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키샘 샘이 버키랑 함께 했던 기억 잃는 게 보고 싶다 1
버키샘 샘이 버키랑 함께 했던 기억 잃는 게 보고 싶다 2
버키는 제 옆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만 있는 샘을 흘긋 쳐다봤다. 병원에서부터 얌전히 저를 따라온 샘은 여전히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오래된 익숙한 가게를 지날 때는 몸을 잠시 일으켰다가, 모르는 길목에 들어오면 다시 시트에 몸을 기대는 게 반복될 뿐이었다. 덕분에 나도, 그가 기억하는 순간을 더듬는다. 스티브를 만나기 전부터 알았다던 샌드위치 가게나, 의외로 자주 들렀다는 박물관, 이탈리아 고향으로 돌아간다면서 몇 달 전에 닫은 노인의 서점…. 시간을 더듬는 그의 뒷모습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안쓰럽다.
시간을 뛰어넘는다는 걸, 그가 이해할까. 버키는 이전까지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질문을 꺼낸다. 눈을 뜨면 몇 달이 쉽게 지나가고 때로는 몇 년이 사라져있는 감각을 그가 제대로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그는, 지금 너무 많은 걸 알아가야 했다. 그가 저만큼의 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모두 잘못으로 생각했다. 그것이 그들의 선택이었을지라도 여전히 그는 자신의 잘못으로 가슴에 묻어두는 남자였다. 내가, 그 모든 걸 이야기해주어야 하나? 문득, 옆 좌석에 앉아있는 그의 무릎을 쓰다듬고 싶은 마음이 들어 핸들에 놓인 손을 꽉 쥐었다.
“정말로 우리가 결혼을 했습니까?”
빨간불에 차가 멈추자마자 갑작스럽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는 전혀 예상하지 않은 내용을 전한다. 고개를 돌리자 짙은 눈동자가 저를 향해있다. 피곤한 건지 아니면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그의 눈가가 붉어져 있다.
“……그랬겠군요.”
군대에서나 들었을 말투가 어색하다. 귓바퀴를 타고 들어오는 경직된 목소리도, 그의 굳은 어깨도 익숙하지 않다.
“표정을 보니, 대충 그럴 거 같습니다.”
샘은 다시 고개를 창밖으로 돌린다. 제 앞에서 좌석을 올려주지 않았던 그의 고집스러운 뒷모습이 겹쳐 보인다. 우리는, 차에 탈 때마다 열에 여덟은 그 순간에 대해 농담을 했다. 지금 그에게는 그 순간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의 농담도, 웃음도 전부 없는 게 되는 걸까? 자꾸만 이상한 질문이 머리를 맴돈다. 그가 무슨 마음으로 저를 따라왔는지 알 수가 없다. 병실에서부터 그는 내가 모르는 사람이 되었던 걸까.
지금의 그에게는 익숙하지 않을 골목으로 들어서자 귀를 쫑긋거리는 게 보인다. 볼 수는 없지만 날카롭게 사방을 살피고 있을 모습이 눈에 훤하다. 새로운 곳에 들어갈 때마다 그는 초면이라는 것을 광고라도 하듯 온통 신경을 곤두세웠다. 눈치도 없이 웃음이 새어 나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를 세우자 창밖을 바라보던 샘이 고개를 반틈 돌려 얼굴을 정면으로 향한다. 잘생긴 코와 긴장한 턱선이 눈에 들어온다. 여전히 그는 긴장을 늦추지 못한다.
“여기야.”
“그렇군요.”
우리의 집이라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다. 창밖을 다시 흘끔거리던 샘이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차 문을 연다.
“저기, 새뮤얼.”
“네?”
“네 반지야.”
천천히 제 손을 내려다보는 속눈썹이 떨리지는 않는지 자꾸만 시선이 간다. 아무 말 없이 저를 따라온 샘은 손 위에 올라간 반지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결혼반지.”
“…….”
“검사 때문에 빼놨어.”
“…….”
“네 거야.”
“이건…….”
손을 내려다보던 눈동자가 저를 향한다. 붉어졌던 눈가가 어느새 가라앉아 있다. 문득 내가 어떤 표정인가 생각해본다. 그나마 웃고 있기는 한 거 같다. 샘이 미안한 얼굴인 거 보니.
-
“그, 혹시….”
“응?”
“잠깐만 시간 좀 가져도 될까요?”
-
목구멍이 칼칼하게 울음이 올라온다. 샘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느리게 그러면서도 어느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신중하게 내쉰다. 익숙한 감각이다. 수년 전에도, 지금 당장도 ─ 제가 기억하는 선에서 말하는 거였지만 ─ 꽤나 자주 느꼈던 압박이었다. 참는 것보다는 차라리 흘려보내는 것이 낫다. 다시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떨리는 호흡이 느껴진다. 잠시 숨을 참아야 한다. 머리가 멍해지지 않을 정도로, 현실감각을 잃지 않을 정도로만 멈추면 된다. 3초면, 아니 방금 제 앞에서 사라진 사내가 듣지 못할 거리를 확보하려면 10초 정도.
“하…….”
참았던 울음이 터진다. 울음소리를 낼 정도는 아니다. 혀뿌리가 아릴 정도로 올라오는 공포와 손가락 관절이 잠시 제 자리를 벗어났다가 돌아오는 정도의 긴장이면 된다. 얼굴을 쓸어내리자 메마른 손바닥이 눈물에 젖는다. 익숙한 감각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상하게 넓은 침대는 익숙하지 않다. 생활감이 있는 이불도 마찬가지고. 시간을 가지고 싶다고 말하자 버키는 저를 침실로 안내했다. 잠시 나가 있고 싶다는 의미였지만, 생각해보니 저 혼자 돌아다니는 건 영 위험한 일인 거 같기는 했다. 덕분에 저도 모르는 남의 침실에서 눈물을 짜내는 중이었다. 눈물에 젖은 손바닥을 부비자 살이 거칠게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그만 풀어내야 하는데. 여전히 긴장이 사라지질 않는 게 문제다.
저를 죽이려고 했던 사내와 한 집에 있다. 그에 대해 기억나는 거라고는 날개가 뜯어진 채로 떨어지던 감각과 뒷골이 띵해질 정도로 턱을 틀어잡았던 아귀힘이다. 신체에 박힌 기억, 아니 통증만 떠오른다. 땅에서 발이 떨어져 붕 뜨는 느낌까지도. 머리부터 뒤집히는 순간이 떠오르자 샘은 패닉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숨을 골랐다. 다른 걸 생각해야 한다. 감각에서 멀어져야 한다. 샘은 쓰라릴 정도로 오른 눈을 닦아낸다. 이상하게 오른쪽 눈에서만 눈물이 많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그의 오른손은 평범한 사람 손이었다. 샘은 차분히 생각을 정리한다. 그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슬픈 표정을 지었던 스티브의 웃음이나, 걱정 어린 눈썹을. 당신한테 총을 쏘는 사람들은 대개 저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했던 실없는 농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사람들이 북적거렸던 카페, 벽 너머로 보이는 솜인형처럼 사람들을 다루던 그의 움직임, 헬기를 차던 무거운 느낌, 감정을 숨기려고 고개를 돌리던 모습, 정전이 되었던 지하 5층─
“… 젠장.”
두려움이 자리 잡는다. 샘은 쥐고 있던 주먹은 풀어낸다. 실수로든, 충동적으로든 제 이마를 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겨우겨우 풀어낸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쌌다. 자해를 참는 건 꽤 많은 노력을 요구했다. 이번에는 이마를 감싼 손가락에 힘을 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고글을 통해서 봤던 그의 공간이 갑작스럽게 수면 위로 올라온다. 이상하게 별거 없는 그의 집, 그 공간에서 두리번거리는 스티브와 계단으로 올라가던 군인들, 냉장고 위에 올라가 있는 감자 칩 봉지가 생각난다. 아니, 이런 쓸데없는 것보다는 그를 설득하던 스티브의 걱정 어린 목소리를 떠올려야 한다. 그래야……
- 샘?
“……네?”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가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언제부터 문 앞에 서 있었던 거지? 저도 모르는 새에 사정거리에 있었을 그의 존재에 괜히 심장이 빠르게 뛴다. 생리적인 공포를 억지로 잠재운 샘은 이상할 정도로 부드러운 사내의 목소리에 조심히 목을 가다듬었다.
- 열쇠 주려고.
문고리를 돌리자 푸른 빛깔의 눈동자가 들어온다. 그다음으로는 축 처진 짙은 눈썹까지.
“…제가 집을 볼까요?”
“그래주면 좋겠어.”
매력적인 목소리가 울린다. 어색한 웃음이 도리어 더 어색하다. 파일 안에서는 보지 못했던 표정이다.
“언제쯤 들어옵니까?”
“응?”
“…병원에서 그러시지 않으셨나요. 혼자 있는 건 위험하다고.”
깔끔하게 정리된 그의 수염이 눈에 들어온다. 제 기억을 떠올린다면 상상도 못할 정도로 순해진 눈빛도. 내가 눈빛을 읽을 수 있나? 근본적인 질문이 떠오르는 직전에 짙은 붉은 색의 그의 입술이 열리는 게 눈에 들어온다.
“사실 그렇게 크게 위험하지는 않아.”
이유는 모르지만 사내의 눈동자가 빛을 되찾는다.
“어떤 정부가 캡틴 아메리카를 위협에 빠뜨리고 싶겠어?”
“네?”
“널 집에 데리고 오고 싶어서 거짓말한 거야.”
농담인지 모를 목소리다. 웃음이 섞였다는 건 읽힌다. 지나치게 푸른 눈이 부담스럽다. 감당하기 어려운 임무를 부탁한 스티브 때문일지도 몰랐다. 둘은 비슷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샘은 어색하게 웃는 버키의 입꼬리에서부터 눈길을 올려 다시 푸른 눈을 바라본다. 직전까지 저를 살피고 있었을 사내가 서툴게 눈길을 물린다. 스티브의 부탁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샘은 어디선가 익숙한 버키의 시선에 마른침을 삼킨다. 그의 눈길이 이상할 정도로 부드러워서이려나. 이번에는 답을 알 수 없는 생각이 자리 잡는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가 알까? 시계를 흘긋 보던 ─ 그의 손목에 꽤나 비싼 시계가 걸린 건 정말로 이상했다─ 버키가 머리를 긁적인다. 이제 가봐야겠다. 더 미루면 안 될 거 같네. 버키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저에게 열쇠를 건넨다. 이건 받을 거지?
“용서해.”
“네?”
“…넌 혼자 있는 걸 싫어하잖아.”
-
“다녀올게. 집은 마음껏 돌아봐.”
“…….”
“금방 올 거야.”
“알겠어요.”
“…다녀올게, 샘.”
-
그가 정말로 나를 잊은 게 분명했다. 아무리 닫힌 문이라도 그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걸 보면.
버키샘 세즈맥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