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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6 06:06

희신강징 약희신광요


강징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사실 염리와 위무선 뿐임. 원래도 남한테 관심 없고, 남들에게 보살핌 받는 공자로 자란 탓에 남들 살피는 일 자체를 잘 못하는거지. 사람 살피는 법은 부모에게 배우는 법이지만 강풍면이나 우부인이나 둘다 이런 분야에 재능이 없었음. 강징은 이게 문제라는 걸 어린 가주가 되고 나서야 알게 되었음. 이때 생각한 건 금광요였겠지. 금광요가 자신보다 나이가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닌데, 처세술이 타고 나서 사람을 두번 만나고 나면 취미로 먹는 간식부터 좋아하는 의복 모양새까지 다 파악하니까. 그의 악행이 직접적으로 자신에게 해를 끼친 부분도 있지만 그걸 떠나서, 나도 그런 부분을 좀 타고 났더라면.. 하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단 말임. 

남희신과 함께 지낸지 며칠이 지났지만 강징은 그가 뭘 좋아하는지도 알 수 없었고 습관도 잘 모르겠고, 온화하고 섬세한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도저히 설명할 수 있는 단서를 더 짚어내지 못했음. 가주로서 능력치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니 습관성 자낮이 또 고개를 들어올림. 착잡한 마음으로 한숨 쉬다가, 처리할 일들 처리하고 주변 심복들과 몇마디 중요한 이야기 나눔. 
강징은 이제 집안 어른이 없으니 고민할 일이 있으면 사당으로 간단말임. 그날도 사당에 향 올리고 가만히 무릎꿇고 앉아서 고민하고 있었음. 운몽 전제가 강징 하나만 바라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강징이 가주로서는 퍽 어린 나이임에도 미간 사이의 주름은 깊어질대로 깊어져있었지. 제가 이리 부족한데, 양친께서는 뭐가 그리 급해 먼저 가셨습니까 하고 혼자 중얼거림. 

이제는 세상이 완만해서 강징, 위무선, 남망기 어린 시절처럼 치열하지 않아도 괜찮았음. 아이였다 다음날 어른이 되어야 하는 시기를 살았으니 강징은 스스로 마음이 늙었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에 빈 구석이 남아있는 건 어쩔 수 없었겠지. 멍하게 앉아있던 강징이 정신을 차린건 징아. 하는 강풍면 목소리 때문이었음. 강풍면은 종종 나타났고 한두마디를 하거나 그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함. 남희신은 곁에 있을 땐 진지하게 강풍면의 행동을 관찰했고, 그 자리에 없었다면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주었음. 
처음 강풍면의 혼백이 나타났을 때는 덤덤했지만 이제 강징은 그를 볼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지쳤는지를 생각하게 됨. 위무선은 남망기와 도려가 되어 세상이 시끄러울 정도로 사랑하는 중이고, 염리는 슬프게도 단명했으나 금자헌은 자신의 마음을 자각한 후에는 주변 사람들이 질색할 정도로 염리를 아꼈음. 운몽 삼남매 중 자신 혼자만이 연정과는 인연이 없다고 여겼겠지. 연정만 그런가. 누군가 강징을 보물처럼 여기고 귀애하는 일은 없었으니 아무래도 그런 팔자는 아닌 거 같았겠지. 그나마 다행이라고 볼 수 있는 건 강징이 부친의 냉랭함에 익숙해져 뭐 내가 그렇지 하고 덤덤히 넘길 수 있는 능력정도는 있었다는 거겠지. 잘린 손가락이 아프지 않은 것처럼 애초에 제 몫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면 그리 슬프지도 않았음. 

생각해보니 징아, 하고 다정히 부르는 것은 또 강풍면이 하던 일이 아니었음. 멍하게 고개를 들어올리니 혼백이 체온 없는 손으로 그의 머리를 살짝 건드림. 
조상의 혼백이건 원한이 들어찬 원귀건 귀신들이 나타나는 이유라면 사실 단순했음. 원하는 것이 있고, 보통 생전에 매듭짓지 못한 일에 돌아오는 거였겠지. 강풍면이 뭔가 말을 하려고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았음. 어쨌든 그는 오래전에 떠난 사람인데다 안혼례를 치뤘으니 사후 혼백이 자유롭지 않은 건 당연했음. 부친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하고 조용히 물었고 강풍면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부정하지 않았다는 걸로봐서 그게 맞았겠지. 

생전에 하신 말씀 다 잘 새기고 있습니다. 아들이 여전히 부족하지만.. 마음에 차지 않으시겠지만 강씨 자손은 저 하나 남았으니 어쩌겠습니까. 자조하듯 웃다가 부친께서 얼마나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면 소천하시고도 돌아오셔야 했는지.. 거기까지 말하고 나니 마음이 무거웠음. 눈물은 다 말랐다고 생각했는데 잠시 울컥하기도 했음. 금릉이 제 몫까지 눈물이 많은 성정이라고 생각했는데. 
강풍면은 어색하게 제 앞에 와있었고, 강징은 한참만에 그가 뭘 하려는지 알아챔. 강풍면은 강징을 안아주려고 하고 있었음. 강징은 수련이 높은 수선자였으니 혼백이 그를 함부로 건드리기가 쉽지 않아서 뜻대로 닿기가 쉽지 않은 거. 그렇다고 해도, 안아준다고 해도 느낄 수도 없었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강풍면이 한번 안아주면 몇달이 기뻤던 강징이었는데. 겨우 강징의 어깨에 닿은 흐린 손이 꼭 따듯한 것처럼 느껴졌음. 

수고했다. 

그 말이 강풍면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었을거임. 혼백이라 눈물을 보일 수도 없으면서, 강징을 바라보던 시선이 따스해지면서 천천히 흩어지겠지. 붙잡고 싶었지만 이미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연기처럼 흩어지는 손길을 쥐어보려 손가락을 달싹였을 뿐이었음. 이때 강징은 도저히 본인을 주체할 수가 없었겠지. 가슴 전반이 뻐근하고 묵직하게 아프고, 동시에 기뻐서 엎드려 숨을 삭히면서 참았지만 쉽지 않았을거임. 제 몸도 가누지 못하던 강징은 삽시간에 커다란 품에 안기게 됨. 운몽의 연꽃향기와 섞인 백단향이 얼굴을 간지럽혔음. 세상이 소란한 시절에 살았으니 강징 또한 거의 본능적으로 믿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할 수 있었겠지. 짧은 고민 끝에 남희신은 마음이 넓고 입이 무거운 사람이며, 강풍면과 자신의 일에 대해 알고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 이정도의 추태는 아마 이해하리라 하는 계산이 있었음. 강징은 저를 안아주지 못하고 사라진 부친의 품을 대신해 남희신의 가슴팍에 매달려 오래 울었음. 

남희신은 정말 강징이 제 자식이라도 된 것처럼 팔을 전부써서 안아주었고 큰 손으로 천천히 등허리를 다독였음. 조금 마음이 진정되고 나서 강징이 자식도 없는 양반이 애처럼 나를 어르네.. 하고 생각할 정도로. 

이틀 정도 남희신은 아무 말이 없다가, 늦은 저녁 여전히 종주 내실에서 같이 차마시다 한마디 했음. 강 종주가 하신 일은 사실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고. 
제가 뭘 했는데요 하고 표정으로만 물었는데 남희신은 여전히 부드럽게 웃고만 있었음. 
 
저를 도와주기도 했고 민망한 모습을 보였지만 적절히 입을 다물기도 했고, 여러모로 고마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음. 왜 그렇게 말했는진 모르겠지만 강징은 잠시 고민하다 기억이 많은 곳은 괴롭습니다. 운몽은 한번 폐허였으니 손님이 많지 않았지요. 오래 머무르셔도 괜찮습니다. 이 정도로 무뚝뚝하게 말했음. 돌려돌려 말했지만 결국 이곳은 금광요가 온적이 없고 그탓에 남희신으로 하여금 금광요를 떠오르게 할 요소가 없는 곳이라는 뜻이기도 했겠지. 남희신은 똑똑한 사람이니 알아들었을거임. 둘은 잠시 눈 마주치고 있다 각자의 일로 돌아감. 일이라는 건, 강종주는 또 과잉업무를 소화하고 남희신은 강징 재울시간 재고 있다는 뜻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