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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6 20:25
1. 카운터어택
10분 전. 그녀는 손거울을 살짝 들어올려 제 얼굴을 확인했다. 번진 덴 없는지. 개기름이 떴는지. 파우더룸 전신거울 앞에서 옷 매무새를 정리한지 2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저 도착했어요.’라는 내용의 짧은 문자를 보냈고 주문을 받으러 온 웨이트리스에겐 간단하게 물 한 잔을 부탁했다. 그녀가 좋아하던 재즈곡이 홀을 가득 채운다. 아주 부드럽게.
5분 전. 상대에게선 ‘곧 도착해요’라든가 ‘좀 늦을 것 같아요’같은 형식적인 답장 하나 오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한번 손거울을 들어올렸다. 지워진 덴 없는지. 진하진 않은지. 아직 약속 시간 전이니까 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좋아하던 재즈곡이 끝나고 처음 듣는 곡이 흘러나온다. 괜히 물을 한 잔 들이켰다.
15분 후. 울릴 것 같던, 아니 울릴 것 같지 않았다. 울려야 했던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알아들을 수 있는 신호였다. 그러나 그녀는 30분이 지날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정말 만나고 싶은 상대여서? 이름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저 정도의 신호도 못 알아먹을 만큼 바보여서? 그녀는 대형 로펌 변호사였다. 물론 이건 학력으로 평가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었다.
쪽팔려서. 다름 아닌 쪽팔려서가 이유였다. 웨이트리스는 물을 가져다준 뒤로 몇 번 더 불편한 게 없냐 물어왔고 그 때마다 그녀는 애꿎은 샴페인만 부탁했다. 알코올에 약한 그녀와, 깨끗하게 비운 두 잔. 볼은 어느새 발간 빛을 띤다. 원래 좀 붉어서, 술이 들어가서, 열 받아서. 어느 쪽이든 갖다붙이면 이유였다.
“...”
“...”
그런 그녀의 앞에 들어선 건,
“....뭡니까?”
“까인 것 같은데.”
“무슨 상관이에요.”
“40분 기다렸잖아.”
3개월 전 상표권 소송에서 제가 변호를 맡았던 남자. 시도 때도 없이 테이블에 올라오는 발, 원고를 향한 불필요한 도발, 환기를 시켜도 코끝을 파고들던 향수 냄새까지. 제 의뢰인이 아니었으면 절대 상종하지 않았을 인간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제가 전담하게 된 에이전시 소속 선수인 인간이었고. 허니비는 잊혀지지 않는 향수 냄새가 다시 제 코끝을 맴도는 순간 상황 파악을 마쳤다.
“나 따라다녀요?”
“그 정도로 한가해 보여요?”
“전반전 끝날 때까지 나 지켜봤잖아요.”
정확히는 45분에서 5분 모자란 시간 동안. 제 일 얘기로 비유를 들먹이자 그가 가볍게 웃음을 흘린다. 퇴짜는 분명 소개팅 상대한테 맞았는데 왜 이 남자가 더 짜증나지. 전반전 비유를 든 그녀는 1대 0으로 진 기분이었다. 물론 상대는 눈 앞의 남자였고.
“도와주는 거니까 같이 일어나지?”
“의뢰인과 사적인 만남은 금지되어 있어서요.”
“싫으면 문 닫을 때까지 혼자 앉아있든지.”
“.....”
"...잠깐 서봐요."
양반은 못 됐다. 언급했듯이 그녀는 자존심이 아주 상한 상태였고, 샴페인 두 잔 때리고 혼자 집에 가긴 싫었다. 그리고 먼저 손 내민 건 이 남자였으니까. 망설이듯 입술을 쭈뼛이던 그녀가 일어선다. 그리고는 바짝 붙어 그의 팔 사이에 제 팔을 꼬옥. 꼬옥?
“팔짱 끼란 소리는 안 했는데.”
“도와주는 거라면서요.”
이래야 나 데리러 온 것처럼 보이지. 그의 목울대가 눈에 띄게 울렁인다. 서너 번 빠르게 깜빡이는 긴 속눈썹은 덤. 내내 도와주는 척 비아냥대던 그가 주도권을 뺏긴 건 순식간이었다. 공을 빼앗은 선수가 그 다음으로 해야할 일이라면.
“자기야! 늦어놓고 뽀뽀도 안 해주려고?”
“....지금 뭐하ㄴ,”
“으으응 얼른!”
카운터어택. 그녀가 선택한 방법이었다. 별안간 그의 뺨도 발간 빛을 띤다. 원래 좀 붉어서, 술이 들어가서, 열 받아서. 그 어느 쪽도 아니었지만.
2. 패스미스
평소 잘 신지도 않는 구두에, 길게 늘어뜨린 머리까지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었다. 엄마도 아는 사람이라 거절을 못했다고. 그냥 앉아만 있다 나오라고. 이번을 마지막으로 다음부턴 이런 일 없을 거라고. 어제 저녁, 본인 딸에게 소개팅 강매를 하면서 하는 말이 그랬다.
“...”
“웃어.”
“웃음이 나와?”
“사진 찍히니까 웃으라고.”
그렇게 해서 만난 남자와 나누는 대화가 이랬고. 허니비는 축구선수는 죽어도 싫었다. 부상 걱정으로 시즌 내내 맘 편한 날은 손에 꼽았고, 함께한 사진들을 sns에 맘껏 자랑할 수도 없었다. 왠지 모르게 결혼을 일찍 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도 싫었다. 그런데 그게 1년 전 헤어진 남자친구라면, 더더욱 싫었다. 창밖의 카메라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징그럽다는듯 고개를 젓는다.
“계산 내가 할 테니까 일어나.”
“앉아.”
“스톤스.”
“제대로 못할 거면서 나오긴 왜 나와.”
입가를 대충 훑으며 소지품을 정리하던 그녀의 행동을 멈춰 세우는 한마디. 그녀의 시선이 그 눈에 가 닿았고, 손에 쥔 냅킨은 형편없이 구겨졌다. 그와 동시에 그를 바라보는 눈빛은 한층 더 날카로워진다.
“..너 알고 나왔어?”
“그게 중요해?”
“대답해.”
“물 뿌릴 거면 지금 하고.”
그가 물이 가득 담긴 잔을 그녀쪽으로 밀어주었고,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알았으면 어쩌게.”
“...알았으니까 그만해.”
“알긴 뭘 아는데.”
“그만하라고 했어.”
“알아먹은 거 확실해?”
“야!”
잔뜩 격앙된 목소리에 주변이 일순간 조용해진다. 제가 소리 질러놓고 되려 놀란 표정을 짓던 그녀는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저를 갖고 노는 듯한 그 태도 때문에, 변함없이 여유롭기만 한 그 말투 때문에. 그리고 이 모든 게 좋아했던 그 모습 중 하나라는 사실 때문에. 파묻은 손바닥 사이로 옛날 생각이 차오르려던 찰나, 그의 말 한마디가 그 생각을 저지한다.
“이제 일어나.”
“...뭐?”
“재결합 기사 안 나게 해주잖아.”
시종일관 카메라를 의식하며 심란한 표정을 짓던 그녀를 모를 리 없었다. 구두를 신고 집에서 나온지 열 걸음만에 후회했을 그녀를,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목에 닿을 때마다 어깨를 움츠렸을 그녀를. 여유로운 척했지만 그는 여기까지 오는 내내 전전긍긍했다. 혹시라도 저를 보자마자 안겨오진 않을지, 옛날 생각에 마음 약해지진 않을지.
'계산 내가 할 테니까 일어나.'
다행히도, 괜한 걱정이었다. 축구선수는 죽어도 싫은 그녀를 모를 리 없었으니까.
“빨리 안 일어나면 나도 못 도와줘.”
“.....”
“응, 나도 고마워.”
똑바로 못할 것 같으면 이렇게 하는 거라고. 할 말이라도 있는 듯 입술을 움찔이던 그녀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느린 듯 느리지 않은 발걸음으로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도. 패스미스. 그가 선택한 방법이었다. 패스미스에도 성공률을 쳐준다면, 이건 100%였다.
3. 하이재킹
환승 시간 생각해서 20분이나 일찍 나온 게 무색하게 그녀는 정시에 도착이나 하면 다행이었다. 며칠 전 난 사고 때문에 차는 수리를 맡겨놨고, 하필 소개팅 날짜는 오늘이었고. 걸을 때마다 들려오는 또각또각 소리에 벌써부터 무릎이 아려온다. 이거 한 이틀은 갈 것 같은데. 시덥잖은 걱정을 하며 회전문을 통과하려던 그 때, 옆을 스치던 남자에게서 무언가 떨어진다.
"어, 이거 떨어뜨리셨,"
"..."
"저기요!"
"..."
"저기 잠ㄲ,"
신도림 조기축구회. 낯선 영국 땅에서 발견한 모국어로 된 명함, 이걸 그냥 지나칠 수 있을 위인은 못 되어서. 묘하게 뒷모습이 익숙한 게 이대로 지나치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저 뒷모습을 어디서 봤더라. 소개팅 장소와 정반대쪽으로 가는 남자의 뒷모습에 그녀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신도림 조기축구회와 금발머리 백인 남성. 안 쫓아가고 배기냐고.
"저기, 이봐요!"
"..."
"아, 떨어뜨린 거 있다니ㄲ.."
어?
그녀는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서서히 발걸음을 늦춘다. 직장동료이자, 제 환자이기도 한 남자.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부상 체크 일로 제 사무실에 앉아있었던 남자. 그가 눈썹을 까딱이며 인사를 건넨다. 또 보네요. 시니컬한 표정과 달리 톤은 매우 부드럽다.
"..그러게요."
"나 따라왔어요?"
"아, 이거 떨어뜨려서."
"많이 걸어왔을 텐데?"
"네... 저 호텔 입구에서ㅂ,"
그녀는 문득 왜 호텔 입구로 가고 있었는지를 떠올렸고. 5시, 소개팅. 이내 작게 소리쳤다. 명함만 전해주고, 얼굴만 확인하고 빨리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8분이나 늦어버린 상황. 돌아가는 시간까지 하면 16분 내외.
"늦었어요."
그래 늦었다. 그녀는 그분께 죄송하다는 말을 전하려고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려고 했다.
"늦었다니까."
"힉..? 이게 무슨,"
"타요, 데려다줄게."
"네? 아니 저 지금,"
보기 좋게 뺏겨버린 핸드폰과 함께 자꾸 뚝뚝 끊기는 말들. 무례한 끼어들기가 아닌 자연스러운 타이밍 이슈.
"핸드폰 나한테 있어요."
그의 왼손에 살포시 자리한 그녀의 핸드폰이 고개를 내민다. 원래 이렇게 막, 그녀는 잠깐 얼빠진 채 그의 눈동자만 바라봤다. 그러나 별 수란 게 없었다. 지각으로 말아먹은 이미지나 퇴짜로 말아먹은 이미지나. 결과는 똑같을 거란 걸.
"...실례하겠습니다."
"네."
"..."
"벨트 매고."
"...근데 그 명함은 뭐예요?"
신도림 조기축구회.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대시보드 위 명함을 향한다.
"쓸 데가 있어서요."
"저걸... 어디다..?"
"잘 쓰인 것 같은데."
"네?"
"여기서 우회전 맞죠."
응, 네네. 급한 대로 대답부터 나갔고. 그녀는 끝끝내 신도림 조기축구회의 출처도, 쓰임도 알아내지 못했다. 맨체스터 시내의 한인 축구회 이름이 신도림임과 동시에 그 명함이 이 남자의 손에 들어갈 확률은? 아무렴 그런 일도 있겠지. 소개팅 상대 바람 맞히고 이 남자 차 얻어타는 본인도 계산엔 없던 일인데. 어딘가 익숙한 승차감과 함께 두 사람은 30분을 달렸다. 말이 달렸다지 퇴근시간 겹쳐서 기었다.
"조심히 들어가요."
"태워주신 거 감사해요."
"뭐 잊은 거 없어요?"
"...네?"
미간을 찌푸리며 가볍게 미소 짓는 탓에. 그녀는 머리가 새하얘진다. 이게 무슨 대화지. 그러니까 뭘... 해드려야 하나? 당황스러움에 눈만 깜빡이자 그가 김 빠진 웃음을 터뜨렸다. 핸드폰 나 주려고?
"아, 아... 까먹고 있었어요."
"그럴 것 같았어요, 들어가요."
"네... 어... 감사해요."
"응, 들어가라고."
부드럽게 눈을 깜빡이며. 무슨 화법이 이렇게 중간이 없어. 괜히 말린 듯한 기분에 맘 편히 웃어보일 수가 없었다. 왜, 왜 이렇게 찜찜하지. 그녀가 대문을 지나 현관문을 꼭꼭 닫을 때까지 헤드라이트는 그 자릴 지키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딱 3초만 세고 내다 본 현관 구멍 너머엔 마치 꿈이라도 꾼 듯 차는 온데간데 없다. 그런데 주소 불러줬었나. 줬었나..?
집주소는 맹세코 그런 거 아니고. 기억도 못할 정도로 취한 어느날 먼저 데려다달라고 한 적이 있어서. 인사불성이 된 그녀 옆자릴 지키고 있던 것 정도는 계획이 맞았다. 다음날 굳이 말 꺼내지 않았던 것도. 그래야 이 여자가 내일 아침 물어올 거거든.
'저희 집... 오셨던 적 있으세요?'
하고. 그가 선택한 방법은, 하이재킹.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정신 못 차릴 만큼 화끈하게. 하이재킹은 그렇게 하는 거니까. 신도림 조기축구회가 그렇듯.
의외로 쑥맥인 양아치, 의외로 선수인 모범생, 선수 오브 선수 치즈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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