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59461083
view 1806
2023.08.17 20:56
94 대 23. 아무리 지역 예선이라지만 압도적인 격의 차이였다. 코트 위에 각을 맞춘 군대처럼 차렷 자세로 정렬한 선수들은 관객들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들의 머리 위로 우레와 같은 경탄과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산왕공고는 세 번째 예선 경기를 치른 끝에 이번 여름의 인터하이 진출을 확정지었다. 전국의 어느 학교보다도 빠른 결과였다. 지난 겨울, 전국을 제패하고 우승컵을 들어올린 왕좌의 주인에게는 다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기 전 출전 횟수를 줄여 체력을 보호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산왕의 어느 누구도 인터하이 진출 정도의 성적으로 흥분하는 얼굴은 없었다. 후배들을 격려하기 위해 방문한 졸업생들도 기뻐하기보다는 당연한 결과라는 투였다.


경기를 마무리하고 퇴장한 후 차분히 락커를 정리하는 아이들에게 도진우 감독은 아직 버스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 금강고와 매산고의 시합을 마저 보고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별다른 반댓말이 들려오지 않았기에 주장은 감독님의 말씀대로 하겠다고 대답했다.






매표소를 다녀온 주장단이 선수들에게 좌석표를 나눠주는 동안 주변을 서성거리던 우성은 매니저 선배에게 혹시 남은 음료수가 없는지 물었다. 락커에서도 물병을 보지 못해 몹시 목이 마르던 차였다.


인터하이 지역 예선의 막이 오르던 날 화려한 공식 데뷔전을 마친 산왕의 에이스는 새파랗게 어린 1학년이었다. 에이스를 너무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산왕은 첫 경기를 제외하고는 우성을 스타팅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우성은 이번 경기 내내 벤치에 앉아 있다가 후반전이 끝나기 전 딱 10분여간만을 뛰었다. 그 10분간 에이스가 낸 스코어는 94점 중 44점이었다.


아이스박스를 열어본 매니저 선배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남은 거 응원석에서 다 먹었나 본데. 피크닉 터진 거 하나밖에 없다. 우성은 시무룩하게 뒷머리를 북북 긁었다. 아무리 주전에 에이스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1학년이라 아직은, 선배들에게 제 몫을 쉬이 뺏기곤 했다. 그럼, 물이라도, 물도 없어요...? 우성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귀한 에이스가 목말라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매니저 선배가 공금용으로 쓰는 지갑을 열어 동전 몆 개를 주었다. 이걸로 음료수 사 와. B구역 쪽 입구에 자판기 하나 있더라. 우성은 활짝 웃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우성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자판기를 찾아 복도를 걸었다. 시합이 시작되기 전에 음료를 사려면 빨리 가야 했다. 포카리 스웨트를 먹을까, 파워에이드를 먹을까? B구역 입구 쪽에 자판기. B구역 입구. B구역 입구. B구역. B구역. B구역... 저기 있다. A구역과 B구역을 나누는 갈림길이 나오자 우성은 룰루랄라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어.'






우성이 걸음을 멈추었다. 갈림길의 ㄱ자 코너 쪽 기둥에 누군가의 뒷모습이 절반쯤 가린 채로 보였다.

호기심이 동한 우성은 그 누군가가 더 잘 보이는 곳으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흰색 티셔츠를 입었고 그처럼 머리를 바싹 짧게 깎은 것으로 보아 산왕공고 소속이 분명했다.

우성은 몇 초간 그 등을 노려보다가 문득 그가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우성도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이명헌 선배.'






저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어쩐지 안 보이시더라니.

우성은 그가 명헌임을 알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우성을 발견하면 말을 걸 것이다. 금방 시합 시작인데 혼자 여기서 뭐 하고 있냐, 베시. 하는 살짝 쉬고 탁하고 무심한 목소리.


명헌은 우성이 코트에 선 이래 만난 이 중 감히 최고의 게임메이커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전국에서 정우성을 제 포워드로 소화할 만한 가드는 이명헌이 유일했다. 그의 경기력은 이미 평범한 고교 선수 수준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산왕공고의 무패 기록이 명헌의 입학과 함께하고 있음은 그를 싫어하는 동급생들마저 동의할 만큼 분명했다. 그 역시 우성처럼 1학년 때부터 산왕의 주전을 맡았다. 이명헌의 정명한 드리블과 수신호 앞에 내로라하는 챔피언과 루키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다. 그에게는 전국의 가드를 절망에 빠뜨린 난공불락의 벽이라는 수식이 붙었다.

한편으로 그 명성에 어울리게도 명헌은 주변 사람을 그리 편하게 해주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는 상당한 마이페이스였고 종종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곤 했다. 3학년 선배들은 그래도 명헌이 동생이라 나은 듯했지만 1학년들은 그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몰라 허둥거리는 일이 잦았다. 차라리 대놓고 무서운 호랑이 선배였으면 쉬웠을 텐데 명헌은 좀 다른 의미로 무서운 타입이었다. 멍한 듯하면서 동시에 날카로운 눈동자를 하고 턱을 괸 채 베싯거리며 이상한 어미를 쓰는 모습은 숫제 내가 관심 있는 것이 아니면 무엇에게도 관심이 없다는 태도였다. 우성도 명헌에게 직접 말 걸려 본 적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마저도 보통은 시합에 관한 이야기였다.

우성은 바로 명헌의 그 건조함과 무심함을 마음에 들어했다. 감정이 있나 싶은 로봇 같은 무정함. 좋지 않은 의미로 주변에게 너무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살아온 우성으로서는 명헌의 담백한 태도가 오히려 기꺼웠다. 정우성을 보고 호들갑떨지도 않고 질시하지도 않고 그저 다른 동료들과 똑같이 담백하게 대해주는 엉뚱한 선배. 그 담백한 태도로 깨끗한 패스를 던져주는 최고의 가드. 간결한 용어로 명헌은 우성에게 드디어 나타난, 좋아할 만한 동료이자 선배였다.


우성은 머리를 털어 단상을 껐다. 어쨌든 음료를 마시려면 명헌의 앞을 지나가야 했다. 우성은 제 손 안의 동전을 세어 보았다. 캔음료로 뽑으면 한 개 더 사서 나눠먹을 수 있을 듯했다. 우성의 돈도 아니고 공금으로 사 먹는 건데 선배를 마주쳐버린 마당에 안 사 드리면 그것도 실례이지 않나 싶었다.

우성은 명헌에게 말을 걸기 위해 발을 내딛었다.






"...이렇게 오시면 곤란하다고요."



우성은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은은하게 노기를 띤 목소리였다. 명헌이 혼자가 아닌 모양이었다. 놀란 우성은 사각지대를 파악하고 벽에 바짝 붙어 몸을 숨겼다.



"왜?"
"왜라고요?"



뻔뻔하시네요. 명헌의 삑사리 섞인 껄렁하고 높은 목소리를 들으며 우성은 천천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뭐지. 저 선배가 화도 내는구나. 우성은 사실 명헌이 화를 내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명헌은 언제나 무심 달관한 얼굴이었고, 굳이 화를 내지 않고도 상대방을 숙연하게 만드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그가 화라는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워 우성은 대화를 더 듣기 위해 숨을 죽였다.

그나저나 누구랑 얘기하고 있는 거지. 우성은 명헌의 뒷모습밖에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누군가와 마주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명헌은 '농구계에서는' 키가 그리 큰 편이 아니었으므로 그 앞에 선 남자의 이마가 명헌의 머리 위로 보였다.

명헌과 이야기 중인 남자의 목소리는 우성에게도 왠지 익숙했다. 우성은 저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생각해 내기 위해 등에 힘을 주어 벽을 밀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전화로도 얘기했잖아."
"진짜로 오실 줄 몰랐다고요."
"명헌아."
"말씀 하지 마세요."



명헌이 으르렁거렸다. 그 남자가 손을 뻗어 명헌의 귀를 살짝 만졌다. 명헌이 팔을 들어 남자의 손을 쳐냈다.

남자의 이마를 열심히 쳐다보던 우성은 갑자기 그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우성이 산왕공고에 입학하기 전 에이스 노릇을 했다는 졸업생이었다. 오늘 예선경기를 치르기 전 락커에 들러 잠깐 격려를 해 주고 간 얼굴들 중에 그가 섞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침 우성이 수신호를 점검하러 명헌을 찾았을 때 명헌은 락커에 있지 않았었다.


남자가 부드럽게 타이르듯 입을 열었다.



"나도 알아 너 화난 거."
"...다 끝난 얘기라고 생각했는데요."
"형도 진심이었던 거 알잖아. 같이 있을 때."
"전 모르니까요. 이렇게 찾아오지 마세요. 경기에 방해됩니다."
"경기하다 나 보면 방해되니?"



남자가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명헌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고개가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



"형이 먼저 형동생으로 지내자고 안 했어?"



명헌이 작게 물었다.



"전 그냥 선배가 하신 말씀에 동의했을 뿐인데요."
"명헌아."
"좋은 대학 가셨잖아요. 애인 사귀세요."
"형 마음 모르겠어?"
"네."
"명헌아."
"네."
"진짜 형 마음 모르겠어?"



명헌이 입을 다물었다. 남자가 명헌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그 음성에 흐뭇감과 만족감이 숨길 수 없이 드러났다. 명헌은 살짝 앙탈을 부리듯 - 우성은 도저히 제 눈을 믿을 수 없었다 - 고개를 약간 흔들더니 손을 빼지 않고 잠자코 잡혀주었다.



"나도 너 좋아해. 말했잖아."
"....말로만?"



들킬까 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우성이 헉 소리를 내며 눈을 크게 치켜떴다. 명헌이 남자와 입을 맞추고 있었다. 남자가 명헌의 양 팔을 제 손으로 붙잡은 것이 보였다. 열렬하고 뜨거운 키스였다. 우성은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팔을 잡고 있던 남자의 손이 슬며시 명헌의 등짝 위로 올라오며 몸을 안았다. 그 이명헌이 반항을 하지 않고 강제적인 성적 접촉을 수용하고 있었다. 이 새끼는 워낙 덤덤충이라 여자 알몸 봐도 안 꼴려할 거라고 낄낄거리던 동급생들의 농담에도 피식 웃고 말던 이명헌이 남자에게 안겨 입술이 삼켜지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본인도 조금 느끼는 것 같은 각도....



"...명헌아."
"...형."
"이번 인터하이 끝나면 정식으로 사귈까."



명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우성은 속이 뒤틀리는 기분을 느꼈다. 이 울렁임의 이유가 짧은 시간에 도저히 머리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많은 정보를 받아들였기 때문인지, 남자와 남자가 키스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인지, 그 남자가 우성이 좋게 생각하던 선배여서인지, 아니면,

자꾸 머릿속에, 등을 돌리고 있는 명헌의 표정이 상상되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요."



남자를 밀쳐 떨어내며 명헌이 둔탁한 거절음을 뱉었다. 잠시의 침묵 후에 따라온 음성에는 노기와 슬픔이 섞인 물기가 배어 있었다.



"저 갖고 놀지 마시죠."











우성은 그 자리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무슨 못할 짓을 하는 현장을 발각한 사람마냥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우성은 침을 꿀꺽 삼키며 박동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이미 갈증은 저 멀리 달아난 뒤였다.



저 선배...

키스.... 할줄 아는구나.









우성명헌
모브명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