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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29 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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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가 워낙 어둑해서 가까이 가지 않으면 자리에 앉은 이의 얼굴도 안 보이는 바였다. 그러나 스즈키는 조용히 재즈가 흐를 뿐 사람들의 대화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는 그 어두운 바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구석에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입구에 등을 보이고 앉아있는 남자는 스즈키가 다가가는 발소리를 듣고도 미동도 없었다. 심지어 스즈키가 천연덕스럽게 맞은편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도 마치 스즈키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제 앞의 술잔을 들어서 잔에 채워진 위스키를 마시기만 했다. 앞에 사람이 앉은 것조차 모른다는 듯한 차갑고 오만한 태도였다. 하지만 스즈키는 그 냉정하고 오만한 태도를 하루이틀 보는 게 아니라 능청스럽게 그 차가운 사람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굿 이브닝."

스즈키가 살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도 없이 잔을 비웠다. 그리고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없이 테이블 위에서 은은한 불빛을 발하고 있는 오일램프를 살짝 들어올렸다. 가슴을 끈적하게 흔들고 있지만 느끼하지 않은 재즈음악과 램프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기름 냄새까지 완벽하게 클래식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오일램프까지. 모든 것이 매니아들의 가슴을 뒤흔드는 콘셉트였지만, 스즈키는 살짝 들린 램프에서 흔들리는 불빛이나 귓가를 부드럽게 감싸며 흐르는 느낌 좋은 재즈보다 무심하게 램프를 들어올리는 커다란 손과 긴 손가락, 그리고 그 손의 주인에게 더 홀려 있는 상태라 흔들리는 불빛 너머로 맞은편 남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가 바로 소리없이 테이블로 다가온 웨이터에게 빈 잔을 들어보이자 웨이터는 잔을 받아들며 고개를 작게 숙였다. 남자만 바라보고 있던 스즈키는 웨이터가 떠나기 전 급하게 주문을 넣었다.

"같은 걸로 한잔 부탁합니다."

웨이터는 이번에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위스키 온더락을 두 잔 가지고 왔다. 스즈키는 잔을 들어 향을 맡고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버번?"
"뭔지도 모르면서 왜 따라시켜."

이 남자는 바에 올 때마다 다른 술을 시켰다. 어떤 때는 스카치로 어떨 때는 버번으로, 블렌디드로 시킬 때도 있고 온더락으로 마실 때도, 스트레이트로 마실 때도 있고, 하이볼로 마실 때도 있었다. 스즈키는 버번을 그다지 즐기지 않지만 남자의 말대로 무작정 따라시킨 스즈키의 잘못이니 군말없이 한 모금 마셨다. 역시 버번은 취향이 아니야. 남자는 모든 게 그날그날 다 달랐다. 담배도 매번 다른 걸 피우고 술도 매번 다른 걸 시키고, 바도 매번 다른 곳을 찾았다. 오늘도 스즈키는 세 번째 들른 바에서 남자를 찾아냈다. 남자는 앉아 있는 위치도 제멋대로라서 입구 바로 옆에 앉을 때도 카운터석에 앉을 때도 구석자리에 앉을 때도 있고. 그나마 이 도시 내에 남자의 취향에 맞는 어둡고 조용한 위스키 전문 바가 많지 않아서 다행이지. 남자의 취향이 맥주였다면 밤새 남자가 있는 바를 찾아다니느라 시간을 다 쓰고 아침을 맞이하게 될지도 몰랐다. 바의 공통점은 정말로 실내가 어둡고 조용하다는 것뿐이어서 오늘처럼 어두컴컴한 레토르풍 바일 때도 있지만 차갑고 세련된 느낌의 금속 가구나 장식들이 가득한 바일 때도 있었다. 평범하게 그냥 어둡고 조용할 뿐 촌스러운 바일 때도 물론 있고. 

아무튼 스즈키는 언제나 남자와 있는 공간에 있으면 본능적으로 남자를 알아챌 수 있으니 남자가 있는 바만 찾으면 남자의 자리를 찾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위스키를 두 잔 비웠다. 스즈키는 버번이 정말 취향이 아니었지만 고집스럽게 남자를 따라서 두 잔을 비웠다. 

"저녁은?"
"생각없어."
"난 먹어야겠는데."
"먹든가. 난 딴 놈 찾을 테니까."
"성질부리지 말고. 같이 먹어 줘요. 나 오늘 저녁 못 먹어서 진짜 배고파."

남자는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겼지만 더 이상 반박은 하지 않았다. 헬폭스의 잠입 지령을 마치자마자 튀어 나왔지만 이미 새벽 2시가 가까워지는 시간이라 저녁을 못 먹어서 배고프다는 말이 먹힌 모양이지. 남자는 아무말없이 팁을 더한 금액을 꺼내 계산대 위에 꽂아 주었다. 스즈키 몫은 내지 않았다. 남자는 위험수당까지 더해서 스즈키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버니까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 줄 정도의 정이 없어서겠지. 스즈키도 제 술값과 팁을 계산대 위에 꽂아두고 일어섰다. 스즈키가 남자를 데리고 간 곳은 남자의 취향을 고려해서 역시 어둑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이었다. 저녁부터 아침까지만 영업하는 이 레스토랑은 아는 사람만 다니는 통에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스즈키는 남자를 구석 테이블로 이끌었다. 남자는 정말 생각이 없었는지 샐러드만 달랑 하나 시켰다. 스즈키는 수프와 샐러드, 커피와 디저트가 포함된 스테이크 세트를 시키며 남자 몫의 수프와 커피, 디저트도 주문했다. 샐러드도 기본 샐러드 말고 연어 샐러드로 바꿔 버리고. 남자는 다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별 말은 없었다. 디저트로 나온 치즈케이크를 먹을 때도 아무 말이 없었다. 아무런 표정도.





나중에 네가 우리 팀이 되면 우리 여우 점수 딸 수 있는 방법 하나 알려줄까?
뭔데요?
순하고 귀여운 녀석인데 가끔 심통 부릴 때는 있거든. 그럴 때 진짜 예쁘게 웃게 할 수 있는 비법이 하나 있지.
뭔데요? 뜸들이지 말고 말해 줘요.


폭스를 그렇게 예뻐했던 폭스의 팀 팀장은 스즈키를 만나서 팀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며 그런 너스레를 떨었었다. 당시 팀장이 조금씩 정보를 알려준 다른 팀원들도 흥미로웠지만, 팀장이 이 녀석이 우리 여우라며 보여준 사진이 너무 귀엽고 예뻤기 때문인지 유난히 폭스에게 관심이 갔었다. 팀장이 네가 우리 팀에 들어오면 우리 막내여우가 형님여우가 될 거라고. 막내라고 내내 귀여움만 받던 녀석이라 형 노릇 잘할지 모르겠다고 점수 딸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하면서 했던 말. 

치즈케이크 안겨주면 진짜 예쁘게 웃는 거 볼 수 있어. 너무 귀엽지. 심통부리고 있을 때도 치즈케이크만 꺼내놓으면 샐샐 웃으면서 다가오거든.

당시 팀장이 스즈키에게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었다. 팀장에게 스즈키는 아픈 손가락이었고 자랑스러운 꼬맹이였다. 그에게는 폭스만큼 스즈키도 소중한 녀석이었기 때문에 거짓말을 했을 리 없는데, 지금 이 남자는 스즈키가 만날 때마다 치즈케이크를 먹이고 있어도 늘 무표정한 얼굴로 깨작거렸다. 

이제는 입맛 같은 것도 다 잃어 버린 것처럼.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깔끔한 무인호텔로 향했다. 

남자와의 밤은 언제나 그렇듯 건조했지만 그래서 더 뜨거웠고 질척했다. 남자와 스즈키는 서로에게 이름이나 나이를 알려준 적도 없었고 연락처도 공유하지 않았다. 몇 년 전 스즈키가 바에서 남자를 처음 마주쳤던 날 오늘처럼 같이 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는데 거절당했었다. 그때 충동적으로 그럼 호텔이나 같이 가자고 했는데 이 남자가 덥썩 그 제안을 받아들인 이후로 벌써 몇 년이나 함께 호텔을 드나들었지만, 남자는 스즈키의 이름이나 연락처를 물어본 적도 없고 스즈키가 물어봤을 때 대답해 준 적도 없었다. 남자의 연락처를 안다면 스즈키가 바를 하나하나 뒤져가며 남자를 찾을 일도 없겠지. 남자는 매번 술이나 바, 담배, 식사메뉴, 호텔도 바꿔 선택하는 기행을 보이며 스즈키에게 남자의 취향 하나조차 알려주지 않으려 했다. 그만큼 건조하고 그만큼 삭막한 관계. 그야말로 몸을 섞는 행위일 뿐인데. 

스즈키의 입술을 마구 물어뜯고 스즈키의 다리와 허리에는 푸른 멍을, 등에는 붉은 손톱자국을 줄줄이 남겨놓는 남자는 사납고 살벌했다. 스즈키를 조금도 봐 주지 않는 그 거친 몸짓은 악랄하게 느껴질 정도로 짜릿했는데 동시에 어이없을 정도로 애틋하기도 했다.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물은 적이 없고 알려준 적도 없기 때문에 로맨틱하게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이 밤에 방 안은 서로의 거친 숨소리와 신음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거칠고 사나웠던 시간이 지난 후, 남자는 여전히 스즈키의 것을 몸 안에 품은 채로 스즈키의 가슴 위로 툭 쓰러졌다. 오늘은 남자가 스즈키를 올라타고 있었기 때문에 등 대신 긁힌 가슴팍이 온통 따끔거렸다. 남자는 스즈키의 목과 어깨를 온통 씹어놓고 가슴과 배에는 온통 손톱자국과 멍자국을 진하게 남겨 두었다. 남길 거라면 멍이나 손톱자국 대신 이름과 연락처나 남겨주지. 하지만 남자의 목과 어깨에도 스즈키의 잇자국이 잔뜩 남아 있고 남자가 스즈키를 올라타고 흔들리는 동안 스즈키가 꽉 움켜쥐고 있던 남자의 허벅지와 엉덩이에도 스즈키의 손자국이 진한 멍으로 남았으니 불만은 없었다. 아니, 그 푸르고 검은 멍들이 남자가 며칠은 스즈키를 완전히 잊지 못하고 떠올리게 해 줄 테니 만족스러울 정도였다. 스즈키가 제 몸 위로 엎어져 있는 남자의 땀에 젖은 짧은 머리카락과 단단하고 날씬한 등을 만지작거리고 있자 그 말랑말랑하고 포근한 감각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남자가 비척대며 일어나 침대를 내려갔다. 남자는 물론 스즈키가 함께 있는 객실에서 느긋하게 목욕 같은 걸 할 타입은 아니라서 물만 끼얹고 나오기 때문에 곧바로 욕실에서 다시 나왔다. 그리고 젖은 머리카락을 탈탈 털며 나온 후에는 바로 옷을 주워입었다. 

"오늘 그쪽을 찾느라고 바를 몇 군데 돌았는지 압니까?"
"안 찾으면 되잖아."
"누가 당신을 주워갈 줄 알고?"
"내가 누구랑 뒹굴든 그쪽이 무슨 상관인데?"
"전화번호, 알려줘요."
"그런 거 안 묻기로 하지 않았나?"

심드렁하게 묻는 것 같지만 목소리에서 경계심이 진하게 느껴졌다. 

"이름까지 알려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전화번호만 알려줘요. 그럼 버번만 주구장창 시켜도 뭐라하지 않을 테니까."
"내가 뭘 마시든."

남자는 시큰둥하게 대답 아닌 대답을 하며 일어섰다. 그리고 1년 365일 상중인 것처럼 늘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검은 옷으로만 감싸고 있는 남자는 발걸음을 옮기기 전에 스즈키를 돌아봤다. 

"간다."

시종일관 못됐게 굴면서도 함께 밤을 보내고 난 뒤에는 착실하게 인사는 안 빼먹고 꼬박꼬박 간다고 고하고 가는 게 이 와중에도 귀여웠다.

귀여워서 좋냐? 좋아? 스즈키 노부유키 진짜 미친놈.





남자가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간 뒤, 스즈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호텔의 복도에는 발소리를 흡수하기 위해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고 방의 방음도 잘 되는 터라 남자가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스즈키가 대충 가운을 걸치고 창가에서 내려다보자 잠시 후에 호텔 정문을 빠져나가 큰길가로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한 번 뒤돌아보지도 않는 남자의 매정한 뒷모습이 멀어져가는 걸 지켜보던 스즈키는 작게 속삭였다. 

"생일 축하해요, 마치다 케이타."

애초에 스즈키의 목소리가 들릴 거리도 아니었지만. 

헬폭스는 변조되지 않은 '볼크'의 목소리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기에. 오늘 몇 시간이나 스즈키와 함께 있었으면서도 오늘 잠입 작전에서 자신에게 지령을 내렸던 볼크가 눈앞에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헬폭스, 남자, 마치다 케이타는 끝까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요원놉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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