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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1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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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 배정은 결혼과는 다르다. 알파와 오메가가 ‘부부’가 된다는 것엔 둘이 이미 이전에 다른 오메가 혹은 알파와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그 아이를 함께 키우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소유욕이란 것은 알파나 오메가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대체로 배정된 오메가는 쭉 배정받은 알파와 함께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쩌면 우성은 그걸 원하는지도 모른다고 명헌은 생각한다. 모든 것은 명헌의 짐작일 뿐이지만 어쩐지 확신이 들었다. 명헌은 의식적으로 우성과 임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우성의 경기가 끝나면 명헌은 우성을 기다려 함께 돌아오거나 먼저 집에 돌아온다. 농구공 몇 개가 널려있는 농구장은 집에서도 특별히 관리되는 곳이라 깔끔했다. 이 집에서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 익숙한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 명헌에게 하루는 그런 것이었다.

농구장에 앉아 골대를 바라보고 있으면 머지않아 누군가가 실내로 들어가라고 한다. 이제는 익숙한 얼굴이지만 명헌은 그의 이름을 모른다. 우성이 말하지 말라고 했을까? 아직 프로선수가 되지는 못한 우성이 이런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처음엔 놀라웠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그것은 명헌이 신경쓸 일이 아니었다.

명헌은 스포츠 채널 외엔 보지 않는다. 화면을 통해 보이는 오메가들은 모두 성공적으로 의무를 행한 사람들이다. 스포츠 채널은 그런 오메가들이 가장 드물었다. 그 드문 한 가운데에 자신의 자리가 아직 남아있을지 궁금했다.

우성은 집에 돌아오면 바로 농구장으로 향한다. 형, 또 여기 있었어요? 농구 할까요? 지금까지 농구를 하다가 왔으면서 명헌과 기꺼이 또 농구를 하겠다는 마음이 갸륵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주 조금은 가증스러웠고.

저녁식사는 항상 우성과 함께한다. 낮시간 동안 말없이 명헌을 감시하던 사람들은 자리를 비운다. 움직임이 적은 명헌은 곧 포크를 내려놓는다. 입맛이 없어요? 우성은 걱정스레 묻지만 더 먹으라 말하지는 않는다. 우성이 아니었다면 억지로 입에 음식들을 우겨넣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오메가에겐 건강도 의무였다. 우성에게선 나무바닥에 칠한 코팅제의 냄새나 하루종일 흘린 땀냄새가 아니라 코를 찌르는듯 상쾌한 바디워시의 냄새가 난다. 언젠가 백 명이 넘는 농구부의 주장이었던 명헌이 이제 그저 배정된 오메가일 뿐이라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식사를 마치면 우성은 명헌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마치 부부처럼. 욕망은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다. 좋아하는 것과 원하는 것을 아주 조심스럽게 구분해야 한다. 명헌은 농구선수로 돌아가고 싶었다. 반질한 코트에서 달릴 때 날카로운 소리를 남기는 농구화의 딱딱한 밑창을 느끼고 싶었다. 먹은 것을 모두 토하고 싶을 정도로 힘든 훈련이 끝난 후의 막대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었다. 바람에 땀이 식으면 서늘해지는 몸도, 훈련이 끝나 텅 빈 체육관 사방에 울리는 공소리같은 것들이 그리웠다. 시간이 흘러 이 시간도 농구를 위한 과정이었다고 느낄 수 있을까. 비행기에 실어 담기엔 턱없이 부족했던 지난 농구를 떠올린다. 아무래도 오늘치의 추억을 벌써 다 써버린 것 같았다. 아쉬운 마음이 든다. 하루가 흐르면 농구는 하루만큼 멀어진다.

한 달에 한 번 센터로부터 연락이 온다. 몸은 어떠세요? 가벼운듯한 물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안다. 똑같습니다. 명헌의 대답을 들으면 수화기 너머의 얼굴없는 목소리에 한숨이 묻어난다.

대부분의 오메가는 반 년 안에 임신을 한다. 완전히 공개된 장소만 아니라면 알파와 오메가의 관계는 쾌락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의무에 속했다. 지금까지 관계하지 않은 알파와 오메가가 존재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하는 직원은 명헌을 재촉한다. 6개월 이상 임신하지 못한 오메가는 정기검진의 대상이 된다. 오메가에게 손대지 않는 알파는 어떻게 합니까. 입밖으로 낼 수 없는 명헌의 사정은 다시 목뒤로 삼켜진다. 사이클 촉진제를 보내드릴까요. 조금은 한심하다고 느끼는듯한 목소리. 얼굴도 모르는 직원의 얼굴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명헌은 부탁한다는 말로 통화를 마무리한다.

어제도 명헌에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명헌은 곧잘 우성의 눈동자에서 어떤 열기를 읽곤 하지만 그것이 무엇에서 기원하는 지는 모른다. 끝내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척한 선배에 대한 복수는 아닐까. 혹은 영영 명헌을 붙잡고 싶은 욕심일지도 모른다. 명헌은 우성의 욕망을 모른다.

우성은 매일 명헌이 눈을 뜨기 전에 나간다. 경기나 훈련이 없어도 같았다. 잠결에 우성의 품 안에서 눈을 뜨는 때도 있었지만 아침이면 우성은 없었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것으로 설명되는 것들은 우성의 생활 곳곳에 있었다. 매일하는 빨래, 같은 시간에 하는 운동과 정확한 루틴, 완벽한 영양의 식사는 기계같이 우성을 채웠다. 곧잘 투정하며 우는 소리를 하던 우성은 이제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아는 농구선수가 되었다. 집을 나선 후의 우성을 명헌은 몰랐다. 오메가는 알파를 몰랐지만 알파는 오메가를 알았다. 몇 달만에 명헌은 속속들이 알고 있던 우성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더 많아졌다.

그 어느때보다 명헌은 많이 읽고, 많이 들었고, 많이 봤다. 그럼에도 명헌은 항상 모르는 것이 더 많았다. 명헌이 할 일은 대체로 시간 사이에 생각을 채우는 것이다. 분침 사이마다 한 문장씩 빡빡하게 끼우다보면 우성이 돌아온다. 저 왔어요. 오늘 뭐 했어요? 명헌이 하루종일 무엇을 했을지는 뻔했다. 그냥. 명헌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도 우성은 만족의 숨을 내쉬었다. 우성의 날것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몇 안되는 순간이었다. 우성과 명헌이 한 침대에 누울 때 까지도 둘 사이의 대화는 그런 식이었다. 하루종일 집안에 박혀 있었던 명헌이 오늘 무엇을 했는지 꼬치꼬치 묻고, 하루종일 바쁘게 땀을 흘리며 신나게 농구를 했을 우성에게 무엇을 했는지 조근조근 말해준다. 우성이 오늘 무슨 일을 했는지 묻고 싶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명헌은 그것이 마음 속 어딘가 자신도 찾을 수 없던 반항의 일종이라는 것을 안다. 의연하게 보이려는 모든 노력이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우성아.” 명헌이 오랜만에 우성의 이름을 부른다. “네?” 여전히 명헌에겐 어린 후배인 것처럼 천진하게 대답하는 우성이 아주 조금 괘씸하다. “임신… 해야하지 않을까.”

눈 깜짝할 사이에 명헌의 위에 올라탄 우성이 번쩍거리는 눈동자로 명헌을 응시한다. “그래서 촉진제가 왔구나.” 명헌은 우성의 번들대는 눈동자를 똑바로 본다. 우성은 그 말을 듣고 좋았을까? 아니면 마땅치 않았을까. 우성은 협탁의 서랍에서 작은 약통을 꺼낸다. 센터에서 보낸 촉진제인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하는 우편은 명헌이 아닌 우성에게로 간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형이 하고 싶다면 해야죠.”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우성은 약통을 연다. 내일부터 노력해볼까요. 우성은 알약 하나를 꺼내 입안에 넣고 명헌에게 입을 맞춘다. 명헌의 입안을 우성의 혀가 침범하고 불식간에 알약이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형이 먼저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항상 그렇듯 옆자리는 비어있다.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숨, 더운듯한 공기, 흔적없이 깔끔한 자리에 어쩐지 묻어나는 아쉬움. 명헌이 늦게 일어난다면 진작에 명헌을 깨웠을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명헌과 우성의 사이를 확실하게 구분짓는 일초는 버거울 정도로 느렸다. 명헌은 벅차는 숨 때문에 몸을 일으키려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고개를 매트리스에 쳐박는다. 우성은 항상 솔직하고 투명했다. 항상 숨기지 않았는데 명헌은 그 속에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애쓰곤 했었다. 우성은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우성을 떠올리며 몸달아할 명헌을 생각하고 있겠구나. 아득한듯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순간이 사진처럼 선명하게, 그렇지만 매끄럽지는 않게 포착된다. 명헌은 처음으로 온전히 자신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우성명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