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키샘 샘이 버키랑 함께 했던 기억 잃는 게 보고 싶다 1
“여러 가지 궁금한 게 많은데요.”
저를 살피는 눈빛에 소름이 끼친다. 샘은 창틀에 올려놓은 손가락에 힘을 준다. 난리 통에 살펴본 풍경을 따져보면 최소 6층에서 어림잡아 8층이다. 창문으로 시선을 돌리면 자신이 몇 층에 있는지 쉽게 알 터지만 고개를 돌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층수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없는 몸으로 지상에 도착할 수 있는가?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반틈 열려있는 창틀에서 새어 들어오는 공기의 흐름에 희망을 건다. 적어도 ‘사내’의 손에 짓이겨지는 것보다는 평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는.
새뮤얼 윌슨은 비관적인 감각을 빠르게 접었다. 제 상황에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 불안은 차라리 차단해버리는 게 낫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는 저를 향한 사내와 눈을 맞춘다. 사내는 여전히 저를 살피는 눈치다. 말이 되나? 2년 동안 흔적만 쫓아다니던 저였다. 샤론의 도움으로 그를 찾으러 갔을 때가 ─의사와 간호사들의 대화로 대충 어림잡아 보면─ 11, 12년 전이란다. 그리고 중간에, 무슨 5년이 ─‘블립’의 후유증으로 보기에는 어렵다는 말에 그게 무엇이냐 물어봤다─ 빈다고 했었나. 계산이 똑바로 되지 않는다.
“제가 왜 캡틴인 건가요? 스티브는요?”
“스티브가 너에게 넘겼어. 방패도 그렇고, 이름도 모두.”
“그러면─”
“걔는 지금 잘살고 있어. 작전이라든가, 임무라든가 그런 이유 말고, 그냥 행복하게. 그러니 그건 걱정하지 마.”
이미 예상한 질문이었는지 사내는 어렵지 않게 제 궁금증을 풀어준다. 네가 어떻게 활동했는지는 토레스가 금방 정리해서 알려 줄 거야. 걔가 컴퓨터는 정말 잘 다뤄. 게다가 네 팬보이기도 하고 말이야. 걔가 정리한 파일을 다 보려면 오늘 하루가 모자랄걸. 농인지 진심이지 알 수 없는 대답이 이어진다. 샘은 애써 발랄하게 어깨를 으쓱이면서 저에게 다가오는 사내에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 박동을 무시했다. 그가 제 심장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까? 혈청을 맞은 슈퍼솔져의 능력을 가늠하기는 너무 어렵다.
거리를 둬주겠다는 아량인지 사내는 발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침대에 걸터앉는다. 사내는 조금 지친 얼굴이다. 제가 기억하는 것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고, 어떤 면에서는 안정된 중년의 얼굴을 하고 있다. 나도 그러려나? 생각해보니 거울을 본 기억이 없다. 아직 감각이 다 돌아오지 않아서 둔한 느낌이 사실은 노화 때문일지도 몰랐다. 열두 살을 더 먹었다면, 저도 이제 사십을 훌쩍 넘은 참이니까.
“좀 앉아서 말하지.”
“당신이 저의 법적 보호자라는 게 무슨 말입니까?”
경계가 풀어졌다고 생각했는지 부드러운 얼굴을 하는 그에게 주도권을 주고 싶지 않아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여섯 걸음 정도로 떨어져 있다. 이 정도 거리라면 일단 병실 안에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럴 바에야 그의 신경을 건드리는 걸 선택했다. 저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방어기제였다. 그게 어느 정도 먹혔는지 사내가 입을 꾹 다문다. 법적 보호자. 그와 함께 가도 되겠냐는 의사의 물음 속에 있었던 단어였다.
“…앉아서 말하자고.”
“그러고 싶지는 않습니다.”
“…….”
“말씀하시죠.”
“…말 그대로야. 내가 네 법적 보호자라고.”
“파트너라고 이야기하는 건가요? 동업자?”
“아니, 결혼.”
“뭐요?”
“우리 결혼했어. 그래서 내가 너의 법적 보호자야.”
이전까지는 억지라고 할 정도로 급하게 대화를 이어가던 샘이 입을 다문다. 코너에 몰렸을 때 대화의 주도권을 가지고자 하는 게 그의 버릇이라는 걸 제가 모를 리 없다. 주도권을 빼앗긴 샘이 당황하는 사이에 저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는 걸 기회 삼아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이제 저와 그의 사이는 세 걸음 정도다. 버키는 조금 더 가까워진 거리에서 샘을 찬찬히 살폈다. 저와 함께하면서 동그랗게 살이 오른 볼이나 부드러워진 어깨선과는 다르게 조금 더 날카롭고 예민한 눈빛이다. 저를 보고도 미소를 짓지 않는 웃음이나 도무지 풀어지지 않는 주먹이 어색하다 못해 이상하다. 편하게 몸을 기대지 못하는 것과는 별개로 당장이라도 병실 침대를 벗어나 얇디얇은 창문을 깨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8층에서, 언제든지 뛰어내릴 준비가 되었다는 듯 창문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체와 무릎이 마음에 걸린다.
“네가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이 언제야, 샘.”
“뭐라고요?”
“어디서부터야?”
“shit, 이게 무슨─.”
샘의 어깨를 감싸 쥐었던 버키의 손이 내쳐진다. 밀쳐질 리가 없는 힘이지만 제 손아귀를 벗어나려는 그의 의지가 지나치게 강한 탓이다. 여전히 그의 온기를 담은 손바닥이 공중에서 천천히 물러난다. 바스락거리는 환자복과 물러나는 구두 굽 소리, 그 사이에서 긴장된 숨소리가 흘러들어온다.
진정하지 못한 제 탓이 크다. 익숙한 버릇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그가 제가 알던 새뮤얼 같아서. 젠장, 저를 거부하는 그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말았어야 한다. 갑작스러운 제 행동에 놀란 듯 숨기지 못할 정도로 오르내리는 가슴에 시선이 빼앗긴다. 단 한 번도 그가 이 정도로 당황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 버키는 물기 맺힌 그의 눈에서 시선을 돌렸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사람처럼, 아니─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음이 틀림없다.
“세뇌는, 언제 풀린 겁니까.”
애써 추스린 직후에 이어지는 딱딱한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음표가 느껴지지 않는, 취조와 다를 바 없는 태도에 양심 없게도 빈정이 상한다.
“네가 기억하는 내 마지막 모습이 언제인데?”
“……박사가 당신을 풀어준 때요.”
씨발, 그렇게까지? 지모의 손에 놀아났던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수치심이 강하게 올라오던 순간도 분명히 있었지만, 이제는 저에게 너무 먼 기억이었다. 그와 스티브, 냇과 도망 다니던 시절도 기억에서 흐려져 그 기억을 꺼내면 항상 내가 맞네, 네가 틀렸네, 하며 다퉈야 했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래프트에 갇힌 지모에 대한 농담도 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가 래프트에서 어떤 식사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느냐, 토레스에게 부탁하면 감시 카메라를 보여줄 거라는 장난스럽게 물어보던 샘의 미소가 저를 괴롭힌다.
어디부터 설명하지. 과거부터 순서대로? 아니면 지금부터 거꾸로?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상황에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버키는 제 목을 조르는 넥타이를 풀어 헤치다가도 제 왼손에 머무는 눈에 손길을 멈췄다. 젠장, 이 손도 처음인가.
“그 이후는 기억이 없어?”
“…….”
“새뮤얼, 네가 조금이라도 말을 해줘야─”
“그때가, 마지막입니다.”
날카롭게 올라간 샘의 눈가가 작게 떨린다. 갈색 눈동자가 제 왼손으로 내려간다. 왜 제 손이 검게 되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다. 샘은 이해하지 못하는 게 있을 때마다 항상 눈가를 좁히면서 눈을 한 번 깜짝였다. 자꾸만 익숙하게 읽히는 그의 모습이 너무 미웠다.
그래, 이건 내 죄가 크다.
-
샘을 양도 받는 과정이 쉬운 건 아니었다.
“진심이야? 당신 보고 기겁하던 건 기억 안 나? 거의 경기 일으키던데.”
“저기, 루스 씨… 경기까지는 아니고…”
“예, 토레스 대위. 내가 그래서 '거의'라고 말했잖아요.”
퇴원 절차를 밟기 전에 마지막으로 진찰을 받아야 한다는 의사의 요구에 이렇다 할 대화를 끝마치지 못한 채로 나오자 저에게 또 다른 취조가 쏟아진다. 루스는 못미덥다는 얼굴로 저를 노려보고 있고 토레스는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 채로 저와 루스를 말리고 있다.
“나야말로 말했잖아, 루스. 내가 걔 남편이라니까?”
“윈터솔져였을 때는 아니었지. 지금 샘은 그 기억에 있는 거 아니야?”
“루스 씨, 아직 캡틴이 어디까지 기억을 잃었는지는 모르는 거─”
“그때가 맞아. 내가 물어봤어.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네? 그건 당연히 상관있는 거 아니에요?”
“야, 토레스…. 너 지금 누구 편이야?”
“저야 당연히 샘 편이죠!”
“토레스 말대로 너무 상관있지. 날 수만 있다면 옥상에서도 맨몸으로 떨어져도 아무렇지 않을 양반이 당신 얼굴을 보고 저렇게 기겁하는데. 그게 어떻게 문제가 아닐 수가 있어. 누구 수명 줄일 일 있어?”
“루스, 이건 나와 샘 사이의 문제─”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그와 당신이 동거를 하든 결혼을 했던 그건 내 알바가 아니지만 어쨌거나 그는 캡틴 아메리카야.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 쪽에서도 난처하다고. ”
“그래서, 그를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데?”
드디어 핵심이 나온다.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에 시끄럽던 복도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버키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대며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여기서, 그를 보호할 사람이 얼마나 있어? 나 말고 누구한테 맡길 건데.”
“캡틴 사무실은요? 거긴 보안 시설 때문에 안전할 텐데.”
“자기가 뭐 하는지도 모르는 애를 사무실에 넣어두자고? 그게 될 거 같아?”
“버키, 그러면 래프트도 나쁘지 않은 선택지야. 나갈 수 없는 곳이면 들어올 수도 없잖아.”
“뭐? 지금 장난쳐?”
“저기요.”
과열되는 대화 사이로 주인공이 갑자기 끼어든다. 언제 열렸는지 병실 문을 잡고 있는 샘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샘은 갑자기 몰려드는 시선에 몸을 한 번 물리더니 이내 입을 연다.
“엿들은 건 미안하지만….”
갑작스럽게 조용해진 복도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소유권을 두고 다투는 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서인지 답지 않게 망설이는 모양새다. 샘은 그를 걱정하던 목소리의 주인공을 구분하듯이 토레스의 얼굴과 루스를 천천히 살피고는 목을 가다듬고는 말을 이어 나간다.
“제가 괜찮다고 했습니다.”
샘은 여전히 저를 보지 못한다.
버키샘 세즈맥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