제는 혼자 다니니까 손 쉬운 먹잇감이었던 거야. 딴에는 그동안 당했던 것에 복수기도 했지. 대만이는 출전이 달렸으니까 변변한 반항 한 번 할 수 없었어. 대만이가 끌려갔다는 말을 들은 영걸이네가 한참 찾아다니다가 발견한 곳이 공중전화였던 거지. 그 안에서 주저앉아서 의식을 잃은 대만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고 부모님께 연락한 게 어젯밤 일이었다고. 농구고 뭐고 당장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지. 그런데 그 상황에서 대만이가 신음처럼 흘린 이름이 태섭이었대. 의식이 없는 채로도 태섭이만 찾고 있대. 그래서 태섭이를 데리고 가려고 왔다는 거야. 이러다 정말로 태섭이를 만나지도 못하고 죽을까 봐.

아... 태섭이는 순간 말을 잃었어. 어제의 뭉개진 발음. 거친 숨소리. 끊어질 듯이 이어지던 말들. 마지막으로 정대만이 떠올린 게 자신의 번호고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던 말이 보고 싶다는 말이었다니. 이번에는 떨리는 손을 감출 수가 없었어. 그때 싫어하지 않는다고 하는 게 아니었는데. 나도 선배 좋아한다고 했어야 했는데. 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이따위가 되면 어쩌지. 대만 선배도 형처럼 돌아오지 못하면. 넋이 나간 태섭이를 영걸이가 이끌었어.

소중한 것들은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사라지는지. 아무 일 없이 행복하기만 할 것 같던 가정이 부서진 건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었지. 바다는 거친 곳이니까 배를 타는 사람에게는 숙명 같은 일이었어. 뭍에서 죽는 건 뱃사람이 아니라는 농담을 하는 아저씨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형은 아니었잖아. 준섭이는 고작 열 두살이었는데.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예감하기 힘들지만 특히나 상대가 나이가 어릴 경우엔 더 했지. 고작 세 살 위의 형이었으니까. 언제나 같이 농구를 하며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던 형의 죽음 이후 태섭이는 자신 안에서 뭔가 부서졌다는 걸 알았어.

소중하지 않으면 잃어도 아프지 않아. 부서져도 괴롭지 않아. 관계는 얼마나 연약하고 나약한지. 농구에 미쳐 있던 건 농구는 태섭이를 떠날 수 없어서였어. 차라리 태섭이 농구를 그만두면 그만 둘 지언정 농구가 먼저 떠나진 않을 테니까. 그리고 이제 형과 남은 유일한 접점이었으니까. 어머니가 집에서 형의 흔적을 전부 지운 후에, 농구마저 그만 두면 형을 추억할 일이 줄어들 것 같았어. 그리고 대만을 처음 만났을 때, 자신도 모르게 형을 떠올렸어. 깔끔하고 깨끗한 호를 그리며 들어가는 슛. 자신감 넘치는 미소. 단번에 태섭의 약점을 알아보던 안목까지 말이지. 애써 지웠던 그리움이 물 밀듯 밀려와서 대만을 외면 했어. 하지만 그때도 내심 싫지만은 않았던 거야. 혼자 연습하다가 비슷한 키나 모습을 보면 괜스레 시선이 가곤 했거든. 거기 어딘가 대만이 다시 나타나서 같이 농구하자고 할 것 같아서.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었지만.

대만이는 태섭이가 자길 싫어한다고 말했지. 둘의 과거를 생각하면 그렇게 믿는 것도 어쩔 수 없었어. 하지만 대만이는 고등학생 송태섭만 기억했잖아. 태섭이는 대만이를 보는 순간 중2 대만이를 바로 떠올렸는데. 실망했지만 싫어하지 않았어. 아무도 먼저 다가오지 않던 태섭이에게 먼저 말 걸어주던 대만이를 알고 있었으니까. 모나고 삐뚤어진 태섭에게 상냥하게 다가왔던 그 순간을. 그저 소중해지는 게 겁이 났을뿐이야.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부서지니까. 대만이도 농구부도 잃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나 큰 욕심이었을까. 형 대신 살아 있는, 무너진 자신에게 휘말리지 않도록 거리를 둔 것이.

태섭아. 송태섭. 행복한 듯 제 이름을 부르는 대만이 어떻게 싫어지겠어. 그리고 여전히 대만의 3점 슛은 그날처럼 태섭이를 설레게 했지. 아마 그날이 없었어도 정대만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쉽게 용서하지는 못했겠지만 그래도. 대만이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어. 그래도 결론은 다시 처음과 같았지. 소중한 걸 만들지 않으면 아프지 않아. 대만 선배는 좋은 동료야. 좋은 선배고. 그걸로 충분해. 선배가 날 좋아한다고 해도 내게는 농구뿐이야. 어차피 우리는 계속 볼 테니까. 정대만이 대학을 간다고 해도 농구를 포기할 리는 없으니까. 우리에겐 그런 막연한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준섭이가 배를 타고 나갈 때도 마음 깊은 곳 어딘가 그렇게 믿고 있었지. 형은 내게로 돌아온다고. 우리에겐 서로 원망하고 미워하더라도 용서하고 돌아갈 시간이 있다고. 그게 매번 당연하게 주어진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실은 부정하고 싶었던 거였어. 대만이 당연히 거기 있어주리라 믿고 싶어서.

자신의 앞에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사람이 대만이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 그래도 본능이 이 현실에서 달아날 수 없게 만들었고 태섭이는 치미는 헛구역질을 삼켜야 했지. 대만 선배... 태연한 척 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엉망으로 떨렸어. 선배, 일어나 봐요... 나 보고 싶다고 그랬잖아요. 일부러 웃으려고 했는데 좀처럼 웃을 수가 없었어. 대만이를 놀리면서 어제 그렇게 전화 하길래 술 취한 줄 알았다고, 엉망으로 말해서 하나도 못 알아 들었다고 놀리려는데 왜 그렇게 목소리가 떨리는지. 일어나서 다시 말 해봐요. 제대로 말해야 내가 들어줄 거 아니에요. 마지막에는 거의 애원하듯이 빌었지만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

자리를 비켜주셨던 대만의 부모님이 돌아오셨을 때 태섭은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랐어. 차라리 그때 대만이 보고 싶다는 말이 아니라 도와달라고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좀 더 빨리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어쩌면 이렇게 위독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차마 그 앞에서 당신들 아들이 마지막으로 전화를 한 사람이 나라고 할 수 없었어. 죽음을 예감한 대만이 보고 싶다는 말 하나를 남기기 위해 전화했다고. 그저 학교 후배고, 농구부 후배라는 말만 간신히 입에 올렸지.

그런데 거기서 송태섭이라는 이름을 밝히는 순간 대만의 부모님 표정이 달라지는 거야. 네가 태섭이구나...! 하면서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반겨주셨어. 당혹스러워하는 태섭이에게, 대만에게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순간 반가워서 그랬다며 사과도 하시는 거야. 네 덕분에 대만이가 다시 농구하게 됐다고. 요즘 얼마나 행복해 보였는지 모른다면서. 태섭은 그런 칭찬을 민망하게 듣고 있었어. 대만이 이미 부모님께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그게 태섭이라고 밝혔다는 건 꿈에도 몰랐으니까. 나를 다시 살게 해준 사람이지만 잘못이 너무 커서 감히 욕심내지도 못할 사람이라고. 그래서 부모님도 그저 고마웠던 거야. 그런 태섭이가 찾아와줬으니까.

위급한 고비는 넘겼다고 했지만 대만이는 여전히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어. 그래서 생명에 지장은 없다는 그 말도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어. 이러다 또 준비되지 않은 이별을 맞고 싶지는 않아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매일 문병을 와도 되겠냐면서 부모님께 부탁했어. 부모님은 오히려 부탁하고 싶었지만 미안해서 말할 수 없었다면서 고맙다고 했지. 대만이 자신을 어떻게 설명했는지 모르는 태섭은 조금 망설이다가 그래도 소중한 선배니까요, 라고밖에 할 수 없었어.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말은 입에서 떨어지지가 않았어. 감히 그렇게 말해도 좋을지 자신도 없었고.

태섭이 올 때마다 부모님은 의사와 상담을 한다든지, 집에 옷을 가지러 간다든지 하시며 자리를 피해 주셨어. 사실은 태섭이 대만과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신 거였지만. 태섭은 그저 그 말들을 곧이 듣고 자신마저 없으면 대만을 지킬 사람이 없을까봐 한시도 떠나지 않고 곁에 있었어. 그나마 다행인 건 대만이 있는 곳이 1인 병실이라는 점이었어. 그곳에선 태섭이 솔직하게 말해도 아무도 듣지 못했으니까. 그때만큼은 그동안 지독하게 감췄던 말들을 다 할 수 있었어. 처음 선배를 만난 건 얼마 전이 아니에요. 중1 때, 혼자 연습하고 있었는데 선배가 먼저 말 건 거 기억 안 나죠? 그때 많이 기다렸어요. 그 코트에서. 다시 한 번 상대해주지 않을까 하면서. 그런 이야기들까지 전부.

내가 먼저 좋아했어요. 선배가 나라는 사람이 있다는 거 알기 전부터 좋아했다구요. 그런데 나는 누구 좋아하면 안 돼요. 내가 좋아하면...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은 다 부서져요. 내가 잃고 싶지 않았던 것들만 내게서 달아나요. 그리고 태섭은 듣지 못하는 대만에게 준섭의 이야기까지 전부 했어. 죽은 형이 있었고, 등번호가 7번인, 누구보다 빛나던 선수였던 형을. 그리고 자신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들과 준섭의 마지막까지. 다시 돌아오지 말라는 말 때문인지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는 것도.

바보 같이 들리겠지만, 난 항상 두려워요. 그리고 선배가 이렇게 된 것도 꼭 내 탓 같아요. 내가 선배 좋아해서... 그래서 선배에게 나쁜 일 생긴 것 같아서... 태섭은 말을 잇지 못하고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어. 난 소중한 사람들에게만 상처만 줘요... 그리고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어. 내가 선배도 망가뜨리면 어쩌죠... 누가 들을새라 혼자 눈물을 삼키느라 어깨가 들썩였어. 미안해요... 미안해요... 태섭이 미처 다 토하지 못한 서러움을 누르고 있을 때였어.

누구를 누구 마음대로 망가뜨린다는 거야...? 말라서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태섭이 잘 아는 그 목소리였지. 아... 순간 놀라서 대만의 부모님을 부를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마주친 눈을 보고 있었어. 네 탓 아냐. 이게 네 탓이면 내 방황까지 네 탓이냐? 그리고 기운 없이 쿨럭이는 웃음소리가 이어졌어. 그리고 나 보기보다 단단해. 어지간한 걸로는 부서지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마. 그리고 마지막으로 억지로 미소를 지었어. 터진 입술이나 부은 눈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잠시 잊고 말이야. 보고 싶었어, 태섭아. 그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