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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9 00:59
호색한이자 난봉꾼이었고, 또한 뛰어난 창술사였던 나에게 그러한 단어는 기생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마르텔의 피는 이어받았어도 이름은 받지 못한 애들이 너댓은 훌쩍 넘었고 이는 나에게 치욕이라기보다는 업적에 가까웠다. 허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나 내 딴에는 살아숨쉬는 본능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날짜를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느 날, 얼마 전 죽은 유모의 딸이 시녀로 들어왔다 들었다. 유모? 나에게 유모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었는데. 어쩌면 듣고 흘려버렸었을 수도 있고.
주변의 여자들이 치렁치렁한 머리를 장신구로 땋아올리는 것과 다르게 유모의 딸은 어깨까지만 닿이는 머리를 하고 시중을 들었다. 어깨에 닿여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꺾인 머리가 그녀의 목을 가렸다. 다른 이였더라면 쉽게 머릿결을 치워 버렸을지도 모르겠지만, 끝내 그 아이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ー머리는 왜 기르지 않지?
ー짧은 것이 더 관리하기 편해서요.
이 아이는 머리 길이만큼 말을 짧게 쳐내는 것이 버릇이었다. 말을 한 번 시작하면 온갖 미사여구를 떼었다 붙였다하며 장황하게 늘어트리는 나와 달리, 유모의 딸은 할 말이 있어도 꾹 눌러 참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능했다.
어느 것을 물어봐도 심드렁. 어떤 것을 시켜도 심드렁. 그 어떤 것에도 괘념치 않아하는 태도를 보며 화가 나기도, 괴롭혀 버릇을 고쳐주고 싶기도 했다. 가끔은 부럽기도 했다.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자신을 가리고 감추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으니까. 스스로를 증명해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제서야, 나는 나를 수식하던 그 모든 것이 허영임을 알았다.
도른 밖으로 나갔다 올 때면 성을 이어받지 못한 딸들의 선물을 하나둘 사오는 것이 일종의 법칙처럼 굳어져 있었다. 선물은 간단하지만 화려한 것으로. 예를 들면 목걸이나 거울. 휴대하며 이따금 누구에게라도 건네며 자랑할 수 있는 것들.
딸들의 취향을 곱씹으며 시장 바닥에서 선물을 고르던 중, 손끝 사이로 파란색 빛을 띄는 작은 머리핀이 스쳐지나갔다. 내 손은 다시 돌아와 머리핀을 쥐었다. 어떠한 장신구도 없이 귀 뒤로 앞머리를 넘긴 유모의 딸이 생각났다. 마치 그 아이가 앞에 서있기라도 한 것처럼 허공에다 대고 머리핀을 비춰본다. 퍽 어울리겠군. 나는 상자에 담아 포장한 다른 선물과는 달리 품 안에 그것을 찔러넣는다.
ー허니.
ー왜 그러세요?
ー가끔은 이런 것도 필요하지 않겠나 싶어서. 시녀 하나가 장신구를 한다고 해서 도른에서 널 패죽일 상전은 없으니까.
아이는 말을 하지 않지만 핀을 받아들고 쳐다보는 불이 불그스레하게 붉어졌다. 뚫릴 줄 몰랐던 경계선의 균열이었다. 경박하지 않은 손길이 핀을 잠시 쓰다듬다가 그것을 드레스 사이로 집어넣었다.
ー감사합니다.
ー할 말이 그것뿐이야? 뭐, 지금 해보겠다던가. 나를 생각해 선물을 사올 줄은 몰랐다던가 하는 그런 말.
ー..감사해요.
사실은 할 줄 아는 말이 그것밖에 없을지라도 좋았다. 기꺼워 어쩔줄을 모르며 내 품으로 달려드는 편보단,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몰라 맞잡은 손을 바르작거리는 편이 보기 더 좋았다.
바로 다음 날, 나는 그 아이의 왼쪽 앞머리에 가지런히 꽂힌 파란 핀을 보았다. 핀을 꽂고 있는 주인은 내 눈길이 부담스럽지도 않은듯 태평하게 시중을 들 뿐이었다. 마치 낯을 붉혔던 어제의 허니는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양.
ー생각하던 그대로군.
ー..네?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는 말간 얼굴로 나를 쳐다보자, 고갯짓으로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유모의 딸은 놀라 입을 약간 벌리더니, 제 손으로 핀을 어루어 만진다. 그러곤 살짝 웃는다. 그 순간 나는 테이블 밑에 가려진 옷자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누구에게나 곁을 주는 것은 가진 특기 중 하나라고 생각했으나, 이리도 손쉽게 애정을 줘버리고 마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본 바가 없었다.
ー..다행이에요. 주인에게 치른 값을 돌려 받으러 가지 않으셔도 되니까.
입꼬리를 계속 올린 채로 이제까지 한번도 보여주지 않은 말장난을 하는 것은 반칙이었다. 짧은머리의 젖형제는 도른의 어떤 여인보다 나를 앞질러 갔다. 아니, 내가 앞을 내줘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원해 그렇게 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가 든 그릇을 받아들다가 손가락이 맞닿았다. 침을 한 번 삼켰다.
이 땅 최고의 창술사답지 못하게 나는 몇날 며칠을 앓아 누웠다. 무슨 연유인지도 못하고 깊은 어둠 속에 빠져 들었다가 겨우 버텨 의식 안으로 기어들어왔다. 성치 않은 눈을 겨우 뜨며 손을 더듬자 따뜻한 손목이 손에 잡혔다.
내게 잡힌 손은 약간 놀래는 듯 뒤로 빠지다가 내가 다시 힘을 주어 손목을 부여잡자 가만히 있었다. 똑같은 체온의 손이 내 이마 위로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이름을 내뱉었다.
ー..허니?
ー여기 있어요. 대공. 안심하세요.
허둥대지 않는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나는 다른 쪽 손도 가져와 양손으로 그 아이의 손을 붙잡았다. 이리 별 것도 아닌 일로 손을 맞잡아보려 한 것은 아니었다. 쓰러진 나에게 있어서 이 아이의 손을 동앗줄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ー어째서 너가 내 곁에 있지? ..다른 이는 없고.
ー처음부터 제가 있던 것은 아니고..
ー...그러면?
ー대공께서, 절 찾으셨다 하셔서요. 다른 분들이 절 데려오라 하셔서..
나는 눈도 뜨지 못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손바닥 아래에 잡힌 그녀의 손을 펼쳐 깍지를 꼈다. 허니의 손은 내 움직임에 반항하지 않았으나, 내 손가락이 그녀의 손등에 닿이는 것과 달리 그녀는 쉬이 내 손등 위로 자리하지 않았다.
ー그럼 계속 여기 있을 테야?
ー..아마도요.
그녀의 손가락이 내 손등 위에 매우 조심히 내려앉은 것은 그날 오후가 다 되어서였다.
그녀를 처음 가진 것은 도른의 여름 무더위가 가시던 주말이었다. 곧 선선해지는 날씨를 앞둔 것이 무상하게, 아래에서 헐떡대던 숨결은 내 가슴팍을 간질였다.
처음 느껴보는 생경한 감각에 길을 잃고 헤메던 손가락이 내 팔뚝을 잡았을 때, 자그마한 소리를 내지르며 본능적으로 내 목을 끌어당겼을 때, 그 바람에 가슴과 가슴이 맞닿아 그 아이의 심장소리가 내 몸으로 흘러들어왔을 때...
나는 이리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 아이는 잡을 성 싶으면 도망갔다.
ー사랑해.
ー그 말만은 하지 마세요.
목에 입을 맞추고, 음식 시중을 들던 와중에 허리를 잡아당겨 품에 안아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으면서 사랑을 속삭이는 말을 듣는 것은 그리도 역겨워 했다. 정사를 나누던 와중에도 그 말을 꺼내려 들면 매정하게 품에서 떠나 옷을 갈아입고 몇 날을 마주해주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당황스러우면서도 왜인지는 그 아이에게 묻지 못했다. 울상이 되어버려 어느 것도 내켜하지 않는 표정을 보고싶진 않았던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다시 주워담지 못할 한마디로 나를 떠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뒤에서 껴안으면 가만히 안겨있는 그 아이의 작은 요동이 표현을 대신했다고 생각했다. 어떤 대화를 하지 않아도 본인이 몸을 돌려 내 등을 껴안아주는 것을 보며 이 여인도 나를 사랑한다 믿었다. 품은 따뜻했고, 손길은 부드러웠으니 그렇게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이 호선을 그리며 지긋이 감길 때는 내가 가진 어떤 귀중한 것이라도 그 발 앞에 갖다 바치고 싶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오베린 마르텔이 젖형제인 시녀에게 푹 빠져있다고.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었다. 허니 비의 시종이 오베린 마르텔이었다.
ー아무래도, 오베린 마르텔이 한 여자에게 정착했다는 이야기는 믿기 힘들지.
ー...
ー그것이 어느 역사에도 이름 하나 남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에는, 다들 더욱 동의하기 힘들..거야.
ー..더이상 말씀하시지 마세요. 아프시기만 할 거에요.
ー잘도 찔러놓고 그런, 말을 하는군.
그 아이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 같다. 점점 흐릿해지는 내 의식 때문인가 싶어, 손을 뻗어 상대의 얼굴을 만져본다. 얼굴을 쓰다듬자 따뜻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손등을 간지럽힌다. 눈동자를 가리던 물방울이 사라져 이내 나를 쳐다보는 눈동자가 고스란히 보인다. 허니의 눈이 심하게 깜빡거린다.
ー울지마. 왜 울지?
ー..대공.
ー바라는 대로 된 것 아니었나?
짧은 머리의 여인이 고개를 숙이자 머리카락이 함께 떨어져 얼굴을 가린다. 그 영악한 얼굴을 좀 더 보고 싶은 욕망에 손을 뻗지만 고통에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은 머리카락까지 채 닿지를 못하고 힘없이 떨궈진다.
ー...고개를, 들어.
ー그럴 수 없어요. 저는, 죄인이에요. 그럴 수..
ー명령이야. 들어.
그녀는 고개를 들지만 우는 얼굴을 손으로 가려버린다. 가린 손에 잔뜩 혈흔이 묻어있다. 내 뜨거운 피가 그녀에게 가 딱딱하게 굳고 있다. 내 사지처럼.
ー원래 영웅들은 여자때문에 죽어가는 거지.
말없이 울고만 있는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손을 뻗는다. 겨우 그 아이의 손에 닿은 내 손가락이 벌써 말라 붙은 핏덩어리들을 닦아내려 노력한다. 헛된 노력일지라도, 계속해서 긁어낸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말라비틀어진 핏자국같은 것으로 기억되고 싶은 남정네가 어디 있겠는가.
ー차라리 절 마음껏 미워하세요!
ー내가 왜 그래야 하지?
ー..당신을, 당신을 이렇게 만든 게 나인데,
허니는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혈흔이 낭자한 내 품으로 안겨든다. 이러지 않아서 사랑했던 것인데. 허나 이제는 이럼에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모습을 두고 떠날 수 밖에 없는 것이. 나는 눈물과 침을 삼킨다.
ー사랑해.
이 아이는 더이상 이 말을 거부하지 않는다. 나는 웃으며 다시 뜨지 못할 수도 있는 눈을 감는다. 사랑하는 여인의 칼과 포옹을 한 몫에 받고, 또 그녀를 원망하지 않으며 죽어가는 것이 나름 영웅적이라 느끼며. 호색한이자, 난봉꾼이었던 도른의 공자를 영웅이라 포장하며.
쾌락즐기는 캐가 찐사 만나는 것만큼 맛있는 게 어딨게요
자기랑 다르게 순수한 허니 만나면서 정착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지만 사실상 모종의 이유로 허니는 오베린한테 복수하러 들어온 거였고, 그런 허니한테 당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오베린이 보고싶었음.
당연히 유모의 딸도 아니었을 거고, 오베린이 쓰러진 것도 사실은 허니가 한 거였으면. 허니도 처음엔 복수만 하려고 떠나려고 했겠지만 이리 엮이고 저리 엮이다보니 증오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것도 뭣도 아닌.. 그런 이상한 관계가 되버린 거임. 페드로오베린 입장에서는 순애이지만 허니 입장에서는 애증이었던.. 그런 관계가 보고 싶었다
페드로너붕붕 오베린너붕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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