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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3 01:21




삐비빅- 삐비빅.

 

알람은 정확히 두 번 울리고 멈췄다. 몸을 일으킨 김낙수는 아직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잠시 고민했다.

 

오늘 새벽 운동은 쉴까?

 

지난밤 일기예보에서 오늘 새벽부터 비가 내릴 것이라고 했다. 비가 오면 아무래도 로드워크는 무리다. 창문 커튼을 살짝 들어 올렸다. 어둡지만 깨끗한 푸른빛 하늘만 보일 뿐 비는 내리고 있지 않다. 오히려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 김낙수는 바로 옷을 갈아입었다.

 

김낙수는 한 번도 입지 않은 새 옷이나 잡화는 항상 3단 서랍의 중간 칸에 넣어둔다. 얼마 전 선물 받은 새 양말을 신으려는데 보이질 않아 서랍장을 열고 닫고 한참을 뒤적거리자 어지간히 시끄러웠던 모양인지 룸메이트인 신현철 끄응하는 소리를 냈다. 하는 수없이 김낙수는 세 번째 칸에서 아무 양말이나 꺼내 신었다.

 

한참 뛰는데 오늘따라 운동화가 뻣뻣했다. 양말 때문인가. 차오르는 숨을 고르게 쉬려 노력하며 양말을 어디에 뒀는지 되짚었다. 바로 전 주, 주말에 외출했을 때 선물 받았고, 서랍장에 넣어두었다. 분명히 중간 칸에. 그리고 꺼낸 적이 없었다. 신현철에게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버릇 따위는 없다. 도둑이 들었을 리도 없다. 무려 거구의 신현철이 있는 방이다.

 

그럼 어디 간 거야. 사라진 양말 때문에 짜증이 난 김낙수가 달리기 속도를 높였다. 운동은 스트레스 해소에 효과적이니까.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코너를 돌았다. 그때 김낙수는 자신보다 앞서 로드워크 중이었던 정우성의 뒷모습을 보았다. 얼굴을 본 건 아니지만 잘 깎은 밤톨머리와 늘씬하게 뻗은 두 다리만 봐도 정우성이었다. 왠지 반갑고, 기특한 마음에 김낙수는 속도를 내 따라 붙었다. 그리고 얼굴만큼이나 예쁘다고 생각하는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평소보다 조금 세게 치고 앞 질러갔다.

 

낙수 형 뭐예요! 제 엉덩이 함부로 치면 안 된다구요!’ 라며 징징댈 줄 알았던 정우성이 조용했다. 김낙수가 뒤 돌았다. 혹시 정우성이 아니면 어떡하지? 걱정이 들었지만 다행히 정우성이 맞았다. 약간 얼이 빠진 정우성. 김낙수는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웃고는 다시 앞을 보고 달렸다.

 

*

 

산왕공고 체육관 사용은 주말에도 자유로운 편이다. 김낙수는 느긋하게 씻으려 체육관 샤워실을 찾았다. 평소대로라면 사물함에서 샤워용품과 세탁바구니에 옷을 정리하고 씻으러 들어갔겠지만 주말 새벽운동은 예외였다. 어차피 대개 아무도 오지 않아서 김낙수는 땀 때문에 몸에 달라붙은 옷을 빠르게 벗고 바로 샤워실 안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줄기 아래 열이 올랐다 식은 몸을 씻자 바로 개운해졌다.

 

기분 좋은 느낌을 즐기던 김낙수는 문득 정우성 얼굴이 생각나 저 혼자 소리 내어 웃었다. ! 정우성 아까 그 표정 진짜 뭐야. 놀란 강아지 같은 표정이었다. 지금껏 새벽 로드워크 할 때 마주친 사람이 나 말고 누구 있다고. 너무 세게 쳐서 그런가? 엉덩이에 손자국 났는지 확인 좀 해줘야겠네. 김낙수는 정우성을 좋아한다. 귀여운 후배로서. 그리고 김낙수가 귀여워하는 정우성 역시 체육관 샤워실을 찾았다.

 

너도 여기로 왔어? 우성아, 나 바디워시 좀 빌려줘라.”

...!”

 

바디워시를 넘겨주는 정우성의 손동작이 평소보다 공손했다. 김낙수가 슬쩍 알몸인 정우성의 엉덩이 쪽에 시선을 노골적으로 주었다. 정우성의 온몸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멍 들었을까 봐. 아팠어?”

 

놀리는 말투지만 퍽 다정해서 정우성은 그저 고개를 양옆으로 도리도리 할 뿐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얌전하게 구는 정우성이 귀여웠다. 다시금 김낙수가 씨익- 웃었다. 서랍장에 숨겨둔 간식이나 나눠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

 

, 진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아랫입술을 깨물며 김낙수가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참고 있었다. 양말이 없는 거야 그럴 수 있지만. 사물함이 없는 건 또 뭐란 말인가, 김낙수의 사물함은 이명헌과 정성구의 사물함 사이에 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사물함이 아닌 최동오의 사물함이 있었다.

 

장난으로 이름만 바꿔 단 건가 싶어 자물쇠 비밀번호를 누르고 사물함을 여는데, 안에는 최동오의 물건만이 가득했다. 정말로 최동오의 사물함인 것이다.

 

뭐냐고. 진짜.”

 

김낙수는 우선 최동오의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어차피 이명헌, 정성구, 최동오. 이 셋이서 장난쳤을 것이다. 아니 최동오는 자신과 같은 피해자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김낙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였다 쉬고 샤워실 문을 열고 나오는 정우성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성아, 너 명헌이가 장난친다고 내 사물함 딴 데다 옮기는 거 봤지?”

..., 아뇨.”

“...설마 너도 같이 했냐?”

? 아니, 아니..에요.”

너 오늘 평소랑 다르잖아? 안 징징거리고 이상하게 조용하고. 찔리는 거 있어서 이러는 거 아니냐고.”

“......사물함..있을 텐데. 원래 있던 자리에...”

어디?”

“...여기...?”

 

정우성이 미리 다 닦아내지 못한 물기를 뚝뚝 흘리며 낙수에게 따라 올라고 손짓했다. 낙수는 조용히 정우성을 따랐다. 정우성이 1학년들이 사용하는 구식 사물함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위에서 오른쪽으로 8번째에 김낙수이름표가 붙여 있는 사물함이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로 옮긴 거잖아?”

..아닌데...”

 

알몸으로 지금 이게 뭐하고 있는 짓거리인지. 김낙수가 자신의 이름표가 있는 사물함 자물쇠 비밀번호를 눌렀다. 자물쇠가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고, 열린 사물함 안에는 김낙수의 물건들이 있었다. 1학년 때 쓰던, 새 것의 물건들이.

 

이건 말이 안 된다고.”

 

어젯밤 일기예보가 틀린 것, 있어야할 곳에 양말이 없어진 것, 사물함 위치가 바뀐 것. 그리고,

 

정우성.”

“...”

너 몇 살이야? 몇 학년이냐고.”

“...18. 2.”

 

정우성은 정우성이었다.

 

“......나는?”

 

김낙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우성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내 결심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낙수, 네가 나보다 한 살 아래니까 17살 고1이지...?”

“......최동오는?”

“...19. 3.”

이명헌은?”

동오 형이랑 똑같지

 

이게 말이 되나. 하루아침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걸까? 이게 꿈인 걸까? 아니면 3학년이 되어 현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던 게 꿈이었던 걸까? 김낙수는 연신 마른세수를 했다. 정신을 가다듬기 힘들었다.

 

정우성. 지금 너 나 놀리는 거지?”

아니. 낙수야, 정신 차려. 너 내 후배야.”

 

김낙수만큼이나 정우성도 지금 이 상황이 혼란스러운 듯했다. 하지만 김낙수의 물음에 대한 정우성의 대답과 표정은 단호했다. 김낙수는 저도 모르게 정우성의 시선을 피했다. 시선은 우연히 열린 사물함 왼편에 있던 거울을 향했다. 그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보고 김낙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없다. 수술자국이 없다. 3학년이라면 자기 몸에 남아 있어야할 상처가 없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김낙수는 어이가 없었다. 한심해서 눈물이 다 났다.


낙수텀 우성낙수 

낙수만 어려진 거 좋아서 어떡함 선배 정우성이 후배 김낙수 그냥 두겠냐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