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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2 00:38
느와르AU





폭력이 가해진 방향대로 순순히 땅을 향해 무너지는 자태란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할지 이미 예견한 자의 것이었다. 명헌을 따라 들어오던 대머리에 가까운 풍채 좋은 사내가 헉 소리를 내더니 쓰러진 명헌에게로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손을 뻗었다. 그러나 명헌은 후려맞아 넘어진 자세 그대로 가련하게 바닥을 짚은 채 미동하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 새까맣고 뾰족한 루이비통 구두가 디밀어졌다.



"너 이 새끼. 어디 갔다 와."



아침까지는 무스를 발라 끈적하게 2대8 가르마를 넘겼을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분노에 축축히 젖어 이마 위로 늘어져 있었다. 사십 대 후반에서 오십 가까이 되어 보이는 중년의 남자는 성깔 더럽게 패인 팔자주름 탓인지 성난 불독처럼 험상궂은 인상을 주었다. 명헌은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한 손으로 감싸고 아무 말 없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단정히 차려입었던 투 피스 정장의 엉덩이는 먼지투성이에 톰포드 넥타이는 헝클어진 채였다. 그를 부축하던 풍채 좋은 사내가 덩달아 굽혔던 허리를 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명헌."

"...."

"어디 갔다 왔어."

"...."

"대답 안 해? 죽고 싶어 이 새끼야?"

"...."



명헌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순종인지 반항인지 아리송한 태도였다. 죽여달라는 뜻 같기도 했고 죽여보라는 뜻 같기도 했다. 명헌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남자는 허리에 손을 짚고는 턱짓으로 명헌의 옆에 선 풍채 좋은 사내를 가리켰다.



"신현철이. 니가 말해봐."

"...."

"이 새끼 데리고 어디 갔다 왔어."

"회장님. 그게..."



신현철이라고 불린 사내가 애써 상황을 모면하려는 듯 구변 좋게 입을 열었으나 그 회장이라는 중년의 남자는 그에게 삿대질을 하며 입을 막았다.



"이 껌둥머리 짐승새끼들 정직하게 대답 안할거 내가 다 알지."

"회장님,"

"입 닥쳐! 신현철이, 내 말이 틀린지 안 틀린지 그것만 대답해."

"...."

"도모나 갔어 안 갔어."



현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공간에서 그 질문에 당황한 것은 현철만이 아니었다. 회장의 뒤에 뒷짐을 진 채 잠자코 서 있던 잘생긴 빡빡머리 청년은 명헌이 문을 열고 모습을 보일 때부터 지금까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있다가 그 질문을 듣자마자 안색이 순식간에 붉어졌다가 창백하게 변했다.

오히려 명헌은 덤덤한 얼굴이었다. 명헌의 시선 끝이 회장에게 갔다가, 아주 천천히 그 뒤의 잘 생긴 청년에게 갔다가, 다시 회장에게로 돌아왔다.



"대답해, 신현철. 도모나 갔어 안 갔어!!!"



숫제 사자후였다. 회장의 성대가 저 정도 볼륨을 낸다는 것은 이곳에서 유혈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9할 이상이라는 뜻이었다. 더러운 커튼 뒤에서 망치 든 하빠리들이라도 튀어나올까 싶어 현철은 한 발짝 나서며 명헌을 제 뒤로 숨기려 했다.



"회장님. 일단 이유를 들어보신 후에..."

"갔어."



명헌이 저를 잡으려는 현철의 팔을 밀어내며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 안에 있는 여섯 개의 눈동자가 모두 도르륵 굴러 명헌을 향했다.



"....뭐?"

"갔다고....뿅. 도모나."

".....이,"

"산부인과."

"이 쌍놈의 새끼가."



회장의 손이 또다시 명헌의 뺨을 향해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마른 살과 통통한 살이 짝 짝 붙는 소리와 함께 명헌의 몸이 갈대처럼 휘청이며 다시 쓰러졌다. 명헌은 맹세코 연약하거나 가냘픈 몸이 아니었지만 회장은 일단 한번 손을 올리면 왕년에 프로 링에도 올랐던 권투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곤 했다. 입에서 피맛이 났다. 볼 점막 안쪽에 액체가 고이는 느낌이 드는 걸 보니 실핏줄이 온통 터진 것 같았다. 회장이 화를 가라앉히려는 듯 허공을 보고 크게 후우우, 하고 폐를 쥐어짜더니 간신히 노기를 억누르는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래서. ...했어?"

"...뿅."

"누구 맘대로?"

"...나."

"얼마 주라디."

"내 돈으로 했다뿅. 이딴 일에 손 안 벌려...뿅."

"몇 주 됐다디."

"...."

"몇 주 됐냐고!!"



명헌이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회장이 명헌을 노려보았다. 그 성난 불독 같은 눈에 아주 살기가 등등했다. 회장이 여전히 주저앉아 있는 명헌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똑바로 서서 대답해. 몇 주 됐어."

"....12주."



명헌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울어? 가증스런 놈."

"...."

"우성아."

"예."



회장이 양복 안쪽 주머니를 거칠게 뒤져 말보로 갑을 꺼내더니 한 개피를 입에 물었다. 뒷짐을 지고 있던 잘 생긴 청년이 군인처럼 두 손으로 공손하게 지포라이터를 들고 담뱃불을 붙여 주었다. 살짝 몸을 수그린 명헌은 그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회장은 화를 참느라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읬다.



"신현철이."

"예."

"닌 언제부터 알았어."

"제 잘못입니다."

"니 잘못이라고? 뭐가? 이명헌이 애 가진거?"

"....."

"씨발놈아 니가 임신시켰어? 어디서 그런 시건방진 소리를 하고 있어?"



회장이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그 끝으로 현철을 가리키며 으르렁거렸다. 담뱃불을 붙여주고 다시 두 걸음 뒤로 물러난 잘생긴 청년의 시선이 잠시 현철에게 머물렀다가 이내 명헌을 향했다. 짧은 순간 그 청년과 시선을 마주친 명헌은 다시 회장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현철이 탓하지 마라뿅. 가진 것도 나고 결정한 것도 나다뿅. 현철은 도와준것 뿐이다뿅. 그리고...."



회장이 어디 한번 더 말해보라는 듯이 볼이 움푹 패이게 담배를 빨았다.



"낳으면 영감도 곤란할텐데... 뿅."



회장이 명헌의 면전에 대놓고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매캐한 냄새가 밀폐된 방을 가득 채웠다. 명헌은 연기를 피하지 않고 깊숙히 들이마셨다.



"....명헌아."

"...."

"언제부터 내가 곤란하고 말고를 니가 판단했지?"

"...."

"애 가지면 말하라 했지."



회장이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구둣발로 비벼 껐다.



"....."

"내가 니를 마누라로 삼든 첩으로 삼든 애를 낳든 지우든 키우든 버리든 다 내가 결정한다고 했지. 어딜 허락없이 니 맘대로 몸을 놀려."



주먹이 턱을 가격했다. 입 안 여린 점막의 핏줄들이 완전히 파열된 것 같았다. 한 번 더 강한 충격과 함께 골이 뇌까지 울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명헌은 혀 옆면에 뜨뜻하게 차는 끈적한 액체의 맛과 온도를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회장은 폭력적인 왼손과는 반대로 오른손으로는 부드럽게 명헌의 턱을 만져주었다.



"명헌아. 너는. 니 목숨은. 잊어버렸어?"

"....."

"여기에 있어. 어?"

"....."

"니가 내 새끼 배는 거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떼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야 근데 내 새끼를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내 마음이야 너는 내 허락 없으면 니 맘대로 엄마도 못 돼!!!!"



명헌의 귓가에 회장의 고함소리가 째지도록 울려퍼졌다. 회장은 한번 더 손을 올려붙여 명헌을 세 번째로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그는 바지에 손을 탁탁 털고 흐트러진 양복의 깃을 정리했다.



"우성아."

"예."

"저놈 이틀간 여기 가두고 밥 주지 마. 쓰애끼..."

"....."

"니가 뒷정리 해. 신현철이는 나 따라와."

"...예."



회장이 문을 쾅 닫고 나갔다.









명헌은 움직이지 않고 그냥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우성이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와 그 앞에 조심스레 주저앉았다.



"이명헌."

"....."

"나 봐."

"...."

"이명헌. 나 봐."



우성의 손이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명헌의 뺨을 파고들었다. 눈을 마주쳐 달라는 듯 우성은 고개를 꺾어 명헌의 얼굴을 들여다보려 애썼다. 명헌은 목에 힘을 빼고 커다란 손에 기대듯이 얼굴을 묻었다. 실핏줄이 터질 정도로 맞은 탓에 이미 볼 주변은 울긋불긋한 멍자욱이 올라오고 있었다.



"...미안해."

"우성."

"....."

"회장님이 되게 웃긴 말씀 하시네용."

"......"

"왜 지 새끼를 내 맘대로 하냐니..."






이명헌은 통증을 참으며 힘겹게 코웃음을 쳤다. 눈물이 고인 정우성의 호수 같은 눈동자가 제 코끝 바로 앞에 있었다. 이명헌은 그 청명한 품 안에 눈을 감고 신음하며 몸을 뉘었다.




그야 니 새끼가 아니니까 그렇지.












우성명헌
명헌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