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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0 22:13
안 사귀는 우성명헌으로 이명헌이 정우성 만나러 미국 가는 게 보고 싶다.
대학 리그에서부터 이름 날리던 이명헌, 24살에 신인드래프트에서 리그 2위 프로팀 확정되고 본격적으로 프로 리그 데뷔하기 전에 잠깐 휴식기 생기는데 같이 프로 진출하게 된 신현철이랑 여행 겸, 오랜만에 정우성도 만날 겸 미국 가기로 함. 신현철이 정우성한테 다음주에 간다고 공항에 마중 나오라고 전화하고, 정우성은 몇년 만에 산왕 형들 만날 생각에 신나서 전화 너머에서 방방 뛰고 난리났음.
근데 신현철이 구단 쪽이랑 계약 문제로 뭐가 꼬이는 바람에 출국하기로 한 날 며칠 앞두고 "미안하다 명헌아. 나 안될 것 같은데." 하고 전화 옴. 그러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프로 뛰면 한동안 죽도록 바쁠텐데 너 혼자라도 다녀오라고 함. 이명헌 잠깐 고민하다가 알겠다고 하고 혼자 가기로 결정하고 정우성한테 연락하겠지.
정우성은 신현철 못 온다는 소리에 좀 서운했지만 그래도 이명헌은 볼 수 있으니까 "알았어요. 형은 꼭 와야 돼요? 알았죠?!" 하고 약속에 약속을 하고 끊음. 그치만 전화 끊고 나서 좀 고민했겠지. 굳이 비교하자면 이명헌 보단 신현철이랑 조금 더 친했거든. 그리고 당연히 이명헌 존경하고 좋아하지만 산왕 멤버들 항상 우르르 몰려 다녔지 단 둘이서 뭘 해 본 적은 없어서 명헌이형이랑 뭐하지, 뭐해야 형이 재밌어 하나, 생각하는데 감 잡히는 게 하나도 없고. 마음 한 구석에 몇년 만에 만나서 괜히 어색하고 그러진 않겠지? 이런 걱정 잠깐 스쳤다가 에이 그래도 명헌이형인데, 하고 지나감.
며칠 뒤. 이명헌 미국 오는 날. 정우성 당연히 공항으로 마중 나가는데 문제는 둘이 어제 통화할 때 이명헌 내리는 게이트가 잘못 전달 되는 바람에 엉뚱한 게이트에 한참 서 있었음. 아무리 기다려도 이명헌은 나오지 않고. 어쩐지 이상해서 한국에서 출발하는 비행기 도착 게이트 확인해봤더니 다른 곳임. 이미 한 시간은 지나 있어서 정우성 서둘러 본래 게이트로 뛰어가면 저 멀리서 훤칠한 등이 일찌감치 눈에 띔. 이명헌은 아직 돌아보기도 전인데 그 등만 봐도 벌써 반가워서 정우성 활짝 웃으면서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가까이 갈수록 보이는 이명헌. 시큐리티 유니폼 입은 공항 관계자 앞에서 곤란한 얼굴로 떠듬떠듬 말하다가 문득 돌아본 시야에 저 만치서 걸어오는 정우성 발견하는데. 그 순간 이명헌 얼굴에 갑자기 길 잃었다가 엄마 만난 애처럼 눈에 띄게 반가움과 안도함이 스쳐서 정우성 순간 이상하게 발걸음이 빨라짐.
"형!"
거의 날듯이 이명헌한테 달려가는데 이명헌이 좀전의 그 확 밝아진 얼굴을 하고 한 손으로 정우성 윗 팔뚝 붙잡으면서 "길 물어보고 싶은데 영어 못해서 죽는 줄 알았다 뿅." 하고 살짝 웃음. 그 순간 정우성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 명헌이형이 이렇게 작았나?
산왕 때는 다들 고등학생이었으니까 1살 차이가 태산 같이 컸고. 거기다 이명헌은 정우성이 입학했을 적부터 주장이었으니 다른 선배보다 유난히 더 크고 멀어 보였음. 근데 이제 둘 다 성인이 된 데다 정우성은 미국에서 홀로서기하면서 정신적으로도 많이 성장했고 키며 덩치며 죄다 커져서 물리적으로는 더 많이 성장함. 그런 정우성의 눈에 몇년 만에 다시 만난 이명헌은 자기 기억 속에 있던 이명헌보다 훨씬 작게 느껴져서 좀 신기한데, 그와중에 길 물어보는 법을 몰라서 고생했다고 자기 팔을 붙잡는데. 어쩐지 한 살 형이 아니라 자기가 지켜줘야 되는 존재처럼 느껴짐. 적어도 여기 미국에서 만큼은.
정우성 마음 속에 괜히 책임감과 보호본능 같은 게 뻐렁쳐서는 늦어서 미안하다고, 게이트 착각했다고 속사포처럼 말하고는 이명헌이 끌고 있는 캐리어까지 제가 가져감.
"캐리어 뿅."
말투도 하나도 안 변해서는 자기 캐리어 내놓으라고 눈으로 말하는 이명헌 보고도 "에이 제가 들게요!" 하고 절대 안 넘겨줌.
둘이 정우성 차 타고 일단 이명헌이 지낼 호텔로 이동하는데. 정우성이 이명헌 보고 '형이 이렇게 작았나?' 생각했다면, 이명헌은 아까부터 '얘가 이렇게 컸나?' 생각하고 있었음. 그도 그럴게 이명헌 티는 안 냈지만 게이트 나오고 한참 기다려도 안 나타나는 정우성에 꽤 많이 당황했던 터라.
처음 한 15분은 조금 늦나 했는데 30분 넘어가고부터는 불안했지. 정우성 약속시간 늦고 하는 성격 아닌 거 잘 아니까. 혹시 무슨 일이 있어서 못 오게 된 건가 싶은데, 이명헌 영어라곤 그냥 고등학교 졸업한 수준 밖에는 못하는데 숙소까진 어떻게 찾아가고 정우성하곤 어떻게 연락해야 할지 막막함. 공항에서 바로 만날 생각에 정우성 미국 주소나 연락처 적힌 수첩을 따로 안 가져 왔으니까. 그런 고민하길 1시간. 이쯤 지나니 못 오는 게 확실하다고 생각해서 공항 시큐리티한테 버스 타고 뉴욕 시내 ㅇㅇ호텔로 가는 법을 물으려는데 생각만큼 말은 매끄럽게 안 나와주지, 속으로 엄청 당황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뛰어오는 정우성 보자마자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근데 그렇게 뛰어와서는 뭐 도와줄 거 있냐고 묻는 시큐리티한테 자기 일행이라고, 고맙다고 빠르게 대답하고 이명헌 캐리어 끌고(대체 캐리어 왜 끌어주는지는 이해 못했음) 차에 태우더니 익숙하게 운전대 잡고 달리는 정우성 보고 있자니 자기 기억 속에 경기 지고 엉엉 울던 그 애기가 얘가 맞나 싶고. 게다가 몸도 훨씬 자라서 예전에는 "혀엉~" 하고 울먹울먹하면 등 두드려서 달래준 적도 몇 번 있는데 이제는 양팔로 안아도 저 등은 다 못 감싸줄 거 같음.
그렇게 서로 정반대의 생각하던 둘. 우여곡절 끝에 이명헌이 예약해둔 호텔 도착해서 정우성이 체크인하고 짐 올려다 놔주고 이제 둘이 본격적으로 놀러 나가겠지. 이명헌은 미국이 난생 처음이니까 첫날은 유명한 관광 스팟이나 좀 돌아보는데 정우성이 걱정했던 게 무색할 만큼 둘이 말도 잘 통하고 하고 싶었던 얘기도 끊임없이 이어짐. 그도 그럴 게 현철이형은, 동오형은, 형은, 형은, 하고 정우성이 산왕 형들 근황 물어보는 것만으로 벌써 얘깃거리 한참임. 이명헌 원래는 말수도 별로 없으면서 정우성한테 산왕 애들 얘기 들려줄 땐 한참을 혼자 얘기해주고 그거 듣는 정우성은 형들 보고 싶어서 혼자 찡했다가 웃었다가 난리가 났음. 그 와중에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신나서는 이명헌 끌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세워다가 사진 찍고, 유명한 맛집이라고 멀대만한 남정네 둘이서 줄 서서 햄버거 세트 5개 조지고, 같이 농구 경기 보러가자고 급계획해서는 이틀 뒤에 있을 경기 표 현장 예매까지 하고 나니 하루가 뚝딱 지나감.
슬슬 저녁이 오기 시작하는 시간이라 이명헌이 먼저 "그만 들어갈까?" 하는데 정우성 갑자기 이대로 헤어지기 싫음. 아직 형들 얘기 더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고, 아까 명헌이형이 자기 대학리그 얘기해주던 거 그것도 물어보고 싶은 거 많이 남았는데, 싶어서 "형, 우리 술 한 잔 할래요?" 함.
이명헌 순간 정우성이 자기랑 술 한 잔 하자는 말에 잠깐 벙찜. 이명헌 기억 속에 정우성은 여전히 애 같은 후배였는데. 이제 같이 술 마셔도 되는 나이구나, 새삼 실감하고는 그러자고 함.
정우성이 이명헌 호텔 근처에 아는 펍이 있어서 둘은 그리로 감. 오늘 하루 종일 그랬듯 이번에도 주문은 정우성이 하는데, 워낙에 아빠 닮아서 다정한 성격이라 메뉴판 보고 이건 생선튀김이고 이건 미트볼이고. 이건 무슨 칵테일이고 이건 무슨 맥주고. 하나하나 일러주는 거 이명헌이 대충 니가 알아서 하라고 함. 둘이 오늘 벌써 몇 번째 이러고 있음. 정우성이 알겠다고 주문하러 가고 이명헌 잠깐 바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는데, 건너 건너 테이블의 금발 하나가 그런 이명헌 쳐다보고 있음.
주문하러 갔던 정우성이 한 손으론 맥주잔 두 개 쥐고 한 손엔 생선튀김이랑 감자튀김 가득 담긴 접시 들고 돌아오는데. 이명헌 앞에 웬 금발 하나가 앉아 있음. 누구지? 하면서 점점 발걸음 빨리지는데 가까이 갈수록 들리는 대화 소리가 가관임. 남자가 잔뜩 내려 깐 목소리로 나 아까 너 들어올 때부터 봤다, 너 진짜 골져스하다, 미국엔 여행 온 거냐, 온갖 플러팅 늘어놓고 있음. 이명헌이 잠깐 곤란한 얼굴로 이마 살짝 찌푸렸다가, 좀 느리지만 그래도 또박또박 미안하지만 영어를 못한다, 대답하는데 금발은 오히려 발음 귀엽다~ 하면서 맞은 편에 앉고 있음. 정우성 거기까지 보다가 이명헌 앉아 있는 테이블에 맥주잔 쾅 내려놓으면서 "내 일행한테 볼 일 있어?" 하고 끼어들음.
척 봐도 예사 사람은 아닌 피지컬에 불쾌한 티 팍팍 내면서 싸늘하게 묻는 정우성 얼굴이 말만 안 했지 꺼지라는 위협이나 다름 없어서, 금발이 얼른 일어나서 자리 뜸. 이명헌만 티 나게 찌푸린 정우성 얼굴 보면서 무슨 말이었이냐고 묻는데 "그냥. 이상한 놈이에요." 대답하는 정우성 이상하게 기분 나쁨.
정우성 사실 미국 처음 왔을 땐 게이 보고 놀라기도 했겠지. 한국에선 말만 들었지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근데 여기오니 길거리에서 남자 둘이 키스하는 것도 심심찮게 봄. 그게 딱히 불쾌하거나 찝찝하진 않았음. 왜냐면 자기랑 너무 먼 얘기라. 그냥 여기가 외국은 외국이구나, 하는 감상 밖에는 없었음. 근데 웬 느끼하게 생긴 놈이 이명헌한테 별 같잖은 수작을 부리고 앉아 있는 걸 보니 화도 나고 아까 공항에서 처음 봤을 때처럼 우리형 내가 지켜줘야지, 하는 이상한 사명감도 들고 해서. 그날 맥주 세잔씩 마시고 나갈 때까지 누가 두 사람 근처 테이블 지나가기만 해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이명헌 지켜내는 거 성공하는데.
며칠 지날 수록 어째 점점 더 심해짐. 이명헌 미국에 일주일 동안 머물기로 했는데. 대체 왜 잠깐 눈만 떼면 오만떼만 남자들한테 번호 따이고 있는지 모르겠음. 음식점이며 카페는 말할 것도 없고 핫도그 트럭에서도 "이 근처 살아? 너 몸 진짜 좋다. 만져봐도 돼?" 하는 싸구려 플러팅이 아주 끊이질 않지. 농구장에서는 맥주 한 잔 사먹으려다 그거 팔던 애가 이명헌한테 너 완전 자기 스타일인데, 인스타그램 아이디 알려주면 안되냐고 하는 바람에 맥주는커녕 물 한잔도 안 마심.
그도 그럴 게 이명헌 희고 눈 끝이 살짝 처진 너드 같은 얼굴에 몸은 반대로 두툼한 근육질인데 피부는 또 손에 착착 감길 것처럼 쫀득하고 허리는 쑥 들어갔는데 허벅지는 딴딴함. 모든 게 너무나 게이들의 이상형임. 심지어 아무 무늬 없는 흰 티셔츠에 청바지, 안경에, 대학가면서부터 기른 약간 긴듯한 앞머리까지. 저 단정하고 담백한 스타일까지도 게이들의 완식임. 그런 이유로 한 여름에 날파리 꼬이듯 이 동네 게이들 마주칠 때마다 죄다 이명헌한테 플러팅 날리는데 이쯤되니 정우성은 거의 이명헌을 지키기 위한 사투중임. 화장실 가는 것도 뛰어서 갔다오는데 아니나달라, 귀신 같이 그 틈에 번호 따이고 있는 이명헌.
정우성 미국 오면서 포인트 가드로 포지션 변경했는데. 이명헌과의 일주일, 코트 위에서의 가드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할만큼 힘든 싸움이었음. 그치만 본인 생각에는 무사히 성공적으로, 이명헌 생각에는 얘 무슨 분리불안 있나 싶게, 이명헌을 게이들의 마수에서 지켜내는데 성공하고. 비로소 이명헌 떠나는 날이 됨.
정우성 이번에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제가 부득불 이명헌 캐리어 끌어다가 차에 싣고 이명헌 공항까지 바래다 줌.
"우성. 고마웠다 뿅."
이명헌 짧게 말했지만 전부 진심이었음. 한참 어리게만 봤던 후배였는데 언제 이렇게 컸나 싶어서 기특하기도 하고 일주일 동안 내내 챙겨준 게 많이 고마웠음. 정우성도 헤어지려니 아쉬워서 둘이 형제처럼 꼭 끌어안고 포옹 한 번 하고는 돌아가면 연락하라고 세 번은 약속하고 드디어 헤어지는데.
이명헌 게이트로 들어가는 줄에 서는 거 보고 돌아가던 정우성이 어째 느낌이 쎄해서 돌아보면. 아니나 다를까, 줄 서 있는 이명헌 뒤에서 어깨 톡톡 두드리는 남자 하나. 이번엔 동양인임.
"한국?"
남자가 이명헌이 들고 있는 티켓 턱짓으로 가리키면서 묻는데 좀 어눌하긴 해도 한국말이라 이명헌도 "네." 하고 한국말로 대답해줌.
"같은 비행기네요. 난 29A인데 자리가 어디에요?"
미국에서 오래 지냈는지 남자가 영 어색한 한국말로 물어보는 거에 이명헌이 대답해주려고 자기 티켓 확인하는데
"이쪽은 별로 관심 없는데."
어느 틈에 왔는지 정우성이 이명헌 티켓 뺏으면서 대신 대답함. 정우성 삐딱하게 버티고 서서는 남자한테 턱짓으로 먼저 가라고 가리킴. 남자가 잠깐 정우성이랑 이명헌이랑 번걸아 쳐다봤다가 어깨 한 번 으쓱하고는 먼저 게이트로 들어가고. 이명헌은 이게 뭐지 싶어서 눈으로 정우성한테 명령하겠지. 설명하라고.
근데 정우성 어떻게 말해야 할지 좀 난감함. 정우성이야 미국에서 오래 있으면서 게이들도 보고 미국애들이 보통 어떤 식으로 수작거는줄도 알고 하니까 한 눈에 아 쟤가 명헌이형한테 수작질 하는 구나, 했지만 이명헌은 전혀 모를 거 아냐. 정우성 곤란해서는 그 커다란 손바닥으로 제 머리만 벅벅 문지르다가 그냥 두루뭉술하게 "저런 애들 다 그쪽이에요." 함.
"그쪽?"
"게이요. 형은 잘 모르겠지만 여기 많아요 저런애들. 방금도 형한테 수작질 하는 거란 말이에요."
정우성 뭐에 삐졌는지 부루퉁하게 입술 내밀고 하는 소리에 이명헌 잠깐 눈만 깜빡깜빡하다가 "아." 하고 영문 모를 소리만 내는데.
곧 정우성 손에서 자기 티켓 가져가면서 "괜찮아." 함.
"네?"
"괜찮다고. 나도 그쪽이야."
정우성 놀라서 눈도 못 깜빡이고 굳어 있는데 피식 웃더니 "간다. 고마웠어." 그 말만 남기고 미련없이 게이트 너머로 사라지는 이명헌이랑, 그 뒤로 밤에 자려고 누우면 '그쪽'인 이명헌 생각나서 잠 못 이루는 정우성 보고 싶다....
대학 리그에서부터 이름 날리던 이명헌, 24살에 신인드래프트에서 리그 2위 프로팀 확정되고 본격적으로 프로 리그 데뷔하기 전에 잠깐 휴식기 생기는데 같이 프로 진출하게 된 신현철이랑 여행 겸, 오랜만에 정우성도 만날 겸 미국 가기로 함. 신현철이 정우성한테 다음주에 간다고 공항에 마중 나오라고 전화하고, 정우성은 몇년 만에 산왕 형들 만날 생각에 신나서 전화 너머에서 방방 뛰고 난리났음.
근데 신현철이 구단 쪽이랑 계약 문제로 뭐가 꼬이는 바람에 출국하기로 한 날 며칠 앞두고 "미안하다 명헌아. 나 안될 것 같은데." 하고 전화 옴. 그러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프로 뛰면 한동안 죽도록 바쁠텐데 너 혼자라도 다녀오라고 함. 이명헌 잠깐 고민하다가 알겠다고 하고 혼자 가기로 결정하고 정우성한테 연락하겠지.
정우성은 신현철 못 온다는 소리에 좀 서운했지만 그래도 이명헌은 볼 수 있으니까 "알았어요. 형은 꼭 와야 돼요? 알았죠?!" 하고 약속에 약속을 하고 끊음. 그치만 전화 끊고 나서 좀 고민했겠지. 굳이 비교하자면 이명헌 보단 신현철이랑 조금 더 친했거든. 그리고 당연히 이명헌 존경하고 좋아하지만 산왕 멤버들 항상 우르르 몰려 다녔지 단 둘이서 뭘 해 본 적은 없어서 명헌이형이랑 뭐하지, 뭐해야 형이 재밌어 하나, 생각하는데 감 잡히는 게 하나도 없고. 마음 한 구석에 몇년 만에 만나서 괜히 어색하고 그러진 않겠지? 이런 걱정 잠깐 스쳤다가 에이 그래도 명헌이형인데, 하고 지나감.
며칠 뒤. 이명헌 미국 오는 날. 정우성 당연히 공항으로 마중 나가는데 문제는 둘이 어제 통화할 때 이명헌 내리는 게이트가 잘못 전달 되는 바람에 엉뚱한 게이트에 한참 서 있었음. 아무리 기다려도 이명헌은 나오지 않고. 어쩐지 이상해서 한국에서 출발하는 비행기 도착 게이트 확인해봤더니 다른 곳임. 이미 한 시간은 지나 있어서 정우성 서둘러 본래 게이트로 뛰어가면 저 멀리서 훤칠한 등이 일찌감치 눈에 띔. 이명헌은 아직 돌아보기도 전인데 그 등만 봐도 벌써 반가워서 정우성 활짝 웃으면서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가까이 갈수록 보이는 이명헌. 시큐리티 유니폼 입은 공항 관계자 앞에서 곤란한 얼굴로 떠듬떠듬 말하다가 문득 돌아본 시야에 저 만치서 걸어오는 정우성 발견하는데. 그 순간 이명헌 얼굴에 갑자기 길 잃었다가 엄마 만난 애처럼 눈에 띄게 반가움과 안도함이 스쳐서 정우성 순간 이상하게 발걸음이 빨라짐.
"형!"
거의 날듯이 이명헌한테 달려가는데 이명헌이 좀전의 그 확 밝아진 얼굴을 하고 한 손으로 정우성 윗 팔뚝 붙잡으면서 "길 물어보고 싶은데 영어 못해서 죽는 줄 알았다 뿅." 하고 살짝 웃음. 그 순간 정우성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 명헌이형이 이렇게 작았나?
산왕 때는 다들 고등학생이었으니까 1살 차이가 태산 같이 컸고. 거기다 이명헌은 정우성이 입학했을 적부터 주장이었으니 다른 선배보다 유난히 더 크고 멀어 보였음. 근데 이제 둘 다 성인이 된 데다 정우성은 미국에서 홀로서기하면서 정신적으로도 많이 성장했고 키며 덩치며 죄다 커져서 물리적으로는 더 많이 성장함. 그런 정우성의 눈에 몇년 만에 다시 만난 이명헌은 자기 기억 속에 있던 이명헌보다 훨씬 작게 느껴져서 좀 신기한데, 그와중에 길 물어보는 법을 몰라서 고생했다고 자기 팔을 붙잡는데. 어쩐지 한 살 형이 아니라 자기가 지켜줘야 되는 존재처럼 느껴짐. 적어도 여기 미국에서 만큼은.
정우성 마음 속에 괜히 책임감과 보호본능 같은 게 뻐렁쳐서는 늦어서 미안하다고, 게이트 착각했다고 속사포처럼 말하고는 이명헌이 끌고 있는 캐리어까지 제가 가져감.
"캐리어 뿅."
말투도 하나도 안 변해서는 자기 캐리어 내놓으라고 눈으로 말하는 이명헌 보고도 "에이 제가 들게요!" 하고 절대 안 넘겨줌.
둘이 정우성 차 타고 일단 이명헌이 지낼 호텔로 이동하는데. 정우성이 이명헌 보고 '형이 이렇게 작았나?' 생각했다면, 이명헌은 아까부터 '얘가 이렇게 컸나?' 생각하고 있었음. 그도 그럴게 이명헌 티는 안 냈지만 게이트 나오고 한참 기다려도 안 나타나는 정우성에 꽤 많이 당황했던 터라.
처음 한 15분은 조금 늦나 했는데 30분 넘어가고부터는 불안했지. 정우성 약속시간 늦고 하는 성격 아닌 거 잘 아니까. 혹시 무슨 일이 있어서 못 오게 된 건가 싶은데, 이명헌 영어라곤 그냥 고등학교 졸업한 수준 밖에는 못하는데 숙소까진 어떻게 찾아가고 정우성하곤 어떻게 연락해야 할지 막막함. 공항에서 바로 만날 생각에 정우성 미국 주소나 연락처 적힌 수첩을 따로 안 가져 왔으니까. 그런 고민하길 1시간. 이쯤 지나니 못 오는 게 확실하다고 생각해서 공항 시큐리티한테 버스 타고 뉴욕 시내 ㅇㅇ호텔로 가는 법을 물으려는데 생각만큼 말은 매끄럽게 안 나와주지, 속으로 엄청 당황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뛰어오는 정우성 보자마자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근데 그렇게 뛰어와서는 뭐 도와줄 거 있냐고 묻는 시큐리티한테 자기 일행이라고, 고맙다고 빠르게 대답하고 이명헌 캐리어 끌고(대체 캐리어 왜 끌어주는지는 이해 못했음) 차에 태우더니 익숙하게 운전대 잡고 달리는 정우성 보고 있자니 자기 기억 속에 경기 지고 엉엉 울던 그 애기가 얘가 맞나 싶고. 게다가 몸도 훨씬 자라서 예전에는 "혀엉~" 하고 울먹울먹하면 등 두드려서 달래준 적도 몇 번 있는데 이제는 양팔로 안아도 저 등은 다 못 감싸줄 거 같음.
그렇게 서로 정반대의 생각하던 둘. 우여곡절 끝에 이명헌이 예약해둔 호텔 도착해서 정우성이 체크인하고 짐 올려다 놔주고 이제 둘이 본격적으로 놀러 나가겠지. 이명헌은 미국이 난생 처음이니까 첫날은 유명한 관광 스팟이나 좀 돌아보는데 정우성이 걱정했던 게 무색할 만큼 둘이 말도 잘 통하고 하고 싶었던 얘기도 끊임없이 이어짐. 그도 그럴 게 현철이형은, 동오형은, 형은, 형은, 하고 정우성이 산왕 형들 근황 물어보는 것만으로 벌써 얘깃거리 한참임. 이명헌 원래는 말수도 별로 없으면서 정우성한테 산왕 애들 얘기 들려줄 땐 한참을 혼자 얘기해주고 그거 듣는 정우성은 형들 보고 싶어서 혼자 찡했다가 웃었다가 난리가 났음. 그 와중에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신나서는 이명헌 끌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세워다가 사진 찍고, 유명한 맛집이라고 멀대만한 남정네 둘이서 줄 서서 햄버거 세트 5개 조지고, 같이 농구 경기 보러가자고 급계획해서는 이틀 뒤에 있을 경기 표 현장 예매까지 하고 나니 하루가 뚝딱 지나감.
슬슬 저녁이 오기 시작하는 시간이라 이명헌이 먼저 "그만 들어갈까?" 하는데 정우성 갑자기 이대로 헤어지기 싫음. 아직 형들 얘기 더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고, 아까 명헌이형이 자기 대학리그 얘기해주던 거 그것도 물어보고 싶은 거 많이 남았는데, 싶어서 "형, 우리 술 한 잔 할래요?" 함.
이명헌 순간 정우성이 자기랑 술 한 잔 하자는 말에 잠깐 벙찜. 이명헌 기억 속에 정우성은 여전히 애 같은 후배였는데. 이제 같이 술 마셔도 되는 나이구나, 새삼 실감하고는 그러자고 함.
정우성이 이명헌 호텔 근처에 아는 펍이 있어서 둘은 그리로 감. 오늘 하루 종일 그랬듯 이번에도 주문은 정우성이 하는데, 워낙에 아빠 닮아서 다정한 성격이라 메뉴판 보고 이건 생선튀김이고 이건 미트볼이고. 이건 무슨 칵테일이고 이건 무슨 맥주고. 하나하나 일러주는 거 이명헌이 대충 니가 알아서 하라고 함. 둘이 오늘 벌써 몇 번째 이러고 있음. 정우성이 알겠다고 주문하러 가고 이명헌 잠깐 바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는데, 건너 건너 테이블의 금발 하나가 그런 이명헌 쳐다보고 있음.
주문하러 갔던 정우성이 한 손으론 맥주잔 두 개 쥐고 한 손엔 생선튀김이랑 감자튀김 가득 담긴 접시 들고 돌아오는데. 이명헌 앞에 웬 금발 하나가 앉아 있음. 누구지? 하면서 점점 발걸음 빨리지는데 가까이 갈수록 들리는 대화 소리가 가관임. 남자가 잔뜩 내려 깐 목소리로 나 아까 너 들어올 때부터 봤다, 너 진짜 골져스하다, 미국엔 여행 온 거냐, 온갖 플러팅 늘어놓고 있음. 이명헌이 잠깐 곤란한 얼굴로 이마 살짝 찌푸렸다가, 좀 느리지만 그래도 또박또박 미안하지만 영어를 못한다, 대답하는데 금발은 오히려 발음 귀엽다~ 하면서 맞은 편에 앉고 있음. 정우성 거기까지 보다가 이명헌 앉아 있는 테이블에 맥주잔 쾅 내려놓으면서 "내 일행한테 볼 일 있어?" 하고 끼어들음.
척 봐도 예사 사람은 아닌 피지컬에 불쾌한 티 팍팍 내면서 싸늘하게 묻는 정우성 얼굴이 말만 안 했지 꺼지라는 위협이나 다름 없어서, 금발이 얼른 일어나서 자리 뜸. 이명헌만 티 나게 찌푸린 정우성 얼굴 보면서 무슨 말이었이냐고 묻는데 "그냥. 이상한 놈이에요." 대답하는 정우성 이상하게 기분 나쁨.
정우성 사실 미국 처음 왔을 땐 게이 보고 놀라기도 했겠지. 한국에선 말만 들었지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근데 여기오니 길거리에서 남자 둘이 키스하는 것도 심심찮게 봄. 그게 딱히 불쾌하거나 찝찝하진 않았음. 왜냐면 자기랑 너무 먼 얘기라. 그냥 여기가 외국은 외국이구나, 하는 감상 밖에는 없었음. 근데 웬 느끼하게 생긴 놈이 이명헌한테 별 같잖은 수작을 부리고 앉아 있는 걸 보니 화도 나고 아까 공항에서 처음 봤을 때처럼 우리형 내가 지켜줘야지, 하는 이상한 사명감도 들고 해서. 그날 맥주 세잔씩 마시고 나갈 때까지 누가 두 사람 근처 테이블 지나가기만 해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이명헌 지켜내는 거 성공하는데.
며칠 지날 수록 어째 점점 더 심해짐. 이명헌 미국에 일주일 동안 머물기로 했는데. 대체 왜 잠깐 눈만 떼면 오만떼만 남자들한테 번호 따이고 있는지 모르겠음. 음식점이며 카페는 말할 것도 없고 핫도그 트럭에서도 "이 근처 살아? 너 몸 진짜 좋다. 만져봐도 돼?" 하는 싸구려 플러팅이 아주 끊이질 않지. 농구장에서는 맥주 한 잔 사먹으려다 그거 팔던 애가 이명헌한테 너 완전 자기 스타일인데, 인스타그램 아이디 알려주면 안되냐고 하는 바람에 맥주는커녕 물 한잔도 안 마심.
그도 그럴 게 이명헌 희고 눈 끝이 살짝 처진 너드 같은 얼굴에 몸은 반대로 두툼한 근육질인데 피부는 또 손에 착착 감길 것처럼 쫀득하고 허리는 쑥 들어갔는데 허벅지는 딴딴함. 모든 게 너무나 게이들의 이상형임. 심지어 아무 무늬 없는 흰 티셔츠에 청바지, 안경에, 대학가면서부터 기른 약간 긴듯한 앞머리까지. 저 단정하고 담백한 스타일까지도 게이들의 완식임. 그런 이유로 한 여름에 날파리 꼬이듯 이 동네 게이들 마주칠 때마다 죄다 이명헌한테 플러팅 날리는데 이쯤되니 정우성은 거의 이명헌을 지키기 위한 사투중임. 화장실 가는 것도 뛰어서 갔다오는데 아니나달라, 귀신 같이 그 틈에 번호 따이고 있는 이명헌.
정우성 미국 오면서 포인트 가드로 포지션 변경했는데. 이명헌과의 일주일, 코트 위에서의 가드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할만큼 힘든 싸움이었음. 그치만 본인 생각에는 무사히 성공적으로, 이명헌 생각에는 얘 무슨 분리불안 있나 싶게, 이명헌을 게이들의 마수에서 지켜내는데 성공하고. 비로소 이명헌 떠나는 날이 됨.
정우성 이번에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제가 부득불 이명헌 캐리어 끌어다가 차에 싣고 이명헌 공항까지 바래다 줌.
"우성. 고마웠다 뿅."
이명헌 짧게 말했지만 전부 진심이었음. 한참 어리게만 봤던 후배였는데 언제 이렇게 컸나 싶어서 기특하기도 하고 일주일 동안 내내 챙겨준 게 많이 고마웠음. 정우성도 헤어지려니 아쉬워서 둘이 형제처럼 꼭 끌어안고 포옹 한 번 하고는 돌아가면 연락하라고 세 번은 약속하고 드디어 헤어지는데.
이명헌 게이트로 들어가는 줄에 서는 거 보고 돌아가던 정우성이 어째 느낌이 쎄해서 돌아보면. 아니나 다를까, 줄 서 있는 이명헌 뒤에서 어깨 톡톡 두드리는 남자 하나. 이번엔 동양인임.
"한국?"
남자가 이명헌이 들고 있는 티켓 턱짓으로 가리키면서 묻는데 좀 어눌하긴 해도 한국말이라 이명헌도 "네." 하고 한국말로 대답해줌.
"같은 비행기네요. 난 29A인데 자리가 어디에요?"
미국에서 오래 지냈는지 남자가 영 어색한 한국말로 물어보는 거에 이명헌이 대답해주려고 자기 티켓 확인하는데
"이쪽은 별로 관심 없는데."
어느 틈에 왔는지 정우성이 이명헌 티켓 뺏으면서 대신 대답함. 정우성 삐딱하게 버티고 서서는 남자한테 턱짓으로 먼저 가라고 가리킴. 남자가 잠깐 정우성이랑 이명헌이랑 번걸아 쳐다봤다가 어깨 한 번 으쓱하고는 먼저 게이트로 들어가고. 이명헌은 이게 뭐지 싶어서 눈으로 정우성한테 명령하겠지. 설명하라고.
근데 정우성 어떻게 말해야 할지 좀 난감함. 정우성이야 미국에서 오래 있으면서 게이들도 보고 미국애들이 보통 어떤 식으로 수작거는줄도 알고 하니까 한 눈에 아 쟤가 명헌이형한테 수작질 하는 구나, 했지만 이명헌은 전혀 모를 거 아냐. 정우성 곤란해서는 그 커다란 손바닥으로 제 머리만 벅벅 문지르다가 그냥 두루뭉술하게 "저런 애들 다 그쪽이에요." 함.
"그쪽?"
"게이요. 형은 잘 모르겠지만 여기 많아요 저런애들. 방금도 형한테 수작질 하는 거란 말이에요."
정우성 뭐에 삐졌는지 부루퉁하게 입술 내밀고 하는 소리에 이명헌 잠깐 눈만 깜빡깜빡하다가 "아." 하고 영문 모를 소리만 내는데.
곧 정우성 손에서 자기 티켓 가져가면서 "괜찮아." 함.
"네?"
"괜찮다고. 나도 그쪽이야."
정우성 놀라서 눈도 못 깜빡이고 굳어 있는데 피식 웃더니 "간다. 고마웠어." 그 말만 남기고 미련없이 게이트 너머로 사라지는 이명헌이랑, 그 뒤로 밤에 자려고 누우면 '그쪽'인 이명헌 생각나서 잠 못 이루는 정우성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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