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서 이명헌 딸내미 만나는게 보고싶다.

1편




Meeting Again이라는 노래인데 들으면서 봐도 좋고 아니어도 괜찮고






* 한국배경 au임

* 아무튼 다 주의

*하 생각해보니 한국에는 인터하이가 없네? 인터하이랑 윈터컵은 일본 시스템을 따와서 쓰겠음.







보통 시간이 흐르면 상황은 지워지고 감정만 남는다. 10년이 지났으면 감정마저도 사라질 법 하건만, 이명헌과의 짧은 재회 이후 애써 잊은 척 살아왔던 끈적하고 불쾌한 미련에 다시 시달리게 된 정우성은 굳이 과거를 되짚어보기로 했다.

정신없는 미국 생활 도중 자연스럽게 휘발된 기억들, 그리고 우성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잊어버린 기억들 사이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장면이 하나 있다. 

정우성의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직전. 인터하이를 코 앞에 둔 어느 날이었다. 아니, 솔직해지자. 사실 정우성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날은 목요일이었고,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고, 시계는 오후 1시 3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잠시 수업 도중에 나와서 교무실로 담임 선생님의 심부름을 하러 가려던 참이었다. 유인물 좀 가져와 줄래, 우성아? 아싸. 잘 됐다. 담임 선생님의 책상 위에서 회색 유인물 더미를 찾아낸 우성은 복도로 나와 일부러 느릿느릿 걸었다. 그러다가 2학년 교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들은 것이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멈칫, 우성은 발걸음을 멈췄다. 살짝 열린 창문 틈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휘- 불어왔다. 사각거리는 필기 소리 사이로 차분하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가 쪽 자리에서 누군가 교과서를 들고 일어나 문학 지문을 읽고 있었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언제나, 라고는 할 수 없다.”

한낮의 따스한 햇살이 그의 옆모습을 비추었다. 낮게 내리깔린 속눈썹, 달싹이는 입술.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노래같은 문장들. 우성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 이명헌 선배다. 

“...나는 책상 앞에 돌아앉아서 옴짝도 하지 않고 있더라도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 그의 표정이나 기분까지라도...”

팔랑 팔랑. 그의 손에서 유인물 종이가 미끄러져 떨어졌다. 창문 너머로 이명헌을 훔쳐보고 있던 우성은 깜짝 놀라 허리를 숙였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교실 안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잠깐 끊어졌다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낭독을 이어갔다.

“...넉넉히 미리 알아차릴 수 있다.”

그 말을 듣는데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파삭. 그의 손아귀 속에서 얇은 종이가 파스라졌다. 결국 우성은 교실로 돌아간 후 담임 선생님께 잔소리를 들어먹었다. 우성아, 종이가 왜 다 구겨져 있니. 그러나 우성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명헌은 고전문학을 잘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높은 성적을 받았던 것은 아니고 그냥 고전소설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걸 왜 미리 못 알아봤나 몰라. 농구 연습할 때마다 –하소서 하는 별난 말투를 썼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말이야.

한편 우성은 영어를 잘했다. 영어를 좋아해서 높은 성적을 받았던 것은 아니고 그냥 공부를 열심히 했다. 어째서? 미국가려고. 정말 순도 100% 필요에 의한 공부였다. 근데 학교 성적을 잘 받는 것과 외국인들이랑 말을 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기껏해야 육성으로는 Yes, I do. 정도만 할 줄 알면서도 학교 시험에서는 척척 100점을 받았다.

그래서 이명헌의 문학 성적과 정우성의 영어 성적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냐고? 아주 아주 큰 상관이 있었다. 왜냐하면 정우성은 국어 낙제점을 받았고 이명헌은 영어 낙제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때가 딱 인터하이 전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선생님은 너희 같은 농구부지? 공부 가르쳐주면 되겠네. 라며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사실 그 유기행위가 우성은 내심 반가웠다.

강원도 모처에 위치한 산왕공고는 전원 기숙사제였다. 그래서 명헌과 우성은 저녁부터 밤까지 체육관에서 농구 훈련을 하고, 밤이 되면 기숙사 휴게실에서 만나 공부를 했다. 그 전까지 매주 우는 소리를 하며 전화를 하던 아들이 갑자기 기숙사 제도를 찬양하자 의아해진 광철씨가 야, 니 뭐 애인이라도 생겼냐? 라며 물어본 건 덤.

하루는 우성이 명헌에게 영어를 알려주고, 그 다음날은 명헌이 우성에게 문학을 알려주는 식으로 둘은 번갈아가며 공부를 봐주었다. 산왕공고는 공부를 빡세게 해서 대학을 가는 학교는 아니었다. 졸업하고 바로 취업하는 애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둘이 매일 그렇게 휴게실에 출근 도장을 찍자 애들이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각자 사이좋게 낙제 점수를 하나씩 성적표에 박아넣었단 소문이 퍼졌다. 

“야. 양놈.”
“아 현철 선배! 그거 명예 훼손이에요!” 
“명예 훼손이 아니라 사실 적시 명예 훼손이지, 양놈 정우성.”
“아! 그게 뭐에요! 싫어요!”
“걱정마. 공평하게 명헌이한테도 별명 지어줬으니까.”

뭔데요?

그러자 옆에서 교과서를 한아름 들고 자습실 안쪽으로 들어가던 낙수가 말했다.

“...문학변태.”

“닥치소서.”

우성은 그 별명을 웃어넘겼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무튼 옆에서 명헌의 친구들이 둘의 성적을 가지고 오만가지 별명을 만들어 내는 동안, 명헌은 조용히 우성이 만들어준 단어장을 중얼중얼 외웠다. Bias. 편견, 성향, 편향. 그 모습을 지켜보며 우성은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들키지 않을 수 있어서. 영어로 말하는 이명헌을 보면 심장이... 덜 뛰었기 때문이다. 명헌이, 고전 소설을, 무덤덤한 얼굴로, 읊을 때면 우성은... 

아 정말이지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이주 정도 매일같이 붙어다니고 나서, 둘은 낙제를 받은 과목을 평균 언저리 정도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최종 성적표를 받은 날, 우성은 불현듯 생각했다.

이제 끝인가?

우성은 힐끔 자신의 옆에 서있는 명헌을 훔쳐보았다. 속을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친해졌다고 생각하는데, 솔직히 선배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우성은 이 어려운 선배에게 어떻게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아서, 곰살맞은 짓을 하기로 했다. 

맞아. 그런거 있잖아. 부모님한테 만드는 효도 쿠폰같은거. 우성은 그걸 만들어다가 이명헌에게 줬다. 아빠가 공부하라고(낙제하면 인터하이에 못나가니까) 사준 노란 노트를 쭉 찢어서 명함만한 사이즈로 잘랐다. 그리고 농구 교습권을 만들었다. 선배, 저랑 원온원해요. 라는 지극히 농구부 후배가 선배한테 요청할 수 있을 법한 말 속에 연심을 숨겨 담았다.

광철씨가 알았다면 뒷목을 잡았을 일이다. 야, 너! 나한테는 편지 한 번 쓴적 없으면서! 그런데 어떡해.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생각나는 게 효도 쿠폰 밖에 없어서 냉큼 만들었다. 그런데 이명헌은 그걸 한번도 쓰지 않았다. 대신 자기가 그렇게 끼고 사는 책 사이에 끼워둘 뿐이었다. 책갈피로 쓰라고 드린게 아니라, 저한테 쓰라고 준거라니까요?

젊은 느티나무 사이에 끼어있는 [정우성 개인 교습 쿠폰]을 보고 우성이 볼멘 소리를 했다. 하지만 우성이 따져물어도 명헌은, 우성. 딴 짓 말고 농구나 하소서- 라며 철벽을 칠 뿐이었다. 팔랑, 팔랑. 그가 소설을 넘긴다. 창가에 앉아, 정오의 햇살과 한여름의 산들바람에 몸을 맡긴 채로.

그런 일들이 있었지.

한참 과거를 되짚던 우성은 미간을 구겼다. 그는 눈초리를 찡그리면서,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제일 좋아하는 소설이 젊은 느티나무였을 때부터 알아봐야했는데. 그 인간, 문란하기로는 세상 둘째가라면 아쉬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정우성은 그게 그렇게 서러웠지만서도 이명헌을 좋아했다.

아마 아직도 좋아하나봐. 

생각하면서 우성은 커튼을 쳤다. 가구 하나 없는 텅 빈 거실. 냉방이 돌아가지 않아 적막하고, 도배풀 냄새가 진동하는. 뭐 그런 사람 마음을 아주 심란하게 하는 공간에 서서 우성은 충동적인 소비를 잠시 후회했다.

정우성은 놀이터가 내려다 보이는 아파트를 샀다.

몇 동인진 아는데 수현이가 호수는 알려주질 않아, 그냥 그 건너편 아파트 중 공실이 난 곳을 바로 사버렸다. 구단에서 어디 펜트하우스 그딴 곳을 마련해줬다고는 하는데 씨발, 그냥 들어가기가 싫었다. 사람이 없기로는 그곳이나 이곳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차라리 이명헌이 보이는 곳에 있을래.

그런 사고 과정을 거쳐서,

지금 정우성은 혼자였다.






“안해요.”

뚝. 우성은 인터뷰 제안을 또 한번 거절했다. 지치지도 않는지. 밤이고 낮이고 각종 언론사에서 연락이 쏟아졌다. 대체 내 번호를 어떻게 알아낸건지. 원래 이런 건 에이전시에서 알아서 관리해야 하는거 아니야? 하여튼 일 존나 못해. 꼬르륵. 배꼽시계가 울렸다. 그러고 보니 명헌을 만난 후 저녁을 거르고, 깜박 잠들었다 일어나 아침도 걸렀다. 식욕이 하나도 없었다.

“...배고프니.”

꼬르륵.

“나는 배 안고픈데.”

자기 위장과 대화를 나누던 우성은 커튼을 걷었다. 오늘은 주말. 스케쥴은 없었고, 정확히는 많았는데 일방적으로 취소했고, 할 일이라곤 놀이터나 음침하게 바라보기 정도였다. 스토커 짓은 아니다. 아니, 애기가 같이 농구를 하자잖아. 근데 언제 만나자고 약속 잡는걸 깜박했다. 그래서 우성은 놀이터에 수현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는 손바닥을 바라 보았다. 수현에게 받은 [이수현 농구교습 쿠폰]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우성은 주먹을 쥐며 흥, 코웃음을 쳤다. 나는 이런거 받으면 무조건 해준다고. 누구랑은 다르게!

“어...어!”

수현이다. 베란다에 턱을 괴고 놀이터를 내려다보던 우성이 작게 탄성을 질렀다. 수현 혼자 농구공을 들고 저벅저벅 사람없는 놀이터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명헌의 딸이라는 걸 알고 나니 새삼 닮았다. 우성은 피식거리며 거실로 뛰어들어갔다. 자자, 뭘 챙겨야 하지? 일단 제일 중요한거. 농구공...은 수현이가 가져왔으니 됐고.

그는 아직 열지도 않은 종이 박스의 테이프를 북 뜯었다. 한참 물건을 뒤적거리던 우성은 미국에서 쓰던 물통을 발견했다. 싱크대 옆에 올려둔 이온음료의 뚜껑을 까서 물통을 가득 채웠다. 콸콸콸. 걱정마시라. 물통은 미리 깨끗이 닦아두었으니까. 그리고 그대로 물통을 챙겨서 나가려다가... 우성은 현관문 옆의 전신 거울 앞에서 멈춰섰다.

젠장.

그는 물통을 내려놓고 다급하게 윗옷과 바지를 훌훌 벗었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으면 어제 농구 교실에 다녀와서 옷을 갈아입는 것도 잊었다. 그는 옷으로 가득 찬 박스를 또 뜯고, 그 안에서 어제와 최대한 다른 디자인의 트레이닝 복을 꺼냈다. 팔 다리를 대충 우겨넣은 우성은 현관문을 박차고 나섰다. 여전히 쿠폰을 꼭 쥔 채로.





“자.”

우성의 부름에 수현이 뒤를 돌아봤다. 동그란 눈이 우성이 내민 쿠폰에 머문다. 그런데 쿠폰에 [이수현 농구교습 쿠폰]이 아니라, [정우성 농구교습 쿠폰]이라고 적혀 있다. 우성은 일부러 뒷면이 보이도록 쿠폰을 건넸다. 수현이 적은 글씨가 아니라, 자기가 적어놓은 글씨가 보이도록. 왜? 라고 묻는다면 우성 스스로도 이유를 몰랐다.

“...”

그걸 흠...하며 바라보던 수현은 쿠폰의 끝을 잡곤 빙글, 뒤집어 받았다. 우성은 눈을 깜박였다. 눈치 빠른 꼬맹이...! 할 말을 잃은 우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가져온 물통을 내려놓았다. 그런 우성에게 수현은 베- 혀를 내미며 웃었다. 하얀 이가 드러난다. 그런데 위쪽 송곳니가 조금 튀어나와 있었다. 우성은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미친, 졸라 귀여워. 언제 웃었냐는 듯 금새 또 웃음기를 지워낸 수현에게 우성이 아는 척을 했다.

“수현이 너, 덧니있네?”
“아빠 닮았어요.”

아.

뭐, 그렇지.

한 방 먹었네.

그러나 수현은 우성에게 딴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았다. 공 보세요. 그 말을 듣는데 소름이 돋았다. 부전자전이네. 수현이 우성에게 공을 던졌고, 그걸 원바운드로 받으면서 우성은 조금 울고 싶어졌다.

“이번에는 패스 똑바로 해줬다?”
“네.”
“수현아. 감독님이 뭐 하나 물어봐도 되냐.”
“일단 들어볼게요.”

...일단 들어볼게요? 어렵다, 어려워. 우성은 일단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했다. 내가 또, 이런 철벽은 이미 한 번 뚫어봤지. 두 번은 못할 줄 알고. 우성은 안 지친 척 숨을 몰아쉬는 수현에게 이온음료를 건넸다. 그러자 미심쩍...은 눈빛이 돌아온다. 우성은 양 손을 들고 뒤로 물러서며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입 안 댔어. 마셔도 돼.”
“그래서 물어보실게 뭐죠.”

갑자기 취조당하는 분위기. 우성은 뒷목을 긁적였다.

“그거 어디서 났어?”
“그거?”
“아니, 하. 그거 있잖아. 나한테 줬던 쿠폰...”
“우리 집에서요.”
“너희 집?”
“네. 단풍나무아파트 702동 404호.”
“야! 개인정보 떠들고 다니는거 아냐! 내가 무슨 사람일 줄 알고 집 주소를 함부로 말해. 아우, 난 아무 것도 못들었다. 못들었어.” 

우성은 깜짝 놀라 손으로 자신의 귀를 막았다.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단풍나무아파트 702동을 곁눈질했다. 404호? 그럼 4층이겠고. 저긴가? 그런 우성을 한심하게 쳐다보던 수현이 말했다.

“무슨 사람인지 알아요.”
“...어?”
“감독님이 어떤 사람인지 안다고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우성이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또 시작인가. 수현이가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할까. 감독님 유부녀랑 바람났다면서요? NBA쪽에서도 쫒겨나듯 돌아왔다면서요? 돌아와서도 두문불출하며 언론 인터뷰도 다 거절하고 유소년 농구 클럽같은거나 한다면서요? 가식적이야. 천박해. 물병 들고 꺼지세요.

그러나 수현에게 돌아온 대답은 아주 뜻밖이었다. 아랫입술을 깨무는 우성이를 지켜보던 수현이 말했다.

“감독님, 영어 잘하잖아요.”
“...어?”

갑자기 영어 이야기가 나온다고? 우성은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내가 영어를 잘한다고? 당연히 잘하지. 미국에서 10년을 지냈는데.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하루 24시간을 영어만 쓰면서 지냈는데. 그거 아니, NBA에서 같이 경기를 뛰던 다른 팀 선수가 있었어. 송태섭이라고. 미국가서 한 3년까지는 우리 둘다 한국어로 대화하다가, 더 지나니까 그냥 영어를 쓰게 되더라고.

그런데 문득 우성은, 수현이 말하는 자신의 영어 실력이라는게 방금 자신이 생각한 걸 가리키는 게 아니라고 직감했다.

제자리에 얼어붙은 우성을 놔두고, 수현은 농구공의 먼지를 털었다. 그리고 또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우성의 손에 쥐어주었다. 

“또 봐요.”
“너...”

또, [이수현 농구교습 쿠폰]이다. 그런데 아까 정우성이 돌려줬던 그 쿠폰이 아닌, 조금 다른 쿠폰이었다. 이게, 이게... 말을 잇지 못하는 우성에게 수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한두 개가 아니거든요.”

아주 많아요. 그리고 수현은 702동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옆구리에 농구공을 낀 채로. 아무렴, 아주 많겠지. 우성은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내가... 많이 만들었으니까.

정말 폭풍같은 원온원이었다. 완벽히 패배한, 원온원. 텅 빈 집에 돌아온 우성은 아까 본인이 되는대로 찢어놓은 상자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싱크대에 물병을 던져놓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줄줄줄. 수도관을 타고 내려가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 그를 둘러싼 상황들을. 다시 나타난 이명헌. 그 옆의 이수현. 단풍나무 아파트 702동. 그 중 최악은 702동 404호가 너무도 잘 보이는 곳에 집을 산 나.

나 10년 동안 뭐한거지.

그렇게 잊으려고 노력했는데, 이건 반칙이지.

이건 반칙이죠, 명헌이 형.

하, 하하하. 텅 빈 거실에, 그만큼 텅 빈 우성의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한참 가슴을 쥐어짜듯 웃던 우성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휴대전화를 집어들었다. 화면이 반짝인다.



카톡.

지금은...

메세지.

지금은 연락을...

부재중 전화.

지금은 연락을 받을 수...

메시지.

지금은 연락을 받을 수 없어...



해가 다 지고, 방 안이 완전히 깜깜해지고 나서야 휴대전화는 어둠 속에 우성을 홀로 남겨두었다. 꺼진 화면을 몇분이고 내려다보던 우성은 그제서야 잠금을 풀었다. 그는 길고 긴 연락처 목록을 내리고, 또 내렸다.

잠시 현철의 이름 위에서 망설이던 그의 손가락은 [송태섭]에서 멈췄다. 우성은 전화기 모양 아이콘을 꾹 눌렀다.

“...어. 태섭이냐? 응. 국내지. 들어온지 좀 됐어. ...미안. 일이 좀 있었다. 어, 응. 그래. 우리 술이나 마실래? 레스토랑 이런 데 아니고 포차에서. 아니, 내가 지금 술값 아까워서 그러겠냐. 그냥 좀 마시고 싶네. 흐흐. 그래. 연락해.”

...

전화를 끊은 우성은 구석에 돌돌 말려있는 매트리스의 포장을 풀었다. 그걸 거실 한가운데에 펼쳐놓고 나니까 창 밖에서 가로등 불빛이 들어왔다. 고층이라 빛이 세진 않았고 아주 어슴프레하게. 그는 가로등 불빛을 이불 삼아 그대로 눈을 감았다.









*



조금만 부연 설명을 하자면 이명헌이 개새끼 맞음.
근데 이명헌은 어쩌다...정우성에게 개새끼가 되었을까?
뭐 그런 내용임.
봐줘서 땡큐





우성명헌
슬램덩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