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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6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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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왕의 군림 이래 단 한번도 몰려본적 없는 핀치에 몰려 사투를 벌이다 끝내 패배를 맛보고 만 이명헌
팀원들 모두 빈틈없이 제역할을 해줬고 끝까지 믿었던 에이스도 제 기대에 응답했는데 받아든 결과가 32강 탈락이라는걸 인정해야만 하는 이명헌
감독님은 '다시 기어올라가자' 고 했지만 그건 '산왕이' 다시 기어올라가는 것이지 '내가' 다시 기어올라갈 수는 없을 것임을 알고 있는 이명헌
다음 세대에게 윈터컵을 물려줘야 하는 이상 이 패배가 산왕에서의 마지막 커리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 이명헌

하지만 충격받고 오열하는 부원들 앞에서 함께 울 수도 약해질 수도 없는 주장 이명헌
이런 일은 살다 보면 있을 수도 있다는 듯 인생 다 산 사람처럼 초연하게 제가 거느린 아이들의 어깨를 두드려줘야 하는 십대 소년 이명헌...


이명헌은 부원들 앞에서는 물론이고 선생님들 앞에서도 울 수 없었겠지
당장 본인의 목이 위험해져버린 도진우에게 기댈 수 없는 건 물론이고
아이구 명헌아 그래 어쩔수 없지 그나저나 너 대학은 어떻게 되는 거니, 하고 애잔하다는 듯 은근히 궁금해하는 교사들에게 속내를 보여주기도 싫음

졸업한 산왕의 선배들에게 연락을 해 볼까 선배님들이라면 지금 이 심정을 가장 잘 이해해주시지 않을까
하지만 산왕 자부심이 얼마나 강했던 선배들인데, 너희들이 잘해줘서 우리들이 대학에서도 기 펴고 다닌다고 좋아하는 선배들인데 이명헌이 패배했다는 소식에 화나 계시진 않을까 괜히 혼나고 기분 나쁜 말만 듣는거 아닐까 자꾸만 대범해지지 못하는 이명헌
그리고 선배들은 비디오로 경기 다 보셨을텐데 결론은 내 인텐셔널 파울이 문제였던 거라고 다 그렇게 말씀하실텐데
아무도 편하게 말할 사람이 없다



그래서 이명헌이 자기 속내 가감없이 드러내고 표현하고 눈물까지 보일 수 있는 사람이 같은 부원들도 아니고 존경하는 선배들도 아니고 든든한 어른들도 아니고
이명헌과 가장 비슷한 처지의 다른 운동부 3학년 주장인거 ㄹㅇ 존나 개꼴리네

야구부든 배구부든 축구부든 다른 운동부 주장
전국대회를 목표로 한다는게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는 같은 학년 친구들
산왕 농구부 명성은 산왕공업 학생이라면 모르는게 간첩이라 이번 패배 소식 듣고 단박에 명헌이부터 걱정하는 운동부 주장들.... 같은 주장이라 이명헌이 지금 누구에게도 의지할 곳 없는거 누구보다도 잘 알거같음 심지어 같은 부원들보다도ㅠㅠ 야 씨 저거 어떡하냐, 아... 우리가 좀 가봐야 되는거 아니냐? 하 나 진짜 세상에 뭔... 32강 탈락이라니 쟤 어떡하냐고 이번에 처음 진거 아니냐고 근데 쟤 이게 주장 돼서 처음이잖아... 주장 돼서 처음 한 경기가 진거잖아 아 씨발.... 북산이란 데는 도대체 뭐하는 학교, 아니 그런 말은 해봤자 필요없고 야 그냥 애 불러 저거 혼자두지마 지네 부원들이랑 있게 하지마


그래서 저녁에 기숙사 밖으로 이명헌 불러낸 주장들이 가로등 어두컴컴한 운동장 구석 한켠에 모여서 다같이 미리 얼려온 파워에이드 마시는거지 주장들끼리

야 명헌아 괜찬해 그럴수도있지
그래 얼른 잊고 털어버려
원래 운동경기가 그런 이변도 있는거 알잖아 우리 다
아후.... 씨발 내가 속상하다 우리 부 쪽팔릴정도로 얘네 연습 좆빠지게 했는데...
그니까.... 진짜 공은 둥글다. 공은 둥글어.
이거 졌다고 니 실력 어디 가는것도 아니고 대학에서도 별 말 없다매
윈터컵 그냥 니가 해 이 마당에 니가 한다고 욕할 사람 아무도 없을거다


묵묵히 그런 말 들으면서 고개 떨구고 파워에이드 찔끔찔끔 마시던 이명헌
입술 파르르 떨리더니 눈 깜빡이다가 손등으로 눈 한번 훔침


야 울지마
울지마 시발 야 울지마
명헌아 왜 울어 야 휴지좀 줘봐



참으려고 꾹꾹 눌러도 이미 터진 걸 막을수없어서 끝내 손등으로 눈 가린 채 흐으윽....... 하고 울음 새어 나오는 이명헌

주장들 애 둘러싸고 모여서 더 말도 못하고 흐느끼며 들썩이는 어깨만 토닥이고 안아주고 아휴... 에휴.... 하고 한숨 쉬는거





그 모습을 매점에서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서 물고 오던 산왕 농구부가 목격하는거임
체격 건장한 남자애들이 누구 하나 둘러싸고 있는게 보이길래 학교폭력인가 싶어 정색하고 다가가는데
자세히 보니까 울고 있는 이명헌이랑 한숨 푹푹 쉬고 서있는 다른 운동부 주장들인거임
저 고개 숙인 사람이 우리 앞에서는 담담하고 태연했던 이명헌임을 알아보는 순간 서로 뭐라 할 말을 잊어버리는 산왕 농구부....

정성구 못보겠다는듯이 그냥 바로 다시 고개 돌려서 걸어가버리고 김낙수 얼굴 찡그리고 주머니에 손 넣고 "씨발..." 중얼거리다가 성구 뒤 따라가고
최동오 표정 무섭게 싸늘해져서 먹고 있던 아이스크림 그대로 벤치 옆 쓰레기통에 버리고 뒤돌아감

정우성 한참동안 거기서 눈 못떼는데 다른 쪽 보면서 기다려주던 신현철이 "...그만 마주치기 전에 가자." 하고 애 어깨 잡아끄는거
근데 정우성 어깨 돌려서 현철이 손 확 떼내버리고 몇초간 더 그 모습 보다가 차가운 얼굴로 발길 돌림

형은 왜 내가 우는건 그렇게 잘 위로하고 잘 토닥여줬으면서 내 앞에서는 저렇게 안 해
저 형들은 형하고 같은 주장이라 형 마음을 이해하나보지? 그래서 형이 저 형들한텐 약한 모습 보일 수 있고 기댈 수도 있는데 나는 형의 에이스인 주제에 형을 이기게 해주지도 못했으니 내 얼굴 보고 울긴 괴로운가봐 나한텐 그런 얘기 하기도 싫다는 거지
저 형들이 닦아주는게 좋다 이거지
내가 형 눈물 닦아주는건 싫다 이거지






그런 생각 하면서 분해하는 정우성... 같은 우성명헌 명헌텀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