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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7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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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꽤 무거워진 터라 빠르게 걷질 못하는 송태섭의 뒤를 이명헌의 비서가 쉽게 따라잡았음. 이것만 위로 올려드리고 가곘다고 덧붙였겠지. 정적이 내려앉은 엘리베이터 속에서, 송태섭도 비서도 더 이상 말이 없었음.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건 불편해하실 것 같으니 현관까지만 넣어드리겠다고, 비서는 그래도 허리까진 올라오는 신발장의 상판에 두 봉지를 올려두고 먼저 가보겠단 인사 후에 사라졌음.

까만 봉투 속 노랗고 예쁜 귤을 가만히 노려보던 송태섭은 홱 몸을 돌려 집안으로 들어왔음. 아직 들여놓지 않은 소파 대신 침대로 가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않고 헤드에 기대 누움. 눈을 감으니 아까 있었던 일들이 꿈처럼 스쳐지나갔겠지.

이명헌을 처음 마주봤을 땐 진짜 꿈이라도 꾸는 줄 알았음. 이 사람이 여기 있을리가 없는데. 지나가다 봤어도 굳이 본인이 무거운 짐을 대신 들어줄 친절함도 딱히. 그러곤 본인도 모르게 기대했겠지. 내가 어떻게 지내는 지 궁금해서 보러 왔나? 이명헌한테 정은 다 뗀 줄 알았는데. 말 뿐인 결혼이라 해도 그 아래 붙은 의미가 대단했던지, 아직 두근거리는 마음에 본인도 당황스러웠음. 그런데 느껴지는 술 냄새에 모든 게 확 가라앉음.

더 이상의 거짓은 진짜 싫은데. 그 속에서 우리 아이 지키겠다고 맹세했는데.
고작 술 몇 병 마셨다고, 이렇게나 쉽게 또 다정하게 다가온다고.
내 마음이, 우리 아이가. 이명헌한텐 그렇게나 가벼운 건가.


비서가 돌아온 뒤, 집에 도착했단 말을 들을 때까지 이명헌은 한 번도 눈 뜨지 않았음. 자켓 안주머니에 들어있는 사진을 떠올리던 중이었음. 아기. 송태섭의 배에. 송태섭과 나의 아기. 친구들은 첫 심장 소리를 들었을 때, 아니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눈물이 났다고 했음. 그에 비하면. 나는?
놀라긴 했지. 송태섭이 임신했다는 사실보다, 임신을 했음에도 나에게 이혼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좋았던가? 좋았다기 보단 짜증이 났더랬지. 의중을 알 수 없는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안 돼서. 송태섭 너는. 아이를 가졌을 때 기뻤니?

집으로 돌아온 이명헌은 불도 켜지 않고 침실로 들어섰음. 어둠 속에서 은은한 달빛만 새어 들어오는 방 안, 자켓 안 주머니에 손을 넣은 이명헌은 슬며시 다시 사진을 꺼내봄. 송태섭과 나의 아이, 송태섭과 나의 아이, 나의 아이, 나의... 아이라고.


그 후로 이명헌은 자켓 안주머니에 꼭 사진을 넣어다녔음. 그럴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지만. 왠지 그러고 싶어서. 딱히 꺼내서 보는 건 아니고, 그냥 들고다니기만 했음. 그 때문인지 뭔지 일과 중엔 일에 집중하다가도 짬 나면 절로 떠오르는 송태섭과 아이 생각에 머리가 지끈 아플 지경이었음. 송태섭을 마주하면 뭐라도 해결될 줄 알았는데, 해결되긴 커녕 더 꼬이기만 한 것 같음. 이전엔 송태섭만 떠올랐다면 이젠 초음파 사진 속 아이까지 같이 떠올라 이명헌의 머릿속을 괴롭히고 있었겠지.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됐음. 이럴 줄 알았으면 친구들과의 만남도 안 나가는 게 좋았겠다 싶음. 적당히 복잡헀던 머리가 모임에 다녀온 후 완전히 새까매진 느낌이었음. 분명 이 정도로 매여있을 사이가 아니었는데. 지금 떠오르는 추억 같은 것도 없고 행복했던 기억도 딱히 없는데. 대체 왜 이렇게까지 깊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나는.

그래서 명헌은 다시 현철을 찾았음.

회사 근처의 술집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기만 하다 조용히 대화를 시작했음. 

그 애가 나를 사랑한댔지.
명헌아.
뭘 보고 그런 생각을 한건데?
...
무슨 얘길 들었나?
느껴지는 게 있잖냐.

넌 그걸 느꼈어? 난 못 느꼈는데. 그건 우리가 끝내주게 연기를 잘 헀다는 증거 아닐까. 명헌은 대답을 삼키고 대신 술잔을 비웠음. 현철에겐 모든 걸 다 이야기해줄까 했음. 객관적으로, 너는 내 상태가 이해가 되냐고. 내가 생각 했을 땐 깊게 감정을 나눈 적도 없고, 떠오르는 행복한 추억 하나 없는데. 내가 이렇게까지 송태섭 생각에 머리아픈 게 이해가 되냐고. 명헌이 입을 떼려던 때, 현철이 먼저 이야길 꺼냈음.

내가 너를 한 두 해 본 것도 아니고. 너 표정 보면 다 안다. 둘이 사랑해서 결혼한 거 아니잖아. 내가 그 정도도 눈치 못 챌 줄 알았냐.

그 말에 명헌의 눈이 놀란 듯 살짝 커졌음. 현철은 명헌의 대답을 기다리는 건 아닌 듯 말을 이어갔음.

어쨌든 잘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거든. 다들 각자의 사정이 있으니까. 근데 제수씨 표정이, 좀 다르더라고. 결혼식 때랑은. 너를 보면서 웃고, 계속해서 너를 살피고, 네 행동 하나에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더라고. 그 정도면 말 다한 거 아니냐. 근데 너는 그런 제수씨 한 번을 안 봐주더라.

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너한테 어떻게 사랑을 강요하냐. 내가 중매쟁이도 아니고. 이건 둘이서 해결할 문제니까. 근데 그때 너 보니까... 내가 말하기 전까진 너 절대 모를 것 같아서.

그래, 이건 나만 알아서 다행이지. 어디 이혼했단 새끼가 그런 재밌단 표정을 짓고 다녀. 잘 됐네. 지금 한 번 물어보자. 너 이혼하니까 이제야 와이프한테 흥미 좀 생긴 거냐? 이제 와 보니까 제수씨가 신경쓰이고 그래? 그래서. 그 날 이후로 뭔가 달라진 건 있고? 그럴 리가 있냐.

명헌아. 그런 좆같은 취미는 아빠 되기 전에 고쳐라. 명헌아. 너 정신차려라.


현철이 앞에 놓인 소주 병을 들어 한 번에 비우곤, 먼저 일어섰음.

더 마시지 말고 집으로 가고. 계산은 니가 해라. 잘 먹었다.


계산을 마친 후 택시에 올라탄 명헌이 눈 위에 팔을 얹은 채 웃었음. 
와, 신현철. 얘가 무슨 소릴 하는 걸까. 그런 좆같은 취미는 고치라고, 아빠 되기 전에. 아빠 되기 전에...
아빠. 이명헌. 산모. 송태섭.


그러고 보니 이 사진은 왜 차에 있었던 걸까. 누가 두고 간 걸까. 왜 보란 듯이 그 곳에다 두고 간 걸까.

이명헌이 택시기사에게 목적지를 다시 댔음. 태섭의 아파트로.


명헌태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