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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6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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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압함 근데 딱히 위에서 진전은 없고 길이만 늘었다
호열대만 백호태웅인데 약호열백호도 있음




백호랑 호열이네 부족은 언제나 눈이 내리는 산등성이에 위치해 있음 언제나 눈보라가 몰아치고 뼈가 시리게 춥지만 산짐승을 사냥하며 배를 채우고 불을 지펴 몸을 녹이니 생존에는 문제가 없었겠지


중요한건 이들이 완전히 고립된 삶을 살았다는거였음 친족끼리 자식을 낳아 대가 이어지고 이게 고이고 고이길 반복하니 어느샌가 팔다리가 뭉게지거나 혼자선 숨도 제대로 못쉬는 아이들이 태어나기 시작했음


그렇게 자식 둘을 떠나보낸 여인이 어느날 산을 넘어가려던 나그네를 붙잡아 건강한 아이를 낳은 이후로 약탈혼은 부족의 전통이 됨 마을의 청년들은 성인식을 치르면 무리를 지어 산을 내려가 자신의 신붓감을 데려오는 거임



솔직히 말하자면 호열은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았음 정확히는 생판 남과 살을 맞붙히고 살기 싫은거였음 호열은 백호에게 감정이 있었음 동료와 우정, 가족이 섞여 꽤 복잡했지만 정 줄 곳이 없던 호열에겐 잃고 싶지 않은 것이었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짝사랑 상대는 성인식만 치루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을 데려올 거라며 떠들어댔고 호열은 그러면 좋겠네 하고 웃으며 맞장구를 쳐주었음 하지만 속은 시커멓게 썩어갔지



성인식날 청년들은 자신이 처음으로 사냥한 짐승의 털가죽을 뒤집어썼음 지금까지 무탈히 살아온 것을 축복하고 앞으로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함이었음 호열은 갈색 사슴가죽, 백호는 붉은 여우의 가죽을 쓴채 서로의 모습을 보며 웃었음


식이 끝나고 붉은 염료로 얼굴을 칠한 사내들은 백호와 호열을 선두로 산을 내려갔음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건 혼례를 치루는 신부가 탄 가마였음 가마 주위로는 젊은 남성들이 호위하고 있었고 여인들은 가마 안의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듯 천을 들추었지


호열의 신호에 무리는 둘로 갈라져 재빠르게 그들을 애워쌌음 잠시 당황했던 그들도 이내 칼을 뽑아들었지만 무장을 한 건장한 그들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음 게다가 오랜 여정으로 지쳐있었기에 더욱 불리한 싸움이었음


능숙하게 칼을 휘둘러 상대를 쓰러뜨리는 호열과 달리 백호는 가마의 천을 올린 채 가만히 서있었음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하니 보기만 하다가 이내 안으로 훅 손을 뻗었지


그러다 가마를 탄 상대에게 얼굴을 얻어 맞았는지 나가떨어지다 씩씩대며 달려들고 그걸 여러차례 반복하더니 백호는 지친 상대를 끄집어 내 어깨에 짊어졌음 붉은 혼례복 아래로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흘긋 보이는게 퍽 미인 같았음


모두가 각자의 짝을 고르고 혼자 숨을 고르는 호열의 눈에 들어온 것은 턱에 흉터가 난 남자였음 마지막까지 호열에게 맞선 사람. 그리 예쁘지도 않고 머리에선 피까지 흘렀지 피로 얼룩진 남자의 턱을 붙잡고 이리저리 돌려보던 호열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음


나 같은 사람에게 걸리다니 당신도 운이 없네.


호열은 망설임 없이 칼등으로 남자를 내리쳐 정신을 잃게 했음 모두가 기대감에 들뜬 채 이런 저런 얘기를 할 때 호열은 가만히 뒤에서 들려오는 사내의 낮은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지


결혼식은 최악이었음 그들이 데려온 신부들의 울음소리는 북을 두들기는 소리와 술에 취한 주민들의 목소리에 묻혀버리고 어느 정도 술을 마신 청년들은 신부로 데려온 이들을 붙잡고 첫날 밤을 위해 세워둔 천막으로 끌고 들어갔음


거기서 유일하게 울지 않은 것은 백호와 호열이 데려온 둘이었음 검은 머리의 남자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반대편에 앉은 백호를 응시했고 갈색 머리의 남자는 울음을 참으려는듯 손에 힘을 준 채 바닥만 응시하고 있었음


술에 취한건지 부끄러운건지 얼굴이 새빨개진 백호가 남자의 손을 잡고 천막에 들어서자 그 자리에는 호열과 그의 신부만이 남게 되었음 신부는 모두의 구경거리가 된 상황이 수치스러운지 얼굴을 붉어져 있었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장신구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음


호열은 손에 얼굴을 기댄 채 그의 얼굴만 쳐다 보다 신부의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가득히 따랐음 그리고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들어 마시자 남자는 한참을 망설이다 두 손으로 잔을 들어 마시기 시작했음 독한 술은 처음인지 얼굴을 찡그렸지


처음엔 신부의 반응에 웃던 사람들도 한 잔 두 잔 호열이 쉴 틈 없이 술을 따르자 그를 말렸음 물론 반쯤 장난이긴 했지만 호열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땐 신부는 이미 술에 취해 몸조차 가누기 힘든듯 휘청이고 있었음 그는 신부의 손목을 잡고는 불이 켜진 천막으로 향했음


여러 겹의 천과 무거운 장신구가 걸쳐진 혼례복이 불편한지 신부는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비틀대며 위태롭기 그지 없었음 그가 허리를 감싸 지탱하지 않으면 그대로 넘어질게 분명했지 신부를 침대 위로 넘어뜨리니 장신구 부딪히는 소리가 그릇이 깨지는 것 같아 호열도 웃어버렸음


뒤집어진 천을 겉어올리니 남자는 물기에 젖은 눈으로 호열을 올려다 보고 있었음 살짝 초록빛이 도는 눈동자에 검은 자신이 담기는게. 별로 마시지도 않았는데 취기가 도는 것 같아 호열은 그의 몸을 더듬으며 옷고름 위로 손을 올렸음 그러다 신부와 눈이 마주치고 말했지


이름이 어떻게 돼요?

-...

아 우리 말을 못 알아들으려나?


잠시 고민하던 호열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양호열'이라 말했음 그리고 상대를 가리키자 그는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정대만이라 답했음


대만, 정대만? 몇 번이고 입안에서 이름을 굴려본 호열은 자신의 아래에 깔린 채 벌벌 떨기만 하는 신부를 내려다 보았음 '양-호-열' 한 자 한 자를 늘리며 말하자 이내 그도 떠듬떠듬 그의 이름을 따라 말했지


어차피 남들이 보는 한 죽을 때까지 붙어 살아야 하는데. 저주할 신랑 이름 정도는 알아야죠. 그렇지 않아요?


내용과 상반되게 밝은 얼굴로 호열이 그의 동의를 구했으나 신부는 별다른 말이 없었음 애초에 무슨 반응을 얻으려 한 질문도 아니었기에 호열은 손을 뻗어 빛을 내던 불을 꺼뜨렸음


매듭을 얼마나 묶었는지 호열은 끝에 가선 거의 뜯어내듯 거칠게 옷깃을 젖혔음 그리 곱게 자란 사람은 아닌지 매끈한 살 사이로 옅은 흉터들이 자리 잡았지 아랫배와 허리 사이에 난 긴 선을 어루만지며 호열은 어떻게 해야 이 남자를 최대한 아프게 할 수 있는지 생각했음


별다른 악의가 있는건 아니고 그냥 이 상황이 싫었거든 백호가 바로 근처의 천막에서 혼인한 상대와 몸을 섞고 있다는 것도 자신에게도 원하지도 않던 신부가 생겨서 이젠 이 사람을 위해 매번 사냥을 나가야 한다는 것도


호열은 이를 내어 신부의 목덜미를 물었음 드득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이가 피부를 뚫고 들어갔고 대만은 비명을 지르며 그를 떨어뜨리기 위해 발버둥쳤음 겨우 호열을 떨쳐냈을 땐 이미 그의 입술은 피로 얼룩지고 목에선 조금씩 피가 솓아오르고 있었음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호열은 피를 닦지도 않은 채 몸을 낮추어 그에게 입을 맞추었음 턱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어 억지로 입을 벌리고 입안으로 밀려오는 비릿한 맛에 헛구역질을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삼키지 못한 침이 입술 사이로 흐를 때까지 호열은 그가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게 했음


그가 몸을 물리자 잔뜩 더렵혀진 얼굴을 한 대만이 살짝 벌려진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천장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음


벌써부터 이러면 어떡해요? 신부가.


그의 뺨을 툭툭 건들던 호열은 머리 맡의 병 하나를 집어들었음 그리고 적은 양을 손바닥에 부었지


이제부터 더 아플건데


분명 불이 꺼졌는데 공포에 질려 크게 떠진 대만의 눈동자는 무엇보다 선명하게 보였음 호열은 그 갈색 눈동자를 볼때마다 속이 뒤틀리는 것만 같아 더욱이 그를 내리누른 몸에 힘을 더했음


가냘픈 신음소리가 들리는 다른 천막과 달리 호열의 천막에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듯 기침하고 작게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났음 팔다리를 휘두르며 자신에게서 벗어나려는 신부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호열은 흰 속치마를 찢어버렸음


조금만 얌전히 있으면 내가 거칠게 굴 필요도 없잖아요.


사냥감을 다루듯 손목과 목에 끈을 둘러 뒤로 묶고 다리는 접어 허벅지와 종아리를 엮었음 혀를 깨물지 못하게 입안으로도 천을 쑤셔넣었지


호열이 모든 행위를 끝내고 담배를 입에 물었을 때 대만의 몸은 멍투성이에 끈에 묶인 붉은 자국이 가득했음 그가 몸을 떨어댈 때마다 허벅지 틈에서는 탁한 선홍색이 섞인 백탁액이 조금씩 밀려나왔음 얼굴은 침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빈말로도 예쁘다고는 못할 정도였음


뿌연 연기를 뱉어내던 그는 완전히 구겨진 채 훌쩍이는 대만의 머리 위로 이불을 덮어버렸음 그의 신부에겐 조금 작았는지 종아리 절반은 가리지 못했지만 두터운 이불 아래로 고운 발이 오그라 들었다 펴지는 모습을 보며 호열은 또다시 속에서 무언가 쏟아질거 같은 기분이 들었음


그가 바랬던 건 그저 지금까지 그랬듯 친구들과 함께 말을 타거나 사냥을 하며 지내는 것이었음 그러나 막을 수 없는 세월은 그를 어른으로 만들고 처음보는 외부인을 신부로 삼게 하였음 그것도 평생을 울상으로 호열의 옆에 억지로 앉아있을 사람을


그거 알아요, 대만군? 아 대만군이라 불러도 괜찮아요? 뭐 어차피 하나도 못알아 들을 테니까 상관없나.


담배를 재떨이에 지져 끄고는 호열은 그의 곁에 누워 이불 채로 끌어 안았음 사실상 배려없이 숨을 못 쉴만큼 힘을 주어 움직이지 못하게 했지


우리 부족은 10살에 처음으로 잡은 사냥감이 미래의 배우자를 닮는다는 미신이 있어요.

그때 백호는 여우를 잡고 저는 사슴을 잡았는데. 아 백호는 제 친구에요 제 옆에 앉아있던 빨간 머리 기억나죠?

아무튼 그땐 그게 다 쓸데 없는 얘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보니 맞는거 같아요.


저는 사슴의 다리를 부러뜨려서 칼로 목을 베었는데 여우는 독이 든 열매를 먹고 죽었거든요.

둘다 마지막엔 가죽이 벗겨지긴 했지만 여우는 훨씬 편하게 죽은셈이죠.


호열은 사슴의 사냥했던 그때가 아직도 기억났음 올가리에 왼쪽 뒷다리가 꺾여 도망도 포기한 모습을


칼을 휘두르자 뺨에 튄 뜨뜻한 피가. 제 친구는 아픈 것도 모르고 죽은 여우를 껴안고는 불쌍하다고 울었는데 그의 등은 사슴에서 쏟아진 피로 축축해져 있었음 어릴 때는 손질하는 법을 모르니 사슴의 머리는 나무 아래에 파묻어 놓고 다릴 엮어 몸통만 들고 돌아왔지


대만군은 그럼 사슴인가?


이불 안에서 들려오는 훌쩍이는 소리에 호열은 웃었음 그게 술기운에 열이 올라 나오는 헛웃음인지 아님 제 품에 안긴 신부가 저 만큼 불행하다는 게 기쁜건지 몰라도.


우리는 그래도 함께 불행할 운명이네요.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당신도 날 평생 떠날 수 없으니까.' 그걸 알아들은 건지 훌쩍이는 소린 커지고 대만은 또다시 울기 시작했음 호열은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달래주었지만 표정은 어느 때보다 차게 식어있었음


그날의 기점으로 대만은 호열의 집에서 살기 시작했음 문 앞에는 다산을 의미하는 하얀 토끼의 발과 사슴의 뿔 조각으로 만든 장식물이 걸렸음 호열은 허리에 매인 원석 허리띠를 매만졌음 혼인을 치루었다는 뜻을 지닌 허리띠는 신부의 목걸이에 박힌 것과 같은 호박이었음


호열은 무심한 남편이었음 자신도 그걸 부정하지 않았지 자기 아내 무릎이 망가졌다는 사실도 몇 달이나 지나고 나서야 알았으니. 매마른 몸에 걸을 때마다 절뚝거리는 것이 겉옷을 내리고 치마를 들추어 보니 왼쪽 무릎은 검붉은 피멍이 가득해 금방이라도 부러질 거 같았음


너무 아내에게 무관심한거 아니야?


백호의 걱정스러운 말투에 호열은 '그런가'하며 성의 없이 답했음 둘의 시야에 끝에서는 부족의 나이 든 여성들이 신부들에게 바느질을 가르쳐 주고 있었음 이미 포기한 건지 바느질 감을 던져둔 백호의 아내는 대만에게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었지


대만은 그에 비해 의외로 성실히 바느질에 임했음 비록 결과물은 마음에 안 드는지 바느질을 했다 가위로 실을 잘라내길 반복했지만 다쳤던 다리가 불편한지 몸을 계속 뒤척이면서도 바늘은 멈추지 않고 수를 새겨나가고 있었음


-그러다 신부가 도망이라도 가면 어떡하려고.

어떻게 도망을 가. 혼자선 많이 걷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양호열 너 진짜,


백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반박하려 들자 가르침이 끝난듯 신부들은 각자의 신랑에게 돌아갔음 곧바로 자신의 신부에게 달려가는 백호와 달리 호열은 가만히 서있었음


바느질이 재미있었나 봐요. 신랑 온 것도 못 알아챌 정도로.


천천히 걸음을 옳겨 그의 앞에선 대만에게 호열은 웃는 얼굴로 말했음 대만은 그가 표정과 달리 좋은 말을 하고 있진 않는다는 걸 알았는지 턱에 힘을 주고 얼굴을 살짝 찡그렸음


식사자리는 젓가락과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가 날 뿐 조용했음 하루의 일과 같은 사소한 일상 이야기는 애초에 없었지 냄비에선 멧돼지 고기를 넣은 국이 펄펄 끓고 있었고 그곳에서 올라오는 육향이 거북한지 대만은 속에서 올라오는 걸 참으려는듯 몸을 움찔움찔 거렸음


'참 까다로운 사람이네.'


그리 생각하며 호열은 국을 한 모금 들이켰음 그렇다고 해서 음식을 바꾸는 일은 없었지만. 참으로 불편한 동거였음 호열이 밖으로 도는 동안 대만은 홀로 집안에 남아 마치 조각품처럼 집안에 가만히 앉아있었음


화로에 불을 지피는 법도 모르는지 밤에 돌아오면 새벽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불이 다 식어버린지 오래라 호열은 싸늘한 집안의 공기에 한숨을 내쉬고는 화로에 장작을 밀어 넣었음 대만은 호열의 눈치를 살피며 침대 구석에서 다시 타오르는 불을 쳐다보기만 했음


그렇게 부부도 동거인도 아닌 날들을 이어 가는데 어느 날 질 좋은 붉은 귀걸이가 호열의 손에 들어왔음 금색의 고리에 붉은 보석이 날카롭게 다듬어져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것이. 햇빛에 비추면 투명하게 반짝이는 게 꼭 누군가를 떠올리게 해 호열은 항상 주머니 속에서 그걸 만지작거리곤 했음


언제 주어야 자연스러울까 고민하며 때만 노리고 있는데 운이 좋게 백호가 호열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음 호열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잠재우며 주머니 깊은 곳에 귀걸이 한 쌍을 품고 백호의 집으로 향해 문을 두드렸음 그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지


집안의 분위기는 많이 달라져 있었음 함께 사냥했던 짐승의 가죽은 치워져 있었고 침대 위에는 푹신한 베개와 이불이 쌓여 있었음 백호의 신부도 이불을 감싼 채 신랑의 품에 안겨 그가 입에 넣어주는 마른 과일을 일일히 받아 먹고 있었음


...임신을 했다고?

-나도 어제 늦게 알았어. 아무래도 호열이 네가 제일 먼저 알면 좋을거 같아서.


호열은 백호의 말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이 들은 말을 계속해서 되새겼음 임신. 저 배 안에 백호의 아이가 있다고? 낮에는 그리 다투더니 밤에는 사이가 좋았나


멍한 정신 속에 분리된 단어들이 뒤섞여 떠다니고 손에 쥐고 있던 귀걸이는 갑자기 송곳으로 변한듯 손바닥을 찌르는 것 같았음 몸을 가득 채우던 액체에 불이 붙어 식은땀이 목 뒤로 흘렀음 갑자기 말이 없어진 호열에게 백호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음


-호열아. 어디 아프냐? 얼굴이,

아, 아냐 하하. 신부가 피곤한 모양이네. 난 이만 집으로 돌아갈게.


백호가 품에서 칭얼대는 자신의 신부에게 한 눈을 판 사이 호열은 몸을 일으켰음 그의 온몸은 달아오른건지 차게 식은건지 중심을 잡기 힘들었고 구역감마저 들었음


백호야.

-응?

축하해. 정말로.


환히 웃는 그의 얼굴을 뒤로 한 채 호열은 서둘러 자신의 집으로 걸어갔음 자신의 헝편없는 꼴을 누가 볼까 두려운 걸까, 사실 그렇지도 않으면서 올라간 입꼬리는 일그러지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음


호열이 집으로 도착했을 때 대만은 바닥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음 그는 신랑의 모습을 보고 놀란듯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가까이 다가오진 않았음 호열은 문 앞에 서 감당하기 힘든 통증에 머릴 헝클어댔음 누군가 절벽 아래 매달린 자신을 조금씩 밀쳐내는 기분


호열이 택한 건 술이었음 아무 맛도 향도 나지 않는 투명한 액체가 물이라도 되는 것마냥 끊임없이 잔에 넘칠 정도로 따르고 목구멍 뒤로 넘겼음 몸 안의 무언가가 타닥타닥 소릴 내며 타들어가는 감각 그게 오히려 반가워 몸이 뜨거움을 넘어 차게 식을 때까지 삼킴을 반복했음


그의 말이면 자신은 하늘 위에서 땅 아래까지 추락할 수 있는데 웃는 얼굴로 자신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짓밟는 백호를 호열은 거부할 수 없었음 그가 호열이 떨어지길 원한다면 기꺼이 떨어져 줘야지 몸의 한계치를 넘은 건지 웃음이 나와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잔을 넘어뜨렸음


-아.


술병을 잡으려는 호열의 손 위로 차가운 냉기가 닿았음 앞으로 무너지는 몸을 힘 주어 일으켜 세우는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대만이었음 '대만군.' 호열이 대만의 허리에 팔을 감아 끌어 당기자 그의 배에 머리가 닿았음


대만군. 그거 알아요?

아이가 생겼대요. 백호네 신부가,

그렇게 싸우더니 언제 그랬대... 대만군도 웃기죠?


제대로 껴안는 것도 쓰다듬는 것도 아닌 대만의 손길이 그의 등에 닿았음 눈을 감고 그 움직임을 느끼던 호열은 허리에 감았던 손을 풀어 그의 아랫배에 두고 힘을 주어 눌렀음


대만군도 아이가 가지고 싶어요?


묘하게 바뀐 호열의 표정에 대만은 풀려있던 얼굴을 굳히고 그를 제 품에서 밀어냈음 탁자에 기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호열과 거리를 두려는지 뒷걸음질을 쳤지만 휘청이는 다리로 도망쳐 봤자 호열이 몇 걸음 걸으면 닿을 수 있는 곳이었음


호열이 비척이며 일어나자 술잔이 깨지는 소리가 났음 하지만 그런 거에 신경쓸 겨를도 없이 대만에게로 달려든 호열이 그의 목깃을 휘어잡아 침대로 밀쳤음 다친 무릎이 가구에 부딪혀 비명 소리가 들렸으나 호열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만의 몸 위로 올라가 우위를 차지했음


...왜 당신은 항상 울기만 해?


호열의 머리속이 회전하기 시작했음 빨강, 빨강색. 어릴 때부터 붉었던 그 애의 머리카락, 사슴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 신부의 다리 사이에서 밀려 나오던 선홍색 액체와 귀걸이, 짓무른 눈가. 전부 다 빨강색이었음


무언가 생각난 듯 호열은 주머니를 뒤져 귀걸이 한 쌍을 꺼냈음 본래 주인이 있었지만 사라진. 그는 손 끝에서 흔들이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그대로 대만의 귓볼에 가져다 대었음


...잘 어울려.


날카로운 끝이 살을 파고 들자 붉은 피가 맺혔음 '아파, 싫어!' 어린아이 같이 미숙한 말이 오히려 반가워 호열은 반대쪽도 똑같이 귀를 뚫었음 그가 고개를 흔들 때마다 들리는 찰랑대는 소리와 벌써부터 마르기 시작한 핏방울이. 대만의 뺨 위로 비가 내렸음


호열은 울었음 마신 술이 모조리 눈물로 변해버린 것처럼 숨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일그러진 얼굴이 더 서러워 귀걸이의 붉은 보석만 매만지던 그는 중심을 잃고 대만의 몸 위로 쓰러졌음 그러자 호열의 귓가에 숨소리가 들렸음 처음 그를 데려올 때 들었던 일정하고 얕은 호흡


그가 말을 못하니 호열은 그의 행동만으로 모든 걸 판단했음 대만이 울고 찡그리고 제게서 벗어나려 드는 모든 행동을 통해 그가 자신을 두려워함을 알았지 경멸, 분노, 슬픔과도 같은 감정은 호열에게 익숙한 것이었음 하지만 대만은 예외의 인물이었음


'이건 분명 사랑이 아니야.'


호열은 확신했음 대만에게 느끼는 감정은 그보다 더 아래, 가벼운 것들이 뜨고 남은 침전물에 가까웠음 본인조차 외면하고픈 이면. 그와 한 공간에 머물며 눈이 마주치고 같은 공기를 들이마실 때마다 호열은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되었음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얼마 못가 목소리를 내는 법도 잊어버릴거에요.


왜인지 조급해지는 마음에 호열은 팔에 힘을 주어 그를 바라보았음 '또 그 표정이네.' 차라리 색이 짙은 얼굴이 좋았음 금방이라도 손 안에서 흩어질 거 같은 얼굴은 싫었음


갈라진 틈으로 솟아 오르는 화에 호열은 그의 뺨을 감싸며 아랫 입술을 깨물었음 쇠의 맛이 혀에 느껴지고 상처를 엄지로 흩으니 옅게 피가 새어나왔음


왜 날 밀어내지 않아요?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질문. 돌아오지 않는 답에 호열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음


지금 이 모든 것을 단순히 술을 마셔서라고 해명해도 되는 걸까 호열은 짧게 대만에게 입을 맞췄음 피와 술이 섞인 키스는 건조했고 그것이 오히려 더 갈증이 나 호열은 따끔거리는 통증에 그가 입술을 살짝 벌린 사이 더욱 깊게 파고들어 숨을 탐했음


손목도 허리도 허벅지도 처음 그를 보았을 때보다 훨씬 가늘어져 호열은 그가 제 연인이라도 되는 듯 자신의 체온으로 대만의 몸을 데웠음 애꿎은 이불만 굵어대는 손을 끌어 목에 감고 대만의 몸을 껴안자 서로의 맨가슴이 맞닿았음


젖은 살이 부딪히는 소리와 억눌린 신음소리. 한쪽 다리는 늘어져 침대 끝에서 흔들리고 나머지 한쪽은 등 위로 걸친 채 둘 사이의 거리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였음 침대가 흔들리면 코 끝이 살짝 부딪힐 수 있는 거리에서 호열은 그의 모든 부위를 하나하나 관찰했음


'갈비뼈 쪽에 점이 있네.'

'눈꼬리는 예상 외로 긴 편이구나.'

'마르긴 했지만, 상체에 비해 하체가 더 단단하고.'

'턱에 흉터는 맞아서 찢어진 건가?'


손가락이 닿는 곳은 전부 이로 물고 혀로 빨며 호열은 그의 몸 위로 자신의 흔적을 남겼음


대만에게서 오로지 그의 체취만 느껴지게 하려는 듯 호열의 정갈한 잇자국이 약지의 첫 마디에 새겨졌음 이내 그는 대만의 허리를 아래로 당기며 몸을 떨었고 눈앞에 불씨가 터지는 듯 빛이 깜빡거려 그는 신부의 몸에 얼굴을 파묻어 깜빡임을 피하려 했음


만일 호열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았다면 기꺼이 몸을 일으켜 대만의 다리 사이로 두 손가락을 밀어 넣어 씨를 긁어냈을까 지금의 그는 그저 점차 식어가는 온기가 싫어 대만을 감싸 안을 뿐이었음



대만이 처음으로 헛구역질을 한 것은 한 달 하고도 일주일이 지난 후였음



보통의 임산부는 한 달도 안 되어 변화를 보인다는데 대만은 그에 비해 늦은 편이었음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체력과 익숙한 구역감을 헷갈린 탓이었음 평소보다 파리해진 얼굴로 거센 숨을 들이키던 대만은 천장이 뿌예질 때까지 향을 태우고 나서야 꽉 쥔 주먹을 폈음


손톱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손바닥을 내려다 보던 호열은 시선을 아래로 내려 그의 아랫배를 보았음 얇은 옷 아래로도 눈에 띄게 납작하게 가라앉은 곳. '여기에 아이가 있다고?' 정대만과 양호열, 그리고 둘의 아이라는 단어들이 어색해 호열은 어찌할 줄 몰랐음


이럴 때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평범한 부모 같은건 없었기에 호열은 말없이 침대 맡의 의자에 앉아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음 그의 뒤에서 약재들을 흰 천에 나누어 담던 노파는 그를 꾸짖듯 말했음


-첫 아이에 원래 몸이 성치 않으니 잘못하면 아이를 잃을 수도 있어.

-네가 애초에 신부를 원치 않은 걸 안다만 적어도 네 부모 처럼은 되지 말아야지.


역린을 찌르는 말에 호열은 발끈하며 돌아보았지만 결국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음 분명 향을 맡으면 편안해져야 하는데 오히려 불안해져서.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릴 흩뜨렸음


-이걸 매일 밤마다 달여서 먹여라. 어미가 건강해야 자식이 자랄 동안 몸이 버틸 테니.


호열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를 배웅하지 않았음 그저 가만히 앉아 대만을 쳐다볼 뿐. 노파도 그런 호열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고는 집을 나섰음


대만이 눈을 떴을 땐 이미 한밤이 된 후였음 두터운 이불을 걷으며 몸을 일으키니 밤새 누군가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린 듯 온몸이 아파 윽하는 신음을 내지를 정도였음 평소보다 장작을 더 넣었는지 유난히 따뜻한 집안에 그는 팔을 쓸어내렸음


일어났어요?


부스럭거리는 소릴 들은 호열이 뒤를 돌아 대만과 눈을 마주쳤음 '몸은 좀 어때요? 대만군 갑자기 쓰러져서...' 방금까지 화로를 건드렸는지 그는 손에 묻은 재를 닦아내고 있었음 멀뚱히 호열을 바라만 보는 대만에 그는 몇 초간 눈을 마주치다 화로로 시선을 돌렸음


타닥거리는 불씨와 물이 끓는 소리 가운데, 호열은 몇 번이나 망설였음 그는 좋은 사람이 아니기에 좋은 부모 같은건 못하는게 당연했음 그러면 당신은? 재수없이 나 같은 남자에게 걸려 배가 부르다니. 이젠 몸이 무거워 도망도 못가게 생겼네


호열은 냄비 뚜껑을 열고 뜨거운 죽을 그릇에 담았음 딱히 신경쓰지는 않았지만 그는 대만이 뭘 못먹는지 알고 있었음 모르는게 이상하지. 밥을 먹을 때마다 올라오는 걸 힘겹게 삼키는 소리가 들렸는데. 향이 강한 재료를 빼고 맛이 약한 것들만 넣고 끓인 죽은 밍밍했음


하지만 대만은 그게 맛있는지 다 비우고도 한 그릇을 더 먹었음 입가에 묻은 것도 모르는 듯 숫가락질에만 여념이 없어 호열은 손을 뻗어 닦아주려 했음 그러나 이럴 사이는 아닌 것 같아 천을 건네주며 그의 뺨을 가리켰음


대만은 한참 호열의 눈치만 보다 검게 달여진 약을 조금씩 들이켰음 아마 몸이 아프니 주는 약이라 생각하는 거겠지 호열은 그에게 어떻게 아이의 존재를 알려야 할지 고민했음 억지로 끌려와서 말도 안 통하는 신부에게


곧바로 혀를 깨무는게 아닐까, 아님 칼이라도 뽑아들거나. 항상 최악의 가정이 먼저 떠올랐음 하지만 대만은 호열이 상상했던 모습과는 달랐음 몸을 건드는 손짓에 움츠리는가 싶더니 그 어떠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음


그저 아랫배에 손을 올려 누를 뿐. 대만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가라 앉아 있었음 웃는 얼굴은 떠올리지도 않았고 그저 그가 또 울까 생각했었는데.


화로의 빛을 받아 주홍빛으로 물들은 채 배를 쓰다듬는 신부의 모습에. 호열은 무엇인가 가슴을 찢고 쏟아지려는 듯 갑갑해져 열을 핑계로 집밖으로 나와버렸음 어린 아이는 운명이 아니라 생각했는데, 방금의 풍경은 마치. 그의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었음


매서운 바람이 뺨을 스치며 순식간에 온기를 빼았았음 그는 뒤를 돌아 문의 틈으로 집안으로 훔쳐보았음 자기가 이방인이라도 되는 것마냥. '정대만'과 '아이', 그 사이 이어지는 '양호열'. 당신이 정말 내 아이를 가졌다고? 그제서야 인지되는 사실에 호열의 속이 휘몰아쳤음


호열의 부모는 그가 잠든 사이 불에 타 죽었음 마을 사람들 사이의 치정 문제가 이유였던 것 같음. 눈 위로 푹 파인 발자국 두 쌍을 따라가니 그를 반기는 것은 새까맣게 타 엉겨붙은 시체였음. 들이마시는 숨에 폐가 아플 정도로 추운 새벽이었기에 호열의 눈물은 순식간에 얼어 붙었음


그 날의 기점으로 호열은 단단히 망가졌음 너무나 깔끔히 떨어져 나가 오히려 아무렇지 않아 보일 정도로. 깊은 것은 두려워 그는 가볍게 행동했음 아무렇지 않게 친구들과 섞여 웃으며,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도록


그런 그가 유일히 애정을 주었던 것이 백호였음 그는 오랜 가족이자 친구였고 떠나지 않는 사람이었음 그렇기에 안심하고 감정을 보여주었지. 어쩌면 그는 백호가 자신과 삶을 연결하는 끈이라 생각했던 것 같음 하지만 그 끈은 느슨해지고 새로 나타난 붉은 끈이 발목을 동여맸음


'깊어질 수록 상처 받을 거야.' 원하지 않았던 관계, 원하지 않았던 아이. 그 존재들은 호열에게 불안감을 주며 동시에 살게 할 이유가 되었음


시간이 흐를수록 대만에게선 아이를 품은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가 맡아지기 시작했음 특유의 따뜻한 온기도. 마른 몸에 배만 불러오는게 신경이 쓰여 호열은 그나마 그가 삼킬 만한 음식을 생각해보았지만 별다른 소용은 없었음


쉽게 얻을 수 없는 푸른 잎을 넣은 음식까지 네 숟갈을 못 넘기자 그는 결국 두손 두발을 다 들어버렸지 차도 싫은지 따뜻한 물만 홀짝이는 신부를 힘없이 바라보던 호열은 이 고민을 어딘가 털어놓고 싶은 마음에 백호의 집으로 향했음


...대만군이 새 요리를 좋아해?

-어, 그리고... 고기도 기름이 적은 것만 먹는단다. 향이 강한 건 싫어하고.


운이 좋게도 대만과 같은 지역에서 온 백호의 신부가 해답을 주었음 직접 말하지 않고 신랑의 귀에 속삭이면 백호가 호열에게 전달해 주었지


호열은 말을 타고 마을 밖을 조금만 지나면 보이는 냇가에서 다리가 길고 몸집이 큰 새들이 무리를 지어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본적이 있었음 살도 많은 편이고 맛도 나쁘지 않았지. '그런 걸로도 괜찮은 걸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백호가 그런 호열을 보며 웃었음


-호열아, 너 진짜 변했다.

내가 변했다고?

-너 처음엔 신부가 뭘 좋아하든 신경도 안 썼잖아. 근데 이젠 이렇게 찾아와서 물어보기도 하고.

...그런가.

-보기 좋아. 너가 우리 말고도 마음을 둘 상대가 생긴거 같아서.


너가 아닌 사람에게 마음을 준 건 처음이겠지. 환하게 웃는 백호에게 호열은 조금은 씁쓸한 미소로 화답했음 선물이라며 건네준 마른 과일을 들고 돌아오니 신부는 침대에 기댄 채 바느질을 하고 있었음 그 옆으로는 글씨가 적힌 종이들이 쌓여 있었음


-저 왔어요.


어색한 인사. 답은 없었음 대만은 그에게 시선을 한 번 주더니 다시 바느질을 시작했음 천 위에는 호열이 본 적 없는 화려한 색의 꽃이 수놓아져 있었음 '아직까지 고향을 그리워 하는 걸까. 당신은 이제 이곳에서,'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말을 할거 같아 호열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버렸음 정리할 필요 없는 물건들만 애써 만지작거리다 그는 대만에게 과일이 담긴 주머니를 건네 주었지 그것도 부끄러웠는지 그의 곁에 툭하고 내려놓은 것이 다였지만.


-어디가?

네?

-어디가, 지금.


활을 어깨에 매고 화살을 매만지는 호열의 등뒤로 어느샌가 대만이 다가왔음 집안이 워낙 따뜻해 얇은 내의만 입고 있던 탓에 다른 곳에 비해 부풀어 오른 그의 배가 여과 없이 드러났음


사냥 좀... 다녀올게요.

-사냥?

대만군 새 좋아한다고 들어서, 요즘들어 제대로 먹은게 없으니까, 좋아하는 거면 괜찮을까 싶어서...


당신이 모르는 사이 다녀오려 했는데. 우연히 당신이 좋아할 만한 걸 잡았고 그걸로 당신의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진다면. 호열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음


하지만 그의 입은 의지와 다르게 떠듬떠듬 그의 계획을 털어놓아 얼굴이 붉어지게 만들었지 분명 싫어하지 않을까. 일을 다 망쳐놓고 이제와서 손을 대려 한다고. 이미 대만은 호열을 충분히 경멸하고 있을 터인데 그는 긴장한 얼굴로 촉으로 손바닥을 약하게 찔렀음


-나도 갈거야.

네? 안 돼요.

-왜?

당연하잖아요! 대만군은 집에 있어요. 금방 다녀올테니까.

-왜?

-진짜... 아이를 가진지도 얼마 안 됐고 그거 때문에 아직도 약 먹고 있잖아요. 위험할 거에요.


-나는 볼 거야. 같이 가.


대만은 이곳에 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도 싫은 건 싫다고 말하던 사람이었음 거기에 글까지 배우니 이젠 아주 쉽게 호열을 당황하게 만들었지. 돌아가지 않고 직설적으로 꽂히는 그의 언어 때문에 호열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적당한 웃음과 장난으로 진심을 숨길 수 없었음


'이것도 백호가 말한 변화 중 하나인가.' 고집스러운 갈색 눈동자에 호열은 허리에 손을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음


-그럼 옷 입고 와요. 밖은 추울테니까.


그의 말을 반만 들을 건지 대만은 얇은 겉옷만 입고 앞장 서라는 듯 호열을 쳐다봐 결국 헛웃음이 나왔음


-갑갑해.

불편해도 입고 있어요. 참기 힘들면 집에 있던가요.

-싫어. 나갈거야.


호열이 먼저 말에 올라타고 대만은 그 뒤에서 그를 껴안는 자세를 취했음 '꽉 잡아요.' 느슨하게 그의 옷깃을 잡는 대만의 손목을 가볍에 쥐어 호열은 그가 자신의 허리를 단단히 껴안게 했음


그렇게 잡으면 다친다니까.


평소보다 느리게 말을 모는데도 몸이 흔들리며 호열에게 대만의 힘이 전해졌음 그는 천천히 마을을 벗어나 외곽으로 향했음 만약 혼자였다면 눈이 사방으로 튈만큼 빠르게 달려 새들이 물을 마시는 곳까지 단숨에 도착했을텐데.


하지만 말이 눈에 파묻힌 돌맹이를 밟아 살짝 비틀거릴 때마다 뒤에 앉은 대만이 움찔대며 허리를 더 강하게 끌어안는게 기분이 이상해서.


분명 호열은 태어나 나비라는 존재를 직접 본적이 없음에도 그 얇은 생명체가 폐 안으로 날아들어가 팔락팔락 날개짓을 하는 것 같았음 그리고 그 움직임으로 흩날리는 반짝이는 가루들이 폐 안에 달라붙어 속이 간지러워졌지


그는 고삐를 쥐지 않은 손으로 가슴팍을 몇 번 두들겼음 그리고 냇가에 도착하자 새들이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나무에 말을 묶었지 잠시 내리쬐는 햇살에 녹았다 금세 다시 얼어붙은 눈은 미끄러웠음


...대만군 손 줘요.

-괜찮아.

방금 넘어질뻔 했잖아, 얼른.


호열의 재촉에 대만은 그의 손을 잡았음 자신보다 작지만 훨씬 단단한 손. 둘 모두 장갑을 끼고 있었지만 그는 그 아래의 강한 힘을 느낄 수 있었음


눈과 마른 가지를 한참이나 밟았을까, 호열은 사냥감을 발견해 마른 덤불 사이로 몸을 숨겼음 여섯 마리 정도의 새들이 목을 축이고 있었고 그가 표적으로 삼은 것은 그중 가장 몸집이 큰 놈이었음 가장 살이 많고 힘이 좋은 수컷을 향해 호열이 활을 겨누었음


나무와 가죽이 뒤틀리는 소리가 나며 화살이 뒤로 당겨지고 소리 없이 날아간 촉이 새의 몸통을 꿰뚫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음 그 순간까지 호열은 물론 옆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대만까지 숨을 죽였지 놀란 새들이 전부 날아가고 나서야 호열은 몸을 일으켰음


얼음물을 가로질러 간 호열은 죽은 새에게 박힌 화살을 빼내고 다리를 묶었음 그리는 물가에서 그를 기다리던 대만에게 돌아갔지 분명 호열은 사냥감의 크기로 으스대는 놈들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신기하다는 눈으로 보는 대만의 앞에선 고작 새 한 마리인데도 기분이 좋아졌음


호열은 새의 깃털을 뽑고 껍질을 벗겨 크게 토막을 내었음 잡내를 뺄 향신료와 함께 삶으니 뼈와 살이 불리될 정도로 부드러워져 결대로 잘게 찢었지 절반은 끓이고 나머지 절반은 양념을 발라 불에 구우니 꽤 먹음직스러워 보였음


먹어봐요. 간은 약하게 했는데, 어떨지 잘 모르겠네.


서로 마주보고 앉은 채 호열은 수저도 들지 않고 대만의 반응을 살폈음 혹여나 그가 또 토하기라도 할까 물수건도 안 보이는 곳에 두고는. 날렵한 눈썹을 만지작 거리며 대만의 안색을 살폈지


-맛있어.

정말요?

-응.


'다행이네.' 그제서야 안심한 호열은 자신의 천천히 자신의 그릇을 비우기 시작했음 대만의 입으로 들어가는 숫가락질이 다섯 번을 넘었으니 이번 시도는 꽤 성공적이라고 생각하며


전과 달리 둘을 감싼 분위기는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이 들었음 적어도 호열의 느끼기에는 그러했지 숨죽여 우는 소리도 적어졌고. 비록 처음 보았을 때보다 그를 읽기 힘들어졌지만 호열은 이것을 안정감이라 여겼음


한 침대에 서로 등을 돌려 잠들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었음 호열의 고집으로 이불은 둘에서 하나로 줄었고 베개의 사이는 서로의 속눈썹의 갯수까지 셀 수 있을만큼 가까워졌음 둘 중 먼저 잠드는 것은 항상 대만이었지


그럼 호열은 그가 잠든 사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곤 했음 낮엔 차마 건들지 못했던 대만의 뺨과 입술과 눈가를 어루만지며 평소보다 깊게 잠에 든 날엔 그에게 입을 맞추었음 간지러운 손길로 그를 쓸어내리다 대만의 어깨를 끌어당겨 몰래 그의 품에 안기기까지 했지


'이게 사랑인가?'


피부 위로 올라오는 박동을 들으며 호열은 멍하니 생각했음 이 사람을 보면 더 닿지 못해 안달이 나고 웃는 얼굴만 보고 싶어. 그가 슬픈 표정을 지으면 금방이라도 몸을 찢고 무언가 튀어나올 만큼 괴로워져


당신에게 주었던 아픔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워도 견딜 수 있어. 하지만 그러면 당신은 내 곁에 머무르지 않을 거잖아.


난 당신이 삶의 이유가 되어버렸는데


백호에게 가졌던 것과는 다른 어둡고 음침한 것들이 섞인 감정. 그 안에는 대만의 숨을 끊고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은 충동과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사랑을 토해내는 애정이 존재했음


'당신의 목에 입을 맞추다 그대로 숨통을 내리누르고 싶어.'


오싹한 생각을 하며 호열은 옷 아래로 드러난 목 언저리에 입을 맞추었음 그의 손가락은 대만의 쇄골 위를 움직였지만 힘은 빠져있었음


호열은 손가락을 세워 피부를 가로지르다 그의 귀에서 반짝이는 것에 시선을 빼앗겼음 찰랑대는 붉은 귀걸이 한 쌍. 술에 취해 엉망으로 헤집었는데도 용케 흉이 남지 않았지 그것은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을 뜻했음


애초에 이뤄질 것이라 생각도 안 했지만. 평생 혼자서 간직하려 한 감정이었는데 그걸 처음으로 보여준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대만이었음 타인을 위한 물건은 어느새 원래부터 그의 것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래 스며들었지


...붉은색이 잘 어울리네. 예뻐.


귓볼을 관통한 고리를 어루만지며 호열이 중얼거렸음 '당신은 자신의 것이 아닌 애정마저 끌어당기는 사람이구나.' 참을 수 없는 기분에 그는 반대쪽 뺨에 손을 대어 대만의 입가에 입술을 길게 내리 눌렀음


양호열은 본래 과묵한 놈이라 표현이 서툴렀음 그를 아는 사람들은 호열이 과묵하다는 말에 의문을 표했지만 그가 혼자였던 시절, 친구들을 만나는 일을 제외한 그의 하루는 정적이었음 집안에 오로지 들리는 것은 불이 타는 소리와 물건들이 부딪히는 소리였지.


말보단 몸이 앞서던 사람이라 그럴까. 호열은 부드러운 말이 어색했음 좋아한다던가, 사랑한다는 말들. 장난기가 담기지 않은 진지한 고백의 문장들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음


이젠 대만의 손끝을 건드는 것조차 설레는데, 사랑한다는 말은 어떻게 해. 그렇기에 호열은 하고 싶은 말을 행동으로 드러냈음 하지만 그는 그게 문제가 될 줄은 몰랐음 겪은 적이 없으니 알 수 없었음 그에겐 그게 당연했으니.


세상엔 행동만으로는 부족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내가 사랑한다고 말했으면 당신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 당신이 내가 내일을 기대하는 이유가 되었다 말했다면, 한번이라도 뒤돌아 봤을까.'

'하지만 이미 늦었지, 당신은 날 떠나기로 결정했는데.'


호열이 숨을 내쉬자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음 날짐승만을 노리던 화살은 대만을 향했고 이미 나무에 박힌 화살에 스친 뺨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음 숨길 수 없이 부른 배를 감싸안은 채로 그는 겁에 질려있었음


대만군 우리 집으로 돌아가요.


매서운 눈빛과는 달리 누그러진 목소리. 대만이 그에게 한 걸음이라도 다가온다면 곧바로 활을 쥔 손에 힘을 풀 생각이었는데. 대만은 오히려 조금씩 뒷걸음질 쳐 그에게서 멀어지려 했음


-...싫어. 집에 갈거야.

당신이랑 내가 있는 곳이 집이잖아요.


마지막 말은 거의 소리치는 것에 가까웠음 갑작스레 숲풀 속에서 튀어나온 사슴에 호열이 시선을 빼았긴 사이 대만을 뒤를 돌아 다시금 도망치기 시작했음 눈밭에 떨어지는 핏방울이 그를 따라가는 것도 모르고


호열은 활을 땅바닥에 내던지고 허리춤에서 칼을 빼들었음 그는 차라리 대만이 이대로 멀리 사라져 버리기를 바람과 동시에 그 어디에도 갈 수 없을만큼 망가진 채 자신의 곁에 머물게 하고 싶었음


호열은 사냥에 대해 잘 알았음 아기를 지닌 암컷은 배 안의 새끼를 지키기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짝이 없는 이상 평생 수컷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것도


'어쩌면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아챈 순간 곧바로 발목부터 끊어버려야 했을지도 몰라.'

호열은 뛰지 않고 걸어서 그를 쫓았음 어차피 대만이 뛰어도 그는 몇 번의 큰 걸음으로 따라잡을 수 있었기에.




호열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