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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28 03:57



스즈키 노부유키가 지령실로 들어가자 수많은 모니터를 앞에 두고 서 있던 요원 하나가 뻣뻣한 자세로 경례를 올렸다. 이 요원이 스즈키보다 직위가 낮긴 하지만 이렇게 뻣뻣하게 굳어서 대할 정도로 차이가 크지는 않다. 요원들간의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한 조직이기 때문에 서로의 직위가 중요하지도 않은 데다 스즈키가 딱히 권위적인 상사도 아니었고. 그런데도 요원이 식은땀을 흘리며 이렇게 뻣뻣하게 굳어 있는 건 이 요원이 어마어마한 실수를 해서 스즈키가 불려왔기 때문이었다. 스즈키는 고개만 까딱하고 모니터들 앞에 앉아 있는 이를 바라봤다. 스즈키의 직속상사인 지령팀의 팀장이었다. 앉아 있던 상사는 뒷목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들고 있던 서류철을 건넸다. 

"30분 후에 돌입이다. 헬폭스는 이미 옥상에 잠입해 있다."

지령팀장은 스즈키가 속한 팀의 팀장으로, 스즈키가 대면한 적도 없는 회사 대표와 입사한 이후 한두 번 본 게 고작일 정도로 얼굴 볼 일이 없는 높은 직위의 상사들과 달리 스즈키가 그나마 자주 얼굴을 보는 직속 상사. 그러니 잘 보여야 할 인물인데, 스즈키는 제대로 대답도 하지 않고 서류철을 열었다. 

잠입장소: xxxxxx
잠입시간: 20xx07040000
잠입내용: xxxxxx 전산실 잠입 및 [폭풍의 사막] 관련 자료 획득
콜사인: 헬폭스

특이사항: 콜사인을 반드시 풀네임으로 부를 것. 

모니터 앞에서 진땀을 흘리고 있는 저 애송이 요원이 잘린 이유가 그거라고 들었다. 헬폭스를 폭스라고 불렀기 때문이라고. 콜사인이 수시로 바뀌는 게 이 바닥인데 '헬' 하나 떼는 게 뭐 그리 큰일일까 싶지만 저 잠입요원은 5년 전부터 단 한 번도 콜사인을 바꾼 적이 없고, 헬폭스 대신 폭스라고만 부르면 거의 발작을 한다. 

스즈키가 여전히 대답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서류철을 건네 준 상사가 한 마디 덧붙였다. 

"임무 종료시에 절대로 무사히 끝내서 다행이라거나 생환을 축하한다든가 그따위 말은 하지 마."

아닌가. 이쪽으로의 실수였나. 설마 저 헬폭스한테 문제없이 작전을 끝내고 무사귀환하시길 바란다고 했다가 잘리게 된 건가. 아니지. 이제야 잠입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이라고 하니 먼저 들어왔던 지령 요원이 어지간히 쓸데없는 말이 많은 수다쟁이가 아니라면 이쪽은 아니겠지만. 스즈키는 5년 전까지 폭스였던 저 요원이 왜 5년 전부터 헬폭스가 됐는지 알고 있었다. 팀의 귀염둥이 막내였던 여우가 왜 지옥에서 돌아온 여우가 됐는지. 물론 헬폭스의 신원과 헬폭스가 폭스이던 시절 속해 있던 팀에 관한 정보, 그 팀이 마지막으로 맡았던 사건에 관한 정보는 모두 극비 중의 극비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역시 새파란 신참으로 보이는 저 애송이는 과거 일을 몰라서 아무 생각없이 '폭스'라고 부른 걸까. 지금은 저 헬폭스가 가장 발작하게 만드는 단어가 '폭스'라는 걸 모르고.

스즈키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모니터 앞에 앉자 상사는 이제 실업자가 된 애송이 요원을 데리고 지령실을 나갔고, 스즈키는 마이크를 켜기 전에 마이크에 장착된 음성변조 장치를 먼저 켰다. 

"헬폭스."

마이크를 켜고 음성변조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한 뒤 헬폭스를 중얼거려 본 스즈키는 완전히 기계 변조된 목소리가 나오는 걸 확인한 뒤에야 안심하고 통신을 연결했다. 작전 시작 10분 전이었다. 

"헬폭스. 지령실 볼크입니다."
[예스, 볼크.]
"진입 10분 전입니다. 준비 완료됐습니까."
[예스, 볼크.]

옥상의 거대한 물탱크 옆 카메라 사각지대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헬폭스가 손목을 들어 시계처럼 손목에 감겨 있던 미니카메라를 들어 스즈키에게 얼굴을 보여줬다. 그래봐야 날카로운 선을 지닌 얼굴은 살기가 번들거리는 눈만 빼고 전부 복면으로 가려져 있지만. 

"대기하십시오, 헬폭스."
[예스, 볼크.]

10분간 건물 보안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xxxxxx CCTV에 접속한 스즈키는 정시에 다시 입을 열었다. 

"정문에 드론 도착합니다. 30초."
[예스, 볼크.]

도시 야경 촬영 전문 x튜버로 위장하고 있는 요원이 두 달 전부터 x튜브 계정을 만들고 도시 내의 야경 이곳저곳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 요원이 오늘 밤 실수인 척 xxxxxx 건물 정문에 충돌하기로 돼 있었다. 곧 드론이 날아와 정문에 충돌하고 경비들이 뛰어나오는 걸 모니터로 지켜보던 스즈키는 마이크를 켰다. 

"헬폭스, 지금 진입하세요."
[예스, 볼크.]

스즈키가 미리 옥상의 CCTV를 전부 블라인드 처리해 놨기 때문에 스즈키 앞에 뜬 CCTV 화면 상에서는 전부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옥상만 나오고 있었지만, 실시간 장면이 그대로 보여지는 또 다른 모니터 상에서는 검은색 잠입복을 입고 얼굴까지 검은 복면으로 완전히 가린 늘씬한 체형의 헬폭스가 몸을 숨기고 있던 옥상 물탱크 뒤에서 빠져나와서 문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능숙하게 CCTV들을 차례로 조작하던 스즈키는 이미 뚫어놨던 xxxxxx 보안 시스템을 조작해서 옥상 문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옥상 문 오픈. 10초 후 자동으로 다시 잠깁니다."
[통과.]

그리고 헬폭스가 비상계단을 통해서 12층 전산실로 다가가는 동안 스즈키는 옥상의 CCTV를 전부 원상태로 복구시켜놓고 헬폭스가 이동하는 경로의 CCTV 화면을 차례로 조작했다.

"전산실 통로 쪽. 현재 이동 속도에 맞춰서 차례로 블라인드됩니다. 3m 앞 카메라 블라인드."
[통과.]

그렇게 차례로 복도를 통과한 이후 CCTV를 원래대로 되돌린 스즈키는 헬폭스가 전산실 문 앞에 섰을 때에 맞춰서 전산실의 보안장치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보안장치 오픈 중, 대기하십시오. 14초."
[예스. 볼크.]
"오픈."

전산실을 열어주자 헬폭스는 소리없이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xxxxxx는 세계를 무대로 뛰는 용병회사 치고 건물 보안은 형편없는 수준이지만 전산실이 외부와 전혀 연결돼 있지 않아서 전산실 내의 컴퓨터들은 외부에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전산실의 야간근무 직원은 야식을 배달 주문했을 때 이미 스즈키가 일하는 조직에서 야식에 약을 타 놓은 상태라 헬폭스가 바로 옆까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코끼리도 재울 정도의 수면제 정도는 아니지만 주변에서 엄청나게 큰 소리를 내지 않는 한 깨지 않을 것이다. 헬폭스는 직원의 몸을 건드리지 않고 노련하게 관련 자료를 찾아서 USB에 옮겼다. 그리고 검색 기록과 다운로드 기록까지 완벽하게 삭제한 헬폭스는 조용히 입술을 열어 아주 작게 속삭였다.

[복사 완료.]
"문가로 가서 잠시 대기하십시오. 헬폭스."

잠들어 있긴 하지만 전산실의 직원이 안에 있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작고 더 낮아진 헬폭스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넘어와 귓가를 부드럽게 간질였다. 

[도착.]

전산실에 진입한 지 5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잠시 대기하십시오. 오픈까지 16초."

스즈키는 온통 검은색으로 감싸인 단단하고 날씬한 헬폭스를 모니터 너머로 흘긋 바라본 후 눈을 돌려서 다시 전산실 문의 보안장치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오픈."

문이 소리없이 열리자 슥 가볍고 조용히 전산실을 빠져나온 헬폭스가 미리 지정된 경로를 통해 비상구로 빠르게 달려가는 걸 보면서 스즈키는 계속 정보를 전달했다.

"312호까지 가십시오. CCTV 30초간 블라인드 유지."
[예스, 볼크.]

소리없이 달린 헬폭스가 312호 앞에 섰다. 

"... 312호 창문으로 뛰어내리십시오. 헬폭스. CCTV 블라인드 완료."

말하면서도 이게 무슨 미친 지령인가 싶지만 미리 계획된 부분이었다. 스즈키가 건물 외부를 비추는 CCTV를 조작하고 화면을 보자 헬폭스는 아무런 대답없이 스즈키가 열어놓은 312호로 들어가더니 창문을 조금 열고 늘씬하고 가느다란 몸을 밖으로 뺀 뒤 창문까지 다시 닫아놓고 바로 몸을 날렸다. 물론 아래에서는 철수 보조 요원들이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헬폭스는 트럭 짐칸에 크게 펼쳐진 푹신하고 두꺼운 천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헬폭스를 태운 트럭은 건물의 정면을 통과하지 않도록 뒷길로 재빨리 빠져나갔다. 스즈키는 건물 내외부의 CCTV가 전부 원상복구됐는지 확인하고 CCTV를 조작했던 흔적을 없앤 뒤 드론을 움직였던 요원에게 연결했다. 

"드론 철수하십시오."

이 용병회사의 경비들과 실랑이를 하고 있던 드론 담당 요원이 스무스하게 실랑이를 마치고 정말로 그냥 야경 영상밖에 없는 카메라의 메모리까지 통째로 경비들에게 인심좋게 넘겨주자, 경비들은 드론 요원을 거칠게 밀치며 내쫓긴 했지만 더 붙잡고 있지는 않았다. 드론 요원이 자리를 뜨는 것까지 확인하고 10분 뒤, 트럭 짐칸에 몸을 낮춘 채 숨죽이고 엎드려 있던 헬폭스가 승합차로 갈아타서 현장팀 상사에게 '폭풍의 사막' 자료가 들어가 있는 USB를 건넸다. 

"미션 클리어, 헬폭스, 수고하셨습니다."
[미션 클리어. 수고하셨습니다. 볼크.]

헬폭스의 잠입복 옷깃과 손목에 달려 있던 카메라가 차례로 꺼지고 마이크가 동시에 같이 꺼졌다. 스즈키도 마이크를 끄고 통신이 완전히 끊긴 걸 확인한 뒤 조금 전까지 헬폭스의 모습이 비치던 까만 모니터를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모니터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고 있지만, 위험천만한 작전을 혼자 수행하던 마른 인영과 살기 가득하던 눈빛이 계속 떠올랐다.

그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거라곤 지령실에서 헬폭스를 지켜보고 있는 볼크 하나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볼크가 지령실의, 지령실의 일원이기 때문에 볼크를 완전히 믿지는 못하면서. 그런데도 볼크의 지령에 따라 움직여야 했던. 

스즈키는 다시 한 번 길게 한숨을 내쉬고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잠시 후, 커다란 두 손에 파묻힌 입술 사이로 서글픈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생일 축하해요, 폭스."





5년 전, 폭스가 속해 있던 팀은 극비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팀이 복귀하기로 예정돼 있던 7월 4일, 돌아온 건 폭스 하나뿐이었다. 그 팀은 그때의 극비 작전에서 폭스를 제외하고 모두 사망했다. 팀의 막내로 팀원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폭스는 자신의 생일에 그를 사랑해 주던 사람들을 모두 잃고, 지옥에서 기어올라온 여우가 되었다. 





#요원놉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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