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35167517
view 10181
2023.04.02 21:57


078aaf5d456d3be895f91ca7ff2ff9a2(1).jpg
햎에서 짤줍함
노잼주의 캐붕과 오글거림 ㄹㅇ 많음
베르단테





단테와 수감자들 사이가 그리 쉽게 친해질 성향들은 아니지만 성향보다 더 영향을 많이 끼친게 상황일거 같음. 일반적인 경우라면 잘 마주치지도 않을 사람들이 각자의 목표나 과거 때문에 버스에 탑승하게 되었고 좋으나 싫으나 오랜 시간을 빼곡히 끼어앉아서 보내게 됐잖아. 그리고 생사의 갈림길도 아니고 까딱 적 잘못 만나면 픽픽 다 죽어쓰러지는 상황인데 그 생명줄을 쥔 관리자가 단테니까 시간이 지날 수록 돈독해질 수밖에 없을듯.

단테가 일방적으로 수감자들 머리 위에 있는 상급 직책이면 또 상황이 달랐겠지만 알다시피 단테의 권력...? 귀찮게 굴면 빠따로 시계대가리 부순다는 말이 심심찮게 튀어나올 상황에서 그런게 있을리가 없다 기억도 뭣도 다 날아간 단테는 관리자가 아닌 단순한 개인으로 봤을 때도 상당히 어벙한 편인데다가 자기가 모자란걸 너무 잘 알아서 그런가 딱히 권위를 내세울 욕심도 없어보임. 뭣보다 수감자들 살리기가 손가락 튕기면 다 되는거 아니고 문에서 데리고 나올 때마다 고통 생생하게 다 느끼니까 이 조건 하나만으로 대충 수감자들과 우리는 (가)족같은 가좍이다 식으로 공동체 의식 만들기엔 차고 넘칠듯 청불버전(고어라) 가1오갤 느낌

아무튼간에 처음에는 아니어도 점점 얼굴 보는 시간 쌓이고 우여곡절 험하게 넘다보면 3장 시점보다 더 친해질거 같음. 처음엔 서로서로 이름 제대로 불러주지 않고 벌.양. 이니 시계대가리니 성가신 새끼 같은 대명사로 부르는게 다 였지만 나중가면 거기에 약간의 애정이 담기지 않을까. 벌레 양반, 이라는 말이 아무 생각없이 외양을 콕 짚어 말하는게 아니라 정말로 그레고르에게 친근함을 느껴서 나오는 말로 변하는거지. 그레고르도 처음엔 관리자 양반이라고 되받아친게 내 이름 제대로 부르라는 의미로 그런거지만 문득 깨닫고 보면 옆집 이웃부르듯 관리자 양반, 관리자 양반 하고 있었을듯 시계대가리라는 다소 험한 말도 짜증이나 반감이 아니라 입에 붙다보니 야 시계대갈 우리 어떻게 하면되냐!? 식으로 별 악의없이 부르는 호칭이 될듯


이런 상황에서 단테도 서서히 수감자들 이름을 통째로 부르기보다 마치 간질간질한 애칭처럼 줄여부르기 시작하면 좋겠다. 시작은 수감자들 중 이름이 유독 긴 사람들부터였겠지. 홍루나 이상처럼 간단히 부를 수 있는 두 글자 이름도 있고 세 글자 이름까지도 그럭저럭 괜찮았고 네 글자 이름은 좀 길긴했지만 속사포처럼 뱉으면 괜찮았는데 다섯글자 이름이 되니까, 급박한 전투 상황에서 또박또박 부르자니 너무 맘이 급한거임. 불행 중 불행이랄지, 안그래도 자기 대하는데 툭 하면 쇠빠따가 툭 튀어나올거 같은 히스클리프가 그 다섯글자였음. 단테도 히스에게 머리 깨지는 식으로 생을 마감하긴 싫으니까 히스에겐 되도록 명령을 완곡하게 내리려고 하고 어쩌다 이름 부를일 생기면 꼬박꼬박 히.스.클.리.프. 하고 주의했는데 그것도 한두번이지 빙글빙글 돌아가는 버스의 하루를 체감상 1765498번 겪다보니 점점 경계의식이 말랑해질거 같음. 그래서 전투 상황 땐 풀네임이 아니라 별명처럼 앞 두글자 똑 잘라내서 말하는 단테였을거 같다.

히스, 지금 치고 들어가. 이스마엘 옆엔 가지 말고! 이런 식으로 째깍째깍 지휘하는데 히스클리프도 처음엔 자길 무슨 꽃이름이나 고양이 쉭쉭소리처럼 히스, 히스 하고 부른다는걸 눈치 못 챘을듯 적 대가리 깨기 바쁜데 뭐... 그러다 단테가 버스 안 일상 속에서도 무심코 히스, 오늘 버스 청소 당번은 너니까 제발 화내지 말고 해줘... 라고 말하는거 듣고 에이씨 어차피 또 더러워질거 하고 중얼중얼 욕하며 빗자루 들었다가 뒤늦게 깨달았을듯.

"야 시계대가리 너 지금 날 뭐라고 불렀냐?"

[응? 어...]

단테도 같이 청소하다가 (당번은 아닌데 그냥 자기가 하면 애들이 조금이나마 순순히 따라줘서 그냥 하게됨) 히스의 뜬금없는 질문에 어리둥절해하겠지. 별 생각않고 [히스클리프라고 불렀지?] 대답하면서 의자 밑으로 빗자루 넣고 낑낑거리는데 히스가 옆에 다가와서 불쑥 고개 들이밀듯. 위협적인 동작이지만 그래도 빠따는 안 든 상태임.

"아니, 그렇게 안 불렀잖아"

[그, 그랬나...? 미안...?]

"xx 내가 뭐 잡아먹냐? 왜 사과부터 튀어나와? 누가 너한테 사과하래?"

히스가 으르렁거렸음. 처음엔 으르렁거리며 화내는 히스가 입에서 피거품이 흐르는 늑대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그래도 많이 친해져서 허스키 정도로만 보이는 단테는 주춤하긴 해도 완전히 도망가진 않고 뻘뻘거렸음.

[아니 화가 난거 같아서... 내가 이름 잘못불렀어?]

"내가 알아?! 니가 처불러놓고 까먹으면..."

소리 지르던 히스가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왔는지 에이씨 하고 팩 등을 돌렸음. 바닥을 뚫을 기세로 빗자루질 하는 히스 등에서 어쩐지 묘한 위위화감을 느낀 단테가 째깍째깍 고민하겠지. 착각일 확률이 높지만 어쩐지 히스가 좀 삐진거 같은데...? 생각했다가, 단테도 깨달을듯. 어 히스? 아...!

[내가 히스라고 불러서 기분 별로야?]

등을 돌리고 바닥을 퍽퍽 쓸던 히스가 멈칫했음. 대답없이 뭔가 낮게 욕을 읊조리는거 같은데 화가 나보이진 않았음. 단테는 새삼스럽게 내가 첫날 내 머리를 깨겠다고 윽박지르던 사람에게 애칭도 다 부르게 됐구나, 감개무량해하겠지. 속으로만 생각하려고 했는데 약간 말소리가 튀어나간건지 히스가 투덜거렸음.

"xx 뒤끝 존나 기네. 내가 그래서 진짜 대가리 깬적 있냐고..."

[음, 그건 아니지.]

단테가 살짝 웃었음. 여전히 등만 보이고 있었지만 빗자루질이 제법 부드러워져있었음. 단테가 빙긋 웃으면서 다시 물었음.

[그럼 앞으로도 히스라고 부를게.]

"어쩌라고."

툴툴거리는 목소리는 히스클리프 치고는 아주 부드러운 어조였음. 다시 등 돌리고 얼굴 보여주지 않으려나 기웃거리던 단테는 빗자루를 거꾸로 들고 성가시게 달라붙지말라고 쫓아내는 성미에 못이겨 몇발짝 물러서야했음. 하지만 그래도 히스와 좀 친해진거 같아. 이런 사이를 기대한건 아니지만 그래도 좋네. 그렇게 생각하자 답지 않게 콧노래가 흘러나왔음. 째깍거리는 사이사이 희미한 흥얼거림이 들리자 히스는 어깨너머로 고개를 돌렸다가 흥 하며 빗자루를 다시 제대로 잡았음. 한동안 버스 안에는 제법 경쾌한 비질소리만 이어졌음.




이렇게 히스클리프가 히스가 된걸 시작으로, 점점 더 짧은 이름을 가진 수감자들에게도 애칭으로 부르는게 습관이 되는 단테면 좋겠다. 전투 중에 히스, 히스 하는걸 가장 먼저 눈치챈건 역시나 로쟈였는데 언제 둘이 그런 사이가 됐냐며 호들갑을 떨며 눈을 반짝였겠지. 단테 스스로도 이 이름 부르기가 꽤나 많이 발전한 사이라고 인지했지만 그 이상으로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로쟈라 최대한 사무적으로 설명하려 했음. 히스클리프는 다섯글자 이름이니까 다 부르기엔 상황도 급하고... 내가 부르다가 발음도 몇번 삑나고 그래서 그냥 히스로 부르게 됐어. 히스클리프도 괜찮대. 상황을 그대로 설명했지만 로쟈는 그게 다가 아닌거 같다고 의견을 밀어붙였음. 로쟈가 이러는건 잘 있던 히스클리프가 이 화제가 나오자 갑자기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여서였겠지. 원래 콕 찌르는 것만으로 펑펑 터지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놀리기 좋잖아. 히스가 휘두르는 쇠빠따는 로지온에게 그리 무서운게 아니었음. 소란이 더 커졌다가 단체로 기합받기 싫은 단테가 간신히 둘을 중재했는데도 로쟈는 양손을 뺨에 붙이고 웃는걸 멈추지 않았음.

"애칭이라... 좋구나~"

"xx하네 지는 첫날부터 애칭 강요해놓고."

"강요라니! 적극적인 권유를 한거지~"

"하긴 뭐, 나도 그렉이라고 부르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관리자 양반이 히ㅅ..."

반쯤 장난기어린 표정으로 말을 받던 그레고르가 히스클리프와 눈이 마주치고 황급히 말을 고쳤음.

"엇흠, 그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별 일은 아닌거지."

"아니지! 내가 그렉을 그렉이라고 부르는건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러는거라고~? 그렉을 유별나게 아끼는 내 마음이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았단 말야?"

"무슨 소리야... 그럼 싱클레어는?"

"저, 저는 갑자기 왜..."

"아하, 우리 꼬맹이~?"

로쟈가 냉큼 싱클레어를 잡아다 데려왔음. 

"우리 꼬맹이는 꼬맹이라 부르기도 좋고, 싱클레어니까 어디보자... 싱클이? 웃음소리같기도 하네!"

"제발 그냥 싱클레어라고 불러주세요..."

저항은 일찌감치 포기한 싱클레어가 웅얼거렸음. 한동안 장난스러운 씨름을 하던 로자갸 기습적으로 다시 단테를 바라봤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여러 증언이 말해주다시피 나는 애칭을 그냥 부르지 않아 단테~ 친근하고 좋으니까, 친해지고 싶으니까 부르는거지! 그러니까 단테가 그.냥. 히스라고 불렀다는 말을 순순히 납득하겠어?"

듣고 보니 그러네. 자기도 모르게 넘어간 단테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흠칫했음. 로쟈의 눈이 걸려들었다는 흥분으로 반들반들 빛났음.

"하지만 나는 일개 수감자고 단테는 관리자잖아? 관리자가 사람을 차별하면 쓰나."

당연히 관리자님은 원하는 소수를 특별히 아낄 권한이 있으시다! 오티스가 우렁차게 외쳤지만 다들 자연스럽게 넘겨버렸음. 로쟈가 단테를 덥석 잡아와 수감자들 사이로 쑥 밀어넣었음. 종이인형처럼 팔랑 던져진 단테가 불안한 째깍째깍 소리를 냈음. 퇴로를 막은 로쟈가 히죽거렸음.

"그러니까 모두에게 다~~~ 애칭을 붙여줘! 나는 이미 로쟈니까 넘어가줄게!"

[아니 갑자기 왜 그래, 너희 이름은 딱히 부르기 어렵지도 않고...]

단테가 허둥지둥 변명했지만 이상하게 이 변명은 히스클리프를 자극한 모양이었음.

"그럼 나는 이름 부르기 어려워서 대충 잘라먹은거냐?! xxxx!!"

진심으로 빡쳐보이는 히스클리프에게 아니라고 양손을 열심히 내저은 단테는 빠져나갈 수 없는 흐름을 느끼고 이마를 짚었음. 뭐, 사실 따지고보면 전투 상황 중에 자기도 모르게 수감자들 이름을 줄여 말한 적이 아주 많았을텐데 이제 와서 공식적으로 하나하나 정한다고 별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음. 애칭이란 표현이 거창하긴 했지만... 시계 아래를 긁적인 단테가 기왕 하는거 관리자답게 질서를 지켜보자는 생각으로 로쟈에게 손을 내밀었음. 

[음 그럼 먼저 로지온부터. 앞으로도 로쟈라고 부를게. 지금처럼.]

"오 뭐야뭐야 나 이런거 완전 간질거려~~"

깔깔 웃으며 로쟈가 시원시원하게 손을 맞잡았음. 시계니까 반시계방향으로 돌아볼까, 썰렁한 생각을 하며 단테는 그 옆으로 눈을 돌렸음. 언제라도 자세가 꼿꼿하게 각이 잡힌 오티스가 더 가슴을 쫙 펴고 단테에게 부동자세를 취했음.

[오티스는 첫음절부터 마지막 음절까지 부드럽게 부를 수 있어서 굳이 정할 필요가 없을거 같긴하지만,]

"저는 관리자님이 뭐라고 부르시든 언제나 들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우렁차게 말하는 목소리 아래 약간의 기대감이 섞인 것처럼 느껴지는건 단테의 착각일까? 갑자기 부담감을 느낀 단테는 약간 주눅든 자세로 손을 내밀었음.

[티스가 어떨까 싶어. 입에 잘 붙고 좋거든. ...싫다면 다른거 빨리 생각해낼게.]

"아니오!! 싫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글자만 떼어서 단순하게 간결성을 챙긴 그 기지에 감탄할 따름입니다!!"

오티스가 반색을 하고 손을 절도 있게 잡았음. 힘차게 아래 위 각도를 맞춘듯 악수하는 오티스 반응에 단테는 오티스가 아무리 가식으로 아부를 떠는 거여도 언제나 그랬듯 눈물 나게 고마움을 느꼈음. 오티스, 너라면 내 시계머리 뒤에 칼을 꽂아도 괜찮아... 그런 생각과 함께 손을 꼭 잡은 단테였음.

[이스마엘은...]

"어휴, 굳이 말할 필요 없어요, 패턴을 보아하니 이스겠죠."

시큰둥하게 말하는 이스마엘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음. 단테가 머쓱한 표정을 짓자 시계에는 표정이 없지만 용케 그걸 알아차린 이스마엘이 어깨를 으쓱했음.

"싫다는거 아녜요. 그냥 예상했다는거죠. 그렇게 부르세요,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렇게 불러놓고 나만 기억하는거 같지만요."

으아, 그랬나?! 정말로 기억이 안나는 단테가 뜨끔했지만 이스는 더 기다리지 않고 먼저 손을 내밀어 단테의 장갑낀 손을 감싸 쥐었음. 뱃사람이 닻을 끌어올리는 힘이 실린 강한 악수였음. 이스마엘이 또렷하게 말했음.

"저를 이스라고 불러주세요."

[응, 다시 한 번 잘 부탁해 이스.]

"왜 저거랑 내 거랑 비슷한거야?"

히스가 부루퉁하게 끼어들었지만 이스마엘이 고개를 휙 젖히자 풍성한 주홍 머리채가 히스의 얼굴을 파도처럼 덮치고 말았음. 시x을 연신 뱉으며 자리에서 펄쩍거리는 히스에게 이스가 어쩐지 통쾌한 얼굴로 핀잔을 줬음.

"티스라는 말은 못 들었나봐요? 당신 이름이 내 이름을 따라한걸 어쩌란 말이에요?"

"어풉, 누가 누굴 따라...!"

"단테씨, 저는요? 저는 뭐라고 부를거예요?"

아까부터 옥색이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섞여들어간 검은 눈을 조약돌처럼 반짝거리던 홍루가 끼어들었음. 단테의 손을 미리 양손으로 붙잡고 얼굴까지 들어올린 홍루는 기대로 가득차다 못해 팡 터져버릴거 같은 얼굴이었음. 사실, 홍루는 부르기도 좋고 짧은 이름이라 굳이 애칭을 생각하지 않은 단테였음. 게다가 홍루란 이름은 발음도 예뻐서 굳이 손을 댈 필요가 없다고 느끼겠지. 하지만 그걸로 납득하고 넘어갈리가 없었기에 단테는 조심스럽게 제안했음.

[너무 성의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줘. 네 눈 색에서 따온건데,]

"옥이요?"

홍루가 먼저 말을 가로챘음. 단테는 약간 위화감을 느꼈음.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는 얼굴이었는데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았음. 옥이라는 단어에 뭔가... 있는걸까? 단테는 말을 철회하려 했음. 옥. 옥... 내 이름. 옥. 여전히 단테의 손을 맞잡은채로 그게 대답이라도 되는듯 빤히 들여다보던 홍루가 번뜩 고개를 들고 해맑게 웃었음.

"좋아요!"

[정말? 별로 내키지 않는다면...]

"아뇨, 좋아요! 제게 딱 잘 어울리고, 무엇보다 단테 씨의 입으로 그 이름을 들어보고 싶거든요!"

여태까지와는 좀 다른 느낌이겠죠? 방긋 웃은 홍루의 얼굴은 화사했지만 단테는 그 아래 깊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음. 하지만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 수면을 건드릴 생각은 하지 않겠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단테는 완전히 놓기 전에 홍루의 손을 살짝 쥐었다 놨음. 다음 상대는 어쩌면 버스 안에서 제일 예측불가인 존재였음. 단테는 어렵사리 이름을 불렀음. 이 이름 자체도 부를 일이 상대적으로 적다보니 다소 낯설었음.

[음... 료슈?]

료슈는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단테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크큭, 웃었음. 왜 웃지. 불안해진 단테는 료슈는 그냥 넘길까 하다가 맘을 고쳐먹었음. 경험상 탐탁치 않은 일이라고 해서 피했다간 결과가 좋게 돌아온 적이 없는 버스 생활이었음. 그리고 만.단.지.예를 생각하면 료슈는 아무리 두 글자라도 더 단축할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것 같지 않았지. 단테가 머리를 굴리는데 료슈가 낮디낮은 목소리로 짧은 문장을 읊었음.

"슈. 슈."

[슈슈?]

여전히 두 글자네... 생각한 순간 퍼뜩 떠오르는 한 구절이 있었음. 료슈가 처음 만났을 때 한 말.

[...료슈. 요료슈쿠...]

단테가 회상 속에서 꺼낸 말은 모두의 머릿속에 울려퍼졌음. 짧은 적막 이후에 다들 아... 하는 표정을 짓겠지. 자기소개에서 따온 별명이란 직감이 맞았는지 료슈는 더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푸훗, 웃더니 만족스럽게 고개를 돌렸음. 악수 대신인지 허공에 검집 끝이 휙 움직여 직선을 그었음. 단테는 조금 더 반응을 기다렸다가 료슈가 말없이 웃기만 하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했음. 어쩐지 순번을 넘길 수록 난이도가 높아지는 것같다는 생각에 걸맞게, 동요 한 점 없는 고요한 얼굴이 둘이나 단테를 기다리고 있었음. 흑과 은의 대비가 인상깊은 두 천재들은 단테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무릎 위에 다소곳이 얹고 있던 손을 들었음. 단테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압박감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음. 이건 시험이 아닌데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간 낙제점을 맞을거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음. 먼저 이상부터 바라본 안일하긴 해도 안전한 방법을 택해보기로 했음.

[원하는 애칭이 있으면 적극 반영하고 싶은데.]

조마조마한 단테의 반응을 이상도 다 느꼈는지, 그의 몽롱한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기가 어렸음.

"하융은 어떴소."

[하융? 이것도 말장난이야?]

"이상스런 질문이구료. 이건 이상한 내 이름이라오."

뎅~... 당황과 혼란이 섞인 단테의 종소리에 이상은 조금 더 선명하게 웃었음. 그래봐야 새벽 아침빛처럼 옅었지만.

"단테, 그대가 받아들이기에 농담같은 이름이라면 웃어도 좋소."

화난걸까? 이상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런 감정은 아니겠지. 단테는 쓸데없는 혼란을 내리누르고 차선책을 제시했음. 이것저것 다 제쳐두고서라도 하융은 부르기가 까다로웠음. 이상이라는 이름과 닮은 꼴도 하나 없어서 금방 금방 튀어나올 이름도 아니었고. 

[절충해서 '하오'는 어때.]

"하오...? 훗..."

[네 말버릇이 떠오르기도 하니까.]

맥아리 없이 웃는 이상의 반응에 뻘쭘해지지 말자고 다짐한 단테는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음. 기록적인 시간 동안 웃음을 이어간 이상은 들어올린 손을 완전히 내밀었음.

"좋구료. 흡족'하오'. 듣기에 이상(理想)'하오'. 그래서 적합'하오'."

가끔 이상의 유머감각이 난해한지 료슈의 유머감각이 더 난해한지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다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스스로 내놓은 절충안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아는 단테는 고마운 마음으로 이상의 손을 잡았음. 장갑 너머로 느껴지는 손은 장갑과 온도가 똑같은지 아무런 위화감이 없었음. 악수가 끝나자 파우스트가 매끄럽게 말을 꺼냈음.

"파우스트는 언젠가 이런 때가 올 거란 예측을 했답니다. 쓸 일이 없길 바라기도 했지만,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쓸 일이 없길 바랐다면 그냥 파우스트라고 부를ㄱ...]

"파우스트는 준비한 노력이 이렇게 빨리 무시받는 것이 달갑지 않네요."

기가 팍 죽은 단테는 말 잘듣는 열등생처럼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음. 단테의 손에 자신의 손을 가볍게 얹은 파우스트가 선언했음.

"앞으로 파우스트는 푸르라고 부르면 됩니다."

[............푸르?]

제일 모든 사태에 집중력을 보이고 있던 로쟈도 갸우뚱했음. 끼어들었다가 불똥이 튈까봐 딴청을 피우고 있던 그레고르도 갸우뚱했음. 관성처럼 투닥거리고 있던 이스와 히스도 갸우뚱했음. 푸르는 어디서 튀어나온 이름이지? 파우스트는 이런 갸우뚱을 다 예상했다는듯 우아한 태도로 쏟아질 질문을 봉쇄해버렸음.

"파우스트가 모든 답을 안다고 해서 모든 질문에 답해주어야 한다는건 아니라고 말씀드렸죠."

[그건 그렇네. 알았어 푸르.]

단테는 조금 삐쭉거리는 심정으로 푸르에 힘을 주고 불렀음. 하지만 파우스트는 만족스럽다는듯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가볍게 흔들뿐이었지. 대체 푸르는 어디서 튀어나온 말일까. 파우스트와 대화하다보면 의문이 해결되는 그 이상으로 모르는게 늘어만 갔음. 그래도 이제 어려운 고비는 다 넘겼다! 단테는 체면도 잊고 눈에 띄게 어깨가 가벼워진 태도로 남은 수감자들을 바라봤음. 지금까지 용케 자기 순서를 얌전히 기다리던 돈키호테가 속눈썹이 뾰족한 눈을 더 크게 뜨며 열정적으로 손을 뻗었음. 단테의 손을 콱 움켜잡고 흔들자 온 몸이 덜걱거렸지.

"본인은 뭐로 부르겠소!?!?!?!?!?"

[돈, 키는, 돈, 키가 좋은, 데, 제, 제발, 그만, 흔, 들,]

"돈키!!!!!!!!!!!!! 좋소!!!!!!!!!!! 따로 외울 수고를 덜었구만 하하하하하하!!!!!!!!!!"

버스에 쩌렁쩌렁 울려퍼지는 목소리가 가시기 전에 단테의 다른 손을 싱클레어가 조심스럽게 잡았음. 돈키가 한참 흔들어댄 덕에 시계 이음매가 헐거워진 듯한 단테는 싱클레어의 손을 구명줄처럼 잡고 한동안 비틀거렸음. 

"저는... 음... 그, 뭐, 뭐가 좋을까요...? 기다리는 동안 고민해봤는데 딱히 생각나는게 없어서..."

[싱... 허억, 잠깐 숨 좀... 후우... 싱클레어는... 막내라고 부르고 싶은데.]

싱클레어가 정말 의외라는듯 눈을 동그랗게 떴음. 

"막, 막내요?"

"우리 꼬맹이에게 딱이네!!! 아, 이제 막내라고 불러야겠지? 우리 막내~!"

"저, 저는 막내가... 으음..."

우물쭈물하는 싱클레어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살짝 토닥이자 이 중 가장 앳되고 풋풋한 얼굴에 홍조가 발그레 물들었음. 납득하기 어려운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막내라는 호칭이 나쁜건 아닌 모양이었음. 이런 호칭뿐이라도 평소에 막내 대접을 해줘야지. 책임질 수 없는 동정심은 독이었지만 막내라고 부르며 겉보기에나마 챙겨주는 정도의 정은 이런 상태인 단테여도 책임져줄 수 있을거 같았음. 싱클레어의 손을 가볍게 흔들고 단테는 이 모든 소란과 잡담에 단 한 점의 영향도 받지 않은듯 묵묵하게 앉아있는 뫼르소를 바라보았음. 뫼르소는 뭘 말해도 그러십시오. 하고 받아들여줄 거 같은 확신이 있었기에 의외로 쉬운 상대였음. 이스와 히스의 싸움판에서 멀찍이 떨어지고 싶은듯 엉덩이 끝만 의자에 걸치고 있는 자세인데도 조각상처럼 흔들림없는 뫼르소에게 단테는 가볍게 애칭을 말하려다가 말문이 턱 막혀버렸음. 아뿔싸, 생각해놓은게 하나도 없다!

"말씀하십시오. 관리자님."

높낮이가 직선처럼 일정한 목소리에 단테는 식은땀을 흘렸음. 어쩌지, 진짜 생각나는게 없어! 아무거나 말하면 될 줄 알았는데 이래서 안일함이 독이었음. 알고 있었는데, 또 한 번 당하다니! 뻘뻘 고민하던 단테는 뫼르소가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에서 카운트다운이 보이는듯한 환각을 느꼈음. 시한폭탄같은 침묵 속에서 단테는 그냥 아무거나 던져버렸음.

[메리가 좋겠다.]

"풉큭."

로쟈가 재빠르게 입을 막는 기색이었음. 끅끅소리는 뫼르소의 반응이 아니라 쩔쩔 매다가 악수를 던져버린 단테를 향한 웃음이었음. 뒷목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걸 느끼며 단테는 열심히 변명을 시작하려 했음.

[그, 그게 왜 메리냐면...]

"알겠습니다."

[아, 알겠어?]

"네. 저는 앞으로 관리자님의 메리입니다."

[...............]

단테는 조금 죽고 싶어졌음. 싱클레어마저 입을 손으로 덮고 얼굴을 숨기는게 보였음. 미치겠다. 어쩌다 이런 이름이 튀어나왔지. 파우스트에게 물으면 무미건조하게 뫼르가 뫼리가 됐고 뫼리가 발음이 까다로우니 메리가 됐겠죠. 파우스트에게 단테의 생각 흐름은 지나치게 단순하게 보입니다. 라는 대답을 했겠지. 뫼르소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던 단테는 뫼르소가 아까부터 손을 내밀고 악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손을 맞잡았음. 미안, 진짜 미안 뫼르소. 그냥 뫼르소라고 제대로 부를게. 속으로 사과를 빌었지만 메리가 된 뫼르소는 손을 다섯 번 흔들고 다시 처음처럼 조용히 앉아있을 뿐이었음.

쪽팔려서 죽을 거 같은 마음을 좀 진정시킨 단테는 마지막으로 그레고르를 바라보았음. 계속 딴청을 피우던 그레고르는 좀 쑥쓰러운 얼굴이었음.

"어, 관리자 양반이 미리 말하기 전에... 나는 뭐 그렉이면 충분한거 같거든? 굳이 머리 쓸 필요 없어."

[하긴 그렇겠지... 방금 전 상황만 봐도...]

우울해진 단테가 순순히 수긍했음. 아니 그런게 아니라, 애써 부정하던 그레고르는 메리를 생각하면 차마 빈말이 나오지 않는지 머리를 긁적이곤 말을 얼버무렸음.

"재미없게."

"이봐, 먼저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건 당신이거든?"

로쟈가 단테 어깨 위로 고개를 쑥 내밀고 이죽거렸지만 단테도 불만 없었음. 그렉이라는 말은 입에 착 붙기도 하고, 애칭이라는 원래 목적에 한참 멀어진... 의도도 유래도 알 수 없는 별명들을 여럿 겪고 방금 전 자충수까지 돌이켜보자 그렉이라는 이름은 과분하리만큼 훨씬 친근하게 느껴졌음. 손을 내밀자 그렉은 영 어색한지 자기 손을 한 번 옷에 문지르곤 쑥 내밀고 마주 잡았음. 눈을 어쩐지 잘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이 어쩐지 재밌었음. 이래서 로쟈가 매일매일 놀려대는구나. 로쟈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이자 단테 어깨 위에 턱을 올린 로쟈가 콧소리를 냈음. 

[잘 부탁해 그렉. 이제 호칭 조심할테니까.]

"아니 뭐, 신경 안쓰거든. 그래도 말은 고맙네."

"난 여전히 그렉보다 좋은 별명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이미 정해진거니까 그냥 넘어가자 좀, 어?"


"섹시렉시는 어때?" 

그렉이 놀라 손에 힘을 주는 바람에 단테는 아주 살짝 움찔했음. 벌레 손이 아닌데도 악력이 꽤 있네. 그 탓일까, 그레고르는 번개같이 단테에게서 손을 떼고 로쟈에게 떽떽거렸음. 그렇게 부르기만 해봐 진짜 화낸다! 흐응~ 왜이렇게 흥분하실까~ 단테를 중심으로 두고 좌우로 왔다갔다 얼굴을 들이밀며 웃기지도 않은 추격전을 벌일 때였음. 수감자들이, 그리고 단테 또한 한마음 한뜻으로 까맣게 잊고 있던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려퍼졌음.

"촌극은 다 즐겼습니까, 단테."

와글와글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싹 식어버렸음. 단테는 실제로 삐꺽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굳어버렸음. 고개가 도저히 돌아가지 않아서 몸 전체를 삐걱삐걱 움직여 돌아본 단테는 운전수 바로 옆 자리에서 반이나 걸어나와 버스 한복판에 서 있는 베르길리우스를 발견하고 오싹해졌음.

"언제 끝나는지 두고 봤더니 아주..."

안그래도 낮은 목소리가 빠른 속도로 더 가라앉았음. 그 무게가 꼭 숨통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에 단테는 숨 쉬기가 어려웠음. 진정하자. 다소 소란을 피운걸 빼면 우리가 큰 잘못을 한 건 아니잖아. 칼부림도 나지 않았고. 단테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음. 

[근무시간에 잡담해서 미안해. 이제 그만할게.]

한마디한마디를 신중하게 고르며 단테는 파우스트의 눈치를 봤음. 파우스트가 말을 그대로 옮겼음.

"잡담해서 미안하다네요, 이제 안하겠다는군요."

"......"

대답이 부족했나? 단테는 야차처럼 서 있는 그의 눈이 희미한 잿불처럼 번뜩이는걸 보고 등허리에 소름이 쫙 끼쳤음. 반사적으로 오티스가 나서려는걸 손짓으로 제재하고 단테는 전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베르길리우스와 수감자들 사이에 섰음. 관리자답게. 관리자답게. 속으로 되뇌이며 자기 할 일은 이런거고 책임은 내게 있다는걸 기억하려 애썼음. 그리고 스스로의 능력을 생각하면 베르길리우스가 자신을 그리 쉽게 죽이지 않을거라는 미약한 믿음도 붙들었음. 저 남자는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는걸 더 싫어하던데... 망설이던 단테는 변명처럼 들리지 않길 바라며 자기 입장을 피력했음.

[지휘하는 입장에서 애들... 수감자들의 호칭을 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 너무 시간을 잡아 먹게 한 점은 다시 한 번 사과할게. 이런 일 없을거야.]

"지휘관으로서 수감자들의 호칭을 정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는군요. 앞으로는 이렇게 시간 낭비 할 일 없을거라는 약속도요."

파우스트의 매끄러운 번역이 오늘처럼 고마운 적이 없었음. 남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음. 아니지, 인상이 더 구겨졌나? 단테로서는 이제 할 말이 더 없었음. 이런 상황마다 단테는 반항해봐야 좋을 것도 없고 자기가 큰소리 칠 입장은 더더욱 못된다는걸 알면서도 미약한 불만이 꿈틀거리는걸 막을 수가 없었음. 그걸 밖으로 꺼내는건 별개의 문제였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고개를 숙여보인 단테는 수감자들이 자기 자리에 착석한걸 확인하고 그도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음. 눈이 달구어진 특색 옆을 지나가는건 상상 이상으로 긴장되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음.

"할 말은 그게 답니까, 단테."

[...??]

바로 옆을 지나가는데 나직한 목소리가 꽂혔음. 왜 총에 맞은 것처럼 무섭지. 진정해, 아무리 특색 길잡이어도 말로는 날 죽이지 못할거야. ...그렇겠지? 단테는 혹시라도 서로의 어깨가 스칠까봐 잔뜩 쪼그려있던 자세를 유지하며 남자를 힐끔거렸음. 

"다냐고 물었는데... 저기서 잡담하느라 입재간을 다 쓴게 아니라면 대답을 주시죠, 관리자 단테."

눈(없지만 아무튼)을 질끈 감은 단테는 고개를 발딱 드는 반항심을 꼭꼭 짓밟아 다시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음. 이 정도는 파우스트가 통역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제스처였음. 사실, 이 끄덕거림마저도 반항기가 좀 있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할 말을 쥐어짜내는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음. 분위기가 정말로 흉흉해지면 무릎이라도 꿇어야지... 

"쯧..."

혀 찬건가? 단테가 움츠러들었음. 단테가 움직이기 전에 붉은시선이 먼저 홱 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돌려 자기 자리로 가버렸음. 살았다. 한숨을 훅 뱉은 단테가 수감자들과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았음. 다소 창백해진 막내와 돈키가 서로 손을 꼭 잡고있다가 단테를 보고 열심히 고개를 끄떡거려주었음. 이스와 히스가 소리없이 손을 파닥거리는 걸 보아 더 혼나기 전에 빨리 자리로 가라는 모양이었음. 끝까지 단테 편을 들어줄 마음을 포기하지 않은 티스가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보이는 것에 단테도 살짝 엄지를 치켜주곤 얼른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았음. 침묵 속에 메피의 구동음만 들렸음. 너무 긴장해서 그런가 온몸이 다 아팠음. 등받이에 기대며 단테는 이 정도로 끝나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겠지. 근데 끝이 아니었음.

"단테."

아 또 왜... 단테는 진짜 할 수만 있다면 머리 전원을 끄고 기절하고 싶었음. 조심스럽게 맞은편, 그리고 조금 위에 있는 좌석을 바라보자 몸을 틀어 정확히 이쪽을 향하고 있는 빨간 눈동자가 보였음. 

"내 이름이 뭔지는 압니까? 단테."

[...?????]

그야 알지... 모를리가. 단테는 베르길리우스, 째깍거린 다음 파우스트가 통역해주길 기다렸음. 하지만 베르길리우스는 손을 들어 파우스트 쪽을 막았음. 

"직접 써봐."

[.............?...???...........??]

"손가락이 부러지기라도 했습니까, 단테. 아니면... 그 손으로 쓰기에 너무 하찮은 이름이라 이건가...?"

잽싸게 손가락을 든 단테는 허공에 천천히 베르길리우스, 라고 쓰기 시작했음. 음 그런데 읽는 방향을 내쪽으로 써도 되는건가? 첫 두글자를 썼다가 손을 휘적휘적 움직여 지워버린 단테는 맞은편에서 읽기 좋게 이름을 거꾸로 쓰기 시작했음. 근데 웬걸, 생각보다 이름이 쓰기 까다로웠지. 다섯 글자인 히스클리프보다 더 긴 이름은 거꾸로 쓰려니 더 어려웠음. 베루, 아니 베르... 베르길... 잠시만 ㄹ 방향이 이게 맞나... 낑낑거리는 단테를 보는 시선이 점점 곱지 않아졌음. 

"보기 가련할 정도로 딱하군. 이름에 감각이 있다면 학대라고 불러도 되겠어, 단테."

[.........미안.]

단테의 몸이 그 이상 작아질 수 없을 정도로 짜졌음. 이 상황이 더 악화될 찰나, 도착했다는 카론의 목소리가 들렸음. 다행이다! 단테는 카론 쪽으로 열렬한 고마움을 마구 날리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음. 튀어나가라고 일갈하는 길잡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단테와 수감자들은 말 잘듣는 병아리떼처럼 우르르 버스 밖으로 나갔음. 가장 먼저 도망가는 단테의 뒷모습에 붉은 눈길이 오래오래 달라붙어있었음.





근데 말야. 베르 그 사람, 안그렇게 보이는데 은근히 뒷끝있지 않아? 한바탕 전투가 이어지고 부활 과정도 거쳐 다들 녹초가 된 어느 날. 잠깐 쉬는 사이 맥락없이 톡 던져놓은듯한 로쟈의 말에 단테는 적극동의를 표하며 째깍거렸음. 단테가 그렇게 흥분하고 로쟈가 일부러 말을 꺼낸 이유가 있었음. 그날 애칭 사건 이후로 단테는 쭉 특색 길잡이의 무한 이름 공세에 시달리고 있었음. 가만히 있다가도 자기 이름을 똑바로 써보라고 하는게 시작이었음. 멍청이라도 백번을 쓰다보면 하나를 깨우치듯이 단테가 시행착오 끝에 거꾸로여도 베르길리우스 라는 글자를 막힘없이 쓰게 되었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음.

"파우스트 씨, 단테가 지금 한 말을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그대로 옮겨보도록."

"로지온, 방금 단테가 뭐라고 했지? 멋대로 바꾸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말해."

"뫼르소. 길잡이에 비하면 한없이 존귀하신 관리자님의 보고를 들었겠지. 그대로 따라해봐라."

오티스, 이스마엘, 홍루, 이상, 그레고르... 상대를 바꿔가며 한번씩 단테의 말을 따라하게 시키는 통에 버스 수감자들은 이제 단테가 베르길리우스에게 말할 때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하기 시작했음. 그리고 놀랍게도 모두가 단테가 한 말을 거의 완벽하게 기억하고 베르길리우스에게 옮기는게 아니겠음. 몇몇은 명령이라 따르는거고 몇몇은 혼나기 싫어서 그런거고 소수의 몇몇은 일종의 게임이라고 생각해서 신나게 장단을 맞춰주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그 히스를 포함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요청에 잘 따라주었음. 이런 상황임에도 단테는 수감자들의 손발이 척척 맞는 것에 감격하고 말았음.

하지만 요구사항이 잘 이행되고 있는데도 붉은시선은 전혀 만족하지 않은듯 보였음. 단테는 이제 수감자들이 제 말을 잘 따라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하는 말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됐음. 모든 요소를 고려해봤을 때 그게 가장 신빙성 있었음. 상황을 보고하거나 전투 상황을 요약할 때 자기가 고르는 단어가 섬세하지 못하다던지 아니면 지나치게 비전문적이라던지... 대충 그런 이유같았음. 단테는 베르길리우스가 의외로 문학적인 어구를 구사하는 사람이라는걸 알았음. 버스 규칙을 말할 때도 ~아니한다 라는 표현을 쓰고 카론의 상황을 터널이라는 감수성 깊은 표현에 비유하기도 했잖아. 게다가 한 번 뿐이지만 수감자들이 말 잘 들을 때 소풍나온 병아리라는, 듣기만 해도 솜털이 느껴질 정도로 보송보송한 말을 쓰기도 했고. 단테는 더 혼나기 전에 이 문학적인 길잡이의 기준에 자신의 형편없는 문장력을 맞추어보려고 노력했음. 미사여구를 갖다붙이거나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고 비유를 최대한 쓰기도 했음. 이스가 마치 폭풍처럼 적에게 돌격해 상황을 정리했다, 슈슈가 맹렬하면서도 조용한 산불처럼 모든걸 빠르게 정리해서 일이 수월했다, 히스와 메리가 두 사람이서 거의 열 사람 몫을 해내는 싱크로를 보여주었다... 없는 어휘력을 박박 긁어모아가며 단테는 최대한 말을 꾸며보았음.

소용없었음. 전혀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 단테는 머리를 쥐어뜯다시피하며 고민했음. 대체 뭐지? 뭐가 맘에 안드는거지? 파우스트는 묘하게 뭔가 아는 것 같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대답을 어물쩍 회피했음. 푸르는 이 상황도 예상했답니다. 그리고 단테가 직접 사태를 해결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예상과 얼마나 오차가 날지 보고싶어요. 그렇게 말하고선 이제 단테가 뭐라고 애걸해도 전혀 답을 주지 않았음. 

[나 뭘 잘못한걸까 로쟈...]

우울한 단테를 보며 로쟈는 조금 신중한 얼굴로 입술을 두드렸음. 말을 꺼내기 전에 이게 과연 적합한 말인지 고민하는듯 보였음. 지친 수감자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회복을 끝낸 티스와 그렉이 다가와 옆에 앉았음. 땅바닥에 드러누워 앓는 수감자들을 침울하게 바라보는 단테를 두고 셋은 눈빛을 교환했음. 로쟈가 먼저 말을 꺼냈음.

"있잖아 단테,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일뿐이란걸 염두에 두고 우리 말을 들어봐봐."

[뭔데?]

"거 뭐냐... 우리가 생각을 좀 해봤거든. 요즘 길잡이, 그 양반이 유독 까다롭게 구는 이유를 말이야."

[?! 그래서? 떠오르는게 있어?]

단테는 이제 지나치게 익숙한 태도로 체면을 내던지고 소매부리에 매달렸음. 뭐라도 답을 듣고 싶었음. 

"관리자님, 혹시... 길잡이의 태도가 좀... 음, 말씀드리기가 참 그렇습니다만..."

오티스가 뜸을 들였음. 

"...삐진 거 같지 않아?"

로쟈가 말을 맺었음. 단테가 말그대로 째깍거림을 완전히 멈췄다가 뎅~ 소리를 냈음.

[뭐라고!?]

로쟈가 농담하는거지? 그치? 그렉과 티스를 봤지만 둘은 민망한 표정이긴 해도 제법 진지해보였음.

"아니, 농담이 아니라... 하 내 입으로 말하니까 더 이상하네. 근데 진짜 그래보여. 삐졌다는건 낯간지러운 표현이긴해도."

"뿔이 났다? 심기가 불편하다? ...토라졌다?"

와, 뭐라고 표현해도 낯간지럽네. 그레고르가 몸을 떨었음. 단테가 간헐적으로 뎅, 뎅, 소리만 내는걸 보면 충격이 상당한 모양이었음. 넋이 나간 관리자의 어깨를 단단히 움켜쥔 로쟈가 힘주어 말했음.

"들어봐 단테. 현실이란 원래 그런거야. 믿기 싫고 아니었음 하는게 늘 사실로 다가온다고."

"안타깝지만 사실입니다 관리자님. 관리자님의 건강과 보신을 위해서라도 사태를 받아들이셔야합니다."

[이거... 그거... 토라졌... 아니 삐... 삐진 그런... 그걸... 어떻게 알았는데...?]

단테가 더듬거렸음. 그레고르가 엄지로 어깨너머를 가리켰음. 반듯하게 두 손을 모으고 누운 자리가 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요하게 쉬고 있는 이상이 보였음.

"하오 씨, 저 양반이 천재잖아. 그 동안 시달리는걸 들으면서 패턴같은걸 분석했나봐. 무슨... 아해 어쩌고 하던데 그건 잘 못 알아들었지만 요점은 잘 말해주더라고."

[무슨 요점?]

"단테, 당신이 베르의 이름을 잘 부르지 않는대."

[엥?]

단테가 무릎을 꿇은 그대로 어리벙벙해졌음. 이름? 이름?? 이름이 갑자기 왜... 단테가 또 흐트러짐 문턱까지 갈까봐 셋은 빠르게 입을 모아 설명했음. 요점이란 그거였음. 단테가 지금까지 베르길리우스에게 건네는 말을 전부 통틀어봐도 이름을 제대로 부른 적이 손에 꼽더라는 거였음. 자기 잘못이려니 했지만 이런 잘못일줄은, 아니 잘못인지도 모를 일인줄 상상도 못한 단테가 미친듯이 째깍거렸음.

[아니, 이름을 굳이 안 불러도 되니까 안 불렀지! 보고는 그 사람에게만 올리는거잖아! 그리고! 어차피 내 목소리도 못 듣는데 이름을 부르고 말고가 대체 무슨 상관이야?! 생각하니까 화나네!]

"거야 그렇지... 근데... 그 양반 입장에선 그게 아닌가보지..."

달래보려는 마음만큼 붙임성이 따라오지가 못하는 그렉이 멋쩍게 안경을 벗어 대충 닦았음. 일부러도 아닌데... 충격이 가시자 진짜로 억울해진 단테가 뎅뎅거렸지만 수감자들은 오늘 작정하고 온 모양이었기에 단테의 억울함을 일단 뒤로 미뤘음.

"관리자님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만, 승기를 거머쥐기 위해 한 발짝 퇴보해야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그럼... 이름을 자주 불러주라고?]

"응, 그렇지! 생각보다 쉽지?"

로쟈가 힘내라는듯 등을 토닥거렸음. 단테는 이제 하나 둘씩 완전히 정신을 차리고 꾸물꾸물 기지개를 펴는 애들을 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음. 크, 착하다 우리 단테. 원래 더 성숙한 사람이 져주는거래. 로쟈가 단테의 시계 머리를 쓰다듬었음. 그리고 어깨를 감싸더니 비밀스럽게 한 마디 충고를 더했음.

"그리고... 만약을 위해 한 가지 더 기억해 둘게 있는데..."





또 다시 찾아온 보고의 순간. 단테는 땀이 조금씩 베어나오기 시작하는 손바닥을 초조하게 쥐었다펴며 특색 길잡이, 아니 베르길리우스의 앞에 섰음. 다리를 꼬고 있다가 단테가 오자 슥 일어난 베르길리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조금씩 붉은 빛이 감도는 눈을 단테에게 고정하고 있었음. 단테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 째깍거리기 시작했음. 오늘은 돈키가 말을 옮기는 역할로 단테 옆에 붙어있었음.

[오늘 전투는 평소보다 어려웠지만 그래도 결실은 낸 편이야. 사망자가 꽤 많이 발생했지만 전멸은 피했고 덕분에 부활까지 순조롭게 마쳤어.] 

뾰쭉 솟은 속눈썹이 이마까지 닿을만큼 눈을 크게 뜨고 집중 중이던 돈키가 말을 옮기기 시작하기 전, 단테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또박또박 한 마디를 덧붙였음.

[...베르길리우스.]

"오늘 전투는 어려운 만큼 결실이 있는 편이었소! 사망자는 발생했지만 전멸은 피했소! 부활까지 아주 순조로웠다오!" 

착실한 돈키는 단테가 숨 들이키는 소리까지 기억했음. 후웁! 용맹하게 배에 힘을 준 것까진 좋지만 내쉬는걸 까먹은 돈키호테가 약간 막힌 목소리로 마지막 말까지 다 옮겼음.

"...베르길리우스!"

"...마지막은 뭐야."

붉은시선이 물었음. 돈키는 여전히 베르길리우스 앞에서 조금 주눅이 드는듯 했지만 단테의 등 뒤에 몸 반쪽만 살짝 숨어서 제대로 대답했음.

"그야... 특색 님의 이름이라오!"

"그걸 모를거 같나? 왜... 이름이 튀어나온거지?"

"관리자 나리가 말씀한걸 옮겼다오!!!!!"

베르길리우스가 단테를 쳐다봤음. 정수리가 꿰뚫리는 것 같은 느낌을 애써 무시하고 단테는 이제 아주 작정하고 베르길리우스의 이름을 말하기 시작했음.

[이미 알다시피 중간에 구보 쪽 세력과 마주칠뻔 했지만, 베르길리우스.]
[원활한 진행을 위해 접촉은 일부러 피했어, 베르길리우스.]
[베르길리우스, 당신이 충고했다시피 언제나 뒷바라지나 지원을 기대할 순 없으니까...'
[그리고 우리의 움직임을 눈치챈 저 쪽도 방향을 바꿨더라고, 베르길리우스.]
[결과적으로 베르길리우스, 적어도 황금가지를 뺏기진 않았다는 점과 경쟁자에게 혼선을 빚어준 점, 그리고 메피에게 연료를 제대로 공급한 점을 비롯한 목표는 제대로 달성했다고 생각해. 베르길리우스.]
[보고는 이게 다야. 당신의 너그러운 용인을 바라고 있어. 베르길리우스.]

일곱번. 이름을 일곱번 끼워넣는걸 성공한 단테는 돈키가 자기 등 뒤로 반쯤 숨겼던 몸을 당당히 빼내고 위풍당당한 거위처럼 말을 옮기는 것을 지켜보았음. 그러려던건 아닌데 쓸데없이 반항적인 어투가 된게 아닐까 조금 걱정했지만 중간에서 통역해주는 사람이 돈키호테다보니 자칫 삐딱할 수 있었던 어조도 솔직하게 빠릿빠릿하게 들렸음. 돈키 착하다. 돈키 힘내라. 긴 문장을 기억하느라 작은 얼굴에 꽉 들어찬 이목구비가 더 오밀조밀하게 보일 정도로 인상을 쓴 돈키호테는 훌륭히 맡은 바를 마치고 단테를 바라봤음. 잘했어, 고마워 돈키. 돈키에게만 들리게 속삭인 단테는 이제 떨어질 판결을 기다리며 바닥을 바라봤음. 가까이 선 베르길리우스의 다리 끝과 구두를 한참 바라보고 있던 끝에 드디어...

"... 너그러운 용인이라, 그런 말도 할 줄 압니까, 단테."

베르길리우스가 낮게 말했음. 용기내어 고개를 든 단테는 불이 꺼지고 잠잠한 색으로 돌아온 눈빛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음. 

"그렇게 바란다니 한 번쯤 못 물려줄 것도 없죠. 수고하셨습니다, 단테."

그 말로 보고는 완벽하게 끝이 났음. 돈키의 등을 톡톡 두들겨 자리로 돌려보낸 단테는 의자에 앉자마자 진이 쭉 빠졌음. 진짜... 이게 답이었단 말이야? 머릿속엔 정말 오랜만에 무사통과를 한 기쁨만큼이나 아직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든 탓에 둥실둥실 떠오르는 어리둥절함이 있었음. 억지처럼 끼워넣은 이름이 정답이었다니. 이름이 뭐라고. 단테는 투덜거리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음.

이름이 뭐라고 가 아니라... 이름은 이름이니까... 당연히 중요하지 않나? 생각해보면 수감자들에게 애칭을 지어준 것도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인데. 고작 애칭 하나지만 관계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긴하잖아. 긴장과 압박감이 사라지자 비로소 새로운 시선이 들어올 여유가 생겼음. 단테는 버스 천장을 바라보며 조금 늦은 반성의 시간을 가졌음. 결단코 일부러는 아니었지만 자신이 버스 안에서 베르길리우스의 이름만 쏙 빼놓고 불러댔다는 이미지를 준게 확실히 나쁜 일이긴 했...

"단테."

히이익이이익아악...! 단테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움찔했음. 속마음이 아니라 직접 뱉은 탓에 수감자들이 단테의 비명소리를 듣고 일제히 고개를 돌렸음. 단테의 체면에겐 안된 일이지만 짹깍거림도 이상한 삑사리가 섞여서 째으끄으으악끼이익 같은 괴상망측한 소음이 튀었음. 그 소리에 인상을 찌푸린 베르길리우스는 버스 바닥에 거의 허벅지가 닿을 정도로 미끄러졌다가 허둥지둥 고쳐앉는 단테를 기묘한 눈빛으로 노려봤음. 짜증이 담기긴했어도 완전히 짜증뿐만은 아닌 그 시선은 수감자들 쪽으로 슥 돌아가는 순간 완전히 오싹하게 변했음. 수감자들이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자기들끼리 딴청을 피웠음. 버스 안에 꾸며낸듯한 수런거림이 차오르고 나서야 베르길리우스는 단테 쪽으로 다시 시선을 향했음.

올게 왔나. 단테는 로쟈가 마지막에 더해준 충고를 기억했음. 아마 그 추측이 맞다면...

"존경하는 관리자님께서... 제 이름을 일곱 번이나 불러주시다니, 솔직히 놀랐습니다, 단테."

끄덕. 단테는 달리 할 말이 없었음. 코트 자락을 비틀며 베르길리우스가 본론을 꺼내놓길 기다리는 수밖에.

"부를 이름과 애칭들이 어찌나 많은지 내게 할애할 힘이 없을거란건 알았지만 말입니다."

비릿하게 웃는 얼굴은 기분 좋은건지 아니면 폭발 직전인건지 분간하기가 정말로 힘들었음. 베르길리우스가 손에 든 까만 서류철을 (늘 들고 다니는데 사실 뭐에 쓰는건지 단테는 모르는) 무릎 위로 툭 떨어뜨렸음. 거의 동시에 펜 한 자루가 단테의 무릎 위에 같이 떨어졌음. 데구르르 굴러가는 펜을 손가락으로 직접 멈춰 세운 베르길리우스가, 낮춘 자세 그대로 단테에게 속삭였음.

"별로 달라질게 없다는 생각에 굳이 꺼낼 생각도 없었던 화제지만... 당신 입으로 건드렸으니..."

내가 뭘.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목소리가 닿는 부분마다 못 견디게 민감해지는 기분이었음. 숨결인지 말의 울림인지 모를 자극이 단테의 피부를 천천히 어루만지며 그자리에 오래오래 여운을 남겼음.

"속에 담은 말을 끝까지 꺼내볼까... 싶어서 말이야, 단테..."

정신 차려보니 베르길리우스가 펜을 손에 쥐어주고 있었음. 뻣뻣하게 굳은 시계머리에게 붉은시선이 느릿느릿 말했음.

"당신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애칭을 써봐."

올게 왔다!!!!! 단테는 믿을 수가 없는 동시에 로쟈와 오티스와 그레고르의 혜안에 폭죽이라도 터뜨려주고 싶은 심정이었음. 그리고 아마 말은 안했지만 이 제안에 의견을 실어줬을 이상에게도. 진짜로 애칭까지 요구하다니. 단테는 실수하지 않으려고 초집중한 상태로 로쟈가 귀띔해준 걸 기억했음. 단테도 알지? 내가 베르, 베르, 하고 불러도 그 까칠한 길잡이 씨가 딱히 뭐라한적 있어? 그렇게 불러도 된다고 허락해준거나 마찬가지란 말이지. 그러니까 겁 먹지 말고 그렇게 불러봐! 이름 불러줘야 기분푼다는게 밝혀지면 이제 계속 베르길리우스으~ 하고 불러줘야할텐데 그 긴 이름보단 베르 베르 베르 베르 세 번이 낫지 않겠어? 방금 그건 네 번이다. 요점만 들어! 알겠지 단테? 꼭 발 빼지 말고 베르~해주기야! 네 정신건강과 우리의 목건강을 위해서라도!

응, 로쟈! 나 힘낼게! 얘들아, 지켜봐줘. 오늘 이 두 글자로 붉은시선 이름시대는 막을 내리는거야. 힘차게 베, 르, 하고 쓰고서 여전히 허리를 굽힌 채 자신과 가까이 있는 길잡이를 올려다본 단테는 삐뚜름한 입술 호선에 숨이 멎는듯 했음. 오... 망했다. 베르 라고 쓴 글자 위에 손가락이 닿더니 가차없이 뭉개버렸음. 덜마른 잉크가 종이 위에 더러운 얼룩이 되어 사라졌음. 단테는 그 때 처음으로 이 시계머리가 히끕소리도 낼 수 있다는걸 깨달았음. 

"남의 답안을 가로채면 안되지....."

웃는데 왜 무섭지. 이런 상황에서도 단테는 파우스트에게 묻고 싶었음. 푸르, 왜 베르길리우스는 웃을 수록 무서운거야?

"자..... 잘 대답하는게 좋을거야 단테... 기회를 이미 한 번 날렸잖나... 내가 세 번이나 참아주는 사람이 아닌건 잘 알텐데...?"

꿈인가. 꿈이면 좋겠다. 

"수감자들에게 쓰느라 그 안쪽에 들어찬 부품을 다 써버린게 아니라면... 뭐라도 쥐어짜내보시죠, 단테..."

단테는 정말로 자신의 목숨이 초읽기에 들어갔단걸 깨달았음. 사람이 너무 궁지에 몰리면 오히려 침착해진다고 했던가.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차분해진 마음으로 단테는 머리를 굴렸음. 생각해보자, 애칭은 별게 아냐. 내가 애들에게 지어준 애칭이 뭐 유별나게 똑똑하고 기발한거였나? 아니었지. 그래, 지금도 그러면 되는거야. 베로 시작하는 단어 아무거나 떠올려보자... 머릿속은 주인을 버리고 떠난건지 고요하기만 했음. 베... 베... 베로 시작하는 말... 음산한 동요 가락이 귓가에 맴도는 듯 했음. 단테는 반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눈앞에서 불타오르는 붉은 눈을 바라봤음. 성위도 못 새기고 이렇게 가는구나. 별 보고 싶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왜냐하면 고개를 들어 별을 보면 되니까. 단테는 고개를 들었음. 하늘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둠 속에서도 시뻘겋게 타오르는 빛은 보였음. 붉은 빛... 타오르는듯 강한... 뚜렷하게 빛나는...

붉은 별.

[...아.]

단테는 거의 가사상태에 빠진 머리로 손을 움직였음. 평소보다 이리삐뚤저리삐뚤 대충 굴린 흙덩이같은 글자가 나열되겠지. Betelgeuse... 붉은 눈동자가 움직이는 펜촉을 따라갔음.

"...베텔기우스?"

단테의 손을 살짝 치운 베르길리우스가 단어를 읽었음. 정신이 돌아온 단테도 자기가 쓴 단어를 내려다봤음. 베텔기우스. 아, 왜 잊고 있었을까.

[별이야. 적색 초거성.]

단테는 말하면서 동시에 손을 움직였음. 종이 빈 자리에 글이 한줄씩 늘어났음. 베르길리우스는 묵묵히 단테가 하는 모습을 눈에 담았음.

[겨울 하늘에서 볼 수 있고, 크기가 아주 큰 별이고... 밝기가 변해. 당신 눈처럼...]

"내 눈처럼."

작게 따라하는 목소리는 아까만큼 무섭지 않았음.

[화나면 점점 붉은 빛이 강해지잖아. 꼭 같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렇습니까."

[정말 밝은 별인데도 온도는 차가운 편이야. 그리고...]

아, 단테는 또 한 번 실수했다는걸 깨달았음. 차가운 부분보다, 베텔기우스에 대해 떠오른 사실 하나가 그의 마음에 죄책감을 가져다주었음. 베텔기우스는 죽어가는 별이었음. 아주 거대하기 때문에 일찍이 죽어가는 별. 말을 잘 하던 단테가 어쩐지 죄책감 어린 동작으로 쓴 문장을 지우는 것을 다른 손이 다가와 막았음. 베텔기우스 단어 위로 선을 그으려던 단테가 베르길리우스를 쳐다봤음.

"지우지 마십시오, 단테."

[음, 베르길리우스. 미안한데 이 별이 애칭삼기에 좋은건 아니야.]

"내 맘에 들면 그만 아닙니까."

단테가 망설이는 사이 펜과 종이가 서류철 째로 슥 빠져나갔음. 서류철에서 종이를 빼낸 베르길리우스는 단테를 묵묵히 내려다보다가 피식 웃었음. 

"애칭, 잘 받았습니다. 단테."

나긋한 목소리가 베르길리우스의 입에서 나왔다는걸 깨닫기도 전에 180도를 휙 돌아 평소처럼 돌아온 특색 길잡이는 수감자들에게 협박조로 명령했음.

"곧 도착한다. 입들 다물고 내릴 준비 해."

그말대로 정말 버스는 곧 멈춰섰음. 단테는 베르길리우스가 혹여 말이라도 걸까봐 얼른 엉덩이를 떼고 후다닥 튀어나갔음. 이상하게 얼굴이 홧홧했음. 정신을 놓고 한 행동을 정신머리가 돌아온 상태로 돌이켜보자 미치도록 부끄러웠음. 수감자들이 웅성웅성 뭐가 문제냐고 묻는 소리가 들렸지만 단테는 얼굴을 가리고 손만 휘저었음. 벌써 버스로 귀환한 다음 베르길리우스 얼굴을 어떻게 봐야할지 막막했음. 

버스 안에 남은 베르길리우스는 빼낸 종이에 적힌 문장을 보다가 조용히 종이를 접었음. 베텔기우스. 처음 알게 된 별의 이름을 기억하며, 붉은 눈의 길잡이는 제 관리자가 준 애칭을 고이 갈무리해 품안에 집어넣었음. 베르, 기분 좋아 보여. ...그렇군. 부정하지 않으며 베르길리우스는 웃었음.









림컴 세계에 베텔기우스 있는지 모름.. 사실 베텔기우스가 뭐하는 별인지도 잘 모름 틀린거 존많
파우스트 애칭은 원작에 나오는 발"푸르"기우스의 밤에서 가져왔고 홍루는 가보"옥"에서 이상은 작가 가명인가 하는 하융에서 따왔는데 진짜 하나도 안 중요함
베르가 처음부터 내 이름 말하라고 하지 않은건 말 안해도 단테가 알아서 불러주길 바라서 였을듯 
베르단테긴한데 베르---><-단테 에 가까울듯
읽어줘서 ㅋ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