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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9 00:30
백호가 정신을 차렸지만 태웅도 백호도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음. 집 안에서도 오직 침상에만 누워 빈틈없이 서로를 껴안고 있기만 했음. 배가 고프면 집에 있던 재료들로 가볍게 음식을 만들어먹었고 그 외의 시간은 모두 자거나 서로의 온기를 느끼기만 했음. 백호는 말없이 울 때도 있었고 어린애처럼 엉엉 울기도 했고 가끔은 태웅의 가슴에 머리를 쿵쿵 박기도 했고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노래를 흥얼거리도 했음. 태웅은 그런 백호를 가만히 안아줄 뿐, 무언가를 바라는 일 따위는 하지않았음. 오히려 백호가 태웅에게 이것저것 바라는 게 많아졌음. 안아줘, 업어줘, 먹여줘, 머리 빗겨줘, 노래 불러줘, 나 잘 때까지 등 두드려줘... 그러면 태웅은 백호를 안아줬고 등에 업어줬고 입에 먹을 걸 넣어줬고 엉킨 머리카락을 살살 빗어줬고 서툴지만 어떻게든 노래를 불러줬고 백호가 요구하지않더라도 백호가 잘 때까지 등을 쓰다듬어줬음. 태웅도 백호도 이 공간과 시간 속에 갇혀있고 싶었음.

하지만 세상은 두 사람이 원하는대로 돌아가지않았음. 기어이 몇 시간이고 집 밖에서 태웅을 불러대자 참을성이 끊어진 건 백호였음.

"야, 나갔다와."
"됐어. 조금만 더 있으면 지쳐서 그냥 갈거야."

태웅이 바깥의 소란을 무시하며 저를 껴안자 백호가 태웅의 옆구리를 찔렀음.

"나 자고싶은데 시끄럽다고."

결국 태웅이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음. 이불 속에서 나간 김에 먹을 것도! 라고 외치는 백호를 뒤로하고 태웅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문을 열었음. 얼굴을 마주하고 듣는 말이나 문을 닫고 듣는 말이나 다 똑같았음. 태웅은 제발 밖으로 좀 나오라는 말을 죄다 무시하고 먹을 걸 챙겨 집 안으로 들어갔음. 그런 태웅을 붙잡기 위해 강수가 던져졌음. 전 부족장님이 쓰러졌습니다! 그 말에 태웅의 발걸음이 늦어졌음. 사람들은 그 틈을 놓치지않았음. 명확한 후계없이 부족장이 죽은 탓에 부족은 혼란이었고 전 부족장이 어떻게든 사태를 정리하려다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는 것이었음. 태웅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집으로 들어갔음. 냉정하기까지 해보이는 뒷모습에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였음. 집으로 들어온 태웅은 곧바로 침상으로 향했음. 인기척이 느껴지자 백호가 고개를 빠끔 내밀었음.

"먹을거는?"

백호는 태웅이 가져다 준 꿀에 절인 열매를 먹었음. 태웅은 그런 백호의 입가에 꿀이 묻을 때마다 작게 타박하며 닦아주었고. 손가락에 묻은 꿀을 핥으며 백호가 물었음.

"날씨 따뜻해졌지?"
"응."
"얼음은 녹았어?"
"거의."
"봄바람 불어?"
"응."
"꽃은 폈어?"
"조금 핀 것 같은데 많이는 아냐."

그렇구나. 태웅이 적셔온 물수건으로 제 끈적한 손을 닦아주자마자 백호는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음. 들어올거야? 당연하지, 멍청아. 두 사람은 다시 뿌리가 얽힌 나무처럼 몸을 겹쳤음.

전 부족장의 부재를 알게 된 이후로 태웅은 차츰 바깥일에 나서기 시작했음. 물론 백호가 잠들 때마다 나가서 빠르게 일을 처리하고 돌아왔지만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백호는 태웅이 집 밖으로 나간다는 걸 알았음. 그렇다고 백호가 태웅을 막는다거나 나가는 일에 대해 말하진 않았음. 이전과 똑같이 침상에서만 생활했고 가끔 깨면 텅 빈 옆자리의 온기를 더듬었다가 또 깜빡 잠들었다가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면 옆자리를 채우고 있는 태웅의 가슴을 파고들었음.

백호는 이 생활의 끝이 다가오는 걸 느꼈음. 영영 이 집에 숨어 살 수만은 없었고 제가 저지른 일의 책임을 져야했음. 복수엔 언제나 책임이 따르는 법이었음. 태웅은 요 근래 백호의 처분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중이었음. 태웅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마을에 남아있던 부족민 대부분이, 심지어 백호와 척을 졌던 서쪽 유민들 조차 백호를 두둔해나섰음. 그러나 사망한 부족장의 아들은 어떻게든 백호를 처분해야한다 주장하며 기존 세력들과 함께 대립했음. 부족의 회의장은 하루도 빠짐없이 낮부터 밤까지 사람들로 북적였음.

태웅은 백호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내전도 불사할 생각이었음. 이미 부족은 분열되었고 특히나 남아있었던 자들은 부족장의 아들이 후계자가 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음. 제 맘에 들지않는다는 이유로 부족민을 처형시키려던 부족장의 막무가내인 모습때문이었음. 반려에게 사정을 들은 전사들과 당시 처형 대상으로 몰린 이들의 반려 또한 태웅을 지지했음. 그러나 부족의 오랜 세력인 부족장 측 또한 수가 만만치않았음. 부족의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졌음.

어느날, 기어이 회의장에 날붙이까지 등장하며 분위기가 험악해졌음. 결국 내전의 시작 직전까지 분위기가 내몰리자 각 전사들이 무기를 들었음. 태웅 또한 전쟁 이후로 넣어둔 칼을 들었음. 그 때 회의장 문이 우당탕 열리더니 백호가 나타났음.

"미쳤어? 싸울거면 노약자들은 내보내고 싸워야할거아냐!"

지금 싸움의 핵심이나 다름없는 인물이 당당하게 회의장으로 들어오자 모여있던 전사들이 한껏 당황했음. 심지어 당장 백호를 처형해야한다고 날뛰던 부족장의 아들조차 백호와 대면하자 당황해 어물거렸음. 그만큼 백호는 당당했고 기세가 흘러넘쳤음. 태웅이 놀라 외쳤음.

"멍청아, 여긴 왜 온거야?"
"왜 오긴. 내가 저지른 일의 책임을 지려고 왔다."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당당하게 가리키는 백호에 태웅은 눈 앞이 아찔해졌음. 지금 당장 백호 목을 따겠다 하는 녀석들이 한 둘이 아닌데. 아니나 다를까 백호의 말에 부족장의 아들이 신이 나서 처형하자고 외쳤음. 그러자 백호가 팔짱을 낀 채 콧방귀를 끼었음.

"복수의 율법을 어길 셈이냐?"

그 말에 부족장의 아들이 멈칫거렸음. 복수의 율법은 누군가 해를 끼치면 그 복수에 대한 죄는 묻지 않는다는, 부족 뿐만 아니라 교류중인 모든 땅의 공통된 법이었음.

"부족장은 내 아기를 죽이라 사주했고..."

백호가 숨을 잠깐 거칠게 몰아쉬다 말을 이었음.

"...아기는 죽었어. 나에겐 복수의 권리가 있지."

백호의 눈이 차갑게 빛났음.

"내가 부족장을 죽인 죄에 대해선 할 말이 없어야 할거야."

백호의 말에 부족장 측의 기세가 꺾였음. 태웅은 논리정연하게 말하는 제 멍청이를 보고 놀란 눈을 했음. 저녀석, 저런식으로 말할 줄도 알았나. 상황이 백호의 무죄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음. 암살자는 혀가 잘리긴 했으나 글을 쓸 줄 알아서 부족장의 평판은 비록 죽었지만 땅에 떨어진지 오래였음. 문제는 재판없이 그를 살해했다는 점이었음. 부족 내에서 일어난 일이었기에 재판 절차를 밟았어야했으나 백호는 재판을 무시하고 복수를 행하였으니 백호에게 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게 상대측의 주장이었음. 백호는 마지막 발악마냥 저에게 외쳐대는 부족장의 아들을 무심히 바라보았음.

"그래, 그래서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나왔잖아."

백호의 말에 태웅의 눈이 불안으로 사정없이 떨렸음. 백호는 저를 뚫어져라 보는 태웅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말했음.

"내가 이 부족에서 나가겠어."

태웅이 단숨에 달려와 백호의 어깨를 잡아챘음. 백호는 사정없이 일그러진 태웅의 얼굴을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음.

"부족을 나가겠다고?"
"......그래."

백호가 태웅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부족장의 아들을 노려보았음. 이만하면 되냐는 눈빛에 부족장 측이 한껏 당황해 수군거렸음.

결국 태웅이 백호를 데리고 회의장 밖으로 나갔음. 팔을 뽑을듯이 끌고갔지만 백호는 불평하지않았음. 한적한 숲으로 들어간 태웅은 험악한 얼굴로 백호를 향해 몸을 돌렸음.

"안돼. 못 가."

핏발이 서다 못해 터질 것 같은 눈이 백호를 뚫을듯이 응시했음. 백호는 서글픈 눈으로 태웅의 눈과 마주했음.

"이 수 밖에 없잖냐."
"왜 수가 없어. 네가 나가지 않아도 돼. 난 할 수 있어."

태웅이 말하는 수가 내전이라는 걸 아는 백호가 고개를 저었음.

"전쟁 끝난지 얼마나 됐다고 또 전쟁이야."
"네가 신경 쓸 거 아냐. 넌 그냥..."
"집에서 네 보호나 받으면서 있으라고?"

백호가 피식 웃었음.

"안됐지만 사양이다. 좀이 쑤셔서 못 견디겠어. 그리고..."

백호가 침을 꼴깍 삼켰음.

"누가 나 원망하는거...더는 못 견디겠어."

내전이 일어나면 가족을 잃는 사람이 생길 것이고 그 원망은 백호로 향할 것이었음. 백호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그럴 것이었음. 이전 서쪽 유민들이 백호를 원망했고 그 연쇄 고리가 백호의 아이의 죽음으로 이어졌던 것처럼. 여기서 이 빌어먹을 복수의 연쇄를 끊어야했음.

"내가 여기서 나가는게 최선이야."
"안돼. 가지마. 넌 내 반려잖아. 내 가족이 되어준다고 했잖아. 네가 선택한 건 나잖아. 왜 나를 버리려고 해?"

투정같기도 하고 애원같기도 한 목소리에 백호가 태웅을 껴안았음.

"미안하다."

다정한 손길과 다르게 너무 아픈 말이었음. 태웅이 백호의 등을 사정없이 움켜쥐었음.

"가지마......제발... 강백호, 너 몸도 다 안 나았잖아. 아직 날도 추워. 제발.......내가 다 할 수 있어. 너 안 가도 된다고."

애원하는 목소리에 백호는 되려 웃음이 났음.
이 자식 이전에 나 어떻게 보내려 했대? ......그래서 죽으려 했구나.
백호가 태웅의 등을 토닥였음.

"영영 안 보겠다는거 아냐."

백호의 말에 태웅이 어깨에서 얼굴을 떼어냈음. 백호가 애틋한 손길로 태웅의 뺨을 붙잡았음.

"1년 전이랑 똑같은거야. 무슨 소리인지 알지?"

여우자식이래도 알아듣지? 백호의 말에 태웅의 눈이 흔들렸음.

"멀리 가진 않을게. 그 때처럼 지내는거야."
"...그럼 나도 데려가."
"그건 안돼."

백호가 단호하게 말했음.

"넌 어르신이 원하는대로 부족장을 해."
"싫어."

애초에 강백호를 지키기 위해 떠맡으려던 자리였는데 지킬 이가 없어지면 아무런 욕심도 나지 않았음.

"너없으면 그딴 자리 아무 필요없어. 나랑 같이 가."
"안돼. 그럼 영영 떠나버릴거야."

부족에 속하지 않는다는 건 보호 받지 못한다는 말과 같았음. 저야 어쩔 수 없다지만 멀쩡히 잘 살아 갈 서태웅까지 끌어들이고 싶지않았음. 백호가 주먹을 들어 태웅의 가슴을 툭 쳤음.

"우리 아기를 뺏어가면서까지 네가 부족장에 오르는 걸 막고싶었던거잖아. 절대 뺏기지마."

백호의 말에 태웅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음. 아이를 지키려 발버둥을 쳤고 기어이 원수의 숨까지 끊어낸 백호와 달리 저 스스로는 아이에게 해준 게 하나 없어서, 태웅은 차마 백호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음.

"내가 못된 아빠라고 말하고 싶은거냐?"
"그럴 리가 있겠냐. 네가 우리 지키려다 이렇게 된거 알고있어. 너 귀찮은 일은 싫어하잖아."

그런 네가 굳이 부족장을 탐낸 건......백호가 툭 튀어나온 태웅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음.

"너는 최선을 다했고 나도 최선을 다했어. 결과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지만...그래도 난 너를 잃지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중이야."

백호가 태웅의 반듯한 이마를 쓸었음.

"너무 슬퍼하지마. 우리가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어긋난 것도 아니고 우리는 똑같이 계속 사랑할거야. 1년 전 처럼, 맞지?"

태웅의 이마가 백호의 어깨에 닿았음. 백호는 결좋은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살살 넣어 쓰다듬었음.

"너 가끔 귀찮다고 밥 굶잖아. 나 없어도 잘 챙겨먹어."
"......"
"사냥 나갈 때는 빨래 널고 가지마."
"......"
"아직 추우니까 이불 꼭 덮고. 너무 자면 안돼. 오래 자면 너 자꾸 어디 부딪히더라."
"......."
"바람 피우면 안된다."

백호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태웅이 지금 농담이 나오냐는 눈으로 백호를 바라보았음. 백호가 킥킥 웃었음.

"내가 추방당한거지 이혼한건 아니잖아 "
"당연한 소리를."

죽어도 내 반려야. 심통난 태웅의 목소리를 들으며 백호가 말했음

"봄이 오면 또 사냥가자."
"......응."
"여름엔 수영을 가도 좋을 것 같은데, 어때? 너 수영할 줄 아냐?"
"...응."
"가을에는 뭐하지? 맛있는거 찾으러 갈까. 숲에 뭐가 많이 열리니까."
"응......"
"겨울엔...음....눈구경을 해도 좋고... 계속 자도 좋을거같다. 저번처럼."
"응... 그러자."

점점 눈물이 섞이는 백호의 목소리에 백호의 등을 끌어안고 있던 태웅의 팔에 힘이 들어갔음. 네가 어디있든 찾으러갈게. 백호가 태웅의 몸을 끌어안으며 웅얼거렸음. 그럼 나는 마중나갈게. 그렇게 살자.

봄바람이 따뜻해지고 개울가에 작은 꽃들이 피어날 무렵, 백호는 부족을 떠났음. 백호와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내전이 일어나지않아 다행이라는 분위기가 있었음. 씁쓸하긴 했으나 백호는 이게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음.
백호는 서쪽 부족의 북부 경계선이었던 영역 근처에 자리를 잡았음. 들짐승이 자주 보이는 곳이라 터를 잡기엔 애매한 지역이었음. 태웅이 굳이 여기여야하는 이유를 묻자, 백호가 덤덤히 말했음

"여기 우리 엄마가 있던데야. 우리 엄마 북쪽에서 처음 왔을 때 여기에서 머물렀댔어."

백호의 말에 태웅은 군말없이 정착을 도왔음.

백호는 혼자서도 잘 살았음. 서쪽 부족에 있을 때부터 혼자 살던 삶은 이미 익숙했던 터라, 오히려 요 반년간 태웅과 같이 살았던 날들이 더 낯선 시간들이었음. 다만 1인분만 해야하는 식사를 2인분씩 만든다거나 무두질을 할 때 같이 노가리를 깔 사람이 없다거나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육포의 양을 볼 때마다 눈을 뜨고 감을 때마다 텅 비어있는 옆자리에 이상한 서운함을 느끼곤 할 때마다 백호는 울적함으로 가라앉았음. 반년의 후유증이란 이렇듯 너무 커서 십몇년을 혼자서도 잘 살던 씩씩하던 강백호는 어디로 가고 어리광쟁이가 되어버렸음.

태웅은 종종 백호를 찾아왔지만 자주 오진 못했음. 백호가 떠난 뒤 부족장 자리에 올랐고 연이은 전쟁과 내부분열로 엉망이 된 부족을 정비하느라 바빴음. 그래도 언제나 한 손을 넘기기 전에는 꼭 백호를 찾아왔음.
태웅은 백호 혼자서는 구하지 못하는 음식을 가져다 주기도 했고 다른 부족과 교류해 얻은 천이나 장신구같은 사치품을 가져다 주기도 했고 백호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려주었음. 날씨가 조금 더 풀리고 백호의 정착이 안정되자 둘은 같이 봄사냥을 나갔음. 여느 연인처럼 봄꽃을 따다가 서로의 화살통을 장식했고 보는 이도 없는데 몰래 입을 맞추기도 했고 새풀이 자라 보드라운 초원에 쓰러져 서로 몸을 엉키기도 했음. 그러나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면 태웅은 부족으로 돌아가야 했음. 백호는 언제나 아쉬워하는 태웅을 씩씩하게 배웅해줬고 홀로 집으로 돌아왔음. 하루종일 태웅과 붙어있었는데 집으로 돌아오면 외로움이 밀물처럼 몰려왔음. 추방당한 자신을 부족장인 태웅이 보러온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백호는 잘 알고 있었지만 반년동안 싫어도 좋아도 붙어있었던 탓인지 몇십년동안 비어있던 옆자리가 너무 차갑고 쓸쓸했음. 그래도 태웅이 보러온다는 것 그 자체로도 백호는 그럭저럭 살만했음.

날씨가 더워지고 물가를 찾는 게 잦아짐과 동시에 태웅의 발걸음이 차츰 뜸해졌음. 처음엔 부족장 일이 바쁜가 싶었음. 하지만 한 손을 넘기지않고 꼬박꼬박 보러오던 태웅이 한 손을 넘기기 시작하고 어느순간부터 두 손을 넘기기 시작하더니 길어졌던 해가 다시 짧아지기 시작할 때는 기어이 두 손 하고도 한 손을 넘겼음.
백호는 하루일을 끝내면 집 근처의 절벽으로 갔음. 그곳에 가면 아주 작지만 동쪽 부족의 마을이 보였음. 사람은 잘 보이지도 않고 기껏해야 마을 어귀를 지키는 나무 두 그루 정도와 오두막 한 채가 전부였지만 마을의 출입구 쪽이라 마을을 나서는 사람들이 보였음. 백호는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일을 마치고 나면 절벽가에 앉아있다가 해가 지고 달이 뜨면 집으로 돌아갔음. 집에 돌아온 백호는 곧바로 침상으로 들어갔음. 차가워진 밤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몸이 계속 떨리고 있었음.

첫 서리가 내린 어느날, 늘 그렇듯 멍하니 절벽에 앉아있던 백호는 마을을 나서는 인영을 보았음. 너무 멀어서 사람이 조그만 나무조각 크기로 보였지만 백호는 저게 태웅이란 걸 알아챘음.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백호는 어느새 사라진 태웅의 뒷모습을 멍하니 좇았음. 점점 드물어진 만남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날이 추워진 뒤로 거의 태웅을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백호의 머리를 지나갔음. 백호는 오늘 무언가 끝이 날거라는 강렬한 예감을 느꼈음.
얼마지나지않아 태웅은 백호를 찾아왔음. 이전보다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고 몸짓도 무언가 부자연스러웠음. 태웅의 발걸음이 줄어들 무렵부터 어렴풋이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생각은 정말 생각일 뿐이었고 막상 눈 앞에 닥치니 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렸음.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것처럼 가슴이 아파와서 백호는 제가 제대로 된 표정을 짓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음. 태웅은 그런 백호를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무언가를 말하려 입을 달싹였음.

"할 말이 있어."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지는듯 했음. 백호는 태웅의 입에서 그 말을 들으면 다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질 것 같아서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음.

"됐어. 말하지마."
"뭐?"
"무슨 말 하는지 아니까 말하지말라고."

태웅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는 것도 모르고 백호는 몸을 돌렸음. 더이상 서태웅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차이는 와중에 우는 꼴까지 보이고 싶지않았음. 집으로 가려는 백호를 태웅이 다급히 붙잡았음.

"...너 알고 있었어?"

태웅의 말에 백호가 신경질적으로 팔을 떨쳐냈음.

"니가 티를 그렇게 냈는데 내가 모를 것 같았냐?"
"그렇게 티 났어?"

이새끼가 누굴 놀리나. 백호는 이제 눈물 대신 분노가 치밀어올랐음. 백호가 사납게 고개를 돌리자 조금 놀라고 당황한 태웅의 얼굴이 보였음.

"아주 알아달라고 온 몸으로 보여줘놓고 장난하냐?"

화를 내는 백호에 태웅이 답지않게 중얼거렸음.

"미리 말 안 해서 미안..."

이게 미리 말한다고 될 일인가? 백호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어떻게든 누르려 다시 집으로 몸을 돌렸음.

"됐어.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으니까."

백호가 한숨을 파르르 내쉬었음.

"날씨가 더 추워져서 강이 얼면 떠날거야."
"떠난다고? 어디로?"

백호가 어이없어하며 신경질적으로 뱉었음.

"내가 어딜 가든 니가 무슨 상관인데?"

내가 무슨 사고라도 칠까봐 불안한가보지. 백호가 투덜거리며 발걸음을 옮기려할 때 강한 힘이 백호를 잡아당겼음.

"내가 왜 상관이 없어."

왜 지가 더 성질이야. 백호가 태웅의 어깨를 퍽 밀쳤음.

"네가 무슨 상관이야. 꼴에 추방자와 부족장이라고 감시라도 하게?"
"내가 알아듣게 똑바로 말해."
"아오! 내가 어딜 가든 너한테 뭐가 중요한데?"
"왜 안 중요해! 나도 같이 가는건데!"

태웅이 버럭 외친 말에 백호가 눈을 깜빡였음.

"뭐...?"
"어디 가는지 말은 해야할거 아냐. 아무리 강이 얼어도 그렇지, 겨울에 움직이려면 준비해야 할 게 얼마나 많은지 아냐?"
"자, 잠깐."

백호가 뒷걸음질을 쳤음. 뭔가 의사소통이 크게 잘못되었다는게 느껴졌음.

"너...오늘 헤어지자고 하러 온거 아니야?"

태웅의 동공이 고양이처럼 커지더니 눈썹이 꿈틀거렸음.

"멍청아!"

살면서 처음 들어보는 서태웅의 고성이었음. 놀란 백호가 입을 벙긋거리자 태웅이 한달음에 달려와 백호의 어깨를 잡아챘음.

"헤어지긴 누가 헤어져. 너 보고싶어서 죽는 줄 알았는데!"

태웅의 눈이 희번뜩 빛났음.

"내가 왜 자주 못 왔는데. 그 빌어먹을 새끼 죽이고 후계자 선정하느라 바빠서 그런거였다고."
"뭐?"

태웅이 놀란 백호의 몸을 거칠게 끌어안았음. 귀에 닿은 태웅의 가슴에서 미친듯이 뛰는 맥박이 느껴졌음.

"이제 다 끝났어. 우리 아기 죽인 놈들 복수도 다 했고 부족장 자리는 다른 녀석한테 줬어. 이제 네 옆에만 있을 수 있는데......"

귓가에 태웅이 이를 빠득 가는 소리가 들렸음.

"알긴 도대체 뭘 안다는거야, 멍청이가."

백호가 숨을 색색 몰아쉬머 중얼거렸음.

"난 네가 점점 늦게 오길래... 마음이 식은 줄 알고....."
"내가 본 사람 중에 네가 제일 멍청해. 애초에 같이 나가자고 했는데 말린 건 네 쪽이었다고."

긴장으로 굳었던 백호의 몸에서 힘이 주르륵 빠졌음. 태웅은 제 팔에 기대는 백호를 추슬러 안았음.

"복수는 쉬웠는데 후계자 찾는게 어려워서..... 나도 좀 더 빨리 오고 싶었어."

태웅이 백호의 관자놀이에 입을 묻은 채 중얼거렸음.

"이제 네 옆에 계속 있을 수 있어. 함께 할 수 있다고."

부족을 져버려서는 안된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백호는 차마 말할 수 없었음. 그동안 눌러왔던 외로움이 백호의 심장을 쥐고 흔들었음.

"계속 같이 있어? 이제?"
"그래. 가라고 해도 안 갈거야."
"하지만......"
"다른거 생각 하지말고 나만 봐."

태웅이 백호의 얼굴을 잡고 눈을 마주쳤음.

"같이 있어, 이제."

백호의 인생은 언제나 부재의 연속이었음. 처음은 엄마였고 다음은 아빠였고 그 다음은 부족이었다가 또 그 다음은 아기였고 마지막은 서태웅이 될 줄 알았음. 백호는 태웅을 기다리는 내내 제 삶은 외로움 뿐일거라 생각했음. 하지만 딱 한 번, 평생 한 번만 욕심을 낸다면...
백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음. 백호의 고갯
짓에 태웅이 백호를 와락 끌어안았음.

"멍청이. 이상한 생각이나 하고... 너 때문에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

백호도 태웅의 등을 끌어안았음.

"킁.....지금도 터질 것 같은데..."
"시끄러."

태웅이 툴툴거리며 백호의 뺨에 입을 맞췄음.

"북쪽으로 가고싶으면 가. 대신 같이가는거야. 어딜 가도 나랑 가."
"...응. 계속 같이 있어."
"영원히 같이 있을거야."

두 사람은 서리가 내린 숲에서 한참동안 서로를 껴안고 있었음.






몇 년 쯤 뒤에 각 부족들마다 어떤 소문이 닿았음. 북동쪽 바닷가 근처에 아주 용맹한 사냥꾼 가족이 산다며, 부부 중 한 명은 빨간 머리카락이고 한 명은 까만 머리카락인데 사이가 유별나게 좋다고. 그 자식들도 훌륭한 사냥꾼이라 이름을 떨치고 있더라 하는 그런 이야기였음.











드디어 끝!!!!여기까지 보느라 수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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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웅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