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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0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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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작가인 허니야 준비작업이 끝났으니 좀 여유로워진 편이지만, 배우인 마이크는 출근도 퇴근도 애매해졌다는 뜻이다. 겨우 집에 가서 씻고 눈이나 좀 붙이다가 오후에 나오면, 허니는 이미 출근해서 점심도 먹고 여유롭게 손을 흔들며 마이크를 반겼다. 자기 얼굴 보는 시간 줄어들어서 초조한 남 마음도 모르고.



마이크는 스스로의 캐릭터 해석에 있어 고생을 하고 있었다. 작가와 감독이 상의해서 만든 제 캐릭터라니까 애쓰고는 있었지만, 왜 저에게 준 건지 싶기도 했다. 덕분에 오늘은 출근하자마자 허니를 붙잡고 늘어질 이유가 생겼다. 허니를 구석으로 데리고 와서 한참이나 대본 이야기를 나눴다. 



"으음, 나도 제이크가 왜 거기서 그렇게 나왔는지 고민했거든요. 가끔 내가 만든 캐릭터인데, 혼자 막 살아나서 행동을 해버린단 말이에요. 그런데, 음... 제이크한테는 극 초중반에 레이첼에 대한 확신이 아예 없는 거 같아요. 본인도 베풀 수 있는 친절이라서- 그런데 이제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면, 뭐라도 더 주고 싶은데... 좋아하는 게 너무 티날까봐, 주변인에게 베푸는 친절의 폭을 넓힌 거라는 거..."



"..."



"그런데 사랑은 암살이 아니니까, 들켜야하고 또 아무에게나 친절하면 아무나가 찾아오는 거잖아요. 내가 만나고 싶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걸 제이크는 레이첼이 중간에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하고, 레이첼이 다른 남자한테 데이트신청을 받고나서 깨닫게 되더라고요. 제이크가 원래 처음부터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고, 그걸 스스로 잘 알고 있잖아요. 본인도 모르게 진짜 사랑을 마주하게 되니까 계산적으로 군 건데, 본인이 달라졌다고 착각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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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좀 알겠네. 레이첼의 이상형을 연기한 건데, 사랑 때문에 인류애가 생긴 걸로 착각한 거구나."



"그렇죠."



"... 너는? 너도 그래?"



"음, 이상형 연기? 아니면 보편적 친절 상향?"



"둘다?"



"음, 이상형 연기는 애써보는데 보통 잘 안돼서... 그리고 후자는 난 그 사람한테만 친절한건데, 상대는 내가 그냥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았던 거 같아요. 나한테 관심이 별로 없었나보죠. 좀만 눈여겨봤으면 알았을 텐데. 지금이었으면 신경 좀 쓰이라고 뭐라도 말했을 거 같아요."



"... 뭐라고 말할 건데?"



"음... 나 아무한테나 잘해주는 거 아니고 너 좋아해서 잘해주는 거야. 사람 서운하게 착각하지 마, 바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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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이크가 말하긴 너무 귀여운 거 같은데."



그럼 바보야는 빼고. 어깨를 으쓱하더니 웃어보이는 얼굴이 제법 쑥스러워보여서, 마이크는 고백이라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허니가 저에게 베푼 친절이 보편적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니 고민도 좀 덜해졌다. 무엇보다 자기가 만든 캐릭터에 대해서 깊게 고민한 티가 나는 대답은 더 맘에 들었다. 



"허니, 마이크. 둘이 연애질 그만 하고 연습실 들어가라-"



"알겠어, 금방 들어갈게."



연애질이란 말에 허니는 눈이 휘둥그레졌는데 마이크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심지어는 먼저 일어서더니 아직 앉아있는 허니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고는, 쥔 손을 그대로 놓지않고 연습실로 들어가서야 스르르 놨다. 이거 뭔데? 뭐야, 왜 손잡고 걸어가는데? 연애질이라 하는데 왜 아무말도 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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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뭘 대단히 착각하고 있나 본데, 나는 아무 이유 없이 다정한 게 아니야. 그렇게나 순진하다면 나야 할 말 없지만, 아직도 세상이 그렇게나 아름다울 일인가?"



연기에 몰입한 마이크를 빤히 보다가, 마이크가 아까 쥐고 있던 제 손을 내려다봤다. 씬이 끝나고 허니는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는데, 마이크가 옆에 털썩 앉았다. 고민하면서 연필 끝을 입가로 가져가는 걸 막고 동글동글한 글씨를 구경하자 허니가 팔로 가렸다. 



"나도 보여주면 안돼?"



"다음 씬 들어갈 준비하세요, 배우님- 나중에, 나중에 보여줄게."



"너무해. 나중에 꼭 보여줘야 해."



허니가 알겠다며 대본을 끌어안는 게 귀여워서 마이크는 허니의 팔을 괜스레 톡 치고 이내 연출의 피드백에 집중했다. 허니는 마이크가 툭 친 팔을 문질문질하다가 쓰려던 걸 까먹고 한참 가만히 있고나서야 쓰려던 걸 기억해낼 수 있었다. 마이크가 한쪽에 놓은 본인의 대본을 가져다가 허니는 제 핸드폰 메모장에 적혀있던 것들을 옮겨적은, 하늘색 포스트잇을 붙였다.



Jake's playlist ♫

Tayo Sound - Cold Feet
Peachy!, mxmtoon - Falling for U
Henry Moodie - drunk text
Henry Moodie - closure
Johny Orlando - Leave the light on




저가 남주인공 제이크의 감정선을 잡을 때 들었던 노래들이었다. 한쪽에서 조연출이 저를 부르는 손짓에 허니는 밖으로 나가 의견을 들었다. 연출의 피드백을 다 들은 마이크는 제 대본에 붙어있는 낯선 포스트잇을 발견했다. 아까 본 글씨로 노래제목들이 적혀있었다. 감정선 잡는 걸 어려워했던 오늘 고민을 듣고 허니가 써놓은 게 분명했다. 밖에서 조연출과 이야기하다가 웃는 허니를 보고 저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좋아죽네, 죽어... 네가 낳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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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인마. 나도 딸이 쟤 닮았으면 좋겠어."



소름이 끼친다는 듯 팔을 쓸어내리는 제 친구를 툭 치곤, 포스트잇을 사진으로 찍어놨다. 집 가서 벽에 붙여놔야지. 플레이리스트를 만들며 마이크는 허니가 아까 나눈 대화를 기억하고 챙겨준 게 좋아서 웃기만 했다. 정말이지, 다정해빠진 레이첼을 좋아하는 제이크가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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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스트너붕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