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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30 04:12
bgsd 어나더
그 이후로도 반 년 동안 스즈키는 몇 번 더 지령실로 호출을 받았다. 그동안에도 헬폭스에게 지령을 내린 건 몇 번 있었지만 지령 팀장이 마음을 고쳐먹은 건지 요즘 신참들은 빠릿빠릿한지 스즈키가 대타로 들어간 적은 없었다. 그리고 해가 바뀌고 꽃이 피는 계절에 다시 한 번 지령실을 호출을 받고 갔을 때 이번에 스즈키를 보고 벌개진 얼굴에 식은땀을 가득 매달고 일어선 애송이는 또 새롭게 보는 신참 요원이었다. 당연했다. 헬폭스는 이 조직의 잠입요원 중 명실상부한 최고의 요원이었고 그 요원의 심기를 거슬려서 지령실에서 쫓겨난 요원은 다시 지령실에 발을 들일 수 없었다. 헬폭스를 대상으로 사고를 친 놈은 그대로 해고거나 좌천이었다. 그것도 신참들이나 그렇고 지령팀장의 권력은 만만치 않은지라 모니터들 앞에 앉아 있는 상사는 같은 사람이었지만. 그 문제의 상사가 스즈키에게 서류철을 내밀었다.
"20분 후 작전 개시다."
잠입장소: xxxxxx
잠입시간: 20xx03122200
잠입내용: xxxxxx 대회의실 및 소회의실, 대표실에 도청기 설치
콜사인: 헬폭스
특이사항: 콜사인을 반드시 풀네임으로 부를 것. 콜사인 변형 절대 불가
붉은색의 글자들 중 뒤쪽에는 예전에 볼 수 없었던 문장이 하나 더 추가돼 있었다. 콜사인 변형 절대 불가. 그 몇 글자 중 제일 뒤쪽은 아직 잉크가 완전히 마르지도 않아서 살짝 번들거리는 걸 본 스즈키는 서류철을 펼친 채로 애송이 요원 앞에 다가가서 고개를 푹 숙인 요원을 바라봤다.
"고개 들어."
스즈키를 바라보는 요원의 눈에는 당황과 공포가 가득했지만 스즈키는 여전히 냉랭한 눈으로 요원을 바라봤다.
"글자 못 읽어?"
"... 네?"
"이 붉은색 글자 읽어 봐."
요원은 침을 꿀꺽 삼키고 떨리는 목소리로 '콜사인을 반드시 풀네임으로 부를 것. 콜사인 변형 절대 불가'이라는 말을 더듬더듬 읽었다. 스즈키는 요원의 목소리가 끊기는 순간 바로 요원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요원은 비명을 내지르며 비틀거렸으나 곧바로 몸을 똑바로 일으켰다.
"지령요원에게 잠입요원의 생사가 달렸어.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것도 숙지를 못해? 너 같은 새끼가 지령실에 있으면 잠입요원은 죽어. 알아? 너만 믿고 있는 요원을 네가 죽이는 거라고, 쓰레기 자식."
스즈키는 애송이 요원을 비난하는 듯했지만 실제로는 요원들 교육과 배치를 맡고 있는 상사, 바로 옆에서 구겨진 얼굴을 하고 있는 상사를 향한 비난이었다. 이 조직에서는 처음부터 지령 담당과 잠입 담당은 다른 경로로 교육시키고 지령실 소속이었다가 잠입팀으로 가는 경우도, 잠입팀 소속이었다가 지령실로 이동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지령 담당으로 키워지는 경우는 대부분 잠입팀을 자신의 아래로 여기는 성향이 조금씩 있긴 하지만 지금의 지령팀장은 그 중에서도 비틀린 자부심이 유별난 편이었다.
게다가, 게다가 말이다. 헬폭스가 어떤 인간인데. 헬폭스가 물이 조금만 과하면 곰팡이가 생기고, 물이 조금만 부족하면 잎이 말라버리고 햇빛이 부족해도 죽고 통풍을 제대로 안 시켜줘도 죽고 온도가 조금만 떨어져도 죽어버린다는 유포칼립스처럼 예민하기가 저세상급인 요원이란 걸 이 조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그 정도로 예민한 헬폭스에게 주구장창 신입 지령요원만 붙여줘서 매번 사고를 일으키게 하는 저 팀장 자식이 문제인 게 당연하지 않은가. 악의가 없이 이럴 수 있다고? 악의가 없는데 이러면 더 문제 아니야? 정말 악의가 없다면 대가리 지능이 일반인 수준도 안 되는 멍청한 새끼나 이런 짓을 반복할 텐데!
헬폭스가 피범벅으로 혼자 살아 돌아온 후 몇 달 뒤, 처음으로 지령실 직원이 '폭스'라고 불러서 발작을 하며 작전 수행을 거부했을 때 헬폭스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 자였다고 들었다. 그러나 물론 조직의 상부에서는 잠입요원이 사전에 양해를 구한 상황을 지켜주지 않아서 작전을 거부했다고 유능한 잠입요원을 버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사고를 친 지령실 소속 요원이 본부 경비팀으로 좌천됐고, 이 상사는 당시 1계급 강등과 3개월 감봉 징계를 받았었다. 그 이후 헬폭스에 대한 증오가 더 커진 것 같지만 직위에 비해 너무 무능한 이 상사와 조직 역사를 통틀어서 손꼽힐 정도로 유능한 잠입요원 중, 조직의 상부가 누구의 손을 들어줄 지는 명약관화했다.
게다가 스즈키는 지령실의 멍청이들이 헬폭스의 상처를 들쑤시는 게 정말로 끔찍하게 싫었다.
스즈키는 어린 시절에 부모를 잃고 보육원으로 보내졌다. 보육원에서는 서러운 일도 종종 있었고 학교에서도 고아라고 놀림당하고 괴롭힘당하는 일이 종종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보육원은 썩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원장과 선생님들은 없는 돈으로도 아이들을 깔끔하게 입히고 따뜻하게 재우고 몸에 좋은 걸 먹이려고 애썼고 학원을 보내주지는 못해도 열심히 공부도 봐 줬었다. 그렇게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던 삶이 확연히 나아진 것은 새카만 데다 몸은 커다랗고 얼굴은 무섭게 생긴 주제에 눈빛은 선량하던 한 남자가 보육원에 정기 기부를 약속했을 때부터였다. 원장에게는 그냥 작은 사업을 한다고 했다는 그 아저씨는 보육원에 정기적으로 상당한 금액을 기부하면서도 한두 달에 한 번씩 보육원에 올 때마다 아이들에게 맛있는 간식을 사다줬었다. 철이 바뀌면 아이들에게 옷도 한 벌씩 해 입혔고 여름에는 바닷가를, 겨울에는 눈썰매장을 데리고 가 준 적도 있었다. 언젠가는 자기랑 비슷하게 시커멓고 커다랗고 무섭게 생긴 다른 아저씨들과 우르르 와서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공원에 가 준 적도 있었다.
스즈키의 어린 시절 기억들 중 아름답고 재미있는 추억은 모두 그 아저씨가 만들어줬었다. 나중에 스즈키는 우연히 아저씨가 진짜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게 됐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스즈키가 하교하다 학교 불량배들에게 잡혀서 골목에서 쥐어터지던 날이었다. 스즈키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키가 쑥쑥 커서 웬만한 아이들보다 컸고 원래 타고난 뼈대도 굵어서 덩치도 컸는데도, 놈들은 스즈키를 치고 받고 때리고 차고 밟는 데 거침이 없었다. 스즈키에게 그가 맞았다고 학교에 달려와 하소연할 부모가 없다는 걸 아는 까닭이었고, 스즈키가 보육원과 같은 보육원의 다른 아이들에게 해가 갈까 봐 일을 크게 키우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 까닭이었다.
그날 스즈키가 그렇게 무참히 짓밟히고 있을 때, 마침 보육원에 방문하고자 지나가던 커다랗고 시커먼 아저씨가 달려와서 녀석들을 두들겨팼다. 그때 아저씨가 고작 열몇 살인 불량배들을 반죽음으로 만들었다는 건 아니었다. 그저 몇 대 쥐어박고 다시는 스즈키를 건드리지 말라 훈계만 했는데, 싹부터 썩어빠진 그 자식들이 아저씨가 정기적으로 보육원에 오는 걸 알고 보육원 주변에서 그 동네 건달 형들을 불러서 기다리고 있다가 아저씨에게 린치를 가하려 한 것이었다. 아저씨는 교복도 못 벗은 불량배들은 쥐어박기만 했지만 이미 빨간 줄이 그어진 건달들은 일어서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때 스즈키는 똑같이 주먹으로 먹고 살아도 약자를 삥뜯기나 하는 건달과는 차원이 완전히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아저씨가 그런 일을 한다는 것도.
아저씨는 스즈키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고, 스즈키가 아저씨처럼 되는 것도 극구 만류했지만 스즈키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고맙고 소중한 사람의 뒤를 따라 걷고 싶었고 아득바득 매달린 끝에 결국 아저씨가 일하는 곳이 어딘지도 알게 됐고 그 조직에서는 경력이 없는 이들은 받아주지 않는다는 걸 알고 경찰에서 몇 년 경험을 쌓은 후에 그 경력을 가지고 그 조직의 훈련소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훈련소에서는 공동 훈련을 1년간 받고 잠입팀으로 갈지 지령팀으로 갈지 결정한 후 지망에 따른 훈련을 또 1년간 받게 돼 있었다. 스즈키는 당연히 아저씨가 있는 잠입팀으로 신청할 생각이었다. 아저씨는 훈련소가 쉬는 날마다 스즈키를 만나서 격려도 해 주고 맛있는 것도 사 주었다. 틈틈이 아저씨의 팀원들에 대해 알려준 것도 그때였다. 그중에는 어린 시절 스즈키가 있던 보육원에 아저씨와 함께 와서 바닷가며 놀이공원을 데리고 가 준 아는 얼굴들도 있었고 모르는 얼굴들도 있었다.
그리고 모르는 얼굴 중에는 스즈키보다 연상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귀여운 사람도 있었다.
얘가 우리 막내인 여우야. 아직 애송이지만 엄청 똘똘해. 순둥순둥한데 할 때는 또 확실하거든.
순둥순둥한데 왜 여우예요?
웃을 때 보면 완전 여우거든. 아기여우 같아서 베이비폭스라고 부르려고 했더니 녀석이 길길이 날뛰어서 베이비 떼 주고 폭스라고 해줬지. 예쁘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끄덕할 정도로 예뻤다. 아저씨가 보여준 웃는 사진을 보니 왜 웃는 얼굴이 여우같다는지도 확실히 알 것 같았고.
그래, 오래 전 헬폭스가 말랑말랑하고 보송보송한 폭스이던 시절, 폭스와 같은 팀으로 폭스의 상사이자 팀장이었으며, 그때 그 사고가 없었으면 곧 스즈키의 상사도 될 예정이었고, 스즈키의 든든하고 고마운 아저씨였던 사람이 자랑스럽게 스즈키에게 보여준 사진 속에서 아직 지옥에 발을 들이지 않았던 폭스는, 마치다 케이타는 마냥 사랑스럽고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비극으로 끝난 그 극비작전 이후 폭스는 지옥에서 돌아온 헬폭스가 되었고 다시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됐다. 그런데 정말로 뭣모르는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그날 그 팀을 죽음으로 내몰고 마치다 케이타가 아끼던 모든 사람을 다 죽여버린 지령실 멍청이들이 그 상처를 다시 쑤셔대는 걸 정말로 참을 수가 없었다. 양심이 없으면 제발 머리라도 있어야 될 거 아니야.
"당장 꺼져."
애송이가 절뚝거리며 나가고 나자, 상사는 벌개진 얼굴로 스즈키를 노려봤다.
"스즈키 노부유키."
상사는 경고조로 불렀지만 스즈키는 냉담한 얼굴로 상사를 바라봤다.
"지령팀에 저딴 쓰레기같은 요원들 밖에 없으면 차라리 저를 지령실 붙박이로 넣든가요. 이게 몇 번째입니까?"
"이따위로 굴면 네 앞길도 평탄치 않다는 걸 알 텐데."
남자가 지령팀의 수장인 건 사실이었다. 스즈키의 승진과 무난한 조직 생활이 상사에게 달린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부상과 사망 등으로 로스율이 높은 잠입팀과 달리 지령팀은 인원 자체가 적고, 파벌이라고 해 봐야 힘이 크지도 않았다. 게다가 이 인간은 폭스가 속했던 팀의 괴멸과 헬폭스를 폭스라고 불러서 헬폭스가 작전을 거부했던 사건 이후로 발언권이 엄청나게 약해졌다.
아저씨와 아저씨의 팀원들이 폭스만 제외하고 전원 작전 중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저씨가 죽었을 때의 그 작전이 뭔가 수상한 냄새를 풍긴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당장 아저씨가 몸바쳐 일했던 조직에 뛰어들어가 다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 그러나 그럴 능력이 없고, 사정도 모른 채 분풀이만 해 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걸 알았기에 참았다. 그리고 스즈키는 다가온 진로 결정 시기에 잠입팀이 아닌 지령팀을 선택했다. 아저씨를 죽인 잠입팀에 들어가서 아저씨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야 했기애.
스즈키는 여전히 폭스의 팀이 전멸했던 그 대형 사고 당시에 지령실의 실수가 직접적인 원인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지령실의 실수가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한데도 당시 지령실의 수뇌부 중 하나였던 이 작자가 안 짤려 나가고 여지껏 버티고 있는 거 보면 이 조직 내에서 잡은 줄이 확실히 있는 게 분명했다. 어쨌든 썩어도 준치라고 이 인간이 상사이고 스즈키가 지령팀인 이상 영향이 없지는 않겠지만, 스즈키는 애초에 승진에 대한 욕구도 없었다. 그때의 진상을 파헤치려면 승진이 필요하긴 하지만, 이따위 인간한테 빌붙어서 승진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헬폭스가 한 번 더 작전을 거부하면 이번에는 강등과 감봉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팀장님도 아실 텐데요."
스즈키와 달리 승진 욕심도 많은데 정작 잘한 게 없는 상사는 차마 스즈키를 걷어차지는 못하고 옆에 있던 의자를 걷어차 버리고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문이 채 닫히지 않은 걸 알 텐데도 들으라는 듯 '건방진 새끼'라고 욕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스즈키는 개소리는 무시하고 빠르게 모니터 앞에 앉으며 헤드폰을 착용했다. 음성변조 장치를 켜고 '헬폭스'라고 중얼거리자 변조된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확인했다.
모니터에 떠 있는 시간을 확인하자, 이제 작전 개시까지는 5분 20초 정도만 남아 있었다. 차분하게 숫자의 변화를 보고 있던 스즈키는 숫자가 21:55라고 바뀌는 순간 마이크를 켰다.
"헬폭스. 볼크입니다."
[예스, 볼크.]
"5분 전입니다. 준비 완료됐습니까."
[예스, 볼크.]
"대기하십시오, 헬폭스."
[예스, 볼크.]
그리고 22:00.
"CCTV 블라인드 완료. 진입로 도어 잠금장치 해제 중입니다. 대기 17초."
[예스.]
"오픈."
[통과.]
...
그날의 헬폭스 역시 빈틈없이 작전을 깔끔하게 클리어했다. 스즈키는 헬폭스가 도청기를 은밀히 설치하고 건물을 무사히 빠져나온 것까지 확인하고 작게 한숨을 삼켰다.
"미션 클리어, 헬폭스, 수고하셨습니다."
[미션 클리어. 수고하셨습니다. 볼크.]
무전을 끈 스즈키는 몇십 분 사이에 까칠해진 얼굴을 문지르다 헤드셋을 벗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참지 못한 한숨이 결국 터져 나왔다. 그 한숨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스즈키는 컴퓨터를 끄고 재빨리 지령실을 벗어났다. 헬폭스의 작전 지령을 한 날은 늘 그랬듯이 마음이 미친 듯이 술렁거렸다. 살아 숨쉬고 움직이는 마치다 케이타를 보지 않으면 가라앉지 않을 술렁임이라는 걸 알기에 가야 할 곳은 분명했다. 그러나 이 여우가 오늘은 또 어떤 바에 숨어 있을지 모르니, 밤이 다 가기 전에 여우가 숨은 굴을 찾아내려면 서둘러야 했다.
#요원놉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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