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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3 23:58
2XX△년 12월 7일
눈앞 다 가릴 정도로 새하얗게 내리던 눈발이 어느새 약해졌다. 눈꽃 송이가 보일 정도가 되자 힘겹게 걷던 걸음 멈추고 우뚝 섰다. 손 하늘로 쭉 뻗어 뒤집었다. 노란색 장갑 위로 눈꽃이 머물다 금방 사라졌다. 꼭 물거품이 되어 버린 인어공주를 보는 것 같았다. 멍하니 내리는 눈만 바라보다가 야! 부르는 소리에 코를 훌쩍이며 뒤를 돌았다. 저 멀리서 빠르게 뛰어오는 그 애가 보였다. 한 발자국 뗄 때마다 바닥에 물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내 얼굴만 보고 뛰었다. 미간을 좁혔다. 바로 양손 교차해 엑스를 그려 주었다. 그 애가 멈춰 섰다.
“네 물건 바닥에 다 떨어졌어.”
하늘색 필통에 묻은 눈 탈탈 털어내며 말해 주었다. 잔뜩 젖은 필통을 흔들며 보여 주자 답답한 얼굴로 제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는다. 그 애의 머리카락에 붙었던 눈꽃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게 웃겨서 으하하 웃다가 눈물이 찔끔 나왔다.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눈 흘기는 것이 느껴졌다. 입 다물고 열린 가방에 필통 넣는 순간이었다. ‘우리 아이도 쉽게 배우는 한글, 쉽게 배우는 한국어’라는 이름이 적힌 교재가 보였다. 아래에 영어도 같이 적혀 있었는데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교재를 꺼내 그 애 앞에 대뜸 내밀었다.
“너, 한국말 배워?”
눈 동그랗게 뜨더니 그대로 교재를 뺏어가 제 등 뒤에 숨겼다. 양 볼에 바람 넣으며 장갑 낀 손으로 그 애 얼굴을 잡았다. 나보다 큰 애 제대로 바라보려면 고개를 살짝 올려야 했다. 말해 봐아. 한국말 배우냐고, 응? 재촉하듯 물었다. 바닥 한 번 쳐다보고 다시 내 눈 마주한 그 애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응. 한국말 배워.”
그러면서 검지 손가락으로 내 볼을 콕 찌른다. 장갑 하나 끼지 않은 손가락이 볼에 닿자마자 앗, 소리를 내며 눈을 찡그렸다. 눈바람 맞아 벌게진 손이 얼음장이었다. 으하하, 기분 좋게 웃은 그 애가 다시 한번 더 입을 열었다. 눈꽃이 여전히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너 때문에, 배워. 배우고 있어... 지금. 제대로. 한국말 잘하고 싶어.”
나 때문에? 눈을 깜빡거렸다. 하얗게 물든 운동장 위로 막 찍힌 발자국은 저마다 다른 곳을 향해 걷고 있었다. 오직 그 애와 내 발자국만이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 애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2XXㅁ년 10월 3일
외국인 보기 힘든 우리 학교에 영국인이 한 명 전학왔다. 낯선 외국인의 등장은 아이들에게 흥밋거리를 던져 주었지만 얼마 가지 못해 시들었다. 짙고 굵은 눈썹이 매력 포인트인 그 애는 한국말을 더럽게 못했다. 소문에 의하면 전학 온 첫날에도 온갖 학년 모여든 그 난리통에서 자기소개로 영어만 했다고 한다. 공포의 영어 듣기 시간이 또다시 돌아올까 두려웠던 아이들은 입 꾹 다물고 바라보기만 했다.
2XXㅁ년 12월 11일
스쳐 지나가며 봤던 그 애의 얼굴에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다른 반 친구 말로는 저보다 2배는 큰 6학년 남자애와 축구를 하다 싸움이 붙었다고 했다. 한국말 못해도 유명인사는 유명인사였다. 가만히 있어도 눈에 띄었다. 어머니와 나이차 꽤 나는 형 두 명이 있다고 들었는데 집 가서 혼나진 않을까 조금 걱정되었다. 곧 겨울방학이었다.
2XX△년 3월 4일
초등학교 6학년, 이제 학교 최고참이라며 의기양양한 시기였다. 나는 전교에 딱 한 명 있는 영국인과 같은 반이 되었다. 남들보다 조금 늦게 등교한 그 애는 맨 뒷자리 앉아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쟤 진짜 잘생겼다. 1년 만에 같은 반이 된 친구가 팔짱을 끼며 속삭였다.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갈색 머리에 푸른 눈. 유난히 긴 속눈썹과 굵은 눈썹. 스쳐 지나가도 눈에 띄었던 얼굴이 좁은 공간에 있으니 더 선명하게 보였다.
짝꿍 정하기 시간이 되었다. 각진 녹색 상자에서 종이를 뽑아 펼쳤더니 휘갈긴 글씨로 숫자 7이 적혀 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친구가 너 7이야? 난 14번인데. 같이 못 앉겠네. 하며 우는 소리를 냈다.
얘들아, 다 뽑았니? 번호 확인하고 정해진 자리로 가서 앉자.
아쉬운 발걸음으로 1분단 2번째 줄로 갔는데 그 애가 내 옆자리에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친구들한테 들었던 공포의 영어 듣기 시간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어떡하지? 나 영어 못하는데. 불안한 마음으로 침을 꿀꺽 삼키며 자리에 앉았다. 의자 끄는 소리가 유독 크게 났다. 그 애가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조용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눈만 굴리던 나는 가디건 주머니에서 마이쮸 포도맛 두 개를 꺼내 그 애 앞으로 쑥 내밀었다.
“안녕? 마이쮸 먹을래?”
떨리는 목소리 애써 감추고 운을 뗐다. 그 애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깜빡거렸다. 마이쮸를 더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잘 부탁해. 푸른색 눈동자 내리깔고 마이쮸만 뚫어지게 바라본다. 내민 손이 조그맣게 부들부들 떨렸다.
“아, 이거 캐러멜. 캐러멜 같은 건데... 혹시 마이쮸 싫어해?”
시무룩한 목소리로 재차 물으니 그제야 마이쮸 두 개 쏙 가져가서 껍질을 벗긴다. 한입에 넣고 몇 번 씹던 그 애는 눈 크게 뜨더니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거 좋아. 맛있어. 더 줘.”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머니에 남은 마이쮸 다 그 애한테 몰아주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는 게 꽤 귀여웠다.
자, 자. 다들 짝꿍하고 인사했지? 한 달 동안 같이 앉아야 하니까 싸우지 말고 잘 지내야 돼. 알겠니?
네! 반 아이들의 우렁찬 대답 소리가 교실을 울릴 동안 나는 마이쮸 씹는 잘생긴 얼굴만 바라봤다. 이게 바로 그 애와 나의 첫만남이었다.
2XX△년 4월 1일
달이 바뀌었다. 또 그 애와 짝꿍이 되었다. 신이 장난을 치는 걸까? 그 이후로 제비 뽑기만 하면 나는 7번, 그 애는 8번을 뽑았다. 결국 겨울방학, 학년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서로 옆자리에 앉았다.
기대하는 얼굴로 바라보는 그 애에게 이번에는 딸기맛 마이쮸를 건네 주었다. 스트로베리 맛이야. 맛있게 씹는 얼굴 보고 있으니 자연스레 웃음이 흘러나왔다.
2XX△년 4월 9일
이번 주
우유 당번
리암
♡
허니
지각한 사람
선생님
바보
OOO
ㄴ 지각비 1000000원 내셈
ㄴ 시른디
떠든 사람
선생님
OOO X 100
ㅁㅁㅁ
한 발짝, 두 발짝 힘겹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녹색 상자에 든 우유가 흔들렸다. 2층 계단을 올라가다 짧게 숨을 내쉬며 멈춰 섰다. 우리 잠깐만 쉬었다 가자. 나보다 한 계단 올라가 있던 그 애가 눈을 감았다 뜨며 상자를 내려 놓았다. 한 가운데에 앉아 열려 있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맑은 하늘에 뭉게뭉게 구름이 피어 있었다. 입을 열고 풍경 감상하다가 상자에 있던 우유 하나를 꺼내 뒤집었다. ‘10’이란 숫자가 보였다.
“리암. 너도 꺼내서 뒤집어 봐!”
“싫거든?”
“얼른!”
턱을 괴고 있던 그 애가 이걸 왜 하냐는 표정으로 우유를 꺼냈다. 뒤집어 보라는 말에 고개를 저으며 내게 우유갑 뒷면을 보여준다. 눈에 담긴 ‘5’에 으하하 웃으며 그 애에게 말했다.
“내가 이겼어.”
“What? 뭐야?”
누가 봐도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그 애에게 뒷면의 숫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자, 봐봐. 나는 10이고 넌 5잖아. 내 숫자가 더 커. 허공에 양팔을 크게 뻗어 동그라미를 그려주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겼어. 그 애는 빠르게 눈을 깜빡이더니 미간을 좁혔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건 무효라며 씩씩거렸다. 싱글벙글 웃으며 상자의 옆면을 손으로 잡았다.
“다른 애들한테 물어봐. 무효 아니야.”
“싫어!”
부루퉁한 얼굴로 똑같이 상자를 잡는다.
그 애는 마지막 8교시가 끝나고 하교할 때까지 나한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굵은 눈썹 한껏 가운데로 모으며 입 꾹 닫고 선생님만 노려보았다. 덕분에 수업을 위해 교실로 들어온 선생님들마다 그 애의 굳은 얼굴을 보고 어깨를 움찔거렸다. 제대로 삐쳤네. 내막을 알고 있는 나만 손으로 입을 가리며 몰래 웃었다.
2XX△년 4월 10일
후련한 얼굴로 교실에 들어온 그 애가 평소보다 경쾌한 몸짓으로 자리에 앉았다.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내 책상을 툭툭 쳤다. 가방에서 필통 꺼내다 말고 고개를 돌려 그 애를 바라보았다.
“나, 물어봤어. 노엘한테.”
노엘은 그 애의 5살 차이 나는 둘째 형이었다. 동네 소문에 의하면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음악 관련 알바를 한다고 들었는데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었다. 조용히 고개 끄덕이며 그래서? 물으니 눈매를 예쁘게 접으며 입을 연다.
“그거, 숫자. 재할? 재활?”
“재활용?”
“그래, 그거! 그거 한 숫자래. 인터넷 검색해서 알려 줬어.”
순진한 얼굴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응, 맞아. 그냥 너 놀린 거야.”
“야!”
“네 물건 바닥에 다 떨어졌어.”
하늘색 필통에 묻은 눈 탈탈 털어내며 말해 주었다. 잔뜩 젖은 필통을 흔들며 보여 주자 답답한 얼굴로 제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는다. 그 애의 머리카락에 붙었던 눈꽃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게 웃겨서 으하하 웃다가 눈물이 찔끔 나왔다.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눈 흘기는 것이 느껴졌다. 입 다물고 열린 가방에 필통 넣는 순간이었다. ‘우리 아이도 쉽게 배우는 한글, 쉽게 배우는 한국어’라는 이름이 적힌 교재가 보였다. 아래에 영어도 같이 적혀 있었는데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교재를 꺼내 그 애 앞에 대뜸 내밀었다.
“너, 한국말 배워?”
눈 동그랗게 뜨더니 그대로 교재를 뺏어가 제 등 뒤에 숨겼다. 양 볼에 바람 넣으며 장갑 낀 손으로 그 애 얼굴을 잡았다. 나보다 큰 애 제대로 바라보려면 고개를 살짝 올려야 했다. 말해 봐아. 한국말 배우냐고, 응? 재촉하듯 물었다. 바닥 한 번 쳐다보고 다시 내 눈 마주한 그 애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응. 한국말 배워.”
그러면서 검지 손가락으로 내 볼을 콕 찌른다. 장갑 하나 끼지 않은 손가락이 볼에 닿자마자 앗, 소리를 내며 눈을 찡그렸다. 눈바람 맞아 벌게진 손이 얼음장이었다. 으하하, 기분 좋게 웃은 그 애가 다시 한번 더 입을 열었다. 눈꽃이 여전히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너 때문에, 배워. 배우고 있어... 지금. 제대로. 한국말 잘하고 싶어.”
나 때문에? 눈을 깜빡거렸다. 하얗게 물든 운동장 위로 막 찍힌 발자국은 저마다 다른 곳을 향해 걷고 있었다. 오직 그 애와 내 발자국만이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 애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2XXㅁ년 10월 3일
외국인 보기 힘든 우리 학교에 영국인이 한 명 전학왔다. 낯선 외국인의 등장은 아이들에게 흥밋거리를 던져 주었지만 얼마 가지 못해 시들었다. 짙고 굵은 눈썹이 매력 포인트인 그 애는 한국말을 더럽게 못했다. 소문에 의하면 전학 온 첫날에도 온갖 학년 모여든 그 난리통에서 자기소개로 영어만 했다고 한다. 공포의 영어 듣기 시간이 또다시 돌아올까 두려웠던 아이들은 입 꾹 다물고 바라보기만 했다.
2XXㅁ년 12월 11일
스쳐 지나가며 봤던 그 애의 얼굴에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다른 반 친구 말로는 저보다 2배는 큰 6학년 남자애와 축구를 하다 싸움이 붙었다고 했다. 한국말 못해도 유명인사는 유명인사였다. 가만히 있어도 눈에 띄었다. 어머니와 나이차 꽤 나는 형 두 명이 있다고 들었는데 집 가서 혼나진 않을까 조금 걱정되었다. 곧 겨울방학이었다.
2XX△년 3월 4일
초등학교 6학년, 이제 학교 최고참이라며 의기양양한 시기였다. 나는 전교에 딱 한 명 있는 영국인과 같은 반이 되었다. 남들보다 조금 늦게 등교한 그 애는 맨 뒷자리 앉아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쟤 진짜 잘생겼다. 1년 만에 같은 반이 된 친구가 팔짱을 끼며 속삭였다.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갈색 머리에 푸른 눈. 유난히 긴 속눈썹과 굵은 눈썹. 스쳐 지나가도 눈에 띄었던 얼굴이 좁은 공간에 있으니 더 선명하게 보였다.
짝꿍 정하기 시간이 되었다. 각진 녹색 상자에서 종이를 뽑아 펼쳤더니 휘갈긴 글씨로 숫자 7이 적혀 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친구가 너 7이야? 난 14번인데. 같이 못 앉겠네. 하며 우는 소리를 냈다.
얘들아, 다 뽑았니? 번호 확인하고 정해진 자리로 가서 앉자.
아쉬운 발걸음으로 1분단 2번째 줄로 갔는데 그 애가 내 옆자리에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친구들한테 들었던 공포의 영어 듣기 시간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어떡하지? 나 영어 못하는데. 불안한 마음으로 침을 꿀꺽 삼키며 자리에 앉았다. 의자 끄는 소리가 유독 크게 났다. 그 애가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조용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눈만 굴리던 나는 가디건 주머니에서 마이쮸 포도맛 두 개를 꺼내 그 애 앞으로 쑥 내밀었다.
“안녕? 마이쮸 먹을래?”
떨리는 목소리 애써 감추고 운을 뗐다. 그 애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깜빡거렸다. 마이쮸를 더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잘 부탁해. 푸른색 눈동자 내리깔고 마이쮸만 뚫어지게 바라본다. 내민 손이 조그맣게 부들부들 떨렸다.
“아, 이거 캐러멜. 캐러멜 같은 건데... 혹시 마이쮸 싫어해?”
시무룩한 목소리로 재차 물으니 그제야 마이쮸 두 개 쏙 가져가서 껍질을 벗긴다. 한입에 넣고 몇 번 씹던 그 애는 눈 크게 뜨더니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거 좋아. 맛있어. 더 줘.”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머니에 남은 마이쮸 다 그 애한테 몰아주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는 게 꽤 귀여웠다.
자, 자. 다들 짝꿍하고 인사했지? 한 달 동안 같이 앉아야 하니까 싸우지 말고 잘 지내야 돼. 알겠니?
네! 반 아이들의 우렁찬 대답 소리가 교실을 울릴 동안 나는 마이쮸 씹는 잘생긴 얼굴만 바라봤다. 이게 바로 그 애와 나의 첫만남이었다.
2XX△년 4월 1일
달이 바뀌었다. 또 그 애와 짝꿍이 되었다. 신이 장난을 치는 걸까? 그 이후로 제비 뽑기만 하면 나는 7번, 그 애는 8번을 뽑았다. 결국 겨울방학, 학년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서로 옆자리에 앉았다.
기대하는 얼굴로 바라보는 그 애에게 이번에는 딸기맛 마이쮸를 건네 주었다. 스트로베리 맛이야. 맛있게 씹는 얼굴 보고 있으니 자연스레 웃음이 흘러나왔다.
2XX△년 4월 9일
이번 주
우유 당번
리암
♡
허니
지각한 사람
선생님
바보
OOO
ㄴ 지각비 1000000원 내셈
ㄴ 시른디
떠든 사람
선생님
OOO X 100
ㅁㅁㅁ
한 발짝, 두 발짝 힘겹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녹색 상자에 든 우유가 흔들렸다. 2층 계단을 올라가다 짧게 숨을 내쉬며 멈춰 섰다. 우리 잠깐만 쉬었다 가자. 나보다 한 계단 올라가 있던 그 애가 눈을 감았다 뜨며 상자를 내려 놓았다. 한 가운데에 앉아 열려 있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맑은 하늘에 뭉게뭉게 구름이 피어 있었다. 입을 열고 풍경 감상하다가 상자에 있던 우유 하나를 꺼내 뒤집었다. ‘10’이란 숫자가 보였다.
“리암. 너도 꺼내서 뒤집어 봐!”
“싫거든?”
“얼른!”
턱을 괴고 있던 그 애가 이걸 왜 하냐는 표정으로 우유를 꺼냈다. 뒤집어 보라는 말에 고개를 저으며 내게 우유갑 뒷면을 보여준다. 눈에 담긴 ‘5’에 으하하 웃으며 그 애에게 말했다.
“내가 이겼어.”
“What? 뭐야?”
누가 봐도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그 애에게 뒷면의 숫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자, 봐봐. 나는 10이고 넌 5잖아. 내 숫자가 더 커. 허공에 양팔을 크게 뻗어 동그라미를 그려주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겼어. 그 애는 빠르게 눈을 깜빡이더니 미간을 좁혔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건 무효라며 씩씩거렸다. 싱글벙글 웃으며 상자의 옆면을 손으로 잡았다.
“다른 애들한테 물어봐. 무효 아니야.”
“싫어!”
부루퉁한 얼굴로 똑같이 상자를 잡는다.
그 애는 마지막 8교시가 끝나고 하교할 때까지 나한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굵은 눈썹 한껏 가운데로 모으며 입 꾹 닫고 선생님만 노려보았다. 덕분에 수업을 위해 교실로 들어온 선생님들마다 그 애의 굳은 얼굴을 보고 어깨를 움찔거렸다. 제대로 삐쳤네. 내막을 알고 있는 나만 손으로 입을 가리며 몰래 웃었다.
2XX△년 4월 10일
후련한 얼굴로 교실에 들어온 그 애가 평소보다 경쾌한 몸짓으로 자리에 앉았다.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내 책상을 툭툭 쳤다. 가방에서 필통 꺼내다 말고 고개를 돌려 그 애를 바라보았다.
“나, 물어봤어. 노엘한테.”
노엘은 그 애의 5살 차이 나는 둘째 형이었다. 동네 소문에 의하면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음악 관련 알바를 한다고 들었는데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었다. 조용히 고개 끄덕이며 그래서? 물으니 눈매를 예쁘게 접으며 입을 연다.
“그거, 숫자. 재할? 재활?”
“재활용?”
“그래, 그거! 그거 한 숫자래. 인터넷 검색해서 알려 줬어.”
순진한 얼굴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응, 맞아. 그냥 너 놀린 거야.”
“야!”
2XX△년 4월 24일
드디어 1교시 국어 수업이 끝났다. 애들아, 다음 시간에 복습할 거니까 이 부분은 꼭 외워 둬야 돼. 선생님이 지우개로 칠판을 지울 때마다 분필 가루가 날렸다. 졸음 때문에 처진 눈꺼풀 사이로 떠드는 아이들이 보였다. 짧게 하품을 하다가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흰 우유를 발견했다. 가방 앞주머니에 있는 제티를 꺼내 책상 아래로 숨겼다.
“그거, 뭐야?”
눈을 비비던 그 애가 내 책상 아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검지 손가락을 그 애 입술 앞에 가져다대자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뒤로 물러난다. 선생님이 교실문 열고 복도로 발 내딛자마자 흰 우유에 제티를 들이부었다. 그 애는 입을 벌리고 내가 우유 흔드는 것만 쳐다봤다. 제대로 닫지 않은 틈새로 갈색 제티 우유가 흘러나왔다. 여전히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 애에게 입꼬리 올리며 말했다.
“너도 줄까? 제티?”
“엉.”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만 위아래로 막 흔드는 모습이 웃겼다. 가방 앞주머니에서 제티 한 개를 더 꺼내 그 애 우유에 똑같이 들이부었다. 제티로 물들인 우유 한입 마시자마자 눈 크게 뜨며 나를 바라본다.
“완전 맛있지? 난 초코우유가 제일 좋아. 맨날 초코우유만 나왔으면 좋겠어. 금요일에만 맛있는 거 나오니까 좀 아쉬워.”
그 애는 아무 말 없이 우유를 입안에 털어넣었다. 한 방울도 더 이상 안 나올 때까지 계속, 계속, 계에속.
2XX△년 4월 25일
등교하자마자 책상 위에 놓인 초코우유와 곰돌이 젤리 그리고 제티 한 개를 발견했다. 맨날 아슬아슬하게 교실문 열고 들어오던 애가 오늘은 먼저 도착해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옆자리에 앉은 나는 그 애가 얼굴을 기대고 있는 방향으로 똑같이 엎드렸다. 속눈썹으로 덮인 평온한 얼굴이 유독 예쁘게 보였다.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눈을 감았다.
2XX△년 5월 2일
오후 1시 27분. 세상에서 가장 좋다는 토요일이었다. 쇠고기 잔뜩 넣은 미역국 맛있게 해치운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 나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포O칩 어니언맛과 바나나우유를 골라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2,700원입니다.”
어? 이게 아닌데. 주머니 뒤적거리는 시간이 길어질 때마다 웃음 띠우고 있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집을 나오기 직전, 엄마에게 받았던 5,000원이 보이지 않았다. 잘 접어 바지 주머니에 넣었는데 아무리 뒤적거려도 먼지 한 톨 나오지 않았다. 저기 손님, 돈 안 가지고 오셨어요? 조심스레 묻는 알바생의 질문에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순간이었다. 뒤에서 나보다 큰 손이 쑥 하고 나타났다. 내가 사려고 했던 간식 옆에 빨간색 코카콜라 캔이 놓여져 있었다. 눈을 깜빡거리며 뒤를 돌자 어디서 많이 본 굵은 눈썹의 외국인 남자가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 꼬맹이 것까지 같이 계산해 주세요.”
남자는 꽤 유창하게 우리나라 말을 구사했다. 발음은 조금 어눌했지만 말이다. 4,200원입니다. 바지 주머니에서 구깃구깃한 오천 원을 건넨 남자가 고개를 숙여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거슬러 받은 800원을 대충 주머니에 넣은 남자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내 품에 포O칩과 바나나우유를 안겨 주었다.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합니다! 육성으로 내뱉자마자 머리 위에 아까 보았던 손이 쑥 올라왔다.
“다음부턴 돈 꼭 가지고 다녀, 꼬맹아. 돈 없으면 서럽다.”
그러고선 내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조그맣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2XX△년 5월 4일
기다리고 기다리던 운동회날. 나는 토요일에 만났던 그 외국인 남자의 정체를 알아냈다. 다른 아이들의 부모님 사이에 낑겨 있던 남자는 그 애가 활약을 할 때마다 조용히 주먹을 올렸다. 잔뜩 찌푸린 얼굴 뚫어지게 바라보던 나는 내 옆에 앉아 있는 그 애의 어깨를 툭툭 쳤다. 물음표 띄운 채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저 사람. 혹시 알아? 너랑 닮았는데. 특히 눈썹.”
손가락으로 그 애의 눈썹을 가리키며 물었다.
“누구, 우리애?”
우리애라고 불린 그 남자의 이름은 노엘 갤러거, 그 애의 둘째 형이었다. 함께 고개를 돌려 노엘을 바라보자 무심하게 손을 흔든다. 나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왜 네 형이 왔어? 그 애가 고개를 숙였다. 엄마 바빠서 못 와. 폴도 똑같아. 목소리에 눈물을 매달고 있는 것 같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줄다리기가 끝나고 바로 이어서 미션 달리기를 했다. 나는 운동장 바닥에 친구들 두어 명과 함께 주저 앉아 따사로운 햇빛에 한참 눈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 애가 하얀 종이를 펼치자마자 영어 선생님을 호출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 애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예쁘게 눈웃음을 지으며 달려왔다. 허니! 허니 비! 놀랄 새도 없이 그 애는 대뜸 내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뭐야? 뭔데? 정신없이 뛰다 보니 결승선에 다다랐다. 우리는 2등이었다. 가쁜 숨을 가다듬고 그 애가 등 뒤에 숨긴 쪽지를 빼앗아 펼쳐들었다.
쪽지의 내용은 이랬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 찾아 함께 뛰기. 운동회에는 그 애의 형, 노엘도 있었다. 그 애는 내 시선 피하고 휘파람만 불었다.
2XX△년 7월 6일
칭찬 양파와 비난 양파 실험을 시작했다. 그거 3학년 때 이미 했어요. 볼멘소리를 하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선생님은 꿋꿋하게 양파 두 개를 사물함 위에 올려 두었다. 그 애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실험에 임했다. 나랑 조금이라도 웃긴 이야기한 날엔 칭찬 양파로, 다툰 날엔 비난 양파로 갔다.
“리암! 지금 양파한테 나랑 싸웠다고 다 이르는 거야?”
소리를 질러도 그 애는 여전히 양파와 비밀 이야기를 속삭이고 있었다. 고개를 내저었다.
2XX△년 8월 6일
실험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다.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칭찬 양파와 비난 양파는 모두 쑥쑥 자라 싹을 틔었다. 놀란 표정의 아이들 사이에서 그 애만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칭찬 양파야,
나는 허니랑 이야기하는 게 너무 좋아. 잘 통하거든. 이건 우리만의 Secret이야. 쫌 큰 Secret. 듀나민?
비난 양파야,
나 허니랑 쪼금 다퉜어. Angry Face 쪼금 못생겨도 괜찮아. 난 걔가 좋아.
2XX△년 9월 21일
맑고 쨍쨍한 토요일. 집 근처에 있는 방방 타러 갔다가 갤러거 형제를 마주쳤다. 내가 도착했을 때 그 애는 이미 신나게 한 판 즐기고 있었고, 노엘은 슬러시 양손에 하나씩 쥐고 있었다.
“그 나이 먹고 여기 오니? 곧 초등학교 졸업할 나이 아니야?”
친절한 말투와 다르게 미간 잔뜩 좁힌 얼굴은 괴리가 심했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지금 이 나이 아니면 언제 와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눈을 감았다 뜨자 이래서 요즘 애들은... 하며 고개를 젓는다.
“그러는 노엘은 여기 왜 왔어요?”
“저기 있는 멍청한 애 생일이라.”
그러면서 턱짓으로 해맑게 웃고 있는 그 애를 가리켰다. 생일? 나한테는 아무 말도 없었는데. 순간 들떴던 기분이 확 가라 앉았다. 아무 말 없이 그 애만 바라보고 있자 노엘이 내 앞으로 슬러시를 내밀었다.
“꼬맹이 너 마셔.”
무심하지만 다정하게 그 애를 눈에 담는 얼굴 보다가 말했다.
“집 주소가 뭐예요?”
“그건 왜?”
“생일선물 보내 주려고요.”
2XX△년 9월 22일
오전 11시 30분. 엄마, 아빠와 함께 그 애 집에 갈비를 선물해 주었다. 같은 반 짝꿍인데 생일도 모르고 그냥 지나간 게 마음에 걸렸다.
오후 3시. 우리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 애가 갈비 7접시를 먹다가 배탈이 났다고 했다. 수화기 너머로 노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2XX△년 12월 1일
눈 깜짝할 사이에 해의 마지막 달이 되었다. 그 애의 한국말 실력이 전보다 늘었다. 만화책에 집중하고 있는 눈빛이 꽤 진지했다. 턱을 괴고 조용히 들여다 본 하늘에선 새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2XX△년 12월 13일
“리암. 어느 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진학?”
“어느 학교 가고 싶냐고. 중학교. 미들 스쿨.”
운동장 한가운데에 주인 모를 목도리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한참을 눈만 굴리며 고민하던 그 애가 말했다. 허니 너 가는 곳. 입을 열 때마다 뽀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2XXO년 1월 22일
매일 동네를 돌아다녀도 굵은 눈썹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때 가르쳐 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는데 따스한 목소리 대신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차가운 기계음만 들렸다. 수화기 붙들고 한동안 멍해 있었다. 혹시 몰라 그 애 집으로 찾아갔다.
거기 살던 영국인 가족?
올해 1월에 한국 떴어.
학생, 몰랐구나?
그 애와 연락이 끊겼다. 그 애의 형들도, 그 애의 어머니도. 어느 중학교 가고 싶냐던 물음에 나랑 같은 곳 가고 싶다던 그 애의 말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라 숨을 헐떡거렸다. 공기는 시리도록 차가운데 몸에는 열이 가득했다.
그렇게 그 애는
내 삶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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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0일
힘들었던 자취 생활 청산하고 본가에 들어온 지 이제 일주일째. 평화로운 주말, 그동안 미뤄 두었던 방 청소를 겨우 끝낸 나는 사진 몇 장을 들고 거실에 앉았다. 책장 틈새에 조용히 껴 있던 것을 어쩌다 보니 발견했는데 오래되어서 그런지 먼지가 쌓여 있었다.
“아, 얘 오랜만이네. 되게 웃겼는데... 요즘도 잘 지내려나.”
손으로 먼지를 대충 털어낸 뒤 한 장, 한 장 뒤로 넘기며 추억 여행을 하고 있을 때였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휴대폰 진동이 무섭게 울렸다.
2024년 4월 20일
마이 😎
야야ㅑ
허니비
너 이거 봤어?? 오후 2:13
드디어 1교시 국어 수업이 끝났다. 애들아, 다음 시간에 복습할 거니까 이 부분은 꼭 외워 둬야 돼. 선생님이 지우개로 칠판을 지울 때마다 분필 가루가 날렸다. 졸음 때문에 처진 눈꺼풀 사이로 떠드는 아이들이 보였다. 짧게 하품을 하다가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흰 우유를 발견했다. 가방 앞주머니에 있는 제티를 꺼내 책상 아래로 숨겼다.
“그거, 뭐야?”
눈을 비비던 그 애가 내 책상 아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검지 손가락을 그 애 입술 앞에 가져다대자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뒤로 물러난다. 선생님이 교실문 열고 복도로 발 내딛자마자 흰 우유에 제티를 들이부었다. 그 애는 입을 벌리고 내가 우유 흔드는 것만 쳐다봤다. 제대로 닫지 않은 틈새로 갈색 제티 우유가 흘러나왔다. 여전히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 애에게 입꼬리 올리며 말했다.
“너도 줄까? 제티?”
“엉.”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만 위아래로 막 흔드는 모습이 웃겼다. 가방 앞주머니에서 제티 한 개를 더 꺼내 그 애 우유에 똑같이 들이부었다. 제티로 물들인 우유 한입 마시자마자 눈 크게 뜨며 나를 바라본다.
“완전 맛있지? 난 초코우유가 제일 좋아. 맨날 초코우유만 나왔으면 좋겠어. 금요일에만 맛있는 거 나오니까 좀 아쉬워.”
그 애는 아무 말 없이 우유를 입안에 털어넣었다. 한 방울도 더 이상 안 나올 때까지 계속, 계속, 계에속.
2XX△년 4월 25일
등교하자마자 책상 위에 놓인 초코우유와 곰돌이 젤리 그리고 제티 한 개를 발견했다. 맨날 아슬아슬하게 교실문 열고 들어오던 애가 오늘은 먼저 도착해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옆자리에 앉은 나는 그 애가 얼굴을 기대고 있는 방향으로 똑같이 엎드렸다. 속눈썹으로 덮인 평온한 얼굴이 유독 예쁘게 보였다.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눈을 감았다.
2XX△년 5월 2일
오후 1시 27분. 세상에서 가장 좋다는 토요일이었다. 쇠고기 잔뜩 넣은 미역국 맛있게 해치운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 나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포O칩 어니언맛과 바나나우유를 골라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2,700원입니다.”
어? 이게 아닌데. 주머니 뒤적거리는 시간이 길어질 때마다 웃음 띠우고 있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집을 나오기 직전, 엄마에게 받았던 5,000원이 보이지 않았다. 잘 접어 바지 주머니에 넣었는데 아무리 뒤적거려도 먼지 한 톨 나오지 않았다. 저기 손님, 돈 안 가지고 오셨어요? 조심스레 묻는 알바생의 질문에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순간이었다. 뒤에서 나보다 큰 손이 쑥 하고 나타났다. 내가 사려고 했던 간식 옆에 빨간색 코카콜라 캔이 놓여져 있었다. 눈을 깜빡거리며 뒤를 돌자 어디서 많이 본 굵은 눈썹의 외국인 남자가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 꼬맹이 것까지 같이 계산해 주세요.”
남자는 꽤 유창하게 우리나라 말을 구사했다. 발음은 조금 어눌했지만 말이다. 4,200원입니다. 바지 주머니에서 구깃구깃한 오천 원을 건넨 남자가 고개를 숙여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거슬러 받은 800원을 대충 주머니에 넣은 남자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내 품에 포O칩과 바나나우유를 안겨 주었다.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합니다! 육성으로 내뱉자마자 머리 위에 아까 보았던 손이 쑥 올라왔다.
“다음부턴 돈 꼭 가지고 다녀, 꼬맹아. 돈 없으면 서럽다.”
그러고선 내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조그맣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2XX△년 5월 4일
기다리고 기다리던 운동회날. 나는 토요일에 만났던 그 외국인 남자의 정체를 알아냈다. 다른 아이들의 부모님 사이에 낑겨 있던 남자는 그 애가 활약을 할 때마다 조용히 주먹을 올렸다. 잔뜩 찌푸린 얼굴 뚫어지게 바라보던 나는 내 옆에 앉아 있는 그 애의 어깨를 툭툭 쳤다. 물음표 띄운 채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저 사람. 혹시 알아? 너랑 닮았는데. 특히 눈썹.”
손가락으로 그 애의 눈썹을 가리키며 물었다.
“누구, 우리애?”
우리애라고 불린 그 남자의 이름은 노엘 갤러거, 그 애의 둘째 형이었다. 함께 고개를 돌려 노엘을 바라보자 무심하게 손을 흔든다. 나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왜 네 형이 왔어? 그 애가 고개를 숙였다. 엄마 바빠서 못 와. 폴도 똑같아. 목소리에 눈물을 매달고 있는 것 같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줄다리기가 끝나고 바로 이어서 미션 달리기를 했다. 나는 운동장 바닥에 친구들 두어 명과 함께 주저 앉아 따사로운 햇빛에 한참 눈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 애가 하얀 종이를 펼치자마자 영어 선생님을 호출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 애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예쁘게 눈웃음을 지으며 달려왔다. 허니! 허니 비! 놀랄 새도 없이 그 애는 대뜸 내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뭐야? 뭔데? 정신없이 뛰다 보니 결승선에 다다랐다. 우리는 2등이었다. 가쁜 숨을 가다듬고 그 애가 등 뒤에 숨긴 쪽지를 빼앗아 펼쳐들었다.
쪽지의 내용은 이랬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 찾아 함께 뛰기. 운동회에는 그 애의 형, 노엘도 있었다. 그 애는 내 시선 피하고 휘파람만 불었다.
2XX△년 7월 6일
칭찬 양파와 비난 양파 실험을 시작했다. 그거 3학년 때 이미 했어요. 볼멘소리를 하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선생님은 꿋꿋하게 양파 두 개를 사물함 위에 올려 두었다. 그 애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실험에 임했다. 나랑 조금이라도 웃긴 이야기한 날엔 칭찬 양파로, 다툰 날엔 비난 양파로 갔다.
“리암! 지금 양파한테 나랑 싸웠다고 다 이르는 거야?”
소리를 질러도 그 애는 여전히 양파와 비밀 이야기를 속삭이고 있었다. 고개를 내저었다.
2XX△년 8월 6일
실험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다.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칭찬 양파와 비난 양파는 모두 쑥쑥 자라 싹을 틔었다. 놀란 표정의 아이들 사이에서 그 애만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칭찬 양파야,
나는 허니랑 이야기하는 게 너무 좋아. 잘 통하거든. 이건 우리만의 Secret이야. 쫌 큰 Secret. 듀나민?
비난 양파야,
나 허니랑 쪼금 다퉜어. Angry Face 쪼금 못생겨도 괜찮아. 난 걔가 좋아.
2XX△년 9월 21일
맑고 쨍쨍한 토요일. 집 근처에 있는 방방 타러 갔다가 갤러거 형제를 마주쳤다. 내가 도착했을 때 그 애는 이미 신나게 한 판 즐기고 있었고, 노엘은 슬러시 양손에 하나씩 쥐고 있었다.
“그 나이 먹고 여기 오니? 곧 초등학교 졸업할 나이 아니야?”
친절한 말투와 다르게 미간 잔뜩 좁힌 얼굴은 괴리가 심했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지금 이 나이 아니면 언제 와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눈을 감았다 뜨자 이래서 요즘 애들은... 하며 고개를 젓는다.
“그러는 노엘은 여기 왜 왔어요?”
“저기 있는 멍청한 애 생일이라.”
그러면서 턱짓으로 해맑게 웃고 있는 그 애를 가리켰다. 생일? 나한테는 아무 말도 없었는데. 순간 들떴던 기분이 확 가라 앉았다. 아무 말 없이 그 애만 바라보고 있자 노엘이 내 앞으로 슬러시를 내밀었다.
“꼬맹이 너 마셔.”
무심하지만 다정하게 그 애를 눈에 담는 얼굴 보다가 말했다.
“집 주소가 뭐예요?”
“그건 왜?”
“생일선물 보내 주려고요.”
2XX△년 9월 22일
오전 11시 30분. 엄마, 아빠와 함께 그 애 집에 갈비를 선물해 주었다. 같은 반 짝꿍인데 생일도 모르고 그냥 지나간 게 마음에 걸렸다.
오후 3시. 우리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 애가 갈비 7접시를 먹다가 배탈이 났다고 했다. 수화기 너머로 노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2XX△년 12월 1일
눈 깜짝할 사이에 해의 마지막 달이 되었다. 그 애의 한국말 실력이 전보다 늘었다. 만화책에 집중하고 있는 눈빛이 꽤 진지했다. 턱을 괴고 조용히 들여다 본 하늘에선 새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2XX△년 12월 13일
“리암. 어느 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진학?”
“어느 학교 가고 싶냐고. 중학교. 미들 스쿨.”
운동장 한가운데에 주인 모를 목도리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한참을 눈만 굴리며 고민하던 그 애가 말했다. 허니 너 가는 곳. 입을 열 때마다 뽀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2XXO년 1월 22일
매일 동네를 돌아다녀도 굵은 눈썹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때 가르쳐 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는데 따스한 목소리 대신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차가운 기계음만 들렸다. 수화기 붙들고 한동안 멍해 있었다. 혹시 몰라 그 애 집으로 찾아갔다.
거기 살던 영국인 가족?
올해 1월에 한국 떴어.
학생, 몰랐구나?
그 애와 연락이 끊겼다. 그 애의 형들도, 그 애의 어머니도. 어느 중학교 가고 싶냐던 물음에 나랑 같은 곳 가고 싶다던 그 애의 말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라 숨을 헐떡거렸다. 공기는 시리도록 차가운데 몸에는 열이 가득했다.
그렇게 그 애는
내 삶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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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0일
힘들었던 자취 생활 청산하고 본가에 들어온 지 이제 일주일째. 평화로운 주말, 그동안 미뤄 두었던 방 청소를 겨우 끝낸 나는 사진 몇 장을 들고 거실에 앉았다. 책장 틈새에 조용히 껴 있던 것을 어쩌다 보니 발견했는데 오래되어서 그런지 먼지가 쌓여 있었다.
“아, 얘 오랜만이네. 되게 웃겼는데... 요즘도 잘 지내려나.”
손으로 먼지를 대충 털어낸 뒤 한 장, 한 장 뒤로 넘기며 추억 여행을 하고 있을 때였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휴대폰 진동이 무섭게 울렸다.
2024년 4월 20일
마이 😎
야야ㅑ
허니비
너 이거 봤어?? 오후 2:13
??
오후 2:13 뭐
마이 😎
아니 유X브 보는데
어쩌다 보니 알고리즘 타서 오후 2:14
오후 2:13 뭐
마이 😎
아니 유X브 보는데
어쩌다 보니 알고리즘 타서 오후 2:14
오후 2:14 ㅇㅇ
마이 😎
웬 영국 밴드 인터뷰를 봤거든?
근데 몬ㄱㅏ 익숙한 거야 오후 2:14
마이 😎
웬 영국 밴드 인터뷰를 봤거든?
근데 몬ㄱㅏ 익숙한 거야 오후 2:14
오후 2:14 익숙하다고?
마이 😎
웅
근데 이거 왠지
네 얘기 같아서 오후 2:15
마이 😎
웅
근데 이거 왠지
네 얘기 같아서 오후 2:15
???
오후 2:15 내 얘기?
마이 😎
아 모르겟음난
네가한번봐봐
https://youtu.be/cmpRLodrs......... 오후 2:17
영국 밴드인데 익숙해? 내 얘기 같다고? 심장이 이상한 속도로 뛰었다. 친구가 보내 준 파란색 링크를 누르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링크를 누르자 [영국 밴드 오아시스, 알고 보니 한국에 숨겨 둔 첫사랑이?! 인터뷰 해석] 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떴다. 설마, 아니겠지. 나도 모르게 입술을 물어뜯었다. 영상 속에는 남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눈을 크게 떴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눈에 띄는 굵은 눈썹. 하나도 잊혀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 수록곡 이야기를 안 하고 넘어갈 수가 없겠어요. 최근 가장 핫한 곡이기도 하잖아요? 틱X이나 유X브 쇼츠에서도 많이 흘러나오기도 하고요.
- 좆나 쩌는 곡이니 당연한 거지. 누가 작사, 작곡한 건데.
검은 선글라스를 썼어도 특유의 말투는 여전했다. 노엘은 그때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 이번 수록곡은 리암도 작사에 참여했다고 들었는데요. 리암, 이 곡이 당신의 첫사랑에게 바치는 곡 맞나요?
그 애가 천천히 입을 뗐다. 심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뛰었다. 침을 꿀꺽 삼켰다.
- 맞아. 이건 걔한테 바치는 곡이야. 씨발. 거기 앉아 있는 멍청한 당신도 알겠지... 세상에는 아주 잠깐이지만 잊혀지지 않는 순간이 있어. 걔가 나한테 그런 존재야. 사탕 주면 아껴 먹던 어린 시절, 존나 잠깐이었지만. 걔만큼 내 인생에 영향 끼친 녀석도 없지. 우리 가족들 빼고.
- 그 첫사랑이 지금 이 방송을 보고 있을까요?
- 씨발.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망할 마법사도 아니고. ... 우리애. 한국이 지금 몇 시지?
- 몇 시긴 몇 시야. 다들 좆같은 꿈나라 가 있을 시간이지. 걔도 그럴 거고.
차마 끝까지 보지 못하고 동영상을 멈췄다. 짧게 심호흡을 했다. 머릿속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바닥에 널부러진 사진에 시선을 고정했다. 유독 빛바랜 운동회 사진 속 그 애는 내 땋은 머리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얼굴을 쓸어내리며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 그 첫사랑한테 연락은 해 봤나요? 편지나, 문자, 디엠 같은 거요.
- 아니, 해 본 적 없어. 걔한테 인사하기도 전에 사정이 생겨서 한국을 떴거든. 난 걔 주소도 번호도 없어. 걔는 있었지. 하지만 존나 쓸모없었을 거야. 걔가 가지고 있던 것도 결국엔 없는 주소, 없는 번호였으니까.
그 애가 고개를 푹 숙였다. 선글라스 낀 노엘의 얼굴에 무슨 감정이 담겨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인터뷰가 잠시 끊겼다. 말이 없던 인터뷰어가 겨우 말을 이었다.
- 이 방송을 보고 있을 첫사랑에게 한마디 전해 봐요, 리암. 혹시 모르잖아요? 한국에서 보고 있을 수도 있어요.
그 애가 한참 뒤에 고개를 들었다. 영상에 담긴 푸른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천천히 입을 연다.
- 허니, 허니 비. 나 이제 한국말 잘해. 그때 너 때문에 배우고 있다는 말, 그거 진심이었어. 지금 이 방송 보고 있으면 당장 영국으로 와. 와서 칭찬해 줘. 너무 기특하다고. 보고 싶어. 제발, 제발.
그 애 입에서 유창한 한국말이 흘러나왔다. 떨리는 목소리에 애절함이 담겨져 있었다. 방송은 그렇게 끝이 났다. 불 꺼진 화면 속 내 얼굴은 눈물로 가득했다. 짓궂은 눈이 운동장을 새하얗게 물들였던 그날, 그 애가 해맑은 웃음을 터트리며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너 때문에, 배워. 배우고 있어... 지금. 제대로. 한국말 잘하고 싶어.
우리 반 굵은 눈썹 그 애는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와싯 리암너붕붕 약노엘너붕붕
오후 2:15 내 얘기?
마이 😎
아 모르겟음난
네가한번봐봐
https://youtu.be/cmpRLodrs......... 오후 2:17
영국 밴드인데 익숙해? 내 얘기 같다고? 심장이 이상한 속도로 뛰었다. 친구가 보내 준 파란색 링크를 누르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링크를 누르자 [영국 밴드 오아시스, 알고 보니 한국에 숨겨 둔 첫사랑이?! 인터뷰 해석] 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떴다. 설마, 아니겠지. 나도 모르게 입술을 물어뜯었다. 영상 속에는 남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눈을 크게 떴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눈에 띄는 굵은 눈썹. 하나도 잊혀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 수록곡 이야기를 안 하고 넘어갈 수가 없겠어요. 최근 가장 핫한 곡이기도 하잖아요? 틱X이나 유X브 쇼츠에서도 많이 흘러나오기도 하고요.
- 좆나 쩌는 곡이니 당연한 거지. 누가 작사, 작곡한 건데.
검은 선글라스를 썼어도 특유의 말투는 여전했다. 노엘은 그때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 이번 수록곡은 리암도 작사에 참여했다고 들었는데요. 리암, 이 곡이 당신의 첫사랑에게 바치는 곡 맞나요?
그 애가 천천히 입을 뗐다. 심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뛰었다. 침을 꿀꺽 삼켰다.
- 맞아. 이건 걔한테 바치는 곡이야. 씨발. 거기 앉아 있는 멍청한 당신도 알겠지... 세상에는 아주 잠깐이지만 잊혀지지 않는 순간이 있어. 걔가 나한테 그런 존재야. 사탕 주면 아껴 먹던 어린 시절, 존나 잠깐이었지만. 걔만큼 내 인생에 영향 끼친 녀석도 없지. 우리 가족들 빼고.
- 그 첫사랑이 지금 이 방송을 보고 있을까요?
- 씨발.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망할 마법사도 아니고. ... 우리애. 한국이 지금 몇 시지?
- 몇 시긴 몇 시야. 다들 좆같은 꿈나라 가 있을 시간이지. 걔도 그럴 거고.
차마 끝까지 보지 못하고 동영상을 멈췄다. 짧게 심호흡을 했다. 머릿속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바닥에 널부러진 사진에 시선을 고정했다. 유독 빛바랜 운동회 사진 속 그 애는 내 땋은 머리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얼굴을 쓸어내리며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 그 첫사랑한테 연락은 해 봤나요? 편지나, 문자, 디엠 같은 거요.
- 아니, 해 본 적 없어. 걔한테 인사하기도 전에 사정이 생겨서 한국을 떴거든. 난 걔 주소도 번호도 없어. 걔는 있었지. 하지만 존나 쓸모없었을 거야. 걔가 가지고 있던 것도 결국엔 없는 주소, 없는 번호였으니까.
그 애가 고개를 푹 숙였다. 선글라스 낀 노엘의 얼굴에 무슨 감정이 담겨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인터뷰가 잠시 끊겼다. 말이 없던 인터뷰어가 겨우 말을 이었다.
- 이 방송을 보고 있을 첫사랑에게 한마디 전해 봐요, 리암. 혹시 모르잖아요? 한국에서 보고 있을 수도 있어요.
그 애가 한참 뒤에 고개를 들었다. 영상에 담긴 푸른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천천히 입을 연다.
- 허니, 허니 비. 나 이제 한국말 잘해. 그때 너 때문에 배우고 있다는 말, 그거 진심이었어. 지금 이 방송 보고 있으면 당장 영국으로 와. 와서 칭찬해 줘. 너무 기특하다고. 보고 싶어. 제발, 제발.
그 애 입에서 유창한 한국말이 흘러나왔다. 떨리는 목소리에 애절함이 담겨져 있었다. 방송은 그렇게 끝이 났다. 불 꺼진 화면 속 내 얼굴은 눈물로 가득했다. 짓궂은 눈이 운동장을 새하얗게 물들였던 그날, 그 애가 해맑은 웃음을 터트리며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너 때문에, 배워. 배우고 있어... 지금. 제대로. 한국말 잘하고 싶어.
우리 반 굵은 눈썹 그 애는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와싯 리암너붕붕 약노엘너붕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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