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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28 15:51
나는 며칠 전 부모님이 차사고로 돌아가셔서 급하게 대학을 졸업하고 미네소타 주로 돌아왔다. 부모님의 유일한 재산인 집을 처분하기도 좀 그래서, 그냥 부모님 집에 내가 살기로 했다. 시내가 근처에 있다보니 마을이 꽤 커서 여기서 일자리를 찾아보는 것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옛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이삿짐도 옮기고, 몇 시간 동안이나 옛이야기를 하느라 해 질 녘이 되는 줄도 몰랐다.

남은 이삿짐을 풀고 일어난 차, 창밖 우편함에 뭔가 꽂혀있는 게 보였다. 난 의아함을 느끼며 밖으로 나가 그것을 빼냈다. 집 안으로 들어와 그것을 펼쳐보니 익숙하면서도 누구였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 필체가 휘갈겨져 있었다. 오늘 집들이에 온 친구 중 하나의 것인 듯했다.



[먼저, 네 부모님 일은 유감이라는 말 전할게. 그리고 본론부터 말하자면, 당장 도망가. 네가 부모님의 교육열에 못이겨 삼촌이 있는 뉴욕으로 전학가게 된 13살 이후로 여긴 예전같지 않아졌어. 넌 믿지 못하겠지만, 어쩌면 이런 편지를 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 커다란 마을에는 인간이 아닌 것들이 섞여있어. 정말이야. 왜 우리 짠돌이 주에서 이주 지원을 그렇게 빵빵하게 해주는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아? 그만큼 사람이 많이 사라지니까 그런 거야.

편지 찢고나서 내일 후회하지 말고 지금 다 읽어. 다 읽고 외우면, 그때 찢어서 불로 태워버리든가 씹어 먹든가 알아서 하고. 하지만 누가 볼 수 있도록 펼쳐놓지만 마. 놈들은 글을 읽을 수 있어. 설령 어린애들 장난이라 생각된다면, 좋아, 장난에 속아주는 셈 치고 한번만 읽어봐. 어차피 적어도 오늘 오후 늦어도 내일이면 이게 다 진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테니까.

내가 인간이 아닌 놈들이 섞여있다고 했잖아. 인간과 인간이 아닌 놈들을 구분하는 건 꽤 쉬워. 그놈들은 빨간색이나 보라색 장신구를 달고 있는데, 보통은 뱃지, 패치, 귀걸이, 목걸이, 반지, 팔찌, 벨트 등의 모양새를 띄고 있거든. 그러니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몸에 보라색이나 빨간색의 무언가가 없는지 유심히 확인해봐. 그놈들이 나타난 후로 진짜 사람들은 빨간색이나 보라색 장신구는 절대 안 써.

아래로는 생각나는대로 자세한 주의사항을 적어줄게.





1.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보면 분명 아까 봤던 얼굴의 남자를 여러 번 보게 되는 경우가 있을 거야. 심장께에 '기만 Decepticon'이라고 적힌 보라색 마크 달린 파일럿 가죽잠바 입은 남자 말야. 그런데 그 남자들, 절대 동일인물 아냐. 형제같은 것도 아니고. 당연히 군인은 더더욱 아니지. 아니, 군인은 맞는데 우리가 아는 군인은 아닌 것 같더라. 아무튼 그 남자들은 무작위로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무작위로 아무한테나 말을 걸고 다니거든? 질문은 별 거 아니니 적당히 무난한 대답을 해주면 긴가민가한 기색을 보이면서 그냥 갈 거야. 나이가 어떻게 되냐, 이름이 뭐냐, 키가 몇이냐 같은 질문. 종종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기도 하는데, 그때는 아무말도 안 하고 쳐다보면 그냥 가더라. 얼굴 구분을 못하는 건지 이미 질문해놓고 또 붙잡는 경우가 하루에 몇 번씩이고 있으니 아까 대답했다고 화를 내거나 하는 행동은 하지 마라. 아까 말했다고 하면 놀라면서 놔준다.


1-2. 보통 그 남자들은 혼자 다녀. 그런데 간혹 셋이서 다니는 남자들도 볼 수 있을 거야. 우리는 그 삼인조를 '트라인'이라고 부르고 있어. 우리가 이름을 붙인 건 아니고, 자기들끼리 트라인이라고 중얼거리는 걸 들었다. 아무튼, 트라인이 보이면 웬만해선 질문받기 전에 자리를 피하는 게 좋아. 트라인은 질문을 할 때 상대를 삼각으로 에워싸고 대답이 다 끝날 때까지 보내주지 않거든. 질문도 특히나 까다로워. 다른 놈들이 기본적인 신상만 알아낸다면, 트라인은 너의 더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에 대한 대답을 듣고자 할 거야. 그나마 다행인 건 트라인은 못 알아듣는 말은 하지 않는다는 거지. 그만큼 진짜 인간처럼 말한다고. 그러니까 최대한 사실대로 대답하고, 정 찝찝해서 안되겠다 싶으면 앞뒤가 들어맞는 거짓말을 해. 트라인한테 거짓말을 들켜서 좋을 거 하나 없더라. 맞다, 트라인은 아까 대답했다는 꼼수 안 통하니까 조심하고.


1-3. 한 명이든, 트라인이든 종종 네 대답 듣다가 널 끌고 가려고 할 수도 있다? 그럴 땐 종교있는 척 해. 엄청 독실한 신자처럼 행동하면 얘 아니라고 중얼거리면서 돌아간다. 특히 노란색이 제일 질색팔색해. 그게 안 통하면 갓길에 세워진 차들 쪽으로 뛰어가라. 보통은 기겁하면서 가까이 못 오더라. 불타는 무늬 있는 트럭이 효과 제일 좋아.


2. 동네 도서관에 있는 공용컴퓨터는 쓰지 마. 그놈들 중 몇몇은 도서관에 상주하면서 도서관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어. 특히 컴퓨터존으로 가는 사람들을. 이유는 모르겠지만 컴퓨터를 능숙하게 쓰는 모습을 들키면 어느순간에 소리소문없이 사라질 거야. 컴퓨터가 아니라 책이 목적이라도 그냥 도서관은 가지마라. 사서는 진작에 사라졌고 지금은 그놈들 중 하나가 사서로 취임했어. 난 그래서 책 사서 본다.


3. 새로 이사왔으니 며칠 동안은 행동거지를 조심해. 경찰도 이미 그놈들 중 하나니까. 아마 그 며칠 동안 빨간 뱃지를 단 경찰 하나가 네가 마을을 돌아다니는 동안 알게 모르게 따라다닐 거야. 뭔가 해를 끼친다거나 하는 건 아니니 걱정은 말고. 네가 수상한 짓만 안 한다면 경찰은 정말 따라다니기만 할 거니까. 그게 많이 거슬려서 못 참겠다 싶으면 도넛 한 박스 사서 경찰한테 뇌물로 찔러줘. 그러면 적어도 안 보이게 따라다닌다.


4. 웬 커다란 독수리 두 마리나 표범만한 고양이가 네 주위를 어슬렁거린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거야. 그거 착각 아니니까 탁 트인 곳으로 가지마라. 길 가다가 보라색 조끼 입은 외눈 남자 발견하면 뭐든 이유 붙여서 반려동물 좀 데려가라고 해. 그 남자가 논리적이라고 대답하면 30분 내외로 해결된다. 비논리적이라고 하면 하루종일 그 짐승들이 너 따라다니니까 걍 집 안에 박혀있어라.


5. 보라색 조끼 입은 덩치 큰 남자는 네가 마을 어딜 가나 있을 거야. 시선주지마. 눈 마주칠수록 더 가까워진다. 어차피 경찰이랑 행동패턴은 비슷하니까 없다고 생각하면서 다녀라.


6. 어디서 노랫소리 들려도 따라부르지마. 그거 덫이야. 그냥 혼자 흥얼거리는 것도 마찬가지고. 뭐든간에 노래 부르는 순간 근처에 있는 그놈들이 전부 널 쳐다볼 거야. 수가 적으면 뛰어서 따돌리는 것도 되긴 하는데 옛날부터 유독 느렸던 너한텐 무리겠지. 그러니까 초장부터 조심해.


7. 병원에 가야 할 일이 생긴다면 가급적 도시로 가. 이 마을 병원엔 의사가 총 둘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놈들이다. 하나는 보라색 귀걸이에 반지 끼고 있고 다른 하나는 빨간색 패치를 가운에 달고 있어. 만약 너무 아파서 도시병원까지 못 갈 정도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빨간색 패치를 단 의사한테 진료받아. 비록 널 자세히 해부하고 싶다는 말을 할 테지만 한번 거절하면 두번은 안 묻는다. 반면 보라색 장신구 단 의사는 네 병세를 부풀려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할 거야. 힘이 얼마나 센지 싫다고 하면 끌고 가려고 하니까 조심하고. 그 수술 받은 사람들은 다시 병원 밖으로는 못 나왔다.


8. 가끔 그놈들이 길바닥에서 사지가 비틀린 채로 꿈틀거리는 경우가 있어. 다친 것도, 어디 아픈 것도 아니야. 가만 두면 몇 분 뒤에 "어, 조작이 이게 아닌데."라며 멀쩡하게 두 다리로 벌떡 일어나 걸어다닌다. 하지만 명심해. 네가 그 모습을 봤다는 것을 들켜선 안돼. 소리내지 말고 천천히 도망가. 난 창문 너머로 놈들이 '목격자'를 없애는 걸 봤어.


9. 보코 아저씨네 철물점 기억해? 거기 이제 주인이 바껴서 그놈들 아지트 됐어. 표면상 주인은 웬 중년남자 둘이고, 각각 빨간색 목걸이랑 보라색 반지 끼고 있다. 보니까 빨간색 목걸이 한 쪽이 트럭 주인이더라. 요점은, 철물점 근처에 그놈들 많으니까 길 돌아서 다니라는 거야.


10. 낮에 상점가에서 설문지 들고 다니는 고딩들 봤지? 웬 빨간 목걸이 한 노란 후드랑 빨간 후드 말이야. 학교 과제라고 어쩌고 해도 바쁘다고 거절해라. 스티로폼 판에 스티커 하나 붙여주지마. 강요는 안 하니까 몇 번 거절하면 시무룩해하긴 해도 따라오진 않을 거야. 애초에 문항 하나하나 전부 수상한 것들뿐이라 대답해주고 싶은 생각도 안 들걸. 내가 파리의 재채기 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 내가 초속 몇 키로로 달리는지 어떻게 알아?


11. 잘 보면 길가나 담벼락에 웬 빨간 붐박스가 덩그러니 놓여있을 수도 있다. 건들지 말고 걍 무시해. 세 달 전에 옆동네에서 건너온 불량청소년들이 그 붐박스를 걷어찼다가 실종됐단 것만 말해둘게. 옆에 있는 카세트를 넣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그것도 별로 추천하진 않는다. 카세트 재생되는 순간 그 일대 주변에 있는 놈들 전부 너한테 간다.


11-2. 가끔 저 붐박스 만큼 빨간머리에 하얀 헤어밴드 한 남자가 돌아다니는데 그 남자가 주는 이름적힌 카세트 받지마. 집에 카세트 플레이어 없다고 해라. 마릴다 기억하지? 걔가 반년 전에 그 카세트 받아서 집에 들고 갔는데 그날부터 밤마다 집 안에서 어린애들이 뛰어다닌다고 히스테리 부리고 하루종일 노래만 부르다가 어느날 사라졌어.


12. 붐박스랑 더불어서 길가에 세워진 차들도 건들지마라. 아마 딱 보자마자 비싸겠구나, 아니면 무슨 차가 색깔이 저래? 싶은 것들이 좀 있을 거거든? 그놈들 차야. 종종 차문이 열려있고 그 주인으로 보이는 놈이 문 근처에서 서성이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절대로 열린 문이랑 차주인 사이로 지나가지마. 우리 초등학생 때 쌤들이 조심하라던 납치수법 있잖아. 그거랑 똑같아. 밀쳐져서 차에 완전히 들어가게 되는 순간 문 닫힌다.


13. 아무도 없던 곳에서 사람이 나타나도 놀라지 마. 제일 현실성없는 말이지만 파란 단발머리 남자가 종종 허공에서 나타나는데, 네가 놀라서 비명 지르거나 화내면 엄청 미안해하면서 며칠 뒤에 선물 가져온단 말야. 근데 그 커다란 바구니에 담긴 푸른 반고체 큐브 받고 하루 이상 제정신 유지한 놈이 없다. 그 사람들 모두 이젠 미네소타 주에선 안 쓰는 옛날 구급차에 실려가서 안 돌아왔어.


14. 웬 어린아이들이 너한테 달려들 때도 있을 거야. 잘 보면 옷에 보라색 뱃지 하나씩 붙어있다. 대게 2명에서 최대 6명인데, 널 보고 캐리어니, 엄마니, 혹은 보스라고 부르며 어디론가 데려가려고 할 거야.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네가 이미 기혼이고 자식이 있다고 설명해. 특히 '자식'이 있다는 걸 강조해야 해. 근데 그 자식이 걔네가 아니라는 걸 확실히 해야 된다. 그래야 그 애들이 찾는 게 네가 아니라면서 가거든. 그때 근처에 빨간 마크 장신구 단 사람 있으면 얘네 좀 떼어내달라고, 자긴 이미 가정이 있다고 소리 질러라. 그러면 그쪽에서 엄청 미안해하면서 애들 데려간다. 난 저번에 트라인한테 데려가달라고 했다가 무시당했다.


15.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 썬팅 찐하게 된 포르쉐가 마을 빙빙 도는데 포르쉐 운전하는 놈이 완전 미친놈이거든? 아무리 사람이 아니라 해도 운전할 때 선글라스 쓰는 건 좀 아니지. 경찰이랑 한패라서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신고도 안되더라. 무튼 운 나쁘면 지나다가다 걸려서 그 남자 한탄하는 거 들어줘야 할 수도 있어. 사고로 죽은 애인을 찾으려고 애들이랑 동료들 데리고 여기까지 왔다느니, 근데 여기 있는 게 분명한데 몇 사이클을 찾아다녀도 보이질 않는다느니 뭐니 하는데 잘 들어보면 완전 정신나간 소리에 불과해. 전에 애인이 어떻게 생겼냐고 물었는데 대답을 못하더라. 얘기 끝나면 혹시 자기 애인 찾는 거 도와줄 수 있냐고 물을 텐데 아무 이유 붙여서 절대 안된다고 해. 한번 거절하고 나면 그 다음엔 한탄 들어줘서 고마우니 집까지 태워주겠다고 할 거야. 당연히 그것도 거절해야 하고. 아무리 다리가 아파도 그 남자 자켓 팔 부분에 빨간 패치 달려있다는 걸 기억해. 가위바위보도 삼세판이라는 말 기억하냐? 저 남자가 진짜 약은 게, 차에 태워준다는 걸로 두번이나 함정을 치고도 또 한번 더 친다는 거야. 너 뒤도는 순간 사운더스라면서 이상한 단어로 널 부르는데, 그때 돌아보거나 대답하면 무력으로 차에 태운다. 그 이후에 어떻게 되는진 알겠지.


16. 밤에는 커튼치고 자. 밤에 일어나게 돼도 창 밖은 보지말고.밖에 있는 그거 보름달 아니야. 보름달이 1년 내내 뜰 리가 없잖아. 모른 척 하면 금방 사라진다.


17. 그놈들 얘기 인터넷에 올리지마. 통화로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도 말고. 제품판매원이란 사람들이 네 집에 방문해서는 마구잡이로 문 열고 침입할 거야. 문 안 열리면 창문이나 굴뚝도 문처럼 쓰더라. 패트릭 부인이 그렇게 가셨다.


18. 마지막으로, 절대로 음악 좋아한다고 말하지마. 저 미친 놈들이 무슨 목적인진 모르겠지만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저 질문에 긍정한 모든 사람들을 데려갔어. 다른 걸로 잡혀간 사람들 중에선 종종 돌아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노래나 음악 관련해서는 한 명도 안 돌아왔어.

그러니까 조심해.]




나는 마지막 문장까지 모두 읽은 뒤 편지를 내려놓았다.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음악을 좋아하고, 사운더스라는 단어에 반응하고, 컴퓨터에 능숙한 사람은 잡혀간다니. 오싹하잖아.

그런데, 이런 건 더 빨리 전해줬어야지.

이미 편지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오기 전 선글라스를 쓴 이웃남자에게 음악을 좋아한다는 대답을 한 뒤였다.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해서 대학교에서도 성악을 전공했고, 이런저런 악기도 연주할 줄 안다고. 날 사운더스라고 부르길래 어릴 때 별명이었다고 웃어줬는데. 그리고 지금은 취미로 프로그래밍을 배우다가 정보보안기사 자격증을 취득하려고 공부중이라는 것까지 전부 말했다.

식은땀이 비오듯 흐른다. 그때 덜컹, 하고 창가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겨우 고개를 돌리자 창문에 모르는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게 보인다. 그들이 무언가 말하고 있다.

데리러 왔어. 돌아가자, 고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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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나폴리탄 괴담같은 거 보고 싶다
트포 재즈사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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