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D.png
 


 

"헤이 송! 그러니까 저 큐티파이가 네 '선배'라고?"

".... 하."

 

송태섭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단 10분. 정말 딱 10분- 아니, 10분도 아냐. 한 8분 정도였나?-이었다. 지하에서 광란의 디제잉 파티를 열고 있는 제이슨의 헬프콜로 고장난 미러볼을 손보러 가느라 자리를 비운 게. 제가 수리공이 되고 온 그 짧은 시간 동안 정대만은 그새 꽐라가 되어있었다. 대체 저 형은 농구 빼면 잘 하는 게 뭐야. 하다 하다 무슨 몸이 알콜 분해도 못해?

 

 

"형. 정대만, 정신 차려요."

"어??? 태스바- 우리 태서비...!"

왜 여기있지~???? 우리 태섭이는 지금.. 어... 미국에서 유학 중인데???

 

"네네. 여기가 그 미국이니까 제가 여기 있죠."

물 마셔요 물. 어서.

 

"아하하! 우리 태섭이 세 명이다~ 와 나 너무 행복해. 어떻게 송태섭이 세 명이나 되지? 대박이다!"

나 착하게 살아서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로 주고 갔나봐... 어... 근데 아직 여름인데? 히히.

 

"송, 얘 너무 귀엽다. 근데 지금 뭐라는 거야?"

"어떤 새끼가 술 먹였는지 이름 대라는데요."

"하하. 거짓말~"

"진짠데. 빨리 불어요. 이 사람 어쩌다 이렇게 취하게 된 건지."

"우리 학교가 워낙- 아! 여기서 나고 자란 아시안계 시민권자들 말고- '진짜' 그 문화권에서 넘어온 본토 아시안은 드물잖아. 난 그래서 한국인은 다 너처럼 건방지고 섹시한 줄 알았다?"

근데 얜 색다르네. 얘는 되게 청순하고 귀여워!

 

 

그래, 그래. 청순하고 귀여운 그 사람 내 꺼니까 이만 손 좀 떼줄래 클레어. 

 

태섭은 제 물음에는 대답 않고 정대만의 얼굴만 떡처럼 주무르는 중인 금발머리 학생의 손을 은근슬쩍 치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꼴을 보아하니 쟤도 정대만이랑 똑같이 알콜에 절여져서는 반 쯤 맛이 간 상태인 게 분명하다.

 

 

하.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밝힐 걸 그랬나.

 

​​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을 야기한 것은 순수 100% 정대만의 의지다. 태섭이 몸 담고 있는 커뮤니티 칼리지로 교환학생을 오겠다고 결정한 것도, 그 결정을 통보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실제로 공항 입국장에 모습을 보인 것도, 캠퍼스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학생들의 손에 이끌려 웬 이름도 모르는 놈팽이가 주최하는 하우스파티에 끌려오게 된 것도. 아무튼간에 이것도 저것도 전부 다. 죄다 정대만의 뜻이고 정대만의 실행력이 일궈낸 결과다. 

 

영어도 잘 못하는 양반이...

 

대만이 이곳에 도착한지 채 12시간도 되지 않은 지금 이 시점에서 태섭은 미남의 웃음이 가진 힘을 십분 체감하는 중이었다. 딱 봐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미청년이 방긋방긋 웃으며 캠퍼스를 휘젓고 돌아다니고 있으니 그야말로 온 사방에서 도와주고 싶어 안달이었기에. 근데 그렇다 해서 도착한 첫 날에 파티 초대를 받을 정도라니, 헛웃음이 날 지경이다.

 

아직 짐도 못 풀었는데 같이 놀자는 추파나 한아름 받고 있는 정대만을 가만 내버려둘 수 없었던 송태섭은, 얼굴만 대강 비추고 금방 빠져나오게 하리라는 목적으로 대만과 동행하였고 지금에 이른다. 

"헤이! 송도 왔으니까 다음 판은 진짜 제대로 가볼까? 2 on 2로다가!"

"아니 난 패스. 저 인간 데리고 기숙사로 돌아갈꺼야."

 

잔뜩 취해서 몸도 잘 못 가누는 사람을 데리고 비어퐁은 무슨 비어퐁이야. 

"에헤이- 그러는 게 어딨어? 파티가 이제 막 시작했는데!"

"하... 그럼 대신 한 판만 하고 빨리 끝내. 나랑 선배랑 같은 팀 할꺼니까 게일이랑 노아가-" 

"노노노노! 절대 안돼 송. 아까 저 큐티파이가 공 넣는 거 봤는데, 던지는 족족 쏙쏙 들어가던걸? 네 농구부 선배라더니 공으로 하는 건 다 잘하나봐. 그런데 너랑 한 팀으로 붙여놓으라고? 안될 일이지."

"그래 태섭! 그건 반칙이야! 둘은 팀 메이트였다며? 합이 좋을 거 아냐. 무조건 찢어져야지!"

하... 진짜 가지가지들 하네.

 

 

하여간 좆도 도움 안 되는 녀석들의 결사반대로 인해 태섭과 대만은 각기 다른 팀으로 찢어져 플레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턴 돌아올 때마다 무조건 미스 없이 죄다 골인시켜서 빨리 게임을 끝내는 게... 아니 잠깐. 내가 공을 넣으면 정대만이 맥주를 마시게 되는 거잖아?!

 

 

"형! 그냥 내가 마실 테니까 이 쪽으로 던져요!"

"어..? 어?? 태서바, 나 근데 앞이 어지러워서 ... 어라 왜 내 손에 공이 세 개지?"

이제 보니 손도 세개네! 와 태섭아, 나 이제 슛 더 잘 던질 수 있겠다. 손이 세 개가 됐어...!

틀렸다. 글러먹었어. 저렇게 만취한 상태로는 정대만네 팀이 이기는 루트로 가기 어려워지는데,

 

"뭐야, 둘이 한국어로 작전 타임 가지는 거야? 하하. 아이고 미스냈네! 이제 내 차롄가?"

Attaboy─!

태섭이 어떻게 해야 저 눈 풀린 취객 팀이 승리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는 사이, 태섭과 같은 팀인 노아는 야속하게도 쏠랑 공을 던져버렸다. 가볍게 날아간 그 공이 정대만의 앞에 놓인 컵 안으로 홀인 해버린 건 덤이고.

​​

"노아 오늘 컨디션 좋은데? 지목해. 누가 마실까? 나야, 아니면 이 큐티파이야?"

"당연히 이쁜이가 마셔야지! 아 맞다, 송. 참고로 컵 안에 든 거, 맥주 아니야."

"뭐?? 그럼 뭔데?!"

"어... 제니스가 가져온 위스키랑... 레드불 섞은 거?"

메리제인(*마리화나)도 좀 들어갔을지도? ㅎㅎ

 

이 시발 이래서였구나. 어쩐지 정대만이 아무리 술에 약해도 고작 맥주 몇 잔으로 훅 갈만큼 나약하진 않은데 개새끼들이 이것저것 섞어 놔서...!

저딴 폭탄 발언을 던지면서 뭐가 그리 재밌다고 빙글빙글 웃는 건지, 그 뻔질거리는 면상에 주먹을 한 대 꽂아주고 싶었던 태섭이었으나 얄궂게도 그의 몸은 하나이기에 주먹질보다 더 중요한 사항에 우선 신경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겁도 없이 약물이 든 폭탄주를 손에 움켜쥔 정대만을 저지하는 것.

 

"형! 그거 마시지 말아요! 어서 내려놔!"

"음..? 이거?? 마시지 마???"

"헤이 큐티. 내가 대신 마셔줄까? 여기- 볼에 뽀뽀 한 번만 해주면 되는데~"

"게일, 너 미쳤어? 지금 뭐라고-"

 

쪽 ─ 

미친 건 정대만 쪽이었나.

벌겋게 열 오른 게일의 볼을 감싼 대만이 그대로 제 입술을 갖다 붙이는 걸 96인치 가량 떨어진 곳에서 목격한 태섭은, 저도 모르게 손에 쥐고 있던 탁구공을 와그작 으스러뜨렸다.

 

* * *

장학금으로 겨우 겨우 다니는 주제에 이미 주어진 핸디캡─유색인종, 비시민권자, 비영어권 출신 아무튼 기타 등등─에다 성적 지향까지 추가하기엔 큰 부담이어서, 남들 앞에서의 관계 오픈을 주저했던 나 대신 그냥 고교 시절 팀메이트 사이일 뿐이라고 먼저 선을 그은 것은 정대만이었다. 날 배려한거겠지. 고작 6개월 뒤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교환 학생 신분인 자신과는 다르게, 나는 이곳에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쨌거나 2년은 버텨야 하니까. 아니, 사실은 1년 안에 쇼부 보고 NCAA에 진출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니까.

 

그래. 그러니 분명 배려는 배려야 그런데.... 시발.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임자 없는 사람인 양 굴 필요는 없잖아요 형. 감히 내가 보는 앞에서 다른 새끼에게 입을 맞춰?

 

 

 

​"자자자 그 다음! 다음 질문!! 누구 차례지?"

"나야! 어디보자. Never have I ever... said the wrong name in bed."

"말도 안돼! 누구나 다 저런 경험은 있지 않아?"

"너만 그래, 사이먼. 너만. 빨리 마셔."

 

 

"태서바, 저건 무슨 게임이야? 나도 할래! 나도!"

"손병호 같은 건데요. 그나저나 형, 제발 그만..."

이제 좀 집에 가자고요...!

"어딜 도망가 송. 네가 공을 작살내버린 덕분에 비어퐁도 중지됐는데 저거라도 같이 해야지?"

"오! 송이랑 이쁜이도 끼게? 이거 룰 엄청 간단해! 자기 차례가 오면 나는 안해봤지만 왠지 남들은 해봤을 법한 문장을 외쳐. 그러면 그게 무엇이든지간에 유경험자면 마셔야 돼. 알겠지?"

"아까 클레어까지 했으니까 다음은 사이먼 차례야!"

태섭이 채 말릴 틈도 없이 어느 새 정대만은 누군가에게 어깨동무가 걸쳐진 채 자리에 착석한 상태였다. 송태섭은 다시 한 번 속으로 참을 인자를 새겼다. 오늘 하루 동안 곱씹은 그 글자가 족히 수 백개는 되리라.

이따 집 가면 죽었어 정대만. 앞으로 다시는, 정말 다시는 이런 류의 파티에 발도 못디디게 할꺼니까. 영어도, 주량도 서투른 게 쓸 데 없이 넉살만 좋아가지고는 온갖 사람들 손이란 손은 다 타고 있잖아 지금...!

 

"'나는 넣거나 넣어진 채로 잠든 적이 없다.' 자! 경험 있으면 마시는거야."

"와 사이먼, 네가 그런 적이 없다고? 너 지금 내숭떠는 거지?"

"아 진짜라고! 아직 한 번도 넣은 상태로 쭉 잠든 경험은 없는,"

꼴깍─ 꼴깍─

질문의 수준이 수준인지라 아무도 손 대지 않던 맥주가 정대만의 목을 타고 내려간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모두가 할 말을 잃은 사이, 그 정적 속에서 액체를 넘기기 위해 울렁이는 그의 울대뼈만이 선명했다. 태섭의 얼굴이 삽시간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정대만!!!!"

"아이고 이쁜아ㅋㅋㅋ 경험 없으면 안 마셔도 돼. 룰을 잘못 이해했구나?"

"어... 아닌데. 있어서 마신건데."

 

이 형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제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건지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멍하게 앉아있는 대만의 손에서 빈 잔을 빼앗은 태섭이, 대만의 입가를 추스르며 그를 잔뜩 흘겨보았다. 온 힘을 다해 눈으로 욕하는 태섭의 시그널이 대만에게 닿지는 못했지만. 안타깝게도.

 

"워후~ 정! 정말 그런 경험 있어? 그렇게 안생겨서는 야하네? 핫한 애인을 만났나봐?! ㅋㅋㅋ"

"아 그런데 두고 여기 와서 어떡해. 정 기다리겠다."

그나저나 정이 넣고 잔 사람이야, 아니면 넣어진 채 자야했던 사람인거야? 응? 둘 중 어느 쪽?

"... 선배. 진짜 돌았어요? 대체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래?"

이쯤되면 어그로도 수준급이다 진짜. 고작 술 한 잔 마시는 걸로 이정도 수위의 희롱판을 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걸 해내네 이 사람이.

"아니 있으니까 있다고 하지! 그렇게 따지면 태섭이 너도 내 안에.. 헉!"

아 맞다! 다른 건 몰라도 절대 태섭이랑 연인 사이인 것처럼 보이는 것만은 안 되는데...!

 

 

술에 취해 잔뜩 흐려진 정신머리였으나 그런 오늘의 정대만에게 지켜야 하는 단 한가지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송태섭과 자신의 관계를 들키지 않는 것이었다. 안 그렇게 생겨서는 은근히 남들 시선에 예민한 제 연하남친께서 혹시라도 커밍아웃이 됐다가는 분명 스트레스 받아할 테니까.

그러나 뒤늦게 뇌에 힘을 주려던 대만의 노력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 괜히 주변을 의식했더니 머리만 아프게 되어버린 그가 어지러움에 제 오른편에 있던 태섭에게 기대려던 고개를 최후의 이성으로 참아낸 것 까지는 뭐 그래. 괜찮았다. 다만 문제는... 그 인내의 반동으로 인해 대만의 고개가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기울어버렸다는 것이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하필 정대만의 왼쪽에 앉은 사람이 사이먼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입학 초부터 성별 가리지 않고 문란하게 연애하는 것으로는 이미 캠퍼스 내의 유명인사였다.

 

툭- 

저항 없이 살풋 제게 기대오는 작은 머리통의 무게감을 기껍게 받아들인 사이먼은 이미 감긴 대만의 눈 앞에 휘휘 손을 저으며 넌지시 제안했다.

"얘 좀 봐라? 하하. 귀엽네. 헤이, 버니! 졸려? 위층 올라가서 같이 눈 좀 붙일래?"

​"그만. 거기까지만 해라."

일어나, 정대만. 부축해 줄테니 이 쪽으로 기대요.

그리고 이대로 상황을 더 방치했다가는 저 새끼를 반쯤 패 죽여 출전 제한이라도 걸릴 것만 같았던 태섭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사이먼을 노려보며 늘어진 대만의 몸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됐다. 그냥 하지 뭐. 커밍아웃. 정대만이 내 애인인데 좆같은 미국 사회가 거기에 뭐 보태준 거라도 있나?

"분위기 개판쳐서 미안하긴 한데, 다시 한 번 소개하고 우린 이만 자리 뜰게. 이 사람, 단순히 고교 시절 팀메이트 그런 거 아니야. 내 애인이야."

나랑 같이 있겠다고 교환 프로그램까지 신청해서 여기 온 사람이야. 그러니 함부로 손 대지 마. 

 

 

거의 기절에 가깝게 잠이 든 대만의 몸을 가누어 안은 태섭의 입에서 나온 선포는, 짓씹듯 공간에 울려 퍼졌다. 열 시간이 넘는 비행에 랜딩하자마자 음주라니. 여태 잠들지 않고 버틴 것만으로도 기적이다. 이는 정대만 나름대로 송태섭의 '새 사람들'과 '새로운 영역'에 좋은 첫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한 결과였겠지. 비록 그 노력의 방향이 결론적으로는 태섭이 원하는 형태가 아니게 되었을지라도.

 

으으─..

형, 조금만. 조금만 더. 그래, 나한테 업혀요. 옳지.

저보다 훨씬 키 큰 성인 남성의 축 늘어진 몸을 익숙하다는 듯 잘도 들쳐메고 자리를 뜨려는 태섭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사이먼은 웃음 섞인 말투로 그들을 배웅했다. 아. 제 것을 지키겠답시고 한껏 날서고 예민해진 코요테라니. 엄-청 귀엽잖아. 네가 이러니까 일부러 더 괴롭히고 싶었던 거야.

"이미 너랑 걔랑 현관문 열고 같이 들어온 순간부터 다들 알고 있었어. 그렇게 서로를 죽고 못살겠다는 눈으로 진득하게 쳐다보는데, 둘이 연인 사이라는 걸 어떻게 몰라보겠어? 우린 장님이 아니야 송."

 








-
시점은 태섭이 쌀국 간지 반년 정도 지났을 때 정도라 아직 섹다마로 벌크업 하기는 전이었으면 좋겠다 ㅎㅎㅎ... 그리고 태섭이네 학교가 아무래도 커뮤니티 칼리지다 보니까 정대만네 4년제 국내 대학에서 거기로 1:1 교환 가는 프로그램은 없어가지구... SAF 같은 걸로 본인 쌩 돈 써가면서 태섭이 보러 간거면 더 좋을 것 같음




슬램덩크
태섭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