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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3 01:15
딱봐도 엄청 두꺼워보였음.

붕어눈이 된 주제에 비행기 10시간 넘게 타야한다며? 이거라도 읽어보든가 라고 허세를 부리는 백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꽈악 안은 태웅이는 너무 늦지말라는 말과 함께 진한 키스를 남겼음. 출국 전 키스는 짠맛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태웅이는 비행기에 올라탔음.

귀가 먹먹해지는 시간을 지나 비행기가 안정권에 들어서자 학교 옥상에서도 널부러져 자는 녀석인만큼 태웅이는 곧장 잠에 빠져들었음. 백호의 편지를 손에 쥔 채로.
하지만 미국까지의 거리는 상당해서 그 서태웅이 자다 깼는데도 아직 태평양을 건너는 중이었음. 다시 자도 괜찮았지만 뻑뻑한 눈에 제 손에서 구겨진 백호의 편지가 들어왔음. 너무 자도 안 좋으니까... 태웅이는 편지 봉투를 열어보기로 결심했음.

이런 건 또 언제 썼대. 출국이 다가올수록 두 사람은 거의 한몸처럼 붙어다녔고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까지 내내 몰아붙였는데 언제 이런 걸 준비한건지. 백호의 사랑스러움에 가슴이 저릿해졌음. 아마 감성적인 백호이니 구구절절 자신들의 옛 이야기를 써내려갔더나 아니면 미국가서 한눈팔지 말라는 귀엽고 택도 없는 질투라거나 태웅 자신도 품고있는 불안감을 서슴없이 문자로 나열해 보이는 그런 편지일거라 생각했음.

하지만 열 장은 족히 넘을 것 같은 편지들을 읽어내릴수록 태웅의 예상에 맞는 건 하나도 없었겠지.

[끔찍하게 사랑하는 여우에게.

비행기 안이냐? 아니면 숙소? 어쩌면 아직도 가방 안을 뒹굴고 있거나 아예 잃어버렸을 수도 있겠네. 혹시 이 편지를 다른 사람이 읽고 있다면 서태웅에게 가져다 주세요. This is Taewoong's letter!

내가 네 편지를 잃어버릴 리가 있겠냐, 멍청아. 태웅은 치미는 사랑스러움을 삼키며 다음 문단을 읽어내려갔음.

[미국에 먼저 간다고 우쭐해 있겠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야. 이 천재 강백호가 뒤따라갈테니까! 너무 놀지말라고!

이 문단과 다음 문단 사이의 글자색이 미묘하게 달랐음. 아마 여러날에 걸쳐 쓴 모양이지. 문단이 끝나는 편지지의 가장자리에 물이 한 번 묻었다 마른 흔적이 있는 걸 발견한 태웅의 안색이 어두워졌음. 멍청아...

[미국 생활은 즐겁겠지? 네녀석이 좋아하는 농구도 실컷 할 수 있잖아. 거긴 농구 코트가 편의점 만큼이나 많대. 이곳처럼 농구 코트를 찾겠다고 자전거를 탈 필요가 없는거니 너에겐 천국이겠네.

네가 없는 곳이 어떻게 천국이란거야. 편지를 쥐고 있던 태웅의 손에 힘이 들어갔음.

[그래도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닐거야. 일단 거긴 이 천재님이 없잖아!

당연하지, 멍청아. 태웅이 한숨같은 숨을 내쉬었음.

[그리고 거긴 음식이 다르겠지? 밥 대신 빵을 먹는 나라잖아. 너 어떡할래?

빵도 있고 밥도 있을텐데. 그리고 어차피 식단하면 퍽퍽한 닭가슴살이나 먹을거라 식사는 별 생각이 없었음.

[어차피 넌 식단 관리를 해야하니 닭가슴살이랑 샐러드를 먹을거야 라고 생각하겠지만.

혹시 비행기 안에서 보고 쓴 게 아닐까 싶어 태웅이 슬쩍 뒤를 돌아봤음. 하지만 비행기는 아주 조용했지.
태웅은 다시 몸을 돌려 편지를 읽어내려갔음.

[그래도 가끔은 이곳의 밥이 그리울거야, 나처럼. 그렇지?

혼자 밥해먹고 살기 얼마나 귀찮은지 알아? 넌 모르겠지만 그건 어마어마하게 힘들다고. 게다가 넌 요리엔 재능이라곤 한 톨도 없잖아. 세상에 채웠는데 덜 익혔고 축축한 밥을 만드는 건 너 하나 밖에 없을거다.

태웅이 처음으로 밥을 지었을 때를 이야기하는듯 했음. 얻어먹을거면 돕기라도 하라던 백호는 그 최악의 밥 사건 이후로 태웅에게 부엌 출입 금지령을 내렸음.

[그래도 이제 네가 밥은 해먹고 살아야할거잖아. 매일 삼시세끼를 나가서 사먹는 것도 힘들거고. (닭가슴살은 식사가 아냐!)
그러니까 이 요리천재 강백호님이 여우를 위해 친히 알려주겠어. 잘 보고 따라해!

편지의 첫번째 장은 그렇게 끝이 났음. 태웅이 두번째 장으로 편지를 넘겼음.

[1. 밥짓기(바보는 기본부터)
물 맞추는 것부터 잘해야해. 손가락이 반만 잠길 정도만! 근데 네놈도 손이 크니까 그보단 조금 작게 해도 괜찮을거야.

잘보고 따라하라더니 정말 레시피였음. 태웅의 눈이 휘둥그레졌음.

[밥솥이 있으면 좋지만 없으면 냄비로라도 지어먹어. 냄비밥은 좀 어렵지만 날 따라하면 잘 할거야. 불조절이 관건이야.

백호는 마치 식칼을 처음 잡아보는 어린이를 가르치는 것처럼 태웅에게 밥짓는 걸 세세히 알려주었음. 글자로만 이루어져있었고 조금 두서없긴 했지만 요리치인 태웅도 따라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세세한 레시피였음.

[한국 사람은 밥심인거 알지? 매일 빵이랑 닭가슴살만 먹다보면 네 놈 머리가 노랗게 될지도 몰라. 난 검은 머리 여우가 좋아. 그러니까 일주일에 한 끼는 쌀을 먹어.

레시피 뿐이었지만 태웅은 편지를 읽는 걸 멈출 수 없었음.

[2. 네가 아침으로 좋아하던 감자샌드위치
너 이거 은근 좋아하더라. 그냥 빵만 구워주면 한 쪽만 먹는 녀석이 이건 샌드위치를 두 개나 먹더라고.

재료:감자 두 알(많이 할거면 더 해도 돼. 왕창 만들었다가 나중에 또 먹어),계란 두 알, 마요네즈, 소금, 양배추, 식빵...

이런 것도 알고 있었나. 백호네 집에서 먹고 잔 지는 꼬박 2년을 채웠지만 이정도로 제 식성을 파악한 줄은 몰랐음.

[그리고 이건 나만의 비법인데....사과 반의 반개를 다져서 넣는거야. 이거 아무한테도 알려주면 안돼!

태웅은 천천히 편지를 읽어내려갔음. 온통 레시피였지만 중간중간 섞인 백호의 사담이 가슴을 간지럽게 만들었음.

[4. 지난번에 맛있다고 했던 고기조림.
너 이거 기억나냐? 맛있다고 밥 두그릇이나 먹었잖아. 그 때 맛을 네녀석이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가르쳐주겠어.

7. 소금간 실수했던 만두국.
다시 말하는데 이거 네 탓이야. 니가 갑자기 내 옷 사이로 손 집어넣어서 소금통 빠트렸잖아! 만두국이 짠 건 내 탓이 아니라고. 아무튼 가르쳐주지. 넌 졸다가 소금통 빠트리지나마라.

8. 네가 맵다고 했던 두부 부침.
그 때 아마 매운 고추가 들어갔었지? 네가 재료를 살테니까 이거 만들 땐 안 매운 고추를 넣어. 아니면 고추를 반개만 넣던가.

레시피는 하나같이 백호와 같이 먹은 것들이었음. 레시피를 읽을수록, 백호의 사담과 함께 추억들이 몽글몽글 떠올랐음. 어느새 태웅은 졸음도 잊고 편지에 몰입했음.

[13. 비밀의 계란말이.
너 우리집 계란말이를 항상 궁금해했지. 너희집에서 하는거랑 맛이 다르다고. 계속 비밀로 하고 있었지만...특별히 가르쳐주지.
사실 네가 금방 알아챌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모를 줄은 몰랐어. 너는 날 항상 멍청이라 했지만 너도 똑같아, 내가 보기엔.
아무튼! 우리집 계란말이는 무려...... 꿀을 넣어.

태웅이 저도 모르게 아 하는 소리를 냈음. 어쩐지. 백호네 집도 태웅네 집도 계란말이는 단맛이 났는데 두 집의 계란말이는 맛이 확실히 달랐음. 백호에게 도대체 무슨짓을 하냐고 물었지만 백호는 비법이라며 알려주지않았음.

[15. 하나가 더 들어가야하는 나폴리탄 스파게티
거기도 스파게티는 많이 팔겠지만 가끔 이 맛이 그리울 때도 있을거야. 여기에도 비밀재료가 들어가. 아마 넌 나폴리탄의 소스가 케챱일거라 생각할거야, 그렇지? 단순한 여우놈이니까. 하지만 그냥 케챱만 넣으면 그 맛이 안 나. 굴소스다. 굴소스를 넣어야 우리집에서 먹던 맛이 날거야. 근데 아마 너희 어머니가 만드신 나폴리탄에도 굴소스가 들어갈 걸?

16. 비장의 볶음밥
이건 채소는 아무거나 넣어도 좋아. 근데 햄은 꼭 있어야해. 소시지도 좋은데 햄이 제일 맛있던거 같아. 소스는 굴소스로도 맛있어. 근데 만약에 네가 좀 힘을 얻고 싶으면 비장의 소스를 써. 이거 진짜 비밀이다. 두반장이야. 그걸 반의 반 스푼만 넣으면 맛이 좀 달라져.

19. 비법육수가 있었던 배추찜
너한테는 비법육수가 있다고 했는데...사실은 별거없었어. 어묵을 좀 넣었을 뿐이야.

백호가 비밀이라고 가르쳐주는 레시피는 가슴을 뛰게 만들었음. 2년동안 음식이 맛있어서 무슨짓을 했냐고 물으면 매번 비밀이라고 하던 녀석이었음. 그런 비밀들을 제게 다 알려주다니 그 기분은 어쩐지 짜릿했음.



한참동안 백호의 레시피를 읽고 있던 태웅이는 어느새 마지막 한 장만을 남겨두고 있었음.

[어때? 천재 강백호의 환상적인 요리 레시피야. 이렇게 다 알려줬으니 가게 차리는 건 날라갔네.

가게는 무슨, 얼른 미국으로 와서 농구해야지 멍청아. 들어갔던 태웅의 입술이 또 쭉 나왔음.

[알아. 농구해야하는거. 근데 말이야... 안될 수도 있잖아.

태웅이 놀라 편지를 구겼음. 놀란 심장이 미친듯이 뛰어 승무원이 괜찮냐고 물을 지경이었지만 태웅은 건성으로 대꾸하고 다시 편지를 노려보았음.
안된다니. 멍청아 무슨 수를 써서도 온다고 말해야지. 태웅은 불안한 눈으로 편지를 다시 읽어내려갔음.

[만약을 이야기한거야. 난 최선을 다할거지만 세상은 나에게 상냥했던 적이 별로 없었거든.

레시피를 쓰는동안은 볼펜의 색과 필체가 미세하게 달라졌지만 이 마지막장은 한 번에 썼는지 머뭇거림이 없었음.

[그 날 이후로 내 인생에 다가온 상냥함은 호열이었고 대남이랑 용팔이랑 구식이었고... 그 다음엔 소연이었고 그리고....너였던 것 같다.
난 그런 너랑 농구할 수 있어서 행복했어. 앞으로 나는 계속 농구를 할테지만 너랑 같이 한 농구는 뭔가 특별했어.
어쩌면 세상이 더이상 나에게 상냥하지 않아서 너와 했던 농구는 올해가 끝일 수도 있겠지. 그래도 난 괜찮을거야. 너랑 했던 농구는 아마 강백호의 농구가 끝날 때까지 잊지 못할테니까.

이 레시피를 준 건 만약을 위해서야. 내일도 모레도 한달 뒤에도 1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너랑 같이 밥먹고 농구하고 싶지만...앞서 말했듯이 상냥함이 오늘까지일 수도 있고 내일까지 일 수도 있으니까.

난 혼자 챙겨먹는 밥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건지 알아. 아마 너도 곧 알게 되겠지. 그래도 굶으면 안돼. 굶지 말라고 내 비밀 레시피들도 다 알려준거야. 혹시 내가 미워도 레시피랑 음식은 미워하지 마라.

언젠가 너랑 저 요리들을 다시 먹을 날들을 바라보며 농구할게. 너도 내 생각하면서 먹어줘. 사랑해, 여우야.]






태웅이 떠나고 2년이 지나 백호도 비행기에 올랐음. 태웅이와 같은 학교는 아니었지만 차를 타고 두 시간이면 만날 수 있는 거리였음. 그만한게 어디야. 비행기 타고 열두시간을 가야 만나야 하던 때를 지나서 그런지 2시간은 찰나처럼 느껴졌음.

긴장과 설렘으로 열두시간을 꼬박 샌 백호는 조금 창백한 얼굴로 비행기에서 내렸음. 비행기에서 내내 들떴던게 무색하게 캐리어를 잡자마자 피로가 느껴졌음. 숙소에 가서 잠깐 잤다가 만나러 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출국장을 나선 백호는 곧바로 태웅과 맞딱뜨렸음. 감격의 상봉도 잠시 태웅은 곧바로 백호를 데리고 제 집으로 갔음. 백호는 조금 조급한 태웅의 태도에 순순히 따라갔음. 그도 그럴게 2년이나 못 만났으니...
하지만 태웅을 따라 들어간 집에는 의외의 풍경이 펼쳐져있았음.

"...이게 다 뭐냐?"
"뭐긴 뭐야. 밥이다, 멍청아."

태웅의 집 식탁에는 접시가 빼곡하게 놓여있어 빈틈이 하나도 없었음. 설마 나 온다고 이걸 다 한거야? 라고 하기엔 양이 너무 많았음.

"혹시 섭섭이랑 까까중도 와?"

백호의 말에 태웅이 고개를 저었음.

"오늘은 나랑만 있겠다고 했어."
"아니, 여우야. 나 온다고 준비한 건 고마운데..."

이건 너무 많지 않냐. 태웅이도 백호도 식성이 좋다지만 둘이 다 먹어도 반은 남을 양이었음.
백호의 기쁘지만 조금... 스러운 태도에 태웅이 울컥해 외쳤음.

"같이 밥먹기로 했잖아!"

밥? 같이? 태웅의 말에 잊혀졌던 기억 하나가 떠오른 백호는 황급히 요리를 살폈음. 어딘지 익숙한 요리들이었음.

"나 이제 요리 잘 해. 밥물도 잘 맞추고 계란도 안 태워. 고기조림은 제일 자신작이야."

설마... 백호가 젖은 눈으로 태웅을 바라보았음.

"이제 같이 밥먹고 같이 농구할 수 있어. 그 망할 상냥함 내가 죽을 때까지 퍼부어줄테니까......"

태웅이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백호가 달려들어 태웅을 껴안았음. 태웅은 축축해지는 어깨에 가만히 백호의 등을 감쌌음. 마지막으로 안았을 때보다 훨씬 커진 등이 이녀석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말해주고 있었음.

"식기 전에 먹어. 그리고 농구하러 가자."

결국 그 말에 백호의 훌쩍임이 울음으로 변했지만 태웅은 별로 상관없었음. 밥이야 식으면 데우면 되고 농구는 언제든 할 수 있고 무엇보다 강백호가 제 품에 안겨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다 괜찮았음.



태웅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