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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8 00:55
1.

어린 시절부터 나는 내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손에 꼽히는 귀족의 자녀라는 것은 다른 의미로 사랑으로 인한 결혼은 이미 물건너갔다는 의미였다.

우리 부모님만 봐도 그렇다. 시작부터 사랑 한 점 없었으니까.

비록 두 분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나름대로 아껴주고 사랑해주시기는 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방도 따로, 사랑은 없으며, 두 분 다 남몰래 연인을 따로 두었다.

그러니 난 알고 있었다. 언젠가 내 결혼의 모습도 저런 모습이겠구나.




2.

그래도 조금 다른 희망을 갖기는 했다. 아버지와 친하게 지내셨던 장군의 아들. 마르쿠스 아카시우스.

나는 아카시우스와의 첫만남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나보다 조금 더 작은 키에 소심한 성격 탓에 제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숨어있던 그 모습.

내가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쟨 누구예요?” 하고 아빠께 질문하자 아빠는 사람을 손가락질 하면 안 된다고 나를 혼내셨다.

아마 그 정도로 끝났다면 나는 이상한 희망도 품지 않았겠지.

하지만 결국 제 아버지의 다리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마르쿠스… 아카시우스…“ 하고 대답을 하는 그 얼굴을 보고 나는 바로 사랑에 빠졌다.




3.

그 어린 나이에 사랑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아마 이렇데 대답할 것이었다.

그 아이가 읽는 책이 궁금했고 그 아이가 해주는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 아이의 매일은 즐거운지, 슬픈지 알고 싶었고 그의 아버지가 그 아이를 데리고 오지 않는 날이면 조금은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면… 어린 나이에 충분히 첫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4.

잠깐 타오르다 말 줄 알았던 감정은 생각보다 오래 갔다. 내가 혼기가 차고 결국 아버지가 내 결혼 상대를 데려올 때까지.




5.

예상하지 못 했던 미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내심 그 아이가 내 남편 후보에 들어있었으면 했다.

”장군의 아이 따위와 결혼하겠다고? 너 같은 귀족의 자녀가?“

물론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 것 같았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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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남편 후보는 꽤나 젠틀했다.

아트레이데스 공작이라는 신분, 뛰어난 부와 막강한 군사력. 그야말로 이 보다 좋은 남편감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 나 또한 결정을 했다. 이 보다 좋을 수는 없다.

비록 내가 아카시우스 부인이 될 수는 없지만 아트레이데스 부인은 될 수 있었다.




7.

내 결혼식 날을 마지막으로 나는 아카시우스를 보지 않았다.

괜한 미련이 밀려올 것만 같아서였다. 그래서 결혼식에서 나에게 말을 걸어오려는 그를 바쁘다는 핑계로 긴 대화도 나누지 않은 채 아트레이데스 령으로 와버렸다.

아트레이데스 공작령은 제국의 북쪽에 위치해 있었고 그덕에 아주 춥고 가는 길도 열흘을 꼬박 새야지 도착할 수 있었다.

이만하면 내 몸도 멀어졌으니 마음도 멀어지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8.

날씨가 춥다는 것만 제외하면 아트레이데스 공작령은 나에게 완벽한 곳이었다.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새로운 안주인을 기쁘게 맞이했고 나를 반겨주었다.

결혼 생활도 내가 보며 자랐던 내 부모님의 것과는 달랐다. 나는 공작과 한 방을 썼고 그와 잠자리를 할 때면 그는 나를 함부로 만지면 깨지기라도 하는 유리처럼 대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것이 내 입에서 나오기도 전에 준비가 되었고 공작은 아침에 일을 하러 집무실로 가기 전 꼭 내 손등에 입을 맞추고 갔다.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지는 확실하진 않았지만 정이 든 것은 확실했다.




9.

그렇게 내 머릿속에서 아카시우스는 점점 사라질 줄 알았다. 아니, 적어도 희미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도에서 온 아카시우스 장군의 승전 축제에 대한 편지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10.

애써 무시할 수도 없는 편지였다. 그야 그 편지는 황제에게서 직접 온 것이었고 아무리 공작이라고 한들 황제의 명을 어길 수는 없었다.

수도로 가기 전 날까지도 나는 어떻게든 수도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이 핑계 저 핑계를 댔으나 결국 나는 수도로 돌아가는 마차에 몸을 실을 수 밖에 없었다.

제발 아카시우스를 마주치지 않기를.

이루어질 리 없는 소망을 괜히 마음 속으로 빌었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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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

그리고 수도에 도착하기 무섭게 내 이름을 불러오는 그 나긋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그래, 역시 결혼 이후에라도 첫사랑을 만나는 것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증명이라도 하들, 심장이 또다시 그의 목소리에 반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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