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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5 17:20
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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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명헌의 솥뚜껑 같은 손으로 냉찜질 받으며 그럭저럭 볼만하게 얼굴을 가라앉힌 권준호. 반년만에 보는 녀석들이니 당연히 반갑고 열렬한 반응을 기대하는데 어랍쇼, 이 녀석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 알고보니 우성태섭 싸우고 냉전중에 맘 여린 백호는 눈치보고 태웅이는 백호 땜에 심기 불편한 거.



"이 녀석들이 미운 일곱살도 아니고 형들 불러놓고 아직까지도 입 삐죽이라니 원."

"우성이 아직도 일곱살 삐뇽. 돌아가면 광철님과 미사님에게 이를거에용. 정우성 아직도 철 덜들어서 죽고 못사는 쏭이랑 싸우고 있나용."



기가 차지만 일단 이 분위기를 풀어야 비즈니스 타고 날아온 열 네시간이 헛되지 않을 걸 알아서 이 한 번 악 물고 눈짓 주고 받은 후 후배들 하나씩 달고 근처 카페로 각각 차 몰아 나가는 권준호와 이명헌임.



"우성, 내가 전에 뭐라 그랬어용. 태섭 보기보다 여리다고 안 그랬어용. 상처가 많아용. 태섭은 우성과 달라용. 우성은 광철님과 미사님 밑에서 둥기 둥기 컸지만 태섭은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고용."

"알아요! 저도 안다구요! 아는데! 아는데...태섭이는 말을 너무 안 해줘요...이럴거면 나 왜 만나냐구요. 힘들면 투정도 하고 울기도 하고 그러는게 사랑하는 사이 아니에요? 광철이 그랬다고요. 광철이 힘들어서 울면 미사가 안아주고 그랬다고."

"알아용. 두 분은 그런 분이니까용. 그런데 태섭은 달라용. 그걸 강요하면 안되용. 우성 이대로 태섭이랑 끝내고 싶나용?"

"이런 걸로 헤어져요? 형 제가 그렇게 가벼워보여요?"

"아니잖아뿅. 이런걸로 헤어질 거 아니면 우성이 먼저 숙여라 뿅. 광철님은 항상 미사님에게 무조건 먼저 머리 숙이셨다뿅."


태섭이하고 우성 자존심 하고 저울에 놓으면 뭐가 더 내려갈지 잘 알지 않나용- 이 한마디에 우성이 울먹이며 고개를 주억거렸음. 이젠 드래프트도 앞두고 디비전 a팀의 주전으로 어엿한 성인이라 생각했는데 아직도 자긴 멀었음. 울먹이는 아기 밤톨을 안아주며 이명헌은 한숨을 내쉼.

이래서야 내가 육아하는 것 같다뿅. 나 아직 장가도 안 갔는데 이게 뭔짓 뿅.




"태섭아, 영리한 녀석이 왜 이리 한번씩 어리석게 굴어. 우성이 잘못이 아니잖아 그게. 사람이 말을 안 하면 어떻게 알아."

"알아요, 아는데...굳이 그런 얘길 뭐하러 해요."

"뭐하러 하냐니. 너 너희 어머님께서 네가 쓴 편지 보고 얼마나 충격 받으셨는지 모르지?"

"그러니까요! 그런 말을 하면 꼭 후회한다구요!"

"아니, 너희 어머님은 네 속을 너무 몰라서 후회 된다고 하셨어. 태섭이 네가 너무 말을 안해주니까. 그저 괜찮다고 믿을 수 밖에 없었다고. 사실 그렇지 않은데."

"걱정시키기 싫으니까 그러죠. 안그래도 농구만으로도 힘든데."

"우성이는 네가 이러는 게 더 힘들거야. 우성이는 항상 털어놓고 함께 나누며 넘칠 정도로 사랑받고 감정을 나누며 자라온 아이야. 그런 아이가 이렇게 숨기고 도망가려는 네가 얼마나 힘들겠어. 나도 너 이러는 거 속상해 태섭아."

"선배..."

울먹이며 고개를 떨구는 태섭을 꼭 안아준 준호가 한숨을 내쉬며 등을 토닥여줌.


북산 졸업하고 이런 일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 어렵다 어려워.
...하긴 내 연애도 앞가림 못하는 판에 이건 당연한 건가.



퉁퉁 불어 벌개진 밤톨과 머리가 온통 풀어져 내린 초코 푸들을 각각 데려온 이명헌과 권준호가 두 녀석을 집 앞에 넘겨준 후 오늘 니들 밖에서 자고 오라며 더플백 하나만 던져주고 내쫓았음. 두 녀석이 눈을 반짝이며 차를 몰아 나가자 그제야 시선을 마주한 두 사람이 한숨을 푹 내쉬었음. 그러다 문득 권준호가 웃음을 터트렸고 이명헌이 따라 웃었음. 두 사람의 웃음 소리에 잔뜩 쫄아붙어 있던 강백호가 슬그머니 문을 열고 나왔음.

아무래도 오늘 저녁은 우리 넷만 들어야 할 거 같다-며 명헌이 가져온 짐을 바쁘게 풀고 준호가 주방으로 들어가서 냉장고 문을 열어 젖힘.






대학 4학년 졸업반은 드래프트를 목전에 앞둔 가장 중요한 시기였음. 권준호는 미쳐 돌아가는 의대 시간표 사이 틈틈이로 미국의 우성태섭과 태웅백호를 챙기고 정대만을 살피고 최동오를 살피고 그리고 이명헌을 챙겼음.

처음 산왕의 주장이자 정대만의 룸메이자 팀 멤버로 시작한 사이의 무게추가 어느 새 점점 무거워졌음. 이제 권준호의 생활 한 켠에 이명헌이 자연스레 자리 잡고 있었음.

방학 때마다 함께 미국에 가는 건 너무나 당연해서 이제 카오루상과 태웅이의 부모님과 안선생님 내외는 이명헌이 함께 오는 것을 기정사실로 두고 있음. 한가득 받아온 짐들을 함께 차에 싣고 운전해 집에 오면 이명헌이 자연스레 짐을 들고 준호의 집에 함께 들어옴.

그리고 준호의 어머니가 내어주시는 차를 마시고 준호의 아버지와 함께 느바 이야기와 스포츠 재활 이야기를 함.

권준호의 아버지는 아들처럼 농구를 좋아하지만 역시나 취미로만 두고 접어야 했던지라 딱뚝콱 내츄럴본 주장의 위엄이 있는 경기 운영의 달인 이명헌과 함께 하는 대화가 무척 즐거웠음.




그건 이명헌도 마찬가지였음.


어느 새 정대만이 아니라 미국 녀석들이 아니라 오로지 둘이 보기 위해 연락을 하는 것이 어색해지지 않음.

권준호와 함께 북산 멤버들의 짐을 받아 차에 실으면 권준호가 운전하는 차에 실어 권준호의 집으로 감. 처음부터 당연하단듯 운전석에 앉는 권준호의 모습에 한 번도 권준호 태우고 운전대는 못 잡아 봤음.

광철 미사 부부의 집에 들를때면 광철이 준호가 좋아하는 원두를 미리 준비해두고 식사를 네 사람 몫으로 준비하는 것 조차 당연한 일이 되었음. 광철 미사 부부의 짐을 한가득 실은 차를 권준호가 운전해 이명헌의 집으로 향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 되었음.

운전해주고 짐까지 함께 옮겨준 준호를 본 명헌의 어머니가 들어와 차 한잔 하고 가라 한 것이 이젠 당연한 순서가 되어 저녁까지 들고 들어가게 됨.

이명헌의 어머니는 독특한 제 아들의 정신 세계에 전혀 어색함이 없는 권준호를 귀여워 함.



4학년 드래프트를 앞두고 대학리그가 한참 불타오르는 시기였음. 이명헌은 이미 프로팀에서 대놓고 관리 대상일정도로 안정권이었지만 언제나 드래프트에는 변수가 존재했음. 그런 시기라 이명헌은 예민했고 날카로웠음.

그리고 그런 예민함을 잘 아는 권준호는 없는 시간을 쪼개어가며 이명헌을 보러 옴. 이명헌도 사귀는 사람이 있지만 이명헌의 애인은 이런 부분까지는 이해해주지 못했음. 그저 날카로워진 이명헌에게 너 좀 변했다며 타박을 줄 뿐이었음. 안그래도 신경이 예민한 이명헌은 결국 더 견디지 못하고 이별을 고함. 헤어졌는데도 서운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 홀가분해진 기이한 감정에 이명헌이 한숨을 내쉬었음.


그리고 멀리서 걸어오는 권준호를 볼 때마다 온 몸의 긴장이 풀리며 입가가 부드러워짐. 이명헌은 언제부턴가 제 훈련이 끝날 때 쯤 권준호가 올 지 안 올지 기다리게 되었음. 못 보는 날이 많았지만 그것조차 이명헌에게는 기다려지는 시간이었음. 못 오는 날엔 준호가 전화로 다정스레 컨디션을 물어왔거든.




기말고사가 끝나갈 무렵, 모처럼 이명헌과 권준호 모두 한숨 돌릴 수 있는 시기가 왔음. 마지막 시험이 2교시 였던지라 시험 끝나고 보자는 권준호의 메시지가 그토록 반가울 수 없었음. 마침 이명헌도 모처럼 휴식기를 앞두고 오전 훈련만 있는 날이었음.


이명헌이 훈련을 마치고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어슬렁 어슬렁 걸어나오자 저 멀리서 권준호가 기다리는 게 눈에 들어옴. 한여름임에도 늘 단정한 린넨 셔츠와 슬랙스 차림이 보는 눈을 즐겁게 했음. 손에는 이명헌이 좋아하는 학교 앞 카페의 아이스 커피가 두 잔 들려 있었음.


이명헌을 기다리는 권준호의 시야에 이명헌이 아닌 다른 사람이 들어옴. 권준호가 얼굴을 확인하고 잠시 낯빛이 굳어짐.

이명헌의 전 남친이었음.


이명헌의 전 남친은 권준호를 한 번 노려보더니 큰 소리로 뭐라 외치고는 권준호가 들고 있던 캐리어에 손을 뻗음. 아이스 커피 하나를 집어든 전남친이 그걸 그대로 권준호의 얼굴에 끼얹음.


갑자기 쏟아진 커피 세례에 당황한 권준호가 말을 잇지 못하자 이명헌이 그걸 보고 있는대로 화를 내며 달려옴.



"야 너 미쳤어?!! 내 친구한데 무슨 짓이야!!!!"

"친구? 하, 친구? 친구같은 소리하네. 야, 권준호 너 그 친구라는 핑계로 이명헌 옆에 맨날 그렇게 서방마냥 붙어 다녔냐? 사귀지도 않으면서 그게 무슨 개매너야 이 자식아!!"

"뭔가 오해한 거 같은데 나 명헌이랑 그런 사이 아냐."

"오해? 한밤중에도 새벽에도 연락하고, 경기 보러다니고, 방학마다 미국 같이 가면서 오해? 야 이명헌 너 똑바로 말해. 솔직히 나랑 만날 때 이 자식이랑 양다리 아니였냐? 아니냐고?!"

"무슨 그런 추잡한 소리야!!! 권준호 그런 애 아니야! 얘기했잖아! 후배들 때문에 같이 살피는 거 뿐이라고!"

"이게 끝까지 발뺌이야!"


화가 난 전남친이 손을 올리자 이명헌이 질끈 눈을 감았음. 당연히 따라올 타격에 이를 물었던 이명헌은 그 다음 반응이 없자 어리둥절하며 눈을 뜸.


"손부터 올리는 거 보니 그쪽도 딱히 매너는 좋지 않은데?"


권준호가 이명헌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후려치려는 손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음. 커피를 뒤집어써도 안경 너머로 전해지는 냉랭한 눈빛과 단단한 팔에서 나오는 악력에 전남친이 인상을 쓰더니 거칠게 손을 털어내고 등을 돌려 가버림.



전남친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긴장이 풀린 이명헌이 권준호를 살폈음. 불행 중 다행인지 차가운 커피라 다치지는 않았지만 예쁘게 차려입은 셔츠와 슬랙스가 젖어든 걸 본 이명헌이 눈살을 찌푸렸음. 단정한 성격의 권준호에게 이 일이 얼마나 수치스러울 지 짐작이 가서 너무 미안했음.


이명헌이 두터운 손으로 얼음을 털어내고 매무새를 정리해줌. 머리를 털어주는 손길에 미안함이 가득해 권준호는 말을 얹지 않고 얌전히 챙김을 받음.

권준호의 손을 잡아 끈 이명헌이 체육관 라커를 열었음. 외부인 출입 제한이지만 오늘은 방학 앞두고 오전 훈련만 있어 아무도 없는 시간이었음.

이명헌과 같은 바디 워시와 샴푸로 몸을 씻어낸 권준호가 명헌이 챙겨주는 여벌 옷을 받아 입음. 다행히 라커에는 늘 여벌 옷이 있었고 권준호는 이명헌과 키와 어깨가 차이 나지 않아 충분히 입을 수 있었음.

샤워실 밖에서 노심초사 기다리던 이명헌의 눈 앞에 문을 열고 나온 권준호가 자리함. 좀 전까지 긴장감과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하던 이명헌. 이제는 좀 다른 의미로 어쩔 줄 몰라 함.

지금 이명헌의 눈 앞에 있는 건 자신의 옷을 입고 자신과 똑같은 향을 풍기는 막 씻고 나온 권준호였음. 어쩐지 아까보다 더 긴장감이 올라온 이명헌이 입술을 한번 꽉 깨물다 양손을 들어 제 얼굴을 크게 한 번 짝 소리나게 두들김. 그 하는양을 태연스레 보던 준호가 웃으며 옷 고맙다며 인사를 건넴.

이 와중에도 인사를 빼먹지 않는 권준호의 모습에 이명헌은 한숨이 절로 났음.


"고맙긴 뭐가 고맙냐 권준호. 진짜 미안하다. 그 자식이 좀 성격이 과격하긴 한데 너한테 그럴줄은 하...진짜..."

"네가 왜 미안해. 괜찮아."

괜찮다는 듯 웃어보이는 권준호 땜에 할 말이 더 궁색해진 이명헌이 커다란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하며 한탄을 함.




"하 돌겠네 진짜. 사귀지도 않는데 캠퍼스 한복판에서 커피 싸대기가 왠 말이냐 진짜. 하, 정말 사귀기라도 하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사귀기라도 하면?"


이명헌의 마지막 말에 권준호의 눈이 이채를 띄었음. 저도 모르게 불쑥 나온 한마디의 의미를 뒤늦게 깨달은 이명헌이 화들짝 놀라 크게 손을 저음.


"...뿅발!!! 권준호 말이 그렇다는 거다 뿅발!!"

"사귀면 어떻게 되는데 명헌아?"

"뿅발! 뿅발! 뿅됐어용! 그냥 잊어라 권준호!!!!!"


이명헌 정수리까지 벌개진채로 체대 건물로 전력질주함. 180메다의 잘 익은 자숙문어 한 마리가 온몸에서 김을 풀풀 뿜으며 미친듯이 달려감.

그 뒤를 하얗고 말간 180메다의 건장한 사슴남이 뒤쫓는 이 기이한 형태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수군거리기 시작함.


그러거나 말거나 한참을 달린 이명헌은 숨을 고르며 체육 훈련 비품을 가져다놓는 창고 옆 컨테이너 뒤편에서 숨을 골랐음.


"제 아무리 권준호라도 여기까진 못 쫓아올거다 뿅."


그리고 그 잠깐의 한숨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옴.


"나 찾았어 명헌아?"


헐떡거리는 이명헌의 혼잣말에 권준호가 호흡 하나 흐트리지 않고 웃으며 받아줌.



"뿅발 미친 권준호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용?"

"어떻게 왔냐니, 너 따라왔지."

"권준호 의대생 아니라 체대생인거냐뿅. 이럴수 없다 삐뇽. 내 러닝 실력이 이 정도로 허접할 리가 뿅-"

"하하, 네 러닝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도망 갈거면 내가 모르는 곳으로 갔었어야지. 뻔히 다 아는 곳으로 오면 어떡해, 명헌아."


다정하게 웃으며 땀도 흘리지 않고 숨도 헐떡이지 않는 권준호의 모습에 이명헌은 등줄기에 서늘함과 찌릿함을 함께 느낌.



방금 저게 무슨 미친 소리냐 삐뇽

도망갈거면 내가 모르는 곳으로 가라니 권준호 그런 오해받을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냐 뿅!!!! 아무래도 내 뇌가 요즘 로설에 찌들었나 보다 삐뇽. 역시 그노무 파란집 로설을 끊어야 겠다 삐뇽.


아니 그나저나 여길 어떻게 알아 진짜 의대생이 체대 건물을 왜 이리 잘 아냐고 삐뇽 진짜 권준호 학생증 까보면 체대생인거냐 삐뇽



"사귀기라도 하면 억울하지라도 않다며?"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이명헌의 바로 앞에 권준호의 안경 낀 단정한 얼굴이 가득 함. 바로 코 앞까지 다가온 눈 높이가 같은 지적인 미남이 손을 뻗어 이명헌의 단단한 턱을 붙들어 자기 앞으로 고정시킴. 이명헌 아무런 저항도 못한 채 멍하니 권준호 하는대로 끌려가고 있음.


씩 웃어보인 권준호 이명헌 얼굴 딱 붙든 손 그대로 자기 쪽으로 끌어당김. 놀라서 눈도 못 감은 채로 어버버 하는 이명헌 도톰한 입술이 그대로 권준호에게 먹힘.

당황해서 손 둘 곳도 몰라하는 이명헌 그대로 벽으로 밀어세운 권준호 한참을 그렇게 입술 물고 빨고 부비다 이명헌 숨 차 올라 하는 거 보고 놔줌. 헉헉 거리는 이명헌 바라보며 씩 웃어 보이는 권준호.


"그럼 이제 억울한 건 없는거네?"




슬램덩크 준호명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