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41828072
view 2368
2023.05.08 23:38

Warning!! 이 이야기는 제대로 된 농구지식을 함유하고 있지 않음  




 윤대협의 팀은 기어코 이번 시즌 우승컵을 가져오는데 실패했다. 파이널 총 7회차의 접전. 윤대협의 팀이 2번 먼저 승리했으나 3차전에서는 패배했고 4차전도 연이어 패배했다 윤대협의 고군분투로 5차전은 승리했으나 뒤이어 6차전과 7차전을 연달아 패배함으로서 결국 이번 시즌에도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으며 윤대협의 손가락에 우승반지가 끼워지는 일도 없었다. 체력과 정신력이 모두 바닥난 상태에서 윤대협은 무작정 쿠게누마 해변으로 향했다. 집에 들려 짐을 놓고 와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해가 질때까지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다가 마음이 비워졌다기보다는 공허해진 느낌으로 무거운 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현관문을 열자, 집에 불이 켜져 있었다.

 

이제 와? 밥 해놨어. 씻고 먹어.”

 

강백호가 와있었다. 미국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 있지? 윤대협은 당황했다. 온다는 말도 전혀 없었는데. 너무 놀라서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인사도 못하고 휴대폰부터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나 문자 중 강백호한테서 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백호는 낮게 웃었다.

 

전화 안했어. 심란할거 뻔히 아는데. 늦으면 늦겠거니 했지.”

 

백호는 아직도 멍하니 서있는 대협의 더플백을 가로채듯 받아들더니 저지를 벗기고는 그대로 욕실로 밀어넣었다. 대협은 닫힌 욕실문 너머 백호가 TV의 볼륨을 높이는 걸 들었다.

 

보던 프로그램이 끝났는데도 욕실의 물소리가 그치지 않자, 백호는 수건과 속옷을 전해준다는 핑계로 노크도 없이 욕실 문을 열었다. 자욱한 수증기에 샤워부스 안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는데 유리문이 열리더니 윤대협이 그대로 백호의 팔을 끌어당겼다. 보송하게 말라있던 속옷과 수건이 바닥에 떨어져 젖어들어갔다.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줄기를 다 맞으면서 백호는 자신을 꼭 끌어안는 대협을 마주 안아주었다. 옷이 젖는 것은 상관하지 않았다.

 

.보나마나 밥 한술 못뜨고 바다만 보다가 왔을텐데.”

 

윤대협은 그저 백호를 꽉 끌어안은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무리 뜨거운 물을 맞고 있어도 온도가 오르지 않는 몸 속 깊은 곳 차가운 구슬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의 표면에 천천히 물기가 맺히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미지근해지고 마침내 따뜻하게 달아올랐다. 검은 그림자같은 공허가 물러나고 넘실거리며 붉은 물이 들기 시작했다.

 

백호야.”

.”

나 배고파. 기운이 하나도 없어.”

그럴 줄 알았어.”

 

백호는 대협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척 하며 쏟아지는 물줄기에 대협의 머리카락에 잔뜩 달라붙어있는 헤어제품들을 씻어내려고 애썼다. 윤대협의 가슴 속이 얼마나 시커먼 것으로 뒤범벅이 되었든 그의 입꼬리는 독자적인 자아를 가진 양 위로 올라갔다. 백호는 늘 그를 웃게 했다. 백호는 대협에게 안긴 채 주저앉은 자세로도 요령좋게 움직여 샴푸통을 손에 넣었다. 손바닥 위에 샴푸를 500원짜리 동전 크기로 짜고는 마구 비벼 거품을 내더니 어깨 위에 머리를 얹은 채 꼼짝도 하지 않는 연인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듯이 문질렀다. 농구공을 한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커다란 손 옆에 있자 신장이 2미터에 달하는 사내의 머리통도 작아보였다. 샴푸거품의 반 정도는 대협의 머리가 아닌 백호의 뺨에 묻었는데도 대협은 어린아이처럼 백호에게 안긴 자세를 풀지 않았다. 백호는 대협이 그러든가 말든가 대협의 머리를 꼼꼼하게 다 씻기는데 열중했다.

 

머리를 감겨주는 연인의 손길을 느끼며 대협은 자신이 결코 잊을 수 없는 과거를 거슬러올라가기 시작했다.

 

운대협은 회상한다. 북산이 산왕을 이겼다는 소식을 들은 날을, 그 처절한 악전고투를, 78-79라는 한끝 차이의 점수를, 그리고 강백호가 부상으로 실려나갔다는 소식과 뒤이은 지학전에서의 참패를. 전국대회에 나가지 못한 능남이지만 목표는 언제나 전국 제패다. 유감독은 당연히 북산-산왕전의 녹화비디오를 구해왔고 능남 농구부 전원은 시청각자료실에서 숨죽이며 눈도 깜박이지 않을 자세로 인터하이 역사에 남을 불멸의 경기를 지켜보았다.

 

대협은 그 비디오의 복사본을 구했다. 그리고 필름이 너덜너덜해질때까지 돌려보았다. 밤에 갑자기 잠이 오지 않으면 비디오플레이어와 TV를 켰다. 일요일 아침에 아침 훈련을 나가는데 필요한 에너지가 차오르지 않으면 그냥 퍼질러앉아 그 비디오를 재생시켰다. 강백호가 산왕의 7, 지금 당장 대학리그로 나가도 세 손가락에 꼽힌다는 고교최강의 센터에게 마크당하면서도 두려움과 포기라는 단어가 아예 머리속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움직이는 모습을, 그 아이가 허슬플레이로 등을 다치고 아픔을 참고 마지막까지 뛰다가 마침내 평범한 점프슛으로 승리를 결정지은 장면을.

 

기도하듯 계속 되돌려보았다. 마치 그 장면이, 그 모습이, 그 집념이 자신을 구원해주기라도 할 것처럼. 북산의 경기수행력과 산왕의 전술을 연구하기 위해 능남 농구부는 부단히도 비디오를 돌려보았다. 이 고군분투의 결말이 8강 진출실패와 강백호의 부상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특정 장면에서는 모두가 눈을 질끈 감았다. 강백호가 현재 재활병원에 입원해있고 언제쯤 퇴원하여 다시 부활동을 시작할 수 있을 지 아무도 모른다는 건 카나가와현내 모든 고교 농구부가 다 알았다. 나중에는 유감독조차 강백호의 허슬플레이가 나올때마다 리모컨을 들고는 뒤로 빨리감기 버튼을 눌러버렸다. 그러자 남는 것은 강백호의 인간을 초월한 듯한 운동능력이었다. 마치 후광이라도 두른 듯 경이적인 플레이였다. 그러자 점점 재활병원에 남겨진 초라하고 외로운 아이는 사라지고 앞으로 적어도 몇년간은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릴 승리의 영광만이 남았다. 곡식을 키에 넣고 까부르면 쭉정이와 티끌은 날아가고 알곡만 안쪽에 모이는 것처럼.

 

윤대협은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절대로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일을 하기로 했다. 그는 병문안을 갔다.

 

그때쯤엔 비디오테이프의 필름이 잦은 재생으로 인해 너무 늘어져서 화질이 극도로 저하된 뒤였다. 강백호의 붉은 머리카락 외에는 모두 흐릿하게 몸의 실루엣만이 남아, 특히 산왕같은 경우에는 등번호가 아니면 누가 누구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차피 이정환을 필두로 올해 북산과 경기를 치뤄본 고교에선 모두 병문안을 갔을 것이다. 윤대협은 자신의 방문이 그리 생뚱맞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변덕규에게 찾아가 도시락을 주문하자, 그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강백호의 병문안을 간다고 하자 그녀석 먹성에 2인분까지고는 어림도 없을 거라며 2인분 가격에 5인분 도시락을 만들어주었다. 윤대협은 바 테이블에서 변덕규가 그 커다란 솥뚜껑같은 손에 어울리지 않는 섬세하고 정교한 솜씨로 생선을 손질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수상하리만치 비싼 어종들로만 채워지고 있는 도시락을 쳐다보다가 문득 변덕규가 산왕전을 눈 앞에서 직접 관람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스스로 그 경기의 하이라이트가 되어버린 사람이니까 말이다. 대협은 능남의 전 주장이 보기보다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솔직히 감탄했다. 덕규가 채치수에게 그 정도의 의리를 갖고 있을 줄은 몰랐다.

 

덕규형, 멋있었어요.’

.’

 

덕규는 대협이 뭘 말하는 지 바로 알아들었다. 안그래도 다른 농구부 후배들도 비슷한 소리를 하고 갔다. 채치수와의 뜨거운 우정 운운하며 놀려대는 놈들도 있었지만.

 

형이 채치수를 살렸던데요.’

 

덕규는 쓰게 웃었다.

 

치수를 살린 놈은 따로 있지. 나는 그저 꼴사납게 굴지 말라고 한마디 했을 뿐이야.’

직접 보니까 어땠어요?’

 

덕규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냄비에서 달큰한 간장양념냄새가 나는 무언가를 꺼내더니 도시락곽에 옮겨담았다. 그리고는 보통 이 정도 고급생선이 포함되는 정식에는 잘 들어가지 않는 아주 굵은 계란말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불 위에 올린 음식에서 눈을 뗄 수 없기에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굵고 튼튼한 계란말이 다섯개가 도마 위에서 썰기좋게 식혀지는 동안 덕규가 늦은 대답을 했다.

 

멋있고 경이롭고 안타까웠지.’

……

산왕도 산왕이지만 우리에겐 북산이 더 무섭지. 저 북산을 넘어서야 전국의 문이 열릴 테니. 여전히 벤치가 얇지만 북산은 이제 팀으로 완성됐어. 원래도 기세가 오르면 걷잡을 수 없는 팀이었지만 점점 더 무서워질거다. 특히 그 1학년 콤비는 반드시 대비해두어야 해.’

 

그 골치아픈 콤비 중 한 녀석의 입에 들어갈 도시락을 세상 정성스럽게 준비하고 있는 전 주장 앞에서, 안그래도 충분히 골치아팠던 콤비 중 다른 녀석을 더 골치아프게 만드는데 일조한 현 주장은 시선을 피했다. 강백호의 플레이를 바라보는 것이 대협에게 완전한 몰입을 경험하게 했다면 서태웅이 스스로의 껍질을 깨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의 내면을 엉망진창으로 휘저어놓았다. 요근래에는 이렇게 질척하고 복합적인 기분을 맛보는 일이 별로 없었다. 끝내 못알아들은 줄 알고 실망했더니 기어코 늦게 않게 깨달아 말그대로 날아오르는 타학교 후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선배에 대한 존경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고 자기보다 강한 선수라면 그저 꺾어야 성이 차는 건방진 애송이가 전국에 너보다 나은 놈이 있나?’라고 물어왔을 때의 그 기분이다. 처음에는 이 되바라진 녀석에게 얄팍한 존중이나마 얻어냈다는 것에 잠시 놀랐다가, 같은 학교 후배한테도 잘 안해주는 충고를 애써 해줬는데도 전혀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그렇다면 결국 그 충고를 뒤늦게라도 깨달아 그의 가르침을 헛되지 않은 것으로 만들었으니 기분이 다시 좋아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강백호에 대해서 그가 정도 이상의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능남 농구부 모두가 알았다. 윤대협이 강백호에 대해 말하는 입을 다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태웅은그 정도의 선수라면 의식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 의식의 끝이 그리 썩 좋지 못한 뒷맛을 남긴다는 게 문제다. 윤대협은 자신이 서태웅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치 자신의 치부라도 되는 양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모두가 서태웅을 보고 입을 모아 너처럼 화려하고 변덕스러운, 천재적인 에이스라고 평했을때 윤대협은 씨익 웃기만 하고 일언반구 보태지 않았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을때부터 이 녀석은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기가 싫다. 대협은 자신이 타인의 결점을 침소봉대하여 호들갑떠는 사람은 아니라고 여겼는데 이상하게 서태웅을 상대로는 마음이 치졸해졌다. 그가 농구선수로서, 아니 한 인간으로서 가지는 불완전성과 미흡함이 이상하게 윤대협에게 폐를 끼친 그 어떤 타인보다 세게 그의 속을 긁었다.

 

강백호와는 정 반대다. 강백호의 모든 결점들, 미숙함과 서투름과 경박함, 무례함 그 모든 것이 진심으로 아무렇지도 않다. 그것들은 그가 360도 전방위로 흩뿌리는 복사열 같은 에너지에 당연히 따라오는 부산물이니까. 소금바람을 맞고 태양에 그을리지 않고서야 바다 낚시를 즐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가 하루종일 원온원 상대를 해주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충고를 해 준 쪽은 결국 그 거슬리는 서태웅이다. 자기가 길을 잃었는지도 모른채 어디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는 길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눈 앞을 가로막은 벽마다 있는 힘껏 부딪히며 사방팔방 좌충우돌 뛰어다니던 어린애.

 

재활병원이 인근 바닷가 근처에 두 군데 이상 있을 리 없으니 택시를 타면 바로 도착하겠지 싶었고, 백호의 병실 위치는 안내데스크에 가서 물어보려고 했는데 이미 병문안을 다녀온 변덕규가 병원의 정확한 주소와 강백호가 입원해있는 병실의 번호까지 모두 가르쳐주었다. 다섯개의 도시락을 운반하려면 택시는 이러나 저러나 타야했다.

 

강백호가 입원해있는 병원은 운동선수 및 교통사고 피해자 재활에 특화된 치료시설이었다. 문득 백호가 이런 병원에서 청구하는 치료비를 감당할 수 있나 싶은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백호가 있는 병실은 6인용 다인실이었는데 이름표를 보니 정말 운이 좋게도 백호 외엔 다른 환자가 딱 한명 더 있었다.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어디가 백호의 자리인지는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창가 바로 옆, 방문객 기준으로 왼쪽이 백호의 자리였다. 입원이 아니라 이사라도 온 것처럼 짐이 많았고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북산이 인터하이에서 일으킨 파란이 워낙 요란했기 때문인지 카나가와현뿐만 아니라 전국 고교 농구팀 중 산왕전을 관람한 팀이라면 사람이 직접 병문안은 오지 못해도 우편으로 위문품을 보내왔다. 그 중 가장 압도적인 부피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캠핑용 간이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는 비디오 플레이어 일체형 TV였다. 백호 외에 환자가 한 명 더 있는 걸로 알았는데 잠시 외출했는지 병실 안에는 백호 뿐이었다. 백호는 일체형 TV가 방출하는 영상에 정신이 팔려서 대협이 들어오는 것도 몰랐다. 강백호는 언제나 윤대협을 놀라게 했다. 그것도 아주 기겁하는 수준으로.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등부터 세게 떨어지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다친 부위가 허리라서 재활에 정말 주의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이 녀석이 엎드려 누워있었다. 그것도 TV를 보고 있으면서! 윤대협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윤대협을 아는 이라면 대체적으로 윤대협이 느긋하고 여유롭고 온유한 성품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를 훨씬 잘 아는 사람이라면 저 형용사들 중간중간 게으르고’, ‘변덕스럽고’, ‘자못 무책임한같은 말들을 더 끼워넣고 싶겠지만 어쨌거나 큰 틀은 유지될 것이다. 그러므로 윤대협을 아는 이라면 그 누구라도 그가 사람을 주먹으로 칠 정도로 격분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워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윤대협은 강백호가 병자만 아니라면 그의 등짝을 한대 후려치고 싶었다.

 

? 윤대협?’

..강백호.’

네가 여긴 왠일이냐?’

당장 똑바로 앉지 못해?!’

 

강백호가 윤대협의 말을 듣고 후다닥 일어난 건 학습된 조건반사라고 해야할 것이다. 이미 채치수와 권준호, 정대만, 송태섭, 이한나 등 농구부 선배들이 방문할때마다 허리에 무리가 가는 자세를 하지 말라고 잔소리에 호통에 팔뚝 꼬집기까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호는 무언가에 몰두하면 주의사항을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지금 강백호가 몰두해있는 건 정대만이 주고 간 NBA 경기를 녹화한 비디오였다. 윤대협은 강백호가 똑바로 앉을 때까지 비디오를 끄고 아예 배출 버튼까지 눌러버렸다. 백호는 투덜투덜대면서도 꾸물꾸물 방석과 등받이를 가져와 벽에 쌓고는 그에 기대어 앉았다.

 

이러면 자세히 안보인단 말이야.’

계속 그렇게 가까이서 보면 영영 자세히 못보게 될 거야.’

 

테이프 라벨에 쓰여진 글짜는 ‘87 NBA east finals’ 이었다. 농구를 하는 사람이 NBA의 팬이 아닐 수는 없지만 윤대협은 몇년도에 무슨 경기가 있었고 어떤 팀이 붙었는지를 역사 시간에 연대표 외우듯 줄줄 외우고 다니는 종류의 팬은 아니었다.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랑 보스턴 셀틱스야.’

 

백호는 윤대협의 얼굴에 떠오른 궁금증을 알아차렸는지 냉큼 알려주었다.

 

‘5차전이야.’

 

백호는 윤대협이 병문안 온 것에 아무런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다. 얼굴만 겨우 알고 이름도 기억안나는 사람들이 (그 중 몇몇은 어느 학교인지도 몰랐다) 자기일처럼 안타까워하며 쾌차하길 빈다고 말해주었는데 백호는 그게 아주 기뻤다. 사회성이 바닥을 기는 만큼 사교성이 성층권까지 올라가는 어린 티라노는 농구를 통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알게 되었고 자신의 쾌유를 빌어주고 있다는 사실에 마냥 기분이 좋았다. 당연히 얼굴도 이름도 학교도 다 알고 경기도 두 번이나 치뤘던 윤대협 쯤이야. 오히려 어색해서 삐걱대는 쪽은 윤대협이었다. 그런데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화가 나서 대뜸 고함부터 질러댄게 어색함을 없애는 노릇을 해줬다. 윤대협은 덕규형의 선물이라며 다섯개의 도시락 세트를 들어보였고 강백호는 반색을 하며 좋아했다.

 

두목원숭이 전에도 엄청 맛있는 거 주고 갔는데, 헤헤.’

 

병원밥은 맛있는 편이었지만 양이 너무 적었다. 2시간 뒤면 식사시간일텐데도 백호는 주저없이 도시락 하나를 열어서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윤대협에게 옆에 앉으라며 손짓 하고는 윤대협이 선물로 가져온 도시락 하나를 무릎에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긴 다리를 뻗어 입구에 튀어나와있는 비디오테이프를 발끝으로 다시 밀어넣었다. 테이프는 자동으로 재생되었고 대협은 졸지에 강백호와 1시간 반이 넘는 시간동안 보스턴 셀틱스와 디트로이트 피스톤즈가 5, 6, 7차전까지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걸 지켜보게 되었다. 윤대협이 TV 화면을 보고 강백호를 보고 도시락 내용물 중 마음에 드는 것부터 골라먹는 동안 백호는 남은 도시락 세개를 깨끗하게 해치우고 리모컨으로 특정 장면을 몇번씩 반복재생해가며 보았다. 윤대협 쪽은 거의 보지 않았다. 그래서 대협은 마음껏 강백호를 쳐다보았다. 아직 어린 얼굴에 젖살은 그대로인데 몸이 영 홀쭉해졌다. 대협은 저런 몸을 많이 보았다. 다친 것은 허리 뿐이고 아직 무릎의 성장판이 닫히지 않았으니 아파서 누워있는 동안에도 계속 키가 크는 것이다. 재활치료 자체가 성장판을 계속 자극하기도 할 것이고. 지금 강백호가 흡입하다시피 섭취하고 있는 생선 단백질은 모두 뼈와 근육으로 갈 것이다.

 

높이 뛰는 것도 아니고 몸이 빠른 것도 아닌데 다 잡아내네. 신기해.’

 

백호는 윤대협이 자신과 함께 경기를 시청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어느 선수를 얘기하는지 특정하지 않았다.

 

누구?’

저 키 큰 백인선수 말이야.’

 

당시의 보스턴 셀틱스에는 흑인 선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백인선수가 더 많았다. 따라서 백호가 키 큰 백인선수라고 말한 것만으로는 누구인지 특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백호가 앞서 이야기한 것과 맞춰보면 그가 누굴 말하는 것인지는 자명하다.

 

그게 그 선수의 장기이지. 볼이 어디로 올지 아니까 미리 그 자리에 가 있는 거야.’

어디로 튈지 아니까 리바운드 할때도 높이 뛸 필요가 없고.’

그렇지.’

블록도 스틸도 되게 쉽게 하는 거 같아

 

잠깐의 공백

 

앞으로는 어떻게 하면 저렇게 할 수 있는지 배워야겠네.’

 

윤대협은 아무 말도 못했다. 사실 병문안 자체도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그는 백호의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을지 전혀 예측하지도, 짐작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무작정 돌격했다. 궁금해하기는 했다. 우울해하고 있을까, 좌절하고 있을까, 아니면 절망? 그러면서도 위로가 될 만한 말은 단 한마디도 준비하지 못했다.

 

의사가 뭐라고 했어?’

 

묻는 목소리는 윤대협 본인의 귀에도 자기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 쌤이야 언제나 똑같지. 계속 노력하자,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 이 정도 회복속도면 진짜 빠른 거다.’

근데 왜

 

여기서 윤대협은 기어코 헛기침을 해서 목을 가다듬어야 했다.

 

왜 새로운 걸 배워야겠다는 말을 해?’

‘어, 그게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니까? 내가 초짜니까? 명색이 천재가 되어서 팀의 방해가 될 수는 없으니까?’

..’

그리고 전에 만만쓰가 내가 가진 레퍼토리는 만천하에 드러나서 거덜났으니 다른 걸 준비해야 한다고 했어.’

 

윤대협은 강백호가 경기장에서 커다란 소리로 만만쓰!’라고 부른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했기 때문에 그 말의 진짜 의도도 알 수 있었다. 정대만은 강백호에게 목표를 주고 싶었던 것이다. 우울과 좌절에 잠식되지 않도록.

 

정대만이 3점슛을 가르쳐줬어?’

아니, 그건 미들슛부터 완전히 마스터한 다음에 가르쳐준대. 그런데 슛은 하체부터 써야하는 거라 지금 몸 상태로는 연습 못해. 그래서 일단은 룰부터 제대로 알라고 책을 잔뜩 주고 갔는데 한 장만 읽으면 그 전에 뭘 봤는지 기억이 안나지 뭐야. 그렇게 얘기했더니 만만쓰가 막 화를 내면서 이 TV랑 비디오를 주고 갔어. 자기가 보던 거니 흠집하나 내지 말래. 윤대협 너는 알았어? 만만쓰 집에는 거실에는 식구끼리 다 같이 보는 커다란 TV가 있고 만만쓰 방에 만만쓰 혼자만 보는 작은 TV가 따로 있대. 그럴 수도 있는 거였어? 원래 TV는 한 집마다 한 대 아니야?’

 

윤대협은 빙그레 웃었다.

 

그러게. 나도 그런 줄만 알았는데.’

 

백호는 변덕규가 만들어준 도시락 네 개를 앉은 자리에서 다 먹고 병원에서 주는 저녁식사까지 후루룩 해치웠다. 그러고는 밥을 먹었으니 이제 입가심을 하자며 병실에 딱 하나 있는 공용냉장고에 보관해둔 멜론을 꺼내왔다. 힘이 원체 좋아서인지 아니면 칼 쓰는 솜씨가 좋은 것인지 백호는 작은 과도로도 수월하게 멜론을 반으로 쪼갰다. 안쪽 과육의 색이 연두색이 아니라 주황색이었다. 윤대협은 이 선물이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온 카나가와현 고교 농구부원들에게 큰형님 노릇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니까.’ 강백호의 사정을 알자마자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코트 안에서는 냉정하다못해 냉혹한 전략가인데 코트만 벗어나면 돈과 인정을 퍼주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다.

 

과연, 정환이형한테 유바리 멜론을 얻어먹으려면 산왕 정도는 물리쳐야하는 건가? 그렇다면 난 먹을 자격이 안되겠는 걸?’

무슨 소리야. 애늙은이가 그렇게 째째하진 않아. 게다가 이건 이미 내꺼인걸!’

 

방문객에게 비싸고 귀한 과일을 접대할 수 있다는 것이 기분좋았는지 백호는 콧노래마저 흥얼거리며 멜론을 한입에 먹을 만한 크기로 자르고 대협에게 이쑤시개를 건네주었다. 대협은 입 안에서 부드럽게 으깨지는 달콤하고 상큼한 과실을 잠시 머금고 있다가 목구멍 안쪽으로 넘겼다. 설마 이정환이 정말로 산왕을 물리친 대가로 줬을 리가 없을 텐데도 대협은 자기가 아무 생각없이 뱉은 말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사람의 살점을 삼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강백호.’

?’

멋있었다.’

 

수평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 태양이 내뿜는 농후한 광채가 창을 뚫고 들어와 강백호의 얼굴을 그 머리색과 비슷하게 물들였다.

 

네가 최고였어. 의심의 여지없이.’

 

대협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들었는지 백호는 말이 없었다. 크게 웃으며 과연 천재를 알아보다니 제법인데?’ 같은 말을 해주면 더욱 안심했으련만 백호는 오히려 시선을 피하더니 목이 메여서 대답을 못한다는 핑계를 대기라도 할건지 볼 한가득 멜론을 밀어넣었다. 지금 강백호의 목까지 침범한 붉은 색은 창 밖에서 흘러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대협은 그런 백호를 단 한마디로 구해주었다.

 

역시 내가 보는 눈이 있지.’

아 뭐야~’

 

대협은 생각했다. 나는 늘 네가 훌륭한 선수가 될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이렇게나 훌륭한 선수가 될 줄은 몰랐어. 난 언제나 너를 과소평가하지. 내가 가장 너를 정확하게 안다고 자부하면서도 언제나 네 가능성을 잘못 재단해.

 

윤대협이 3조각 쯤 먹을때 멜론 절반을 해치운 백호는 그제서야 생각이 미쳤는지 윤대협에게 산왕전을 어떻게 봤냐고 물었다. 대협은 전국의 모든 고교 농구부가 그 경기의 녹화테이프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대꾸했다. 모두가 한도 끝도 없이 돌려보며 산왕의 전술과 산왕을 꺾은 북산의 플레이, 그리고 백호 너의 리바운드를 복기하며 대비하고 있을 거라고. 안그래도 분위기에 쉽게 휩쓸리는 백호의 에고가 한도 끝도 없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발화자가 다름아닌 그 윤대협이라는 사실이 큰 역할을 했다. 대협은 눈 앞에서 풍선 부풀어오르듯 부풀어오르는 백호의 자부심을 불난 집에 부채질 하듯 부추겼다. 과연 나를 쓰러뜨린 남자답다고 얘기하자, 비로소 백호는 대협이 듣고 싶었던 경박하고 요란한 웃음소리를 들려주었다.

 

역시 윤대협이야! 이 몸의 진가를 인정하다니!’

 

딱히 강백호의 가치를 알아보기 위해 윤대협 수준의 안목이 필요하지는 않다. 대협은 그렇게 생각했다. 눈이 있는 자라면 네가 가지고 있는 재능의 크기와 희귀함은 다 알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부정하거나 축소하고 싶은 마음은 자신이 지금 처해있는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나약함의 산물일 뿐이다. 강백호가 농구를 배운지 겨우 4개월된 초보라는 사실만 되풀이하면서 4개월동안 이만큼을 이뤄낸 아이가 1, 2, 마침내 4년쯤 지나면 무엇을 이루어놨을 지에 대해서는 상상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인생에 있어 4년이 얼마나 짧은 시간인지 이 나이에는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윤대협은 그것을 짧은 시간이라고 단언했다. 누구나 태풍이나 해일이 오기 전의 징조를 안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과연 만만쓰, 허튼 말은 하지 않았어. 모두가 이 천재의 플레이를 연구하고 있단 말이지. 호오, 역시 방심할 수 없어.’

그렇지, 그렇지.’

 

말하면서도 대협은 자기가 좀 비겁하게 굴고 있다고 생각했다. 윤대협의 찬사는 강백호가 지금까지 들어온 핀잔과 걱정, 염려와 질책에 딱 반대되는 말이었다. 강백호가 신이 나서 역시 윤대협은 이 천재의 가치를 알아줄 줄 알았다며 의기양양해한다. 하지만 걱정과 염려, 질책과 핀잔이야말로 이 아이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과 관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맨 마지막에 나타난 주제에 진심으로 쌓아올린 탑 꼭대기에 걸터앉은채 기름과 꿀을 잔뜩 바른 말들로 백호의 마음을 얻어내고 있다. 이 아이를 진심으로 아낀다면 두 번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말해야 옳다. 절대 승부를 위해 너의 미래를 거는 짓은 하지 말라고. 하지만 잊혀지지 않을 광휘 뒤에 홀로 남겨진 아이를 찾아왔으면서도 윤대협은 강백호의 플레이를 다시 보고 싶었다. 백호가 산왕과 싸우면서 보여준 플레이야말로 사람의 육체와 영혼을 가진 자가 현실에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의 최고점이라고 생각했다. 천재 에이스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아온 윤대협에게 기술적 완성도는 언젠가 이룰 수 있는 목표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현실이다. 하지만 백호가 보여준 그 집념과 에너지는. 그것이 다시 한번 재현된다면, 그때는 반드시 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윤대협의 세계 속에서는

 

그 광휘와 열기만이 실존에 앞선다.

 

강백호는 그러한 윤대협의 마음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자신에게 돌아온 긍정적인 피드백에 기뻐하기만 했다. 후회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아무런 망설임없이 어떻게 이 기나긴 밤을 이겨내겠는가. 이제 강백호에게는 윤대협의 말이 생겼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지새우는 기나긴 밤을 이겨낼 무기가 되었다. 후회하지는 않는다. 열번, 백번 다시 생각해도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냥 불안에서도 벗어나겠는가. 강백호의 세계를 쌓아올린 재료들 중 가장 외곽에서 최전방을 지키고 있는 것은 언어다. 다정한 말들과 딱 그만큼의 무게와 따스함으로 구워진 벽돌을 쌓아 축조한 성으로 외부의 파랑을 쉽게 투영하는 자아를 보호한다. 윤대협의 찬사는 그 성 주변에 두른 해자쯤 된다. 진심어린 걱정도 염려도 다 소중하기는 했지만 해가 지고 난 뒤의 시간을 버티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꼐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