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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4 00:01
전편: 태웅명헌 우성명헌 이 모든 연약하고 복잡한 감정이 드는 이유는 모두





 *
 서태웅은 전문가의 말을 잘 따르는 사람이었다. 전술은 감독 말대로. 세부훈련은 코치 말대로. 피지컬은 트레이너 말대로.

 

 그렇다면 사랑은. 소수자의 사랑은.

 

 

 

 *

 서태하는 서태웅의 집 소파에 앉아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바싹 깎은 손톱과 대비되는 화려한 반지가 가운데 손가락에서 빛났다. 기다란 손가락 사이로 흑단같은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서태하는 서태웅의 누나이다. 그리고 태웅이 아는 유일한 동성애자였다. 일찍히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은 서태하는 머리에 피도 안 말랐을 중학교 시절부터 용케 몇 명의 여자를 만났다. 그리고 고교 2학년에 한 살 어린 운명을 만난 서태하는, 스물다섯에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그녀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고.

 

 그리고 아버지가 던진 책에 머리가 깨졌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튼튼한 몸으로 죽지 않은 서태하는 그 자리에서 중지를 날리고 집에서 나왔다. 그리고 연인과 함께 중지 손가락에 가장 멋진 반지를 걸었다.

 

 의외로 서태웅은 그때의 서태하를 이해했다. 서태하와는 그 나이 남매답게 매우 친밀한 사이까지는 아니었으나, 그 모습만은 멋지다고까지 생각했다.

 

 만약 아버지가 농구를 하지 말라고 제 머리를 깼다면 자신도 중지를 쳐들었을 거라고. 당시 서태웅에게 성애는 크게 중요한 개념이 아니었으나, 그도 서태하처럼 일찍히 사랑에 몸을 바친 소년이었다.

 

 그리고 장성한 청년 서태웅은 차를 한 잔 건네며 소파에 앉았다. 와 서태웅 나름 접대도 할 줄 아네. 뜨거운 차를 호록, 들이킨 서태하가 쉽사리 말을 못 꺼내는 태웅을 세모눈으로 쳐다봤다.

 

 "할 말 있어서 부른거 아니니? 본론부터 말해."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처음부터 말하자 태웅아."

 

 서태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답지 않게 선선한 여름, 태웅의 휴가 3일차 일이었다.

 

 

 

 *

 4일 전 명헌의 집 서랍 앞에서 그 사진을 본 순간부터 태웅의 심장은 미친듯이 뛰었다.

 

 세상에는 일 초도 되지 않는 순간 알게되는 진리가 있다. 그것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것에 가깝다. 태웅은 처음으로 제가 던진 슛이 림을 통과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때 만고불변의 진리가 태웅의 몸에 새겨졌다. 나는 농구를 사랑한다.

 

 사진을 본 순간 태웅은 그간의 자신의 마음을 한 순간에 이해했다. 이해라기보다는 어떠한 거대한 힘이 변하지 않는 사실을 몸에 욱여 넣는것에 가까웠다.

 

 그간 모든 불편함과, 신경쓰임과, 괜한 생각과, 사진을 보고 들었던 일시적인 분노와, 몸이 고장나고 속이 꼬이는 이상한 감정이, 바로....

 

 

 

 *

 휴가 전 마지막 인터뷰를 준비하는 대기실에서 태웅은 정우성 선수의 근황을 검색했다.

 

 폴라로이드에 찍혀 있던 날짜는 작년 여름이었다. 그리고 정우성은 올 봄, 한 미국인 여성과의 교제를 인정하는 기사를 내었다.

 

 태웅은 평온하기 그지없어보이는 명헌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태웅은 황급히 핸드폰으로 눈을 돌렸다. 여전히 심장이 너무 뛰어서 바보같은 말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이미 바보같이 행동하고 있다는 건 태웅도 알고있다. 알고만 있고 고쳐지지는 않는단게 문제지만. 태웅은 전혀 자연스럽지 못한 손놀림으로 메신저 앱을 켰다. 이렇게 머저리같이 굴다가 정말로 폭탄같은 말을 할지도 모른다.

 

 태웅이 아는 사랑은 늘 충실한 계획을 따르는 과정이었다. 태웅은 사랑을 잘 하고 싶었다.

 

 그리고 태웅은 자신이 이런 종류의 사랑에 무지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개중에서도 아버지라는 사람에게 머리를 맞을 부류의 사랑이라면 더욱.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할 일을 정해야해. 그래서 태웅은 얼굴을 보기만해도 마음이 차게 가라앉는 -하지만 답은 명쾌히 줄 것 같은- 혈육의 메신저 프사를 눌렀다. 언제봐도 본인과 똑같이 생겨서 묘한 불쾌감이 올라왔다. 누나. 언제시간돼.

 

 

 

 *

 "그래서 그 분은 널 좋아하는거 같니."

 

 서태하는 찻잔을 가져와놓고 한 입도 마시지 않는 서태웅을 바라보며 제일 중요한 질문을 꺼냈다. 쯧쯧. 고양이혀는 여전하구만.

 

 "음.... 일단 남자는 좋아해."

 "응 다행이네 그래서 널 좋아하는 거 같냐고."

 "그리고 지금 남자친구도 없는 거 같아."

 "그건 정말 다행이다. 그래서 널 좋아하는 거 같냐고."
 "그런건 어떻게 알아."

 

 아 태웅아…. 너 정말 어떡하니….

 

 서태하는 충격에 휩싸였다. 내 동생이 이정도로 연애X자 라니. 생각해보니 서태하는 서태웅의 연애 히스토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얘 설마 모태솔로는 아니겠지.

 

 "아니 너한테 호감을 표시했던 여자분들은 없었어? 그 분들이 한 행동이라도 생각해봐."

 

 서태하는 생각했다. 뭐 휴일에 괜히 뭐 하냐고 연락한다던지. 어디 재미있고 예쁜 곳에 같이 가자고 한다던지. 맛있는 걸 챙겨준다던지. 너 좋아하는 취미 같이 하자고 한다던지. 아니면 자기 취미생활을 함께 하자고 하던지. 야밤에 보고싶다고 부른다던지. 그런 일 없었냐고.

 

 서태웅은 생각했다. 경기 끝나고 서태웅 선수 멋있어요 하는거 말하는건가. 편지 주고. 싸인 받고. 사랑한다고 응원한다고 하고. 그런 일이라면.

 

 "없는데."

 "아 정말 태웅아…."

 

 우리 엄니가 힘내서 너를 이렇게 낳아줬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니.

 

 서태하는 어머니와 자신을 쏙 닮은 태웅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눈꼬리가 슬쩍 쳐지고 입술은 댓발 나오려 드는 것이 풀이 죽은 모양이다. 너는 이 유전자의 수치다. 서태하는 NBA 출신 197cm 근육질의 스몰포워드 서태웅 군의 움츠러든 어깨를 툭툭 치며 입을 열었다. 서태하 할 수 있다. 사랑을 모르는 13세 아동의 첫사랑을 도와준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태웅아 노력하면 다 된다. 사랑은 쟁취하는 거야."

 "그치?"

 "그럼그럼. 태웅아 나는 너의 노력을 믿어."

 "그럼 어떻게 해야해."

 "너가 먼저 그 분한테 호감을 표시해 봐."

 "그건 어떻게 해야해."

 "아니진짜서태웅이놈아이때껏뭐하고살았니진심 하…. 그 분은 뭐 좋아해?"

 "농구."

 "혹시 농구 업계 종사자신데 농구 말한거면 죽는다."

 "어떻게 알았지."

 "니가 농구 업계 외에 친구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진 않네. 그래서. 농구 말고는?"

 "음…."

 

 서태하는 고민에 빠진 서태웅을 보며 공포에 빠졌다. 얘 설마 그 분의 취향 하나도 모르는건 아니겠지.

 

 "물고기 좋아한대."

 "그래? 그럼 휴일에 물고기 같이 보러 가자고 해봐."

 "저번에 나랑 새 어항 같이 꾸미쟀어."

 "오?"

 

 뭐야 이거 생각보다 잘 풀리고 있는거 같은데? 서태하는 서태웅에 대한 평가를 개노답에서 노답으로 수정했다. 어항은 집에서 꾸미는거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 곰탱이가 용케 그 분의 집까지 초대받았다는 뜻이다. 나름 잘 되고 있는 거 같은데? 물론 잘되고 있는거 같은데 아무 것도 모른다는 점에서 서태웅은 노답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이면 태웅아. 한 번쯤 확신을 줘야지. 밀어 붙여야지.

 

 "그러면 어항이랑 물고기 매장 같이 가자고 해봐."

 "그럴까."

 "응 물고기 공부도 좀 해가고. 공통 관심사 만드려고 노력한 티를 내. 감히 가르치려 들진 말고. 옷 예쁘게 입고 가. 트레이닝복 안된다."

 "나도 그 정도는 알아."

 "놀랍네. 그리고 옆에 착 붙어서 그 분이 고른 거 다 예쁘다고 해. 성의있게 예쁘다고 해야한다."

 "응…."

 "제일 예쁜 물고기 보면 그 분 닮았다고도 해봐."

 "느끼해."

 "우리같이 생겼으면 괜찮아."

 "알았어."

 "물고기도 사줘. 대신 밥 사달라 해. 그리고 밥도 너가 사. 커피도 너가 사. 돈 뒀다 뭐하니."

 "우와."

 "짐도 들어줘. 운전은 못하니까 몸으로라도 때워. 튼튼한 몸 뒀다 이런데 쓰는 거야."

 "응."

 "그래 태웅아. 일단 이거라도 해보고. 진척사항 있으면 보고하도록."

 "싫어."

 "그래라…."

 

 서태하는 이것도 상담이라고 도로 멀쩡해진 동생의 얼굴을 보며 맥이 풀렸다. 내 동생이지만 참 웃기는 놈이다. 그 분은 이시끼가 이런 놈인걸 알까. 부디 이 모자란 동생놈을 품어주는 너른 바다와 같은 마음을 가지셨기를…

 

 서태하가 생각에 빠진 사이 눈꼬리가 도로 올라가고 입술도 들어간 서태웅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누나."

 "응."
 "그 선배 남자야."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지?

 

 

 

 *

 서태하는 조금 떨리는 서태웅의 목소리를 캐치했다. 서태하는 덤덤한 얼굴로 찻잔에 입을 대는 동생을 바라보며, 대가리가 깨졌던 밤 제가 듣고 싶었던 말을 했다.

 

 "응.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어."

 "…응."

 "그냥 잘해주고 좋아한다고 말해."

 "알았어."

 

 그래서 나한테 말한 거였구만. 말해줘서 고마워 태웅아

 사실 좀 무서워

 원래 사랑은 무서운 거야 태웅아. 하지만

 응

 너 뭐냐 어떻게든 공 넣는게 니 직업 아니냐?

 그렇지

 너답게 하는거지 뭐

 

 

 

 *

 서태웅 10/10. 태웅의 마지막 자유투가 림을 가르며 들어갔다. 이명헌 9/10. 명헌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공을 주워 태웅에게 넘겼다.

 

 "태웅이 이겼네용."

 "네."

 "질문은?"

 

 태웅이 말 없이 공을 손가락으로 돌리다가 이내 공을 잡았다. 명헌도 공을 쫒던 눈을 들어 태웅과 눈을 맞추었다.

 

 코트에 마찰음도 풀벌레 소리나 바람조차 없는 조용한 순간이었다. 태웅이 입을 열었다.

 

 "시간 될 때"
 "...."

 "물고기 사러 가요."

 "…."

 "같이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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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웅이는 연애는 잘몰라도 사랑을 대하는 태도는 알거같다. 나름 로코!

+ 다음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