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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6 00:05
"아...진짜...사람이...사람이 어떻게 그러냐 정말...아...진짜...진짜...내가...내가...어떻게 했는데...으흐흐흑."

"...너 여기서 안 멈추면 개막전 엔트리에서 뺀다."



잘나가는 프로 농구팀의 젊은 구단주 이정환에게 있어 팀 운영은 그렇게 난이도 높은 일은 아니었다. 그전에 혹독한 경영수업으로 이미 본사 기획팀에서 밑에서도 굴러봤고 구단 평직원으로 일해보기도 했다. 물론 한 달도 못 가서 들통났다. 이미 얼굴에 나 재벌 3세요 하고 쓰여있는 얼굴인데다 해남고 시절 농구로 너무 날려서 언론에 얼굴이 다 퍼진 상태여서. 어쨌든 구단 운영이 신경쓰이고 손은 많이 가지만, 농구는 즐겁고 애정이 가는 일이었다. 계획과 이윤으로 채워지는 이정환의 인생에서 농구는 몇 안되는 불확실성과 변수가 넘쳐나는 도파민 덩어리의 활력소였다


눈 앞에서 지금 죽상을 하고 술 푸고 있는 이 자식만 아니었으면 말이지- 아니 이 자식 때문에 내 사랑스러운 구단이 굴러가니 그건 아니고 정확히는 이 자식의 그 죽일놈의 연애사 때문에 말이지.


냉정한 경영자 이정환의 앞에서 겁도 없이 신세한탄을 하며 비싼 위스키를 물처럼 들이붓는 이정환의 그 자식은 농구 모르는 이도 얼굴은 다들 안다는 슈퍼스타 마성지였다.





"내가 사준 집에서 어떻게 그러냐고오오오오!!!!!"

"내가 말했잖아, 그 자식 별로 질이 안 좋다고."

"그래도 내가 저한테 얼마나 공들였는데!!"

"내가 봤을 땐 그렇게 오냐오냐 퍼주니까 그 쪽이 얼씨구나 하고 벗겨 먹은거 같은데?"

"너 말이 좀 심하다, 벗겨 먹는게 뭐야 벗겨 먹는게!"

"마성지 프로, 말은 똑바로 합시다. 농구하라고 주는 연봉으로 그 새끼 차 사줘 명품 사줘 집까지 사다 바치고 아주 못하는 말이 없네? 그거 다 누가 주는 돈이야?"

"아 그거야 내 신성한 노동의 댓가!이긴 하지만..."

"누가 주는거다?"

"구단...스폰서...모기업...죄송합니다아아아......"




아니 거기서 왜 또 기가 죽고 그래, 이 답 없는 놈아. 평소에 나한테는 핏대 세워가며 눈 부릅뜨고 화만 잘 내던 놈이 또 구단 얘기 나오고 팬 얘기 나오면 주인 신발 뜯다 걸린 강아지처럼 또 축 처지지 아 진짜. 그만 좀 하라고 그 새끼는 니가 이러는 거 알고는 있냐. 아니, 잘 아니까 그 짓거리를 하겠지.





마성지는 화려한 외모처럼 연애가 끊이질 않는 남자였다. 누가봐도 잘난 얼굴에 승리를 끌고 다니는 우승청부사, 20점 30점도 그냥 뒤집는 타고난 스코어러, 승리의 여신이 사랑하는 남자.


그러나 이 남자는 승리의 여신에게 황금 사과를 바친 댓가로 사랑의 여신에게 미움을 받았는지, 헬레네를 얻고 트로이를 털린 파리스와 정반대로 코트 위에서는 늘 승리를 쟁취했지만 사랑에서는 한번도 승리자가 되질 못했다. 연애는 쉬지 않고 늘 해왔으나 항상 끝은 좋지 않았고 마성지는 그 잘난 알파메일임에도 항상 안좋게 차이거나 이별을 당하는 수난을 감내해야 했다.



이정환은 마성지의 연애사를 지켜보며 같이 술을 푸기도 하고 욕도 같이 해주다 어느 새 슬슬 답없는 연애사에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오래된 친구로서의 안타까움도 있지만 구단주로서 에이스가 늘 답 안나오는 연애에 목매다가 차이고 심리적으로 타격을 입는 걸 보고 있자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거기다 자기 구단에서 나가는 돈이 애먼 놈들 바람피우는 돈으로 나가는 게 참기 어려웠다. 옷이나 시계 주얼리야 그렇다 치더라고 이번은 스케일이 참으로 커서 집까지 덥썩 안겨줬다.



이 새끼 손도 크지. 하긴 저 녀석이 뭐 아쉬운 소리를 하며 컸겠어. 아이고 마 회장님 셋째 녀석 키울 때 등짝 좀 더 치지 그러셨어요.



답도 없이 잔뜩 부은 눈으로 술을 푸는 마성지의 손에서 잔을 뺏은 이정환이 손에서 잔을 치우고 물컵을 쥐어주었다. 물을 얌전히 받아마신 마성지의 눈에 다시금 낯선 명함 한 장이 들어왔다. 금테 두른 고급스러운 종이에 변호사 직함과 이름이 단정히 박혀 있었다.




"이게 뭐야? 나 변호사 필요 없는데-"

"필요 없긴 왜 없어? 집이랑 시계랑 차랑 사다 바친 거 다시 안 받아 올거야? 거기다 식장 취소한 거랑 업체 위약금은?"

"아니! 내가 준건데 그걸 어떻게 받아와? 아니 남자 자존심이 있지-"

"쓸데없는 소리 말고 그거 다 수습하고 와. 잡소리 안나게 깔끔하게. 못하면 너 개막전 엔트리에 못 들어가."

"이정환!"

"너 내가 친구라 잊어먹는가 본데 나 구단주다 마성지."


이번에는 아주 본보기를 보여줘야 다시 이런 날파리들이 안 붙지



이정환은 엄선해서 고르고 골라 부른 권준호의 단정한 얼굴을 떠올리며 눈을 매섭게 떴다.








아 진짜 정환이는 왜 그런 소리를 해서-


다음날 아침, 숙취로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난 마성지는 침대에서 네 발로 어기적거리며 구르듯 침실 밖을 나섰다. 한동안 비워두다 얼마전 들어온 집은 크기는 하지만 세간 살이는 별로 없고 사람은 혼자라 적막하기 그지 없었다.


물론 이것보다 더 크고 고급스러운 집이 있긴 하지만 그 집은 지금 쳐다 보기도 싫었다. 결혼까지 약속한 약혼자-이제는 전애인이지만- 가 딴 남자와 침실에서 헐벗고 뒹굴다 마성지에게 걸린 집이었기 때문이다. 악몽처럼 떠오르는 살색 현란한 기억에 마성지가 머리를 휘휘 저었다. 숙취 때문에 울리는 머리가 더 지끈거렸다.


친구이기전에 하늘같은 구단주이자 고용주를 거역할 수 없어서 마성지는 맛대가리 없는 그린 스무디를 넘기며 전화번호를 톡톡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자, 스피커 너머로 단아하고 지적인 목소리가 울려왔다. 사무적이지만 예의바르고 단정한 목소리에 물흐르듯 약속을 잡았다. 의뢰인의 급한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변호사가 바로 다음날 오전 시간을 내어왔다. 잠깐 고민하던 마성지는 본래 일을 미루는 성격이 아닌지라 흔쾌히 받아들였다.




숙취로 다 죽어가던 몰골을 어느 정도 수습한 마성지가 마천루가 빼곡히 들어찬 법조타운의 대형 로펌 빌딩에 들어섰다. 데스크에 이름을 밝히자 직원이 곧 방으로 안내해주었다. 노크 소리 두 번 후에 승낙이 떨어지자 마성지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흰 셔츠 차림에 네이비 넥타이, 깔끔하게 드라이한 머리와 얇은 은테 안경 너머로 하얗고 선 고운 얼굴의 젊은 남자가 웃으며 마성지에게 다가왔다. 앉은 자리에선 키가 그리 커 보이지 않았는데 일어서니 훤칠한 키와 슬림하게 잘 뻗은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마성지 프로시죠?"

"네, 안녕하세요. 변호사님."

"반갑습니다, 변호사 권준호입니다."


말끔하게 지적인 인상의 미남이 손을 뻗어왔다. 마성지는 손을 마주 잡으며 어디선가 이 남자를 본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상식적으로 자신은 농구 선수고 저쪽은 변호사인데 접점이 있을리가? 싶었지만 안경 너머 선한 눈매가 무척이나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지? 혹시 우리 학교 출신인가? 아니 그래도 같은 학교라도 다 알지는 않는데, 어디서 봤더라?



묘하게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당장의 건이 급한지라 마성지는 내어온 차를 한 모금만 들이키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미 이정환에게 어느 정도 전해들었는지 대강의 설명에도 이해하는 눈치였다.



"상대방의 귀책으로 인한 파혼이니, 위자료 청구와 부동산 반환, 예물반환 청구 소송을 진행하면 되겠군요."

"저 변호사님, 정환이가 뭐라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게까지-"

"이 본부장님께 대강 들었습니다. 전 약혼자의 부정 행위로 인한 파혼이라고요."

"하아...그게요...제가 아시다시피 좀 바빠서 집을 잘 비우거든요. 그러다보니 카드도 그냥 통으로 주고 결혼할 사이라 자기 명의로 뭐 하나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할 말이 있다고 그래서 집도 걔 명의로 해줬는데-"


내가 사준 집에서 딴 남자랑 아주 헐벗고 뒹굴고 있었단 말이죠. 내가 사준 집에서 내가 주는 돈으로 산 침대 위에서 내가 사준 옷들은 전부 바닥에 뒹굴고 있고. 근데 그 짓거리를 한 두번이 아니라 몇 달을 그랬어요 몇 달을.


법률 상담을 하러 온건지, 사랑과 전쟁을 찍으러 온 건지. 그럼 4주 후에 뵙겠습니다-멘트라도 쳐줘야 하는 건지 권준호가 실없는 고민을 하는 사이에 마성지는 호구로운 연애생활을 줄줄이 잘도 읊어냈다.


건조하고 철저한 손익을 주로 논하는 무채색의 대형 로펌 변호사 생활에 이혼 소송 또는 파혼 소송은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답지 않게 미러볼 같이 형형빛깔 색을 지닌 에피소드가 들어오자 호기심이 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얼굴만 봐도 드라마가 나올 거 같은 잘생긴 남자가 한숨과 탄식과 나즈막히 소리죽인 욕까지 섞어가며 넋두리 늘어놓는 장면은 진귀한 것이었다. 권준호도 솔직히 반쯤은 속으로 그러길래 왜 그렇게 호구잡힌 연애를 하셨어요-라며 장단을 치다가도 그 새끼 그 때 아마 딴 놈이랑 여행 갔을 거에요-라며 추임새를 넣어주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변호사의 영업용 스마일을 덮어 씌운 상판 아래에서.



"마성지 프로, 이정환 본부장이 왜 저를 소개했을까요?"

"파혼 소송 하고 다 받아오라고 그랬겠죠."

"그리고?"

"...잡음 나는 게 싫어서겠죠. 정환이는 자기 영역에서 컨트롤 밖의 일은 정말 싫어하니까. 걔도 맘에 안 들어했고."



마성지는 귀한 집에서 부족함 없이 곱게 자란데다 성장과정도 딱히 꺾이거나 무너지는 일이 드물어서 그런지 집에서 소개하거나 비슷한 무리에서 엮이는 곱게 자란 영식이나 영애들에게는 그닥 흥미를 못 느꼈다.

특히나 소개 같은 만남은 작위적이다며 늘 영화나 드라마 같은 로맨스를 꿈꾸는 지라 연애는 늘 즉흥적이고 충동적이었다. 운동하다 우연히 마주치거나, 우연히 자신의 옷에 커피를 쏟아서 번호를 주고 받다가 만나거나 그런 사이. 듣기에는 퍽이나 로맨틱하지만 현실은 로맨스만 있지 않아서 그런 만남의 상대는 대부분 안정적이지 못했다.


전 애인도 카페에서 알바하다 실수로 자신의 그릇을 엎었다고 그랬지. 얼굴 반반하고 애교는 많지만 딱히 능력은 없어서 마성지가 주는 돈으로 생활하다시피 했고.


이젠 마성지의 파혼남 첫만남 스토리까지 들으며 권준호는 생각했다. 프로 선수가 참 순진하기도 하네. 그게 과연 우연이겠어요 이 사람아. 한 마디 해주려다 겨우 참은 권준호는 자신 몫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넘기며 올라오는 참견을 넘겼다.

머리를 다시 차갑게 정리한 권준호가 웃으며 구구절절한 연애사 속에서 받아낼 물건 목록을 착실히 작성했다. 참 많이도 퍼줬네 이 양반.




"그럼 일단 이 정도 받아내고 위약금에 정신적 금전적 위자료까지 청구하면 되겠군요. 물론 이건 대략적인거고-"

"저기 변호사님. 걔가 잘못은 했지만 지금 딱히 돈도 없고 가진 것도 그닥-"

"그래서, 지금 이걸 혼수가 아니라 파혼 선물로 줄려구요? 위자료 받아도 모자랄 판에?"



마성지씨, 아무리 리그 탑 연봉이라도 이건 좀 선넘었지. 이러려고 구단에서 그 비싼 연봉 주는 줄 알아요?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마음의 소리를 변호사 특유의 영업 미소와 인내로 눌러내린 권준호가 안경이 얹힌 콧대를 지그시 눌렀다가 떼면서 표정을 추스렸다.


"마성지 프로. 저도 농구를 참 좋아해서 하는 말인데...시즌 연간권 vip석이 얼마나 하는 줄 알아요? 그럭저럭 경기 볼 만한 a석만 해도 백만원이 넘는데?"

"기본 몇 백이죠."

"거기다 경기장에 오면 경기만 봅니까? 뭐라도 마시고 먹고 거기에 교통비에. 경기 보러 오는 시간은 어떻고요? 빅매치나 플옵 가면 직장인들 피같은 연차 쓰면서 오는 거 알아요?"

"...압니다."

"마성지 프로, 그 리그 탑 연봉 다 팬들 악착같이 일하며 버는 돈에서 나오는 거에요. 팬들이 우리 선수님 자존심 세워줘야 한다며 시즌마다 구단 욕하면서도 유니폼 홈팀 원정팀 마킹 해가며 사줄려고 보너스며 알바비며 탈탈 터는 거 알아요?"

"...잘 알죠."

"루즈볼 잡으러 몸 던지다 넘어지면 팬들 표정 어떤지 보긴 봤어요?


어떻게 그걸 몰라요. 내가 콰당 소리만 내도 경기장 전체가 울리게 탄식이 퍼지는데. 내가 그걸 왜 몰라요 몰라. 나도 아니까요 그만 때려요 변호사님. 말로 때리는 게 더 아파요. 차라리 농구공으로 처맞고 말지.



"마성지 프로, 팬들이 무릎 갈아가고 온 몸 멍들어가며 번 돈으로 엄한 놈 바람피는 집 사주고 옷 사주고 하는 거 알면 뭐라고 할까요?"

"네...변호사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다 제가 죽일놈입니다아아아아 모드로 풀이 푹 죽은 모습을 보자 그제야 속에 얹힌 것이 내려간 듯한 표정의 권준호가 셔츠 소매를 조금 걷어 올리며 서류를 추스렸다. 언뜻 드러난 팔 근육이 제법 선명해서 오 저 사람 드리블 좀 하겠는데? 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게 어쩔 수 없는 농구광인이자 프로 선수인 마성지였다.



"연락처 적어요. 제가 연락할테니까 셋이서 만나죠."

"네? 네? 셋이요?"

"맡겨 놓으면 못할 거잖아요. 또 다 퍼주고 오겠지."

"아니, 그렇지만-"

"그럼 저만 나갈까요?"

"아닙니다. 여기-"


마성지에게 번호를 건네받은 권준호는 바로 그 자리에서 전화를 걸었다. 당장 내일로 약속을 잡는 권준호의 미친 일처리 속도에 속공이 특기인 마성지도 기겁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권준호는 밀어붙였다.


"곧 시즌 시작이에요. 이정환 본부장은 시즌 전에 이걸 아주 없었던 것처럼 마무리하길 원해요."

"아니 그치만 걔도 이렇게 갑자기 급하게 만나자면-"

"귀책 사유가 상대편에 있는데 시간을 왜 줘요? 마성지 프로는 공격 할 때 상대편 백코트 할 시간 다 주고 해요?"


그렇게 마성지는 바로 그 다음날 전애인을 권준호와 함께 마주하게 되었다.



"얼굴이 말이 아니네, 자기. 이쪽은...혹시...새 애인?"


딱 봐도 날티가 줄줄한 얼굴의 남자가 처연한 듯 애처로운 듯 안쓰러운 듯 마성지의 안부를 물으며 동시에 권준호를 날카롭게 훑었다. 딱히 배운 거 없어도 이런쪽에 통달한 종족들은 본능적으로 계산부터 한다. 깔끔하고 단정한 인상에 지적인 생김새와 주름 하나 없는 수트 차림. 누가 봐도 고연봉 직장인 아니면 전문직이다. 권준호가 훑어내리는 눈빛을 가소롭다는 듯 받아치며 명함을 내밀었다.


"마성지 프로 법률 대리인 권준호 변호사입니다. 지금부터 얘기는 저랑 하시죠."


이름만 들어도 다들 아는 대형 로펌의 사명이 찍힌 명함에 마성지의 전애인이 흠칫 놀란 눈으로 둘을 번갈아 보았다. 헤어지기 전 마성지의 동정심을 자극하여 한탕 뜯고 그만두려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다.


"자기 어떻게 이래? 아무리 내가 잘못했다지만 이게 변호사까지 부를 일이야?"

"귀책사유자가 말이 많네요. 억울하면 변호사 동석하셔도 됩니다. 아는 변호사 많은데 소개해 드려요?"


어차피 변호사 불러 봤자 내가 알거나 내 아버지를 알거나 그렇겠지. 변호사 수임료가 얼마나 비싼지 아직 모를텐데 이 기회에 한 번 알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텐데.


"이봐요! 말 좀 가려해요!"

"말은 귀책사유자가 가려해야죠. 아 이거 지금 다 녹음하고 있으니까 말 가려하시고."

"아니 이 사람이 진짜! 마성지 너 이렇게 쪼잔하냐? 돈도 잘 버는 놈이 그게 그렇게 아까워? 어?"

"네 아까워요. 마성지 프로가 아무리 부잣집 아들이고 잘 나가는 프로라도 그 돈 그냥 나오는 줄 알아요? 그거 마성지 프로가 새벽잠 설쳐가며 운동하고 퍽퍽한 닭가슴살에 프로틴 먹어가며 만든 몸으로 버는 돈이에요. 온 몸에 멍들고 근육 찢어지고 무릎 연골 갈아가며 버는 돈인데, 저는 너무 아까워서 다 받아와야겠습니다만-"


입으로는 생글 생글 웃으며 조곤 조곤 말을 뱉는 변호사의 눈초리가 차가웠다. 더 이상 진행했다간 정말로 법원으로 갈 기세였다. 위자료 까지 받으려다 그건 정말 감당할 여력이 없는 걸 알아서 결혼을 전제로 지원한 모든 금전적 지원과 각종 유류 자산을 받아들이는 걸로 마무리 지었다.


부들거리는 손으로 각종 서류를 제대로 읽지도 못한 채 도장을 찍고 서명을 하는 꼴이 퍽이나 가관이었다. 잘나가는 프로 하나 잡아서 빨대 꽂으려던 계획이 다 박살이 났으니 인생 계획이 다 틀어졌겠지. 그러게 딴 짓을 하긴 왜 합니까 이왕 빨대 꽂을거면 내조나 좀 잘 해주지.



그렇게 마성지의 다사다난했던 1년의 결혼까지 생각했어 연애사가 파혼 조정 합의로 끝을 향해가기 시작했다.







"하아...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어요, 마성지 프로."


서류나 절차는 사실상 한 단락 마무리지어졌지만 사람의 감정은 그렇지 못하다는 건 마성지도 알고 권준호도 잘 알았다.


대강의 서류를 추스린 후, 함께 로펌으로 와 다시 서류를 훑는 내내 마성지는 이게 잘 하는 일인지 이래도 되는 건지에 대한 망설임이 있었다. 최악으로 헤어졌지만 전애인에 대한 미련이 있었다. 그리고 코트에서는 승부사지만 현실의 삶에서는 정 많고 여린 면이 있어 독해지지 못하는 성정 탓도 컸다.

그리고 권준호가 지적했던 면들, 바로 힘들게 벌어 일하는 돈으로 엉뚱한 이들의 향락을 채워준 자신에 대한 후회와 믿어준 이들에 대한 미안함이 마성지를 견디기 힘들게 만들었다.

머리를 감싸쥐고 괴로워 하는 마성지를 아까부터 서류 너머로 살피던 권준호가 작게 한숨을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트 재킷을 집어든 권준호가 마성지를 데려다 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혼자 갈 수 있다는 말을 못 들은 척 하며 권준호가 마성지를 차에 태웠다.



"지금 이 상태로는 운전대 잡게 못 해요. 당장 개막이 코 앞인데 넋놓고 운전하다 VIP가 다치기라도 하면 제 입장도 곤란해져요."

"아니 저 그 정도는-"

"그냥 제 입장 봐줘서 하자는대로 해줘요, 마성지 프로."



그렇게 순순히 권준호가 모는 차에 실려 마성지는 집까지 안전하게 배송되었다. 혹시라도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고 브레이크를 밟는 모습에서 마성지는 젊은 변호사의 속깊고 다정한 성품을 읽어냈다. 서비스 마인드도 있겠지만 사람 참 다정하네, 일 아니면 넘어갈 정도로. 그렇게 한가로운 생각도 잠시였다.

집 앞에 서자 이내 밀려온 현실 감각이 마성지를 또다시 괴롭게 만들었다. 총기 넘치는 반짝이는 눈에 활력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권준호가 한 발 움직여 마성지의 바로 앞에 다가섰다. 인기척에 수그러진 고개가 절로 들어졌다.

풀죽은 마성지의 왼쪽 볼에 잘 뻗은 손가락이 와닿았다. 감촉에 고개를 드니 이내 길고 마디가 곧은 엄지와 검지가 아프지 않게 볼살을 가볍게 잡았다 놓았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스킨십에 마성지가 넋을 놓고 마주한 이를 바라보았다. 권준호가 입가에는 미소를 띤 채, 오늘 좀처럼 웃지 않던 눈매를 휘며 부드러운 얼굴로 마성지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철 좀 들어요, 마성지 프로."


아니 외간 남자 볼을 이렇게 덥석 덥석 잡아도 되는거에요, 변호사 양반? 우리 언제 봤다고?





슬램덩크 성지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