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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7 02:25
보고싶다








-뭔데

판석이 특유의 단조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대상은 코앞에 있는 작은 무엇이다. 뭐지 이건 뭔데 길을 막고 지랄이야 건너편에 빨간머리가 있는데 갈수가 없잖아

- 여긴 길이 없어

오, 이런 건 오랜만이다 건방지네 하지만 빨간머리가 까부는 것과는 달리 불쾌했다 판석은 그다지 누군가와 대거리를 한 경험이 많지 않았다 보통 말을 하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상황이 해결되곤 했다 굳이 누군가와 다투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무언가 이루거나 해결하기위해 노력이란걸 한 적이 별로 없었다. 있긴 있었겠지 하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래서, 방금전까지만해도 오랜만에 구미가 당기는게 생겨서 몹시 재미있었는데, 이렇게 초를 치면 곤란하다

- 여기, 길 아니라고

판석은 싸움을 좋아하지 않았다. 애써 더러워진 기분을 갈무리하며 무시하려는데 이 벌레같은 놈이 기어코 몸에 손을 대는 바람에 걸음이 멈추고 말았다. 정말 작아. 이런 놈들과 붙어본 기억은 없다. 다만 시합중에 마주친 이만한 녀석들은 존재감도 없었다 예외없이

휙!

판석은 아무렇지 않게 잡힌 팔을 휘둘러 놈을 후려쳤다 아니, 후려치려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놈이 빠르게 몸을 사정거리 밖으로 빼내며 피하는 것이었다 제법이네

- 여..손버릇 나쁘네
- 나한테 손댔잖아
- 그러게 멈췄어야지

그래 조금 다른건 인정해야겠다 이렇게까지 적의를 드러냈는데도 도망가지 않는 놈은 처음이다 하지만 아직도 전의가 오르는 정도는 아니다 한번만 걷어차면 말라비틀어진 낙엽처럼 나뒹굴텐데 주제를 모르는 것들은 밟아줘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귀찮아져

- 야 죽고싶냐?
- 미안. 나도 초면에 먼저 말시키고 그러는 타입은 아닌데…너무 거슬려서
- 하,

판석은 진심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짧은 웃음이 터졌다 거슬려…? 누가 누구를

- 재밌네.
- 미안하지만 그만 저쪽엔 관심 끄고 돌아가
- 니가 뭔데

판석의 물음에 놈은 그냥 어깨만 으쓱하는 것이었다

- 빨간머리하고 무슨사이냐?
- 역시 거슬려. 대체 왜 너도나도 백호인건데

놈이 짜증난다는듯 투덜거리며 머리를 털었다

- 빨간머리,10번, 백호…

판석은 그 와중에 백호의 이름을 알아낸게 마음에 들었다 다시 생각하니 절로 입맛이 돌았다 발치에서 나뒹굴며 자신을 올려다보던 맹랑한 눈빛이 마음에 들었더랬다 백호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잠시 회상에 잠기는데 작은 놈이 성을 낸다

- 씨발 그 손 좀 치워 눈이 썩을거같아

판석은 녀석의 말에 무심코 앞섶을 주무르던 손을 의식했다 빨간머리 생각만 해도 여기가 간지러운걸 어쩌라고. 먼저 시비 건 주제에 내내 여유가 넘치는 꼴이 못마땅했던터라 놈의 진심어린 짜증이 꽤 듣기 좋아 판석은 여보란듯 불룩한 중심부를 더 크게 움켜쥐었다

지난번 빨간머리와 처음 경기하고 돌아와서 놈을 생각하며 수음했다 수음 자체가 오랜만이어서 간만에 뽑아낸 액체가 꽤 탁했다. 또 만나고 싶어. 그 후로도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녀석을 생각하며 종종 아랫도리를 달래왔다. 다시 만나는 오늘같은 날을 기다리며

놈을 마크하면서 사이즈를 가늠해봤다 적당히 아담하고 귀여운 사이즈였다 안으면 한팔로도 기분좋게 감을수 있겠구나 실제로 참지못하고 경기중에 녀석의 허리를 끌어안았을때 예상한 크기와 감촉에 꼭 맞아서 내심 놀랐다 그 좋은 기분을 계속 느끼고 싶었는데…심판의 휘슬이 아쉬울 뿐이었다. 같은 종류의 파울을 몇번 저질렀는지 생각도 잘 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눈앞의 작고 짜증나는 벌레같은게 싫다 그리고 놈도 같은 이유로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도 알수 있어서 더 그렇다. 어쩔수 없이 동류는 동류를 알아본다
저 벌레도 꽤 열이 오른 모양이다

- 야, 그만하자. 와.

제법 위압적인 목소리로 놈이 손을 까딱였다. 판석은 그저 백호를 좀 예뻐해주려고 했을 뿐인데 자신의 의도를 왜곡하는 검은 머리의 리젠트에게 분노했다

- ?니가 와.

판석의 대꾸에 놈이 웃는다. 아 그렇군 백호에게 가려면 판석이 움직여야했다 그리고 놈은 길만 막을수 있으면 먼저 손을 쓸 생각은 없어보인다. 갑자기 짜증섞인 지루함이 밀려왔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에 빨리 백호에게 가 그 새빨간 머리를 만지고 싶다 지난번엔 멍청할정도로 짧더니 오랜만에 본 녀석의 머리카락은 제법 자라 있었다 움켜쥐면 고개를 낚아챌 수 있을 정도로.
판석은 목을 까딱이며 눈앞의 벌레를 빨리 짓밟고 쌓인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움직였다

벌레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을 들었다. 사람을 치고 싶지 않은데 지금은 정말 어쩔수 없다 손등으로 벌레의 두상을 노리고 세게 휘둘렀다 이상하다 웬만하면 피할 수 없는 속도였을텐데 놈의 뺨을 빗나갔다. 헛나간 팔의 반동을 이용해 그대로 반대쪽을 노리고 휘둘렀으나 이번에도 빠져나간다 두번째 스윙때 생각보다 힘이 들어갔던지 몸이 살짝 휘청거렸고 짜증이 몰려왔다

- 피하지마 새끼야

판석이 중얼거리며 쉬지않고 다시 놈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지만 사정거리에 있는데도 쉽게 닿지 않는다 그리고 그 순간 역공이 들어왔다 판석의 운동신경이 아니었다면 맞았을 것이다 거기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예상외로 매섭고 무거웠다 놈은 한참 내려다봐야 될만큼 작았는데 어떻게 얼굴까지 주먹을 올렸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 새끼…키 졸라 크네

직전의 헛스윙이 회심의 일격이었는지 놈이 손목을 까딱거리며 중얼거렸다

- 니가 존만한거야

판석의 말에 벌레가 비죽이 웃었다 아, 저딴 놈하고 놀아줄 시간이 없어 판석은 쿵쿵 소리를 내며 놈에게 다시 다가갔다 조져줄게 다시 못일어날정도로
그러자 놈이 판석을 보며 정면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오,좋아 먼저 와주면 고맙지 어서와 고개도 숙여줄게 깊게 들어와 그리고 깊이 쳐맞아라

놈이 지척으로 왔다 그리고 날아오는 주먹을 맞잡을 준비를 했다 그런데 몸을 낮추기까지 했는데도 순간 놈이 사라졌다

- …!

갑자기 무릎께로 예상치 못한 무게가 부딪혔다 판석은 버티기 위해 본능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었으나 종아리에 들어가는 힘을 느끼자마자 녀석도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힘을 가하는 것이었다

-씨발!

대들보가 썩어 내려앉는 지붕처럼 판석의 몸이 균형을 잃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차가운 흙바닥이 등에 닿고 판석이 빠르게 몸을 일으키려했으나 순식간에 판석의 가슴팍을 타고 오른 놈의 주먹이 더 빨랐다
어떤 군더더기도 없이 예리하고 강한 타격이 판석의 관자놀이를 향해 달려드는 것이 슬로우모션처럼 판석의 눈에 들어왔다 아, 맞겠네. 그건 예상에 없었는데
아마도 한대 맞은 뒤의 판석은 생각했을것이다 어쩔수 없이 한대까진 맞아주지 하지만 이제 진짜 죽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다음은 없었다 놈의 주먹이 머리뼈를 강타한 순간, 그대로 암전이었다












- 어디갔다와? 찾았잖아
- 왜, 백호는? 아흐…
- 에엥 너 손 왜그러냐

인상을 쓰며 손목을 터는 호열을 보며 구식이 물었다

- 실수로 부딪혀가지고…아씨 더럽게 아프네
- 조심 좀 하지 으이구
- 왜 찾았는데? 백호는?
- 백호 부원들하고 버스로 같이 간대. 우리끼리 가면 돼
- 아…

호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 백호 이따 도착해서 연락한대 가라오케 가자고. 오늘 이겨서 신났더라ㅋㅋ

용팔의 말에 다들 킬킬 웃었다. 경기도 진 주제에 그딴건 상관도 없다는 듯 백호를 찾던 놈이 여전히 불쾌하지만 주특기인 음이탈로 한곡 빠듯하게 채울 백호를 생각하니 기분이 나아졌다 가라오케까지 가서 동요를 부르는것도, 동요 부르면서 삑사리내는 사람도 백호밖에 없을것이다

-가자

열차시간 다되가. 친구들을 재촉하며 용팔의 어깨에 팔을 올리는데 다시금 손이 욱신거렸다

주먹이 얼얼할 정도로 세게 사람을 쳐본건 정말 까마득할 정도로 오랜만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귀찮아질거 같았는데 다행히 한방에 먹혔다 다만 기절한 걸 확인하고 뒤도 안보고 와버린건 호열답지 않았다 만에 하나 놈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그런 가정을 해도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쪽 한켠으로 시선을 고정한채 바지춤 위를 주무르던 손이 아직도 역겹다. 그 시선끝에 뭐가 있었는지 모를수가 없다.뒤지든가

다음에 만났을때도 여전히 더럽게 굴면 그땐 정말로 어디든 한군데 제대로 끊어 줄 생각이다. 아무리 운동으로 다져진 태산같은 몸집을 갖고 있다 해도 주먹질을 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걸 진짜 바닥을 굴러본적 없는 놈들은 모른다. 잘된일이다.

호열은 새삼 가소로운 생각이 들어 웃음이 픽 나왔다 어쩌면 안도의 웃음일수도 있지만 모른척했다

- 뭐냐, 그 웃음은

대남이 물었다 이상하게 웃지말라는 핀잔과 함께

- 웃지도 못하냐
- 아 몰라. 뭔가 섬뜩했어
- 뭐래

옛날 호열이 보는거 같았어 백호 농구하기 전. 대남이 몸서리치는 시늉을 하며 몸을 푸르르 떨었다. 시끄러. 호열이 아프지 않게 발로 대남을 차듯이 밀었다 기분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잘 알수없었다. 그저 빨리 가서 백호가 웃는걸 보고싶었다.









판석백호 호열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