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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8 00:54
치수는 황족인데 계승서열은 많이 뒤일듯. 부친이 황제 동생인데 초초늦둥이라 치수가 황제한텐 조카인데 거의 손주뻘... 거기에 황제 슬하에 아들만 셋인지라 치수는 황제 동생 아들인데도 계승 서열이 딱히 높지않음. 황궁에서 살진 않지만 늦둥이 동생인 치수 부친을 황제가 이뻐라해서 황궁만큼이나 화려한 사택에서 살겠지. 걍 가만히 있어도 먹고사는데 지장없지만 공부에 뜻이 있어서 공부하는 치수일듯.

백호랑 첫만남은 딱히 안 좋았을거임. 치수네 금지옥엽 소연이가 길에 쓰러진 백호를 주워왔거든. 다들 어디서 저런 거렁뱅이를 주워왔냐고, 치수도 화를 냈지만 소연이는 길에 쓰러진 자를 어떻게 그냥 보내냐며 백호를 직접 돌봤음. 원래 백호는 떠돌이패에 있었는데 빨간머리라고 신기한 동물 취급 당하다가 떠돌이패에 안 좋은 일이 연이어 일어나자 불길하다며 버리고 간 것이었음. 백호가 잠든 사이에 묶어두고 떠돌이패가 도망갔는데 백호는 며칠동안 밧줄을 끊고 떠돌아다녔는데 민가라고 다를 건 없어서 백호 빨간 머리를 보고 다들 돌 던져댔지. 그러다 결국 굶주림을 못 이기고 쓰러진건데 그걸 소연이가 주워온거였음. 거의 죽기 직전이던 백호는 소연이의 보살핌으로 정신을 차렸고 자기를 구해준 소연이에게 엄청 고마워했지. 집에선 정신 차렸으니 내보내라 라고 했지만 소연이는 백호가 오갈데가 없다며 집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했음. 당연히 집안 사람들은 반대했는데 의외로 치수가 소연이 편을 들어줬음. 저 이상한 놈이 동생한테 허튼 짓 할까봐 소연이가 백호한테 갈 때마다 동행했던 터라 백호가 바보같긴 해도 순수하고 착한 애라는 걸 얼마 지나지않아 알았거든. 치수는 소연이에게 놀이 동무로 붙여주자고 했고 어른스러운 치수가 그렇게 말하니 어른들도 어쩔 수 없이 허락했음.

백호는 사실상 천민 신분이었지만 치수네에선 신분으로 그렇게 차별받지 않았음. 백호를 데리고 다니는 소연이부터 백호에게 스스럼없이 굴었고 백호는 소연이 말이면 껌뻑 죽었지. 백호는 치수를 언젠가 보았던 외국의 커다란 원숭이와 닮았다며 고릴라라고 불렀지만 치수도 건방지다 하면서 크게 제지를 하진 않았음. 그러다보니 일하는 사람들도 뒤에서 욕할지언정 앞에서 막말은 못했음. 물론 처음부터 그런건 아니었음. 치수네가 워낙 귀한 집안이라 그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자부심이 있었는데 어디서 굴러들어온 돌이 그 댁 아씨와 도련님과 친하게 지내니 아니꼽게 보는 자들이 있었거든. 그래서 주인들 눈치 슬금슬금 보면서 백호를 엄청나게 구박했음. 먹는 것도 먹다남은 거 한 그릇에 몰아서 던져주고 잠자리도 찢긴 이불인데 수선 안 하고 그냥 던져주고 신발에 돌멩이 넣어두고 이랬겠지. 근데 백호는 워낙 떠돌이 생활에 익숙해서 그냥 지붕 있는데서만 자도 좋았고 밥도 배부르면 최고인거라 별 생각이 없었을거임. 신발에 돌 들어간 건 빼면 되는거고! 그런 마인드라 괴롭힘이 안 먹히니 점점 수위가 올라가겠지. 이젠 아예 같이 밥먹지도 않아서 백호는 제 몫으로 나온 쉰 나물이 올라간 밥그릇을 들고 뒤뜰에 쭈그려 앉아 밥을 먹었음. 옛날에 구걸 받은 음식이랑 비슷하긴 한데 양이 많아서 좋다고 와구와구 먹던 백호를 치수가 발견해서 다가왔음. 왜 다같이 안 먹고 여기서 청승 떠냐는 말에 백호가 청승 떠는거 아니라며 밥 냠냠 먹었음. 백호가 맛있게 먹고 있긴 했지만 치수는 자기네 집에서 이런식으로 하인들 밥 안 주는거 아니까 괴롭힘인거 바로 눈치를 챘겠지. 그간 가까이 지내면서 백호랑 꽤 정이 붙었던 치수는 그 모습에 울컥했음. 이 집안 주인인 소연이나 저와 건방지게 친구마냥 지내는 사이이면서 이런 일은 또 어찌 남일인 것마냥 말 한 마디 안 해준건지. 따지자면 뒷배라는 게 있는 건데 우직한건지 무식한건지 혼자 참아내는 백호가 어이없으면서도 애틋하게 느껴졌음. 복잡한 심경으로 백호를 보던 치수는 밥그릇을 뺏어 던지고 백호를 데리고 제 방으로 갔음. 왜 밥 잘 먹고 있었는데 뺏냐고 성질내는 백호 자기 방에 들어앉혀놓고 밖에 하인에게 점심상을 2인분 차려오라 명했음. 하인은 일단 차려오래니 차려왔는데 방에 백호 있는거 보고 속으로 엄청 놀랐겠지. 2인용 식사가 나오고 치수가 은수저를 백호 손에 쥐어줬을거임.

-앞으로 여기서 밥먹거라.

영문 모를 일에 백호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고기밥상에 침이 질질 흐르는게 먼저였음. 나중에 말 바꾸기 없기다? 라며 허겁지겁 밥을 밀어넣는 백호를 보며 치수가 혀를 찼음. 그러다 목 막힌다며 국을 앞으로 밀어주고 백호가 잘 먹는 반찬은 더 가져오라 일렀음. 백호 실컷 먹인 치수가 백호는 다시 소연이한테 돌려보내고 하인들 죄다 불러모아 기강 쎄게 잡았음. 자기 집안 사람들이 그럴 줄은 몰라서 진짜 실망했거든. 한바탕 집안 뒤집고 그 뒤로 백호한테 눈길 한 번 더 가고 챙기기 시작함.

백호는 치수와 소연이 비호 아래 무럭무럭 자랐음. 어릴 때야 놀이동무였긴한데 치수보단 못해도 집에서 제일 큰 치수 다음으로 커버리자 치수는 백호에게 검술을 가르쳤음. 그 덩치인데 놀이 동무나 기껏해야 하인으로 끝내기는 너무 아까웠음. 치수는 직접 백호를 데리고 검술을 가르쳤고 백호는 몰랐던 재능을 꽃피워나갔음. 물론 백호가 하기 싫다고 중간중간 땡땡이 치긴 해서 치수가 한숨을 쉬긴 했어도 백호는 꽤나 수업을 잘 따라왔음. 치수도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백호가 신분만 안 걸렸어도 무관 시험은 거뜬했을거라 생각했지.

나이가 어느정도 차자 소연이는 신부수업을 시작했음. 귀족가 여식의 운명이었지. 소연이가 신부 수업을 받는동안 시간이 빈 백호는 눈치껏 몸쓰는 일을 거들기 시작했음. 일단 호위무사이긴 했는데 집에서 뭔 일이 나겠냐고. 누가 시킨건 아니었지만 백호도 나름 눈칫밥 먹고 자란 터라... 물론 치수는 그게 탐탁치않았음. 자기 집안 사람들이 지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참 속도 없다 라고 생각했겠지.

-왜 쓸데없는 짓을 해?
-할 일이 없걸랑. 쌩 놀면 뭐해? 시간 아깝게.
-할 일이 없긴 왜 없어. 어렵게 소연이 호위무사로 붙여놨더니 땡땡이나 치고.
-소연 아씨 지금 글공부 중이그등?

수업 중인 아가씨가 무슨 위협을 당하겠어. 코웃음을 치며 쌀가마니를 드는 백호를 보는 치수의 표정은 썩 좋지않았음.
그 때 한바탕 집을 뒤집긴 해도 백호는 여전히 뒷말이 많았음. 치수와 소연이 백호를 아껴서 그런건진 몰라도 백호는 계속 하인들틈에서 겉돌았음. 그 때처럼 대놓고 구박은 안 해도 끊임없이 뒷말이 돌았지. 이렇게 잡일하는 하는 것 또한 백호가 뒷담을 들어서 그런 것이었음. 탱자탱자 노는게 꼴보기 싫다던가, 인생 폈다든가, 누구는 고생하는데 쟤는 노는게 짜증난다던가 하는거였지. 백호는 은근히 예민한 아이라 그런 뒷말에 눈치를 보며 잡일을 하는거였음. 물론 잡일을 한다고 해서 시선이 고와지는 건 아니고 신분이 천해서 일하는 걸 좋아한다든가 같은 뒷담을 또 하지만... 그걸 다 아는 치수는 백호가 차라리 진짜 놀았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음. 백호는 제가 호위무사를 맡게된 이후로 제대로 잔 적이 거의 없었음. 밤마다 소연이 방문을 지키고 섰거든. 굳이 경비가 이미 삼엄한 저택에서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백호는 불침번을 꼭 섰음.제가 자고 있을 때 패거리가 버리고 간 기억 때문인듯했음. 그래서 소연이랑 치수랑 같이 있으면 같이 놀기는 커녕 모자란 잠을 자기 바빴지. 성실한 백호인 걸 아는 치수는 백호가 답답했음. 어차피 욕 들어먹을 건데 굳이 일을 하다니..참 멍청할만큼 우직하다 싶었음. 떨떠름하게 백호를 보고 있던 치수가 백호를 불렀음.

-따라와라.

그 뒤로 치수는 백호를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음. 백호가 빈 시간에 쓸데없는 잡일을 안 하게 하려는 거였지. 검술 연습을 할 때도 있었고 백호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고(이건 검술 가르치는 것보다 더 어려웠음) 종종 시장에 같이 나가 구경하기도 했고 낮잠을 재우기도 했음. 백호는 귀찮다고 툴툴 거리긴 했어도 치수를 잘 따라다녔음. 백호는 어릴 적부터 애정에 목말라있었기에 이렇게 자기 챙겨주는 건 아닌 척 정말 좋아했거든.

소연이가 나이가 더 차면서 신부수업 시간이 늘어나자 치수와 함께 하는 시간이 더 잦아졌음. 어느새 사이도 이전보다 훨씬 가까워졌겠지. 원래도 스스럼없는 사이이긴 했는데 거의 하루종일 붙어있다보니 더 가까워졌음. 그러다보니 백호는 명목상으론 소연이의 호위무사였지만 치수가 데리고 다니자 치수의 무언가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음. 물론 실제로 그런 건 아니었고 치수는 그냥 아끼는 동생 데리고 다니듯 한 것이었을 뿐인데 소문이란 건 원래 이상하게 시작하는 법이었고 집안 어른들 귀에까지 들어갔겠지. 정식 혼인 전에 첩실을 들이는 건 남들 보는데 안 좋다는 꾸중에 치수는 어안이 벙벙했지.

-첩실.....제가 말입니까?
-그래. 요사이 네가 끼고 다니는 그 붉은 머리 말이다.

치수는 설마 백호와 그렇고 그런 사이로 오해받을 줄은 몰라 철쩍 뛰었음. 그저 아끼는 동생 같은거라고, 검술이 뛰어나 데리고 다니는 것 뿐이아며 해명했지만 어른들은 탐탁치않아했음.

-어찌되었건 음인이 아니더냐. 너도 곧 혼사가 있을 텐데 몸가짐을 바로 하거라.

한바탕 꾸중을 듣고 나온 치수는 하필이면 또 바로 백호를 맞닥트렸음. 아직도 어이가 없어서 좀 멍한데 소문 당사자를 만나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지.

-고릴라, 어른들한테 혼났다며? 왠일이래?

키득키득 웃는 백호는 음인이라기 보다는 아직도 꼬질꼬질하던 그 때 그 꼬마로 밖에 보이지 않았음. 이런 녀석이랑 무슨... 치수가 피식 웃었음.

-또 땡땡이냐.
-땡땡이 아니거든! 아씨 수업 시작해서 그래!

이제는 아주 루틴이라 소연이가 수업만 시작하면 백호는 치수를 찾아왔음. 그게 꼭 강아지같다고 생각하며 치수는 백호에게 말을 꺼내오라 했음.

-어디가?
-스승님 댁에. 너는 집에 남아있거라.
-어? 왜?
-스승님이 편찮으셔서 그렇다. 문병 가는데 사람을 주렁주렁 데려갈 순 없잖느냐.

순간 치수는 또 제가 없으면 백호가 잡일을 할 것 같아 마음이 쓰였음. 그러고보니 이 녀석도 음인이었지. 치수가 툴툴거리는 백호에게 넌지시 말했음.

-너도 같이 수업 듣는게 어떠하냐.
-내가? 신부수업?
-너도 음인이니 언젠가는...

백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음.

-됐어. 나같이 덩치 크고 빨간 머리인 음인을 누가 받아줘?

이 집에 온 이후로 한 번도 백호 몸이나 머리색으로 뭐라한 적 없는데 백호는 너무나 당연하게 스스로를 비하했음. 그 모습에 치수는 뭔가 울컥하고 올라오는 기분이었음.

-나중에 아씨 시집가면 따라갈거야. 호위무사 겸 몸종 이면 충분해.

백호는 혼사 같은 건 제 인생에 없을거라는 어투로 딱 잘라 말했음. 그런 백호를 물끄러미 보던 치수는 네 맘대로 하라며 자리를 떴음.

스승의 문병을 간 치수는 같은 학당 학우들을 만났음. 사실 사이는 별로 안 좋음. 걔네는 치수가 혈통 잘 타고 나서 개꿀 빤다고 뒷담 까는 애들이라... 치수가 매일 밤마다 글공부한다는 건 일부러 무시한 채 치수를 혈통만 좋은 인간으로 몰아갔지. 정작 귀족 신분으로 능력도 없는데 개꿀 빠는 건 지들이면서... 하지만 그건 어린 시절이었고 어느정도 대가리가 크고 나니 옛날처럼 치수를 막 대하진 못함. 자기들도 곧 정계 나가야하고 방계이긴 하나 황족인 치수한테 눈도장 한 번 찍어놓으면 나중에 편하겠다 싶었던거지. 물론 치수가 친하다고 막 밀어주고 이런 인물은 아니지만 그걸 생각할 대가리였다면 애초에 혈통빨이라고 뒷담을 안 깠을 것... 아무튼 치수에게 비벼보려 하던 어느집 자제가 치수에게 사냥 대회에 오지않겠냐고 초대했음. 치수는 학우들과 사이가 안 좋으니 굳이 그런 친목회는 가지 않아도 됨. 오히려 저쪽에서 와주면 감사한 위치지. 하지만 거절하려던 치수는 문득 백호가 떠올랐음. 사냥엔 딱히 관심이 없지만 백호가 좋아할 것 같아 치수는 저도 모르게 가겠노라 답했음. 갑자기 튀어나온 산뜻한 수락에 입의 주인인 치수가 당황했지만 학우는 치수의 수락을 받고 신이나 폴랑폴랑 사라진 뒤였음. 어쩔 수 없나... 오늘 꾸중을 들은 참이지만 사냥대회이니 별 일은 없을거였음. 치수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다가도 백호가 좋아하는 얼굴이 쉬이 그러져 슬쩍 웃고 말았음.

아니나 다를까 백호는 엄청 좋아했지. 사냥 같은거 가본 적 없지만 재밌을 게 분명하잖아. 치수도 덩달아 들떠서 어른들 주의도 잊고 백호한테 승마도 가르쳤음. 백호가 적잖이 잘했으면 몰라 투덜거려도 가르치면 잘 따라와서 가르치는 맛이 좋았지. 물론 승마 한 번 배우고 나면 엉덩이가 아프다, 말이 성질이 더럽다 칭얼거렸지만. 그렇게 백호는 승마까지 배우고 치수랑 같이 사냥대회에 갔음. 어찌되었건 사냥 대회였기에 치수나 백호나 이길 마음이 잔뜩이었음. 그런데 친목회에는 여전히 치수 싫어하는 놈들도 꽤 있었음. 몇몇이 폐하의 조카 나으리께 영광을 바쳐라 는 식으로 빈정거렸음. 치수가 황족이니 남들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1등은 치수꺼다 이거였음. 치수는 순간 울컥했지만 함부로 화를 낼 수 없었음. 이런거에 하나하나 반응하면 끝이 없다는 걸 알기에... 하지만 먹금하려는 치수 뒤에는 미친 어그로 킹 강백호가 있었고 백호는 니들이 쫄리니까 그런거 아니냐며 귀족 자제들에게 시비를 털어댔음. 종자 나부랭이가 귀족에게 대들다니, 목이 날아가도 할 말 없었지만 그 종자의 주인이 치수라면 말이 다르지. 다들 얼굴이 시뻘개져서 말도 못하고 백호만 노려보는데 치수가 백호에게 쓸데없는 소리 하지말라고 호통치며 데리고 갔음. 겉으로 보기엔 백호를 꾸짖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치수는 백호가 대신 나서서 시비 턴 게 꽤 맘에 들었음. 백호는 입만 산 녀석들에게 본 때를 보여주자며 씩씩거렸고 치수는 바보같이 굴지 말라고 말해놓고 슬쩍 웃었지.
치수가 가르치긴 했지만 백호는 사냥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보였음. 보통 종자들은 주인을 보조하는 역할을 해서 몰이를 하거나 사냥을 해도 막타는 주인에게 넘겨주는 법이었음. 하지만 백호가 그걸 알 리는 없었고 신이 나서 사냥터를 뛰어다녔지. 백호가 첫 사냥에 사슴 한 마리를 잡자 치수가 기특함에 머리를 북북 쓰다듬었음. 치수에게 아부하러 온 사람들도 백호를 칭찬하자 백호 어깨가 산처럼 높아졌지. 하지만 모두가 치수와 백호의 승승장구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음. 일전에 치수에게 시비털다 백호에게 입으로 두들겨맞은 놈들은 사냥 실력이 뛰어난 백호가 아니꼬왔지. 치수한텐 시비 터는게 한계가 있으니 만만한 백호에게로 화살을 돌린거임. 그래봤자 종자놈이니 뭐 어떻겠냐던 놈들은 사냥 중 몰래 백호를 겨냥했음. 그 놈은 실수인 척 백호를 쐈고 백호는 오른쪽 날개뼈에 화살을 맞고 말았음. 다들 치수가 화를 낼거라는 건 알았음. 자기 종자가 화살에 맞았잖아. 하지만 모두 간과한 게 치수의 분노 정도였음. 치수는 직접 백호를 업고 야영지로 돌아갔고 당장 의원을 불러 치료케 했음. 그리곤 활을 쏜 자를 잡아넣으라 했지. 아무리 그래도 천민인 종자를 쐈다고 귀족을 잡아넣으라니, 다들 당황했지만 치수가 살인 미수라며 서슬이 퍼래져 당장 관아에 연락을 넣어 끌고 가라했음. 기껏해야 화나 벌컥 낼 줄 알았지 설마 재판까지 열릴 줄은 몰라 다들 수군거렸음. 사냥대회는 그렇게 흐지부지 마무리되고 백호는 등의 상처 때문에 바로 움직일 수 없었음. 사실 치수가 가자 하면 등이 찢어지든 뼈가 갈라지든 가야하는 신분이었지만 치수는 백호가 어느정도 나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음.

백호는 별 것 아니라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꽤 깊은 상처였음. 치수는 속이 상해 매번 백호를 살피는 의원을 닥달했음. 그러다보니 백호와 치수를 둘러싸고 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음. 그냥 귀족도 아니고 황가 사람과 천민이 흘레붙었다는 소문에 모두가 관심을 기울였음. 야영지에서 사람들을 모시는 노예들은 특히나 백호를 궁금해했음. 도대체 얼마나 반반하면 그 꼿꼿한 양반을 꼬셨냐고. 그 중에는 호기심에 겁대가리가 나간 자들도 있었고 결국 몇 명이 백호를 구경하러 갔음. 백호는 어느정도 몸이 나아 방 앞을 슬슬 걸어다닐 정도는 되었음. 마침 백호가 답답함을 못 이겨 정원에 산책을 나왔을 때 노예 무리와 마주쳤음. 노예 무리는 백호를 보고 놀랐지. 성질이 불같은 그 댁 도련님이 음인 하나를 끼고 산다더니, 심지어 사냥대회까지 끌고 왔다니 어떤가 하고 다들 구경온거였는데 왠 팔척장신이 있으니 다들 수군수군거림. 백호는 이런 취급 이미 익숙해서 귀나 후비고 있는데 좀 질 나쁜 놈들이 백호 툭툭 건드리기 시작함. 음인을 사냥대회까지 끌고 온거 보니 뭐가 있는 것 맞는데 첩으로 삼았단 말도 없는거 보니 하룻밤 노리개구나 싶었던거. 밤일을 얼마나 잘하길래 저 대쪽같은 도령을 꼬셨냐, 그 덩치로 진짜 음인 맞냐, 음문이 아니라 양물이 달려야 할 것 같다고 낄낄 거리며 백호를 툭툭 건드렸음. 백호는 성질같아선 다 때려눕히고 싶었는데 치수가 기껏 데려와준 곳에서 사고치고 싶지않았음. 나중에 또 이런데 와보고 싶단 말이지. 백호 걍 입 다물고 멍때리는데 그거 본 놈들이 백호가 겁먹었다 생각해서 더 건드리기 시작함. 턱도 잡아서 돌려보고 허리도 찔러보고 심지어 아랫도리 살피는 시늉까지 해댔지만 백호는 가만히 있기만 했음. 그런 백호의 태도에 꼴받은 놈 중 하나가 얼마나 맛이 좋길래 그 댁 도련님을 꼬셨냐며 자기도 한 번 먹어보자고 시비를 털었음. 확연하게 달라진 수위에 옆에서 헉 하고 놀랐지만 백호가 워낙 꼿꼿하게 있으니 빈정 상한 놈은 정말 백호를 잡아 끌고 가려했음. 백호는 아 진짜 귀찮네하고 패대기 칠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얼음장같은 호령이 떨어지겠지. 뒤를 돌아보니 치수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서 있었음.

치수가 성큼성큼 다가와 백호를 잡아 제 뒤로 물리고 놈들을 노려보자 녀석들이 냅다 엎드렸지. 자기네가 관리하는 노예들이 치수네 종자 희롱하는 걸 들켰으니 노예들 주인이 헐레벌떡 나와 고개를 조아렸음. 눈 앞에서 백호 희롱당한 꼴을 본 치수는 눈이 돌아가 당장 이 자들을 잡아 가두라 했겠지. 주인이 혼비백산해 노예들을 끌고갔고 치수와 백호만 덩그러니 남았음. 백호는 괜히 치수 눈치를 봤음. 자긴 괜찮다며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치수를 달래는데 오히려 치수의 화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지.

-너는 왜 가만히만 있어!
-이렇게 시끄러워지는 것보단 낫지. 별 것도 아닌데...

대놓고 희롱을 당했는데도 아무렇지않아하는 백호에 치수가 벌컥 화를 냈음.

-바보냐! 왜 별 것도 아니야!

그 때 치수에게 화를 식히라고 말하듯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음. 급작스럽게 내린 소나기에 치수와 백호는 조금 전 일도 잊고 서둘러 처마 밑으로 들어갔음. 조금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먼저 말을 꺼낸 건 치수였음.

-누가 널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해. 네가 너를 아끼지 않으면 어쩌자는거냐.

천민에 음인으로 태어난 이상 이런 취급은 어느정도 체념하고 있던 백호는 치수의 말에 코 끝이 찌릿해졌지. 그치만 치수 앞에서 우는 건 너무 볼썽사나우니까 괜히 투덜거렸음.

-어차피 때려눕힐 생각이었어.

끼어드는 바람에 못 한거였다고 백호가 툴툴거리자 치수도 어느정도 화가 가라앉았지. 하지만 백호는 재앙의 주둥아리를 가지고 있었음.

-그리고 걔들은 그냥 내가 신기한거야. 날 발가벗겨도 별 짓은 못 할 걸?

용케 가라앉고 있던 화를 다시 들쑤시는 백호였음.

-바보같은 소리!

하지만 백호는 귀나 후빌 뿐이었음.

-무늬만 음인이라구. 누가 나를 음인으로 봐?
-너도 음인이다!

그 말에 백호가 장난스럽게 말했음.

-고릴, 내가 음인으로 보여?

순간 치수가 말을 잇지 못하자 백호가 낄낄 웃었음.

-거봐, 아무도 음인으로 안 본다니까?

때마침 비가 그쳤음. 백호가 이만 돌아가자고 하기도 전에 치수가 자리를 떴음. 성큼성큼 걸어가는 치수에 백호는 치수 화가 안 풀렸나..싶었겠지.

물론 치수 화가 안 풀렸다거나 그런 이유가 아니었음. 남들이 뭐라 하건 말건 너는 음인이라고 말하려 고개를 돌린 치수는 비에 젖은 백호와 마주했지. 어릴 때부터 물장난 친다고 젖어있던 건 자주 봐왔지만 지금은 느낌이 조금 달랐음. 물놀이를 하느라 홀딱 젖은 꼬마 소년이 아니라 싱그럽게 젖은 음인이 제 눈 앞에 있었음. 그러니까 정말로 백호를 음인으로 봤다는 말이었음. 이제껏 백호를 어린 동생 그 이상도 그 이하로도 보지않았던 치수는 새롭게 뜨인 제 시각에 놀라 도망치듯 자리를 떴음. 뒤에서 백호가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게 꼭 저를 사냥하러 오는 맹수의 소리 같다고 생각했겠지.




사냥대회 이후로 치수는 백호를 피하기 시작했음. 어린 동생으로만 봐왔던 애가 갑자기 음인으로 느껴지니 스스로에게 자괴감도 들고 무엇보다 백호를 볼 낯이 없었음. 자기 마음이 가다듬어지면 다시 보겠다 생각하고 치수는 열심히 백호를 피했지. 어차피 핑계는 많았음. 공부라던가 학우들과의 만남이라던가... 하지만 아무리 핑계를 댄다고 해도 하루에도 몇 번씩 부르던 사람이 갑자기 감감무소식이 되니 치수가 거리를 두고 있단 걸 모를 수가 없었음. 백호는 역시 지난번 사냥대회가 문제였나보다 하고 기가 팍 죽어 지냈지. 백호가 기가 죽어 지내도 치수가 거리를 두니 그걸 볼 수도 없었음.

그 와중에 집안에서는 백호의 처우를 두고 말이 나오기 시작했음. 남매가 천민을 끼고 도는 것부터 남들에게 못 보일 일인데 그 천민이 자꾸만 치수와 염문 같은 걸 일으키니 골치가 아픈거였음. 사냥대회 이후로 치수와 백호가 무언가 있다는 소문이 수도에 퍼졌고 지금도 부상을 입었다는 이유로 온갖 호화스런 약재를 갖다주곤 했음. 어른들은 치수의 남다른 행보에 심상치않음을 느꼈고 애초에 싹을 잘라야 한다며 백호를 집에서 내보내기로 결정했음. 함부로 내쫓았다간 그를 아끼는 채남매가 난리를 칠게 뻔하니 집안 어른들은 백호를 혼인시키기로 하고 행랑아범에게 적당한 자를 물색하라 했음.

하지만 백호는 천민인데다 머리까지 새빨개서 같은 천민들도 꺼려했음. 암만 천민이래도 또 그들 사이에선 급이 나뉘는거라 아예 어미아비도 모르는 녀석은 하급 중에 하급으로 여겨졌음. 그러다보니 백호를 처로 맞이할 만한 사람은 질이 극도로 나쁘거나 어딘가 하자가 많은 사람들이었음. 이런 저런 논의 끝에 백호를 처로 맞이하겠단 사람이 나왔음. 마을 외곽에 사는 팔십이 넘은 늙은이였음. 앞서 처가 셋이었는데 죄다 못살게 구는 바람에 한 명은 애 낳다 죽고 한 명은 목 매달아 죽고 한 명은 도망가다 죽었다는 것이었음. 마지막 처는 그 늙은이가 패죽였다는 말도 있어서 소문이 영 흉흉한 자였음. 사실 팔십이 넘었으니 처가 굳이 필요없었지만 그 늙은이는 제 수발을 들어주고 학대할 만한 자가 필요했던 것이었음. 집안 사람들도 그 자에게 백호를 보내는 건 좀 찝찝했지만 그 자가 아니면 마땅히 보낼 자가 없었음. 적당한 사람을 찾아보려해도 죄다 백호를 퇴짜놨거든. 그 사람이 사실상 마지막 보루인지라 어쩔 수 없었음. 집안 어른들은 채남매 귀에 들어가지않게 빠르게 일을 처리하라 했음. 하지만 집안 대소사에 하인들이 빠질리가 있나. 알음알음 백호가 미친 늙은이에게 시집간다는 소문이 퍼졌음.

평소 백호를 시샘하던 하인들은 꼴이 좋게 되었다며 좋아라했음. 주인들 비호만 믿고 떵떵거리며 살더니 그런 늙은이 처로 들어간다며 다들 비웃었지. 그래도 첩이 아니라 처가 어디냐며 백호의 처지를 놀려댔음. 하지만 백호를 그렇게 이유없이 미워하는 자들만 있는 건 아니었음. 백호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하녀들은 백호의 혼인 이야기를 듣고 기겁했지. 설마 그 미친 늙은이랑 이어주려하다니 어르신들 너무한 거 아니냐며 다들 발을 동동 굴렀음. 그 때 누군가 도련님과 아씨는 이 사실을 아냐고 의문을 던졌음. 그러자 다들 뭔가 이상한거임. 채남매가 그렇게 백호를 아끼는데 그 미치광이에게 시집을 보낸다? 말이 안된다는 걸 깨달은 하녀 몇 명이 치수와 소연이를 만나러 쪼르르 달려갔음.

치수는 백호 혼사가 결정되었다는 청천벽력같은 말에 기함했음. 백호 주인은 따지자면 소연이었고 치수였는 걸. 왜 자기들도 모르게 백호를 보내느냐며 어른들에게 따지고 들었지만 어른들은 백호도 수락했다며 네가 더이상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말했음.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치수는 백호를 찾아갔음. 백치도 아니고 뻔히 미친 늙은이 소리 듣는 그런 자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언제는 시집 안 간다고, 소연이 따라 간다더니? 하필 혼인을 해도 그런 놈에게 간다니 제정신이냐고 쏘아붙이는 치수의 말을 백호가 덤덤하게 들었음.

-내가 그 치랑 비슷한가부지.

심드렁한 백호의 말에 치수는 속이 뒤집어지다 못해 창자가 꼬이는 기분이었음. 평소엔 천재랍시고 거드럭거리더니 왜 이런데선 자꾸만 스스로를 후려치는지 몰라. 치수는 마음같아선 가슴을 퍽퍽 치고 싶었지만 그나마 귀족 체면이 막았지.

-네가 뭐가 모자라서!

울컥해 내뱉은 치수의 말에 백호가 씨익 웃었음.

-그렇게 말해준거 고릴이랑 아씨 뿐이야.

태어나서부터 빨간 머리 천민이라고 손가락질 당했는데 유일하게 저를 사람 취급해준 게 치수와 소연이었음. 어디까지 봐주나 싶어 일부러 뻐기고 날뛰었지만 두 사람은 그런 백호를 그저 따뜻하게 봐주기만 했음. 그런 둘과 영영 함께 한다면 좋겠지만 그건 그러 바램일 뿐이지. 어른들은 백호의 혼사를 강요하며 치수의 앞길을 막지 말라 그랬음. 그 말 한 마디에 백호는 모든 걸 수긍했지.

-나 좋다는 사람 있을 때 가야지. 또 어디서 혼처를 구하겠어.

백호가 일부러 장난스럽게 종알거렸음.

-이래봬도 가정을 꾸리는 게 꿈이걸랑.

아이도 두엇은 낳고 싶고, 그러니 누가 오라 할 때 가야한다고 말하던 백호의 말에 치수가 폭발했음.
제가 왜 저를 멀리했는데. 보고 있으면 손잡고 싶고 껴안고 싶고 입맞추고 싶고... 마음을 참을 수 없을까봐 그렇게 멀리한거였는데. 제 마음이 닿지 않는 건 괜찮았지만 그까짓 잡놈에게 보내려 접은 마음이 아니었음.
차마 치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시선을 돌린 채 되는대로 말하던 백호는 갑자기 저를 덮쳐오는 향에 놀라 치수를 바라보았음. 설마 열락기인가 싶었지만 우성 양인인 치수가 향을 이렇게 갈무리 못한다는 건 말이 안됐음. 마치 너를 원하는 양인이 여기 있다는 것처럼 강렬하게 제 몸을 감싸는 향에 백호가 어쩔 줄 모르며 헐떡였음. 백호의 얼굴이 붉어지고 허리가 굽어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치수가 급하게 향을 거두고 도망치듯 자리를 떴음.

그 뒤로 두 사람은 밤마다 서로에 대한 꿈을 꿨음. 치수는 이전부터 백호 귀여워하고 음인으로 보는 시선을 자각한 뒤로는 종종 꿈에 나타나긴 했는데 백호는 꿈에 치수가 나오니 정말 죽을 맛이었음. 자고 일어나면 아랫도리가 축축하고 무슨 병에 걸린 것 같음. 아마 소연이랑 신부 수업 받았으면 그게 뭔지 알았겠지만 백호는 암것도 몰라서... 결국 치수 찾아가서 엉엉 울어버리겠지.

-그 때 고릴라가 향 푼 뒤로 자꾸 꿈에 고릴이 나타나.

치수는 가슴이 환희로 차오르는 걸 느꼈음. 하지만 아침마다 바지가 축축해진다는 울먹임에 치수는 입 안 쪽을 꽉 깨물어야 했음. 이상한게 아니라고 얼버무리는 치수에 백호가 그럼 이게 뭐냐고 달라붙어왔음. 평소라면 상관없을 행위였지만 두 사람은 애매하게나마 혹은 무의식적으로 감정을 자각했고 밤마다 꿈에 상대가 나타나는 바람에 몸이 어느정도 들뜬 상태였음. 아침마다 은은하게 향이 풀린 채로 일어났는데 그런 상태로 서로의 몸이 닿자 마치 조각이 맞물리는 것처럼 두 사람의 열락기가 동시에 시작되었음.
집안 사람들이 두 사람의 상태를 알아차렸을 땐 이미 열락기가 한창이었음. 몸도 마음도 맞아버린 양인과 음인이 만나버리니 극상의 열락기가 찾아왔고 두 사람은 근처 별채에 처박혀 몸을 맞댔음. 집안 어른들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고 원통해했지만 열락기 도중인 두 사람을 끌어낼 수도 없었음. 그랬다간 몸에 큰 무리가 가니, 황가의 자손의 몸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음. 결국 치수와 백호는 열흘 내내 별채에서 뒹굴어댔음.

저물어가는 열락기에서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치수였음. 차차 맑아지는 시야 속에 엉망진창이 된 백호가 보였지. 치수는 기어이 일을 쳤구나 싶었지만 내심 백호 혼사가 어그러진게 기뻤음. 온 몸이 얼룩덜룩해져 아래에선 끊임없이 씨물이 흘러나오는 백호를 보고도 그런 생각이 먼저 들다니, 치수는 제가 미친 것 같았지만 한 번 고삐 풀린 마음은 도무지 잡힐 생각을 안 했음. 이렇게 된 거 영영 제가 끼고 살겠다 그렇게 마음 먹은 치수가 널부러진 백호를 다시 끌어안았음.
마음과 몸을 동시에 통하긴 했어도 어찌되었든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으니 두 사람 사이는 더욱 돈독해졌음. 소연이는 조금 놀라긴 했으나 백호가 치수의 소중한 사람이 된 데는 진심으로 기뻐해주었음. 일상이 달라지진않았음. 애초에 백호의 일상은 채남매의 것이라.. 소연이랑 놀다가 소연이가 신부수업을 가면 치수한테 쫄래쫄래 가서 글공부도 하고 검술 연습도 하고 또 시장으로 놀러 나가기도 했지. 이전과 전혀 다른 게 없었지만 이젠 밤이면 하인들의 처소가 아니라 치수의 처소로 갔음. 치수는 몸이 동하지않아도 꼬박꼬박 백호를 처소로 불러 곁에 두고 잤음.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아이란 건 진즉 알았고 이제 이런 사이가 되었으니 낮이건 밤이건 외롭지않게 해주고 싶었음. 백호는 감자같이 헤헤 웃으며 치수 옆을 파고들었고 치수는 똥강아지녀석 이라고 말하면서도 백호를 소중히 보듬어 안았음. 백호는 매일매일이 행복했지.
집안에선 결국 일을 쳤으니 첩으로 들이라 했지만 치수는 미적지근하게 행동했음. 이제와 마음이 바뀐 건 아니고 백호를 첩 따위로 들이고 싶지않았음.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설득 될 리가 없었음. 그래서 치수는 그냥 혼인을 미루기로 했음. 막무가내인 방법이었으나 치수는 그냥 버티기로 했지. 저가 혼인이 싫다고 퇴짜를 놓으면 그만이니까. 여차하면 치수는 백호를 데리고 도망 갈 생각도 있었음. 친우인 덕규나 준호네도 있었으니. 저답지않은 생각에 치수가 픽 웃고 말았음. 아무래도 그 녀석을 닮아가는가보다 싶었지. 백호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않는 걸 치수는 빤히 생각하며 소연이와 투호 놀이를 하는 백호를 바라보았음.

하지만 치수가 무언가 계획을 세워보기도 전에 집안에, 정확하게는 온 나라에 우환이 생겼음. 전염병이 돌기 시작한거였음. 수도에서도 사람이 매일같이 죽어나가니 온 나라가 비상이었음. 소연이는 수업도 중단했고 모두 바깥 출입을 금했음. 치수는 아예 백호를 제 처소에 들여놓았음. 하인들은 집안을 꾸려야하니 바깥 출입하는 이들이 조금 있었거든. 행여나 백호 잃을까봐 방에 꽁꽁 숨겨두고 매일같이 붙어있었지. 그래서 답답한 전염병 시기라도 둘은 오히려 꽤 행복했을거임. 하지만 전염병 기세는 어마무시했음. 기어이 황궁까지 침범한 전염병은 황가를 덮쳤음. 장군으로 서쪽 경계에 업무를 보러 갔던 둘째 황자는 애진작에 죽었고 셋째 황자는 어린 자식이 죽어 곡기를 끊고 슬퍼하다 죽은 아이에게 병이 옮아 아이의 뒤를 따라갔음. 연이어 황자들이 죽어나가자 다들 신경이 곤두섰음. 방비를 더욱 철저히 했지만 결국 황제와 황태자마저 병에 걸리고 말았음. 자연스럽게 승계는 늦둥이 동생인 치수네 아버지에게 넘어왔지만 치수네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않았음. 노약자부터 죽어나가더니 결국 채남매도 부모상을 치르게 되었음. 졸지에 가족을 거의 잃게 된 치수는 슬픔에 잠길 새도 없이 입궁하라는 독촉을 받았음. 아버지 다음 승계권은 치수였으니까. 치수는 그렇게 입궁을 했고 다음 황제가 되었음.
백호는 어안이 벙벙했음. 어재까지만 해도 같이 자고 일어난 치수가 황제가 되었다잖아. 뭐... 부인은 커녕 첩이 될거라는 상상도 안 했는데 황제라니, 이젠 영영 안녕이네 싶어 백호는 밤마다 훌쩍였음. 소연이가 그런 백호를 위로해주지 않았다면 백호는 그냥 밖으로 뛰쳐나갔을거였음. 백호는 하루하루 말라갔음. 자기 몸도 마음도 다 피워놓고 가버린 치수가 원망스럽다기보다 너무 보고싶었지. 하지만 황궁이 옆집도 아니고 그 구중궁궐을 어찌 찾느냔 말이야. 백호는 치수 이부자리를 뒤집어쓰고 매일밤을 울었음.

하지만 치수는 백호를 안 잊었지. 어느정도 상황이 진정되자 치수는 백호를 데리고 오기로 마음 먹었음. 원래 부인으로 들이려 했는데 그건 그나마 사가에 있을 때지 황제가 된 지금은 도저히 백호를 황후 자리에 앉힐 수가 없는거임. 사가에 있을 때는 그냥 채치수였지만 지금은 황제잖아. 황제의 자리가 얼마나 무겁고 중요한 자리인지 아는 치수였기에 백호를 막무가내로 황후 자리에 앉힐 수 없었음. 황후 자리는 정치력을 요하기도 했고 백호가 버틸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음. 그렇지만 치수는 백호에 대한 마음을 접을 수가 없었고 결국 청렴하기로 유명하던 채가 도련님 평생 처음으로 욕심내서 백호를 궁으로 데려왔음. 오랜만에 백호를 보자마자 치수가 달려가 백호를 안았음. 백호도 오랜만에 치수 품을 만끽했지. 치수는 차마 백호를 볼 면목이 없다 생각했음. 부인으로 들이겠다 다짐했는데 결국 첩인 후궁으로 들여야했으니까. 치수가 제 욕심 때문에 미안하다 하는 말에 백호가 눈을 깜빡였음.

-나는 고릴, 아니 폐하랑 있으면 다 좋아.....요.
-이전처럼 말해도 된다.

네가 언제부터 존대를 썼다고, 치수의 말에 백호가 애처럼 웃었지. 모든게 바뀌었지만 여전히 웃는 백호의 얼굴은 변함이 없어서 치수는 폭풍같이 휘몰아치는 지친 삶에서 위안을 얻었음.

백호는 신분이 신분이라 후궁 중에서도 품계가 최하인 답응이었음. 새 황제가 즉위했으니 후궁전과 황후전도 사람들이 들어왔지만 치수는 황후와는 정해진 합방일에만 만나고 남은 날들은 모조리 답응인 백호의 패만 뒤집었음. 백호는 다른 후궁들을 안 봐도 되겠냐고 눈치를 봤지만 치수는 괜찮다고 백호를 안심시켰음. 물론 괜찮진 않았음. 한 사람에게만 총애가 몰리는 것도 다른 후궁들은 빡칠 지경인데 심지어 그게 천민 출신이라는 답응이야. 황후하고도 합방일에만 만나고 남은 날들은 모조리 답응인 백호의 패만 뒤집었음. 백호는 다른 후궁들을 안 봐도 되겠냐고 눈치를 봤지만 치수는 괜찮다고 백호를 안심시켰음. 물론 괜찮진 않았음. 한 사람에게만 총애가 몰리는 것도 다른 후궁들은 빡칠 지경인데 심지어 그게 천민 출신이라는 답응이야. 황후하고도 합방일에만 만나고 열락기조차 그 천한 답응과 보낸다니 다른 후궁들이 뒷목을 잡고 넘어갔지. 하다못해 황후가 어찌 손이라도 써주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황후는 치수네 외가의 사람이었음. 그러니까 이미 치수네 사람이었고 치수는 황후와 계약을 마친 상태였음. 황후는 정치적인 사람이었고 제가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니 치수가 누구랑 만나든 상관치 않았음.
하지만 다른 후궁들이라고 뒷배가 없는 건 아니었음. 치수는 매일같이 신하들에게 시달렸음. 한 사람만 총애해서는 안된다, 황제된 도리를 보아 후사를 많이 봐야한다... 기실 저들이 밀어넣은 후궁들이 총애를 얻기 위한 수작질이었지만 또 예법에 따라선 틀린 말은 아니었음. 아직 어린 황제였던 치수는 신하들의 압박에 마지못해 몇몇 후궁들의 패를 뒤집었음. 하지만 손도 대지않고 그저 잠만 잘 뿐이었음. 물론 백호가 그 사실까지 알 리는 없었음. 백호는 점차 혼자 있는 밤들이 늘어났지만 이전처럼 울진 않았음. 애초에 후궁이 되었을 때부터 이런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불면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백호는 멍하니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아졌음. 치수는 백호에게 미안해 남은 날들은 꼭 백호를 찾았음. 백호는 괜찮다고 했지만 치수는 백호가 상처받았다는 걸 알았음. 잠자리에서 애달프게 굴며 매달리는 백호를 볼 때마다 치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지. 하지만 치수는 황제였고 백호는 여염집의 부인이 아니었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두 사람은 그렇게 합리화를 했음.
형식적인 밤들을 제외하고 열락기까지 백호와 지내다보니 백호는 궁에 들어온 지 일년도 지나지않아 아이를 가지게 되었음. 야생적인 직감으로 임신 사실을 안 백호는 어떻게든 숨기려 했으나 치수가 백호의 궁을 주시하고 있어 백호가 구역질을 한다는 말에 바로 어의를 보냈고 결국 회임 사실이 드러나고 말았음. 백호가 잘 못배우긴 했어도 황후보다 제가 먼저 임신했다는 건 전혀 좋지 못한 징조라는 걸 알았음. 백호는 치수가 들어오자마자 무릎을 꿇었음. 놀란 치수가 백호에게 다가오기도 전에 백호가 다급히 외쳤음.

-후계 따위는 넘보지 않게 키울게요. 원한다면 궁을 나가서 키울게요. 그러니까 제발....

아이를 낳게 해달라 비는 백호에 치수는 비참함을 느꼈음. 사가에 있었다면 백호가 아이를 가지자마자 부인 자리에 앉혔을거임. 제 아이는 평생에 백호와의 아이가 전부일거라고 으름장을 놓고 그렇게 억지를 써서라도 부인으로 두었을텐데. 지금의 치수는 황제였고 백호는 제 아이의 생사를 두고 간청하고 있었음. 치수는 떨리는 손으로 백호를 잡아 일으켰음.

-...산부가 찬바닥에 앉으면 어쩌자는거냐.

치수가 백호를 끌어안고 침상에 앉혔음. 불안해하는 백호에게 어떤 말을 해야할까 고민하던 치수는 결국 백호에게 뭐가 먹고싶냐 물었음. 백호가 축축해진 눈으로 치수를 보자 치수가 백호 눈물을 훔쳤음.

-걱정마라. 아무도 네게서 아이를 뺏어가지 못해.

치수가 눈물을 닦은 보람도 없이 다시 백호는 훌쩍였고 백호는 말없이 백호를 보듬어 안았음.

백호는 치수의 비호 아래에서 아이를 키웠음. 하지만 후궁들은 불안해했지. 답응인 지금도 문턱이 닳도록 황제가 드나드는데 아이까지 낳는다면? 만약 양인을 낳는다면 적어도 비 자리는 꿰찰게 뻔했음. 출신도 불분명한 백호가 저들보다 더 높이 올라갈거라 생각하자 후궁들은 돌아버리릴 지경이었음. 치수는 황후와 이미 후사 문제까지 약조한 바가 있었지만 다른 후궁들이 그걸 알 지는 못했고 결국 불안감을 느낀 후궁 하나가 일을 치고 말았음.

볕이 좋던 어느날, 업무를 보고 있던 치수는 내관에게서 백호가 토혈을 했다는 말을 듣고 기함해 백호의 궁으로 뛰어갔음. 백호는 사흘밤낮을 꼬박 앓았으나 약이 워낙 지독했던 터라 백호는 그만 아이를 잃고 말았음. 심지어 어의의 말을 들어보니 내장이 심하게 상해 앞으로 회임을 어려울 것이라 하였음. 망연자실한 치수의 귓가에 오래전 말했던 백호의 말이 다시 들려왔음.
'이래봬도 가정을 꾸리는 게 꿈이걸랑.' 어느 미친 늙은이에게 시집간다는데도 수줍게 제 소망을 속삭이던 애였음.
내가 네 모든 걸 빼앗았구나. 치수가 멍하니 중얼거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