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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7 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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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들짝 놀란 유모가 사내의 눈치를 본다. 그러게 말입니다. 사내는 소년에게 살짝 웃어보이며 돌아선다. 소년은 형을 닮지 않았다. 사내는 소년의 형만큼이나 소년을 잘 알았다. 소년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사내는 온통 기억 속에서 살았다. 사내가 살뜰하게 살핀 저택의 살림은 소년이 떠나던 그 날과 다른 것이 없었다. 소년의 기억에 남아있는 그 무엇도 사라지지 않은 집안의 구석구석, 세심하게 신경썼을 사내는 그저 웃었다. 마당에 놓여있는 공과 짚인형은 먼지 한 톨도 발견할 수 없을만큼 깔끔했다. 사내가 소년을 가르칠 때 사용했던 것들이니 이제 누구도 사용하는 이가 없을 텐데도. 소년은 오랜만에 집을 돌아본다. 소년의 어린시절이 잔뜩 묻어있는 집을 본다. 카즈는 아직도 변하지 않는구나.

소년은 저택의 마루 한 가운데에 눕는다. 어렸던 소년이 혹시 뛰어다니다 넘어질까 사내는 꼭 필요한 가구가 아니라면 내놓지 않았다. 지나다가 소년과 마주칠만도 한데 사내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다. 오랜만에 돌아온 저택은 지겨울 정도로 기억과 다른 것이 없다. 도시의 생활을 겪은 소년에게 시골의 저택은 영 재미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손가락을 꼽아가며 저택에 돌아올 날을 기다렸던 소년은 단정한 필체로 안무를 묻던 사내를 생각한다. 시골에서 도시로 넘어온 꼬깃한 편지들을 몇 번이나 읽었던지. 마을의 장에서 사와키타 저택을 바라보고 있으면 느껴지던 딱 그만큼의 단정함을 담은 편지. 매일 그리워하던 사내의 모습이 완벽히 기억속에 남아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소년은 묘한 기분을 느낀다.

언제든 소년이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같은 완벽한 식사도 모두 사내의 준비였을 것이다. 소년은 정갈하게 차려진 식사를 눈 앞에 두고도 샐쭉한 얼굴을 했다. 카즈는? 낮동안 말없이 저택을 그저 돌아다니던 소년이 걱정되어 식사자리까지 따라온 유모가 소년의 물음에 답한다. 저녁식사는 거르겠다고 하셨어요. 가끔 몸이 좋지 않으실 때엔 드시질 않아 찬이 소박하네요. 아침 일찍 장에 나가라고 하겠어요. 서둘러 말을 덧붙인다. 소년은 내내 젓가락으로 찬들을 들춰댄다. 입맛이 없으세요? 하인의 물음에 고개를 젓는다. 너무 입맛이 돌아서 문제야. 도통 입안에 음식을 넣지 않는 소년의 말을 하인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저택에 남아있던 이들에겐 아직 도련님이었지만 소년은 자랐다. 소년은 금세 상을 물린다. 소년은 학교에서 셈에 빨랐다. 수를 세는 것도 잘했지만 시골에서 온 도련님이라 쉽게 무시를 당하던 동안에도 쉽게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소년은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방법을 알았다. 순진해보이는 소년의 미소를 당할 이가 없었다. 사내가 줄곧 그래왔던 것처럼.


내일은 마을에 나가봐야겠다.


소년은 준비된 이부자리에 눕는다. 소년이 정말로 소년이었을 때와 같은 천장이었다. 지겨워. 소년의 목소리는 천장에 튕겨 다시 돌아온다. 다시 해가 긴 여름. 도시보다 서늘한듯 후끈한 시골의 여름은 소란스럽다. 멀리서 벌레가 우는 소리가 소년의 귓전을 때린다.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방문을 나서는 소년의 걸음이 조심스럽다. 이제는 소년이라 부르기엔 너무도 커버린 소년은 천천히 뒷마당으로 향한다.

소년과 사내의 추억이 가득 담긴 뒷뜰을 찬찬히 살핀다. 소년이 좋아하는 꽃을 신경써서 심은 사내의 마음이 무엇이었을지 생각한다. 누군가 없어진대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넓은 저택에 작은 소년이 온 마음을 기대곤 했던 곳은 조금 달라져있었다. 소년이 사내에게 담아보낸 추억들을 빼곡하게 채워넣은듯한 공백이 느껴졌다. 소년은 뒷마당의 끝을 따라 걷는다. 사내가 지내는 방은 소년의 방에서 가장 먼 곳이었다. 왜 카즈의 방은 내 방에서 멀어? 어렸던 소년의 물음에 사내는 웃어보였다. 조용한 것이 좋아서요. 소년은 이제 이유를 안다.

긴 복도의 끝은 마을어귀에 붙어있는 산이 눈 앞에 있는듯 가까운 곳이다. 소년은 줄곧 사내가 산을 마주하는 방에 있는 것이 싫었다. 그 산을 넘어 저택에 왔다던 사내가 그 길을 따라 다시 돌아갈 것 같았다. 소년이 저택의 대문을 열고 온 마을을 활보하는 동안 담장 안에서 바깥을 궁금해하는 일조차도 없었던 사내가 홀로 정원을 마주하는 순간 몰려올 감정의 바람을, 소년은 어렴풋이 느낀다. 불지 않는 바람에도 흔들리는 마음에 소년은 걸음을 서두른다.

지금 소년은 사내의 모든 것이지만, 사내의 마음 깊은 곳을 차지할 수 없음을 안다. 또래보다 늦었던 소년의 시작들 탓일지도 모른다. 소년에게 사내는 부모이며, 스승이고 친구였다. 소년을 만든 모든 것들을 차곡차곡 채운 사내를 탓하고 싶을 정도로 소년은 사내에 대해 복잡한 마음을 가졌다.


카즈. 뭐해?


완벽한 저택을 꾸리는 이가 만들어낸 저택의 유일한 오점 한 가운데에 사내가 앉아있다. 순간, 소년은 이 작은 정원의 모든 풀을 베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소년의 모든 것을 채웠으면서 모르는 척을 하려는듯 구는 사내의 모습이 원망스럽다. 소년은 이제 서운하다는 이유로 뒷마당으로 향하지 않는다. 제법 길었던 시간동안 소년은 사내를 대하는 방법을 배웠다.


잠이 안오세요?

응.

따듯한 차를 내어올까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다는 것처럼. 사내는 당연하게 답한다. 저택의 모든 것은 그대로다. 소년을 맞이하던 저택의 사용인들의 면면마저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한결같이 관리한 사내는 달라져있었다. 소년이 사내를 마주한 그 순간부터 사내는 달라져있었다. 찰나의 순간 소년은 사내의 결심을 읽었다.

소년은 사와키타 집안의 늦둥이였다. 소년의 형이 벌써 마을에서 공을 차고 글을 읽을 때 태어난 아이였다. 집안뿐 아니라 온 마을이 소년의 탄생을 기뻐했다. 소년이 아주 어렸을 때 소년과 소년의 형은 부모를 잃는 슬픔을 겪었으나 형제는 함께였다. 소년이 몸을 뒤집었을 때, 무릎에 힘을 주고 기어다닐 수 있게 되었을 때, 막 걷기 시작했을 때에도 소년의 형은 항상 함께였다. 소년은 그 때문인지 형을 아주 잘 따랐다. 막 걷기 시작할 즈음엔 형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고 싶어했다. 소년의 형이 혼기에 들었다는 말에 소년은 심통을 부렸다. 아직 형과 함께한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낀 탓이었다. 그렇게 소년의 집안에 사내가 찾아왔다. 전날에 산을 넘어간 형이 그 어느때보다 기뻐하는 얼굴로 맞이한 사내는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카즈나리입니다.

소년은 그 때를 기억한다. 사내가 싫었지만, 싫지 않았다. 소년의 형은 소년만큼이나 좋아하는 것들이 많았기에 소년은 형을 기다리는 일이 많았다. 형님, 언제 들어오세요? 물을 때마다 소년의 형은 미소로 답했다. 그러면 사내가 소년의 손을 잡았다. 도련님, 저하고 뒷마당에서 놀까요? 소년은 형과 사내를 번갈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형수와 함께 놀고 있으면 형은 언제든 웃으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으니까. 외출한 형은 자주 꽃의 씨앗을 들고왔다. 마을 바깥의 친우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엔 귀한 씨앗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날 밤에 형은 사내와 대화를 나누며 정원에 씨앗을 심었다. 소년은 그것이 싫었다.

소년은 집에서 글을 배웠다. 소년의 글 선생님도 사내였다. 소년이 집에서 내내 글을 읽으면 형이 외출에서 돌아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다녀오셨어요. 사내의 단정한 인사를 들으며 형은 행복해했다. 나도, 나도 나가고 싶어! 소년이 외쳤다. 도련님은 나중에요. 사내는 소년을 다정히 달랬다. 소년의 형이 성년이 되었을 때, 소년은 비로소 외출할 수 있었다. 며칠씩 밖에 나가 노는 동안 소년은 형과 사내를 만날 수 없었다. 형님은? 유모는 외출을 했다고 했다. 카즈는? 하인은 몸이 좋지 않다고 했다. 바깥에서 있던 일을 모두 다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소년은 볼을 바람으로 부풀렸다. 하지만 이제 소년은 알았다. 성년을 맞이한 형과 아내인 사내가 왜 며칠동안 소년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는지.

홀로 사와키타 가문을 감당하게된 소년의 형은 점점 소년에게서 멀어졌고 그 빈 시간은 오롯이 사내와 함께였다. 소년에게 가족은 드문하게 이어지는 점과 같은 것이었으나, 사내는 그렇지 않았다.

시골마을은 항상 평화로웠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크지 않은 시골마을 몇 개를 관리하는 귀족인 사와키타 가문에 비극이 찾아왔을 때 소년은 그 칼날을 가까스로 빗겨갈 수 있었다. 누군가는 불행이라고 했지만 사내는 다행이라 말했다. 도련님이 다시 사와키타 가문을 일으킬 것이라, 사내는 소년을 품에 안고 말했다. 저택의 문을 걸어잠근 사내가 다시 저택을 깔끔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내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저택은 다시 돌아왔다.

소년은 그동안 자랐다. 사내가 정인의 흔적이 가득 남은 곳에서 정인의 바램을 이루어주겠다며 가는 숨을 하루하루 이어붙이고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사내는 소년의 곁에 있어야했다. 모두가 소년의 곁에서 떠나도 사내만큼은 떠나서는 안됐다. 사내가 사랑했던 이의 얼굴을 닮은 얼굴로, 소년은 사내를 바라본다.


아니, 카즈나리가 재워줬으면 좋겠어. 옛날처럼.


사내는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는 것처럼. 분명 소년보다 더 컸던 것 같은데 지금 사내는 소년보다 작았다. 소년이 변하는 동안 사내는 변하지 않았다. 사내는 분명히 달라졌는데도 변하지 않았다. 소년은 사내가 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소년이 사내의 손을 잡는다. 놀란듯 손이 조금 움찔했지만 힘주어 빼지는 않는다.


카즈도 사와키타 맞지?





우성명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