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https://hygall.com/530567524



자신의 희락기가 어떠하리라고 예상해 본 적이 없다. 황제와 모진 밤을 여러 날 보내는 동안 몸이 제법 상했다. 문지방이 닳도록 처소에 드나든 궁의는 몸에 무리를 주지 말라는,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충고를 하였다. 특히 주기를 끊는 약으로 혈자리를 몇 군데 막았으니 각별히 건강에 유념하지 않으면 희락기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강조하면서. 더 나은 미래가 있으리란 희망이 요원하였던 시기다. 궁의의 충고는 사실상 선고였다. 마치다는 조심하겠다고 대답하면서도 속으로는 희락기를 포기하였다. 기대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포기도 쉬웠다. 


사람일이란 참 모르는 것이다. 그는 오늘 갑작스러운 첫 희락기를 맞았다. 그리고, 중요한 배움을 얻었다. 통상 사람들이 귀히 여기는 건 함부로 포기하는 게 아니라고. 


고백하건대 그는 음인의 몸으로 살아오면서도 희락기에 대해 잘 몰랐다. 지식이 부족하였다는 뜻이 아니다. 중요성을 몰랐다는 뜻도 아니다. 희락의 체험적인 면을 실감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왕가의 일원으로서, 대통을 잇는 문제는 제일의 화두였다. 희락기는 회임과 직결되는 사항이었으므로, 그의 머릿속에서는 희락기가 음인의 삶에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가임기 쯤으로 치부되었다. 실제로 겪어보면 무언가 추가적인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대단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머리로만 알던 것과 실제는 판이하게 달랐다. 희락은 만개였다. 형언하기 어려운 힘들이 몸의 속과 밖에서 피어오르고, 지금까지 봉오리졌던 몸이 완전히 열리는 신비. 그건 가임이라는 낱말에 갇힐 수 없었다.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이전에, 자신부터가 다시 태어나는 경험이었다. 그 기간을 희락이라는 거창한 명칭으로 부르는데는 다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역사와 문화가 달라도 첫 희락기를 축하하는 풍습은 만국공통이다. 고국인 북부에서도 왕가의 음인이 첫 희락기를 맞이하면 축하연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타국을 유학하던 시절에도, 어느 마을의 아무개가 첫 희락기를 기념하는 큰 잔치를 벌였다고 하여 초대받은 적이 있었던가. 마치다는 귀빈으로 그 자리에 참석해 주인공에게 축사를 하였다. 그 당시에는, 솔직히 무엇을 축하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좋은 마음으로 어디서 주워들을 덕담을 건넸다. 그 덕담이 가식이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나, 만일 시간을 되돌려 다시 그 아무개를 축하할 수 있다면, 마치다는 진심을 다해 하늘이 당신을 축복한다고 말할 것이다. 


눈을 감고 꽃잎과 색종이가 흩날리는 그날의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그 화창하고 흥겨운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뭇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축하를 받는 아무개가 있다. 그에게 다가간다. 바삐 손님들을 맞다가 자신을 돌아보는 그.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축언을 건넨다.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아무개는 활짝 웃는다. 세상의 모든 기쁨과 즐거움을 싱그러운 미소로 빚어내며... 마치다는 자신이 그 아무개가 되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아무개가 들은 축언이 다 자신의 것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현실의 벽은 어찌나 높고 냉정한가. 하늘이 찢어지는 천둥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바로 다음 순간, 마치다는 폭우가 쏟아지는 비품창고로 돌아왔다. 창고는 침침하고 냄새가 났다. 문전성시를 이루던 사람들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창고엔 황제와 자신 단 둘 뿐이다. 황제는 귀비를 얼싸안고 바닥에 앉아 쉬고 있었다. 


"이제 열기가 좀 가셨소?"
"소첩은 괜찮습니다. 처소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향이 완전히 가시면. 지금 돌아가면 궁인들 입소문에 황궁 전체가 뒤집어질 거요."


손바닥 안에 만져지는 용포의 비단결... 재물과 권력 만으로는 손에 넣을 수 없는 황제의 품. 거기 안겨 누리는 사치가 상당하다. 그러나 무슨 욕심인지 마치다는 아쉬움을 달랠 길이 없었다. 첫 희락기가 별궁의 외진 처소에서 시작하여 한낱 비품창고에서 끝나려 한다는 사실이, 그리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하고 이대로 잊혀져야만 한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늘 자신의 처지를 수용하고, 참고, 때를 기다려왔다. 그럼에도 창고에서 죽치자는 황상의 목소리가 경쾌한 것은 마치다를 너무 외롭게 하였다. 참아보려고 하였으나 끝내 눈물 한 방울이 빠져나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황상께서는 크게 당황하셨다. 어째서 귀비가 슬피 우는지 조금도 짐작하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명민하신 분이다. 금방 까닭을 아셨다. 황상께선 어깨를 다독여주셨다. 그리고 더 꼭 당겨 안으셨다. 


"미안하오. 그대가 이처럼 아름답게 피었는데 축하도 못 해주어 면목이 없구려.. 꼭 섭섭하지 않게 보상해주리다."


보상이 무슨 소용일까. 처음이란 지나가버리면 끝인데. 대저 귀비의 희락기란 먼저 서운한 표를 내지 않으면 무엇이 문제인지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사소한 일인가... 하기사 남탓 할 입장은 아니다. 자신만 해도 겪기 전까지는 별 거 아닌 사건으로 치부하지 않았던가.


"..지금도 섭섭하지 않습니다."


이를 꽉 악물고, 다시 마음을 독하게 먹는다. 어리광을 부려도 정도가 있지. 섭섭해도 섭섭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귀비의 무게다. 마치다는 울적한 기분을 억지로 밀어냈다. 






적적한 시간이 흘러 희락기의 흔적이 가셨다. 그들은 먼지를 털고 일어섰다. 폭우는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더 기다려도 의미가 없을 만큼. 


"그만 가십시다."
"예, 폐하."


손등으로 이마만 가리고 밖으로 나왔다. 애매하게 마른 옷이 빠르게 다시 젖어들어갔다. 그들은 빗물에 무거워진 옷을 질질 끌고, 눈도 못 뜨게 쏟아지는 빗물을 훔쳐내며 처소로 돌아갔다. 황제는 우산도 시중도 없이 무턱대고 빗길을 뚫고 온 몇 시진 전의 충동을 후회하였다.


"내 이 성질머리를 뜯어고치지 않으면 그대의 낭군이 아니오."


황제는 용포를 벗어들고 귀비의 머리를 가려주려고 하였다. 거추장스럽기만 하고 빗줄기를 막아내기엔 턱도 없는, 성가신 배려였다. 그 행위는 딱 한 가지 면에서 의미있었다. 황제의 심경이 몹시 미안하고 복잡하다는 것을 귀비도 느꼈다는 것.


마치다는 부담감을 느끼고는 용포를 만류하였다. 감히 황제를 내의 차림으로 쫄딱 젖게 할 수는 없는데다, 번거롭게 비를 가리는 행동이 오히려 빗속에 머무는 시간을 지체시켰다. 그는 차라리 빨리 처소까지 달리자고 권하였다. 그리하여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황제는 귀비를 따라 채신머리 없이 흙탕물을 밟고 내달렸다. 


경주하듯 처마 아래로 뛰어들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나인이 산짐승 마냥 물기를 털어내느라 바쁜 황제 내외를 발견하였다. 나인이 순간적으로 지어보인 그 충격적인 표정이란... 부랴부랴 찾아온 상궁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노련한 그녀는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하고 즉시 목욕물과 새 의복을 준비시켰다. 그녀는 또한, 나인들을 둘씩 짝짓게 하여 황제와 귀비의 탈의를 도왔다. 나인들은 물에 젖어 잘 벗겨지지 않는 옷을 이리저리 당기며 애를 먹었다. 평범치 않은 윗전을 모시느라 궁인들도 참 고생이다.


볼썽사나운 소동이 마무리 되었다. 마치다는 다시 고운 자태로 쾌적한 방에 앉아 품위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겉만 멀쩡해졌지, 아직 그는 첫 희락기를 창고에 묻은 설움과 싸우고 있었다. 그 마음을 헤아린 황제는 밀린 집무도 팽개치고 처소에 눌러 앉았다.


황제는 자꾸 소소한 것들을 대신 해주려고 하였다. 목욕할 때는 등을 닦아주고, 다과를 할 때는 간식을 먹여주고, 적막감을 없애느라 먼저 담소를 시도하거나, 혹은 창고에서의 일을 사과하였다. 참으로 다정하시지만... 그 때 마다 마치다는 조금씩 지쳤다. 황제는 안절부절 못하며 한시라도 빨리 귀비의 기분이 나아지길 바라신다. 그러나 냉정하게, 그건 불가능한 바람이다. 주먹구구식 배려 또한 그분이 편해지고자 하는 행동이지 귀비를 위한 행동은 아니었다. 


혼자 있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슬픔에 빠질 시간이 필요했다.


"케이.. 어떻게 해야 기분이 풀리겠습니까."


연심이 지극해지면 곧잘 말씀을 높이시더니 지금도 그러신다. 그리고 계속 보채신다. 슬플 권리는 포기해야 하는가. 귀비에겐 슬플 권리 조차 없는가. 그러나, 사랑에 빠지면 사람은 바보가 되는지, 애타는 황제의 눈빛이 제 몫의 슬픔보다 더 아팠다. 가슴 속에 초조함이 짙어졌다. 아무래도 양보해드려야 할 성 싶다...


‘정인의 희락기 하나 축하해주지 못하니 얼마나 면목이 서지 않으시겠지... 황상께선 난처하신 게야.’


혼자 있게 해달라는 청을 목구멍까지 올렸다가 도로 삼켰다. 대신 넌지시 다른 주제를 꺼냈다. 


"소첩이 폐하께 여행의 뒤풀이로 삼을 연회 주최안을 올렸사옵니다만.."


조용했다. 윤허하시지도 불허하시지도 않고, 고요의 시간만 어색하게 흐른다. 갑자기 이 주제로 전환될 줄은 예상하지 못하신 것 같았다. 한참 뒤에 황제는 한숨처럼 말했다.


"상소는 읽었소. 현명하더군. 후궁들끼리 자랑하고 경쟁할 자리를 만들어, 불만은 불만대로 해소하고, 싸움은 그들끼리 시키고. 그대는 조용히 숨어 있기에 용이해지고. 여러모로 탁월하다 여겼소."
"허면 윤허해 주시는 것이옵니까."


황제는 말을 아꼈다. 그분의 용안에 번지는 피로감과 회의감을 읽을 수 있었다. 불허의 기미가 느껴졌다. 역시 참석하기 어려우신가... 나름 묘안을 고안해 냈다고 자신하지만, 나랏일이 연회 일정에 맞춰 딱딱 끝날 리는 없으니 쉬이 윤허하기 힘들지 모르겠다. 혹 불허하시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비록 못난 내면은 벌써 낙심하고 있었지만. 


"상소를 읽을 때부터 마음에 걸린 것이 있소. 그 연회는 후궁들을 띄워주기 위한 연회요."
"예. 그것이 목적인 연회이옵니다."


불허의 이유라도 말씀해주시는가 하여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황제는 예상과는 영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여행의 마지막이 될 연회 아니오. 헌데 그대가 즐길 거리가 하나도 없지 않소.."
"...."


너무 당연한 말씀을... 마치다는 함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불허하신다는 것인지, 윤허는 하겠지만 재미난 요소를 더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무슨 다른 뜻이 있는 것인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모르겠다.


황제는 자못 속상한 어조로 설득하였다.


"내 말을 못 알아들으시겠소? 그 연회장에 앉으면 그대는 눈총만 잔뜩 받으며 내내 가시방석을 버텨야 한다니까. 위아래도 모르는 후궁들은 뭐하러 챙긴다고 그런 연회를 여시오."


마치 미래에 다녀오신 것처럼 예견하신다. 실은 마치다 역시 생생하게 연회장의 풍경을 그릴 수 있었다. 후궁들은 한껏 치장을 하고 나와 자신은 돋보이고 남은 끌어내리려고 혈안이 되리라. 누군들 경쟁 상대가 아니겠냐만 시침을 독차지하는 귀비는 공공의 적이므로 작은 것 하나라도 수틀리면 그들은 귀비를 상대로 연합공격을 펼칠 것이다. 어디 그 뿐이랴. 귀비가 무슨 볼 만한 재주라도 펼쳐 자신들을 망신주지는 않을지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할테지. 더구나 귀비는 희락기를 맞아 백옥 같은 피부를 빛내고 있으니 질시를 받지 않으려면 일부러 탁한 분칠까지 해야 할 판이다. 


무슨 수난이 있을지 다 짐작하고 있다. 그럼에도 연회를 주최하려는 의지는 확고하였다. 귀비된 자로서 후궁들을 돌보는 책임을 방기할 수는 없는데다, 지금 고생해서 후궁들의 불만을 풀어두어야 차후에 후궁들 등쌀에 덜 시달릴 것이다. 그러니 연회는 마치다 자신을 위해 계획한 것이기도 했다. 물론 황상과 함께할 구실을 마련하고픈 욕심도 컸다.


"폐하와 함께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자리 아니옵니까. 즐길 거리는 그것으로 족하옵니다."


진심이었다. 어떤 연회를 열든, 누가 앉아있든, 그것이 마치다가 가장 기대하는 연회의 재미다. 그런 재미가 있기에 독이 들끓는 연회장이 될지라도 버틸 만 했다. 황제는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따라 속에 든 마음의 고통도 같이 쏟아내시는지 숨소리가 묵직하다. 


"재주를 발표할 차례가 되어도 그대는 아무것도 뽐내지 않겠지. 마음 먹고 겨루고자 하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거면서."


귀비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시는 말씀에 설핏 웃음에 나왔다. 듣기는 좋으나 과찬이시다. 마치다는 승부욕이 조금 있기는 하나 겨루는 족족 이길 자신은 없었다. 그래도 질 자신이 없는 재주가 하나 있기는 한데, 그는 남무를 잘 추기로 유명했다. 고국에서는 왕자의 남무가 시작되면 뒷간 청소하는 구실아치들도 하던 일을 팽개치고 몰래 구경하러 왔다.


......결국 다 공허한 이야기다. 귀비는 이번 연회에 시문을 지어 갈 계획이었다. 물론 그저그런 시문으로. 낭송도 시시하지만 너무 성의없지는 않게 하려고 한다. 여하간에 지금은 무엇이든 숨겨야 하는 때였다. 


"이기고 지는 대결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함께 즐기고자 여는 자리입니다. 게다가 소첩은 실력으로 나서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멀었기는.."
"연회를 윤허해 주시겠사옵니까."


재차 부탁드렸다. 황제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뜻대로 하시오. 이번만이 아니라 다음번에도 얼마든지 윤허하겠소. 귀비가 마음껏 장기를 선보일 수 있을 때 더 좋은 여행지에서 더 화려한 연회를 엽시다. 그때는 아무것도 감추지 말고 마음껏 펼쳐보이시오." 


속상한 마음은 비단 귀비만 가진 게 아닌가보다. 아직 첫 번째 연회도 열지 않았는데 황제는 벌써 다음을 기약하였다. 마치다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나중을 약속해주는 게 어딘가. 매번 '나중'이라는 것이 여전히 서럽지만. 


억지 미소를 본 황제는 시선을 돌리더니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근래에 그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소."


먼곳을 보는 황제의 뒤통수가 쓸쓸하고 초라하다. 그분은 담담하게 말씀을 이어갔다.


"내가 무능해서 그대를 숨기고 사니 이 꼴이 났지. 못난 내 모습을 부정하려고, 후에 귀비에게 무엇을 포상할지 상상하며 현실을 잊을 때가 많았다오. 오늘도 창고에서 그대의 마음은 모르고 꽃길 걸을 날만 기대하며 들떴소. 헌데 그게 다 회피 아니겠소..."


이상한 기분이 휩싸였다. 두런두런 실패담을 참회하는 이 사람은 황제가 아니었다. 지독한 사랑에 빠진 외로운 청년이었다. 적어도 마치다의 눈에는 그렇게 비춰졌다.


"이제 그만 쓰디 쓴 현실을 직면하려고 하오. 적어도 그대가 받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 그거 하난 좋더군."


황제는 떫은 속마음을 비틀어 미소로 만들었다.


"희락기를 그냥 지나가는 설움은 나중에 보상한다고 채워지는 허전함이 아닐 거요. 그대의 슬픔을 나눠 가지게 해주시오."


자신 없는 목소리에서 가난이 느껴진다. 말씀 이편에 있는 순수한 슬픔이 심금을 울렸다. 마치다는 알 수 있었다. 그 슬픔은 이미 귀비에게서 가져가신 것이었다.


입술을 달싹이며 생각했다. 황제가 슬퍼하시는 모습은 보고싶지 않았다. 그분이 슬퍼하면 마치다의 가슴도 아렸다. 이를 어쩌지. 너무 어리광을 허용하시면 안 된다고 엄격한 태도로 일관할까. 별로 슬프지 않다고 의연하게 대처할까. 폐하께서는 슬프지 않으셔도 된다는 위로해 드릴까. 알아주시는 것만으로도 황공하다고 사양할까.


그러나 그 중 어떤 것도 마치다의 진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그런 공허한 말은 어렵게 열어보인 황제의 진심을 단칼에 잘라내는 것이다. 그건 겸양이 아니라 무례함이다. 


"하오나.. 폐하께 불평을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제발 불평이라도 하세요. 케이의 얼굴이 너무나도 가엾어 차마 못 보겠습니다.."


이왕 공감해 주시는 것, 차근차근 애로사항을 털어놓을까 하였다. 헌데 그리 되지가 않았다.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다. 그리고 그걸 신호탄 삼아 묵혀둔 감정들이 일시에 들고 일어났다.


"소첩이.. 하루만 투정을 부려도 되겠사옵니까...!"
"내 앞에서는 꼭 의젓하게 계실 필요 없습니다."
"흑.. 흐윽... 흑!"


마치다는 황제 앞에서 소리내어 울었다. 얼굴이 벌개지도록 눈물을 쏟고 대성통곡을 했다. 불평이든 설명이든 나올 틈은 없었고 필요하지도 않았다. 황상께서는 손수건을 건네셨다. 그러나 손수건보다 원하는 건 황제의 품이었다. 마치다는 그분께 안겨 금빛 용포에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후련해질 때까지 실컷 오열하였다. 






빗줄기가 얇아진 어느 날, 작지만 특별한 연회가 열렸다. 형형색색의 고운 비단으로 차려입은 후궁들이 정자에 모였다. 모두들 어찌나 공을 들였는지 분내가 십리 밖에도 났다. 귀비는 본디 의복의 화려함이 법으로 정해져 있으나 오늘 만큼은 수수해 보였다. 세 후궁들의 경쟁적인 치장이 귀비의 존재감을 가린 결과였다. 덕분에 칙칙하게 비만 내리던 별궁이 화사해기는 하였다. 아리땁기로는 밀리지 않는 묘령의 음인들이 욕심껏 치장하고 모였는데 칙칙할 수가 없었다.


숙비는 모란 그림을 그려왔다. 귀족 집안의 규수로 교양을 익힌 그녀의 솜씨는 탄복할 만큼 뛰어났다. 특히 모란 꽃잎의 색 안배가 일품이었다. 숙비는 제법 감탄하는 황제에게 자신감으로 팽만한 턱을 치켜올렸다. 화비는 창을 준비했다. 구성진 목소리가 제법 뛰어났으나 춤사위는 다소 뻣뻣하여 아쉬움을 남겼다. 현비는 자수를 준비했다. 숙비의 그림 만큼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을 수준은 아니지만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재주였다.


귀비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시문을 낭송했다. 별궁의 자연경관을 애수어린 마음으로 노래하는 시였다. 두 수를 지었는데 그 중 하나는 실력을 들킬 뻔한 아름다운 구절이 잠시 등장하였다. 마치다는 문제의 시 구절을 듣고 놀란 현비의 표정을 보고 아차 싶었다. 다행히 전체적으로는 별볼일 없는 시였다. 그것으로 귀비의 발표는 끝났다. 차례만 주어지고, 있는 듯 없는 듯 지나간 순서였다. 


연회는 의외로 재미있었다. 후궁들은 귀비를 견제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못살게 굴지는 않았다. 자기들 내세우는 데 바빠 그럴 틈이 없기도 했고. 귀비는 후궁들의 장기를 구경하고, 종종 영혼 없는 용안를 훔쳐보며 썩 괜찮은 시간을 보냈다. 황제는 형식적인 박수를 치고 짧게 축사했다.


"다들 수고하였소. 그 동안 이런 재주를 숨겨왔다니 아깝군. 또 이와 같은 자리를 마련하려고 하니 꾸준히 정진하여 서로간의 우애도 돈독하게 하고 나에게도 기쁨을 주시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장기를 선보이고, 칭찬을 하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이상적인 그림이 완성되었다. 이제 술 한잔 나누고 음악을 듣다 헤어지면 연회가 끝난다. 모두들 그리 알고, 오늘 자신들이 이룬 업적이 쓸 만 하였는지, 조금 더 황제를 유혹할 기회는 없을지 계산중이었다. 그런데 음주를 할 때 으레 깔리는 음악이 아무리 기다려도 시작하지를 않는 것이다. 사소한 문제가 있어 지체된다기엔 너무 늦는 감이 있었다. 후궁들은 악단을 힐끔거렸다. 그때 갑자기 황제가 껄껄 웃었다.


"왜. 음악이 필요하시오? 재롱을 부리러 모인 자리인데 나만 쏙 빠질 수 없지. 내게도 발표할 기회를 주시오."


어리둥절한 시선들이 어지럽게 교차했다. 곧 그 시선들은 일제히 귀비를 향해 꽂힌다. 연회를 귀비가 주최하였으니 황제를 위한 숨겨진 순서라도 있는가 의문을 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귀비도 아는 바가 없없다. 대체 무엇을 발표하시려고? 이런 돌발상황은 꼭 귀비를 고생시키는 상황으로 귀결되곤 했으므로 마치다는 긴장으로 손끝이 떨렸다.


황제는 내관에게 손짓하더니 무엇인가를 대령시켰다. 크기가 좀 되는 향단목 상자에서 나온 것은 금琴이었다. 황제는 익숙하게 금을 들어 상석에 배치했다. 마치다는 이제 손끝만이 아니라 발과 가슴도 같이 떨렸다. 이 상황은, 황상께서 직접 금을 연주하시려는 것이다!


눈을 굴려 주변을 살짝 돌아보았다. 공중엔 잔잔한 빗소리가 촘촘히 드리웠고, 후원 연못에서 피어오른 물안개는 그 정취가 그윽했다. 후궁들이 모여 앉은 정자는 알록달록한 색채가 뒤섞여 풍경의 지루함을 덜고, 황제의 늠름한 풍채는 저마다 자기주장 하느라 바쁜 세상에 중심을 잡았다. 이 가운데 영롱한 금 소리가 더해지면 지상낙원이 바로 이곳이다.


귀비에게 스치듯 은애의 눈빛을 건넨 황제는 곡을 소개하였다.


“첫곡. 우천雨天.”


능숙한 운지를 따라 영글어진 금 소리가 울려퍼졌다. 서정적인 선율이었다. 황제는 금을 아주 잘탔다. 곡의 제목도 음율도 처음 듣는데 낯설지 않게 느껴질 만큼. 마치다는 현의 떨림에 녹아든 애잔함을 느끼고는 눈시울을 붉혔다. 우연인지, 악곡의 의도 때문인지, 비품창고에서 올려다 본 하늘이 떠올랐다.


“두번째 곡. 능소화凌霄花.”


멈칫했다. 우천을 감상할 때는 설마했던 추측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황제의 자작곡은 귀비와 함께 넘어온 시련을 담고 있었다. 특히 두번째 곡은 능소화의 만개를 노래하고 있었다. 이는 귀비의 희락기를 공개적으로, 그리고 비밀리에 축하신다고밖엔 생각할 길이 없었다.


정녕 이것이 참인가! 너무 황홀하여 혹 자신의 달뜬 망상은 아닐까 싶다. 마치다는 황제와 눈을 마주치려고 하였으나, 황제는 눈을 감고 연주에 몰입해 있었다. 마치다도 따라서 눈을 감고 황상께서 주시는 음악에 빠져들었다.


“마지막 곡. 애심가哀心歌.”


애심가는 무겁고 구슬펐다. 며칠 전 마치다가 황제의 품에다 눈물로 다 풀어낸 한이, 황제에게는 아직도 넘치는 홍수를 이루는 듯이...... 마치다의 가슴도 먹먹해졌다. 그는 남몰래 눈물을 훔치고는 표정을 고쳤다.


중후반부에 이르러 연주는 전조를 이루며 잔잔한 희망을 기리고 끝났다. 그리고 그 순간 작은 기적처럼 비가 그쳤다. 맑아지는 날씨에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했다. 마치다는 술을 들이켰다. 맛이 달았다.


후궁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들은 평소 황제를 필요할 때 권력을 꺼내는 넉넉한 주머니 쯤으로 취급했지만, 오늘 이때 만큼은 준수하고 근사한 낭군님으로 삼고싶은 듯 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세상 기쁨을 다 가진 듯 입가를 벙긋거려도 귀비가 느끼는 기쁨을 능가할 수는 없으리라. 완벽하게 귀비를 위한 서사로 쓰인 곡이고, 황제의 마음이 담긴 연주였는데, 어떻게 귀비보다 행복한 이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마치다는 후궁들 앞에서 너무 들뜬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간질거리는 웃음이 자꾸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그렇게 첫 희락기의 추억은 한 폭의 수묵화처럼 물들어가고 있었다.

 






별궁편 끝.
너무 늦었다.... 현생이랑 병행이 힘들어서 ༼;´༎ຶ ۝ ༎ຶ༽
2023.03.19 18:44
ㅇㅇ
모바일
내센세오셨다
[Code: e1ff]
2023.03.19 18:59
ㅇㅇ
모바일
연회때 노부 사람들 다 있는 앞에서 즈그 케이 위한 연주 하는거 존멋....
[Code: e1ff]
2023.03.19 18:46
ㅇㅇ
선설리부터 달러 내려왔는데 별궁편만 끝이라는거고 계속 억나더가 있다는거죠 센세?????
[Code: 9491]
2023.03.19 18:48
ㅇㅇ
모바일
기다렸어 센세ㅠㅠㅠㅠ 늦어도 와주기만 하면돼ㅠㅠㅠ
[Code: 7a8d]
2023.03.19 18:5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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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ㅠㅠㅠㅠㅠ
[Code: fa57]
2023.03.19 19:0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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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케비는 오늘 센세 오실 것 같은 느낌이었어 센세랑 통했어
[Code: de47]
2023.03.19 19:2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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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는 즈그 케이 생각만 하고 케이는 노부랑 함께 술잔 기울이는게 가장 재밌고 놉맟 서로만 생각하고 있는거 찐사랑 ㅠㅠㅠㅠㅠㅠ
[Code: 1d03]
2023.03.19 19:23
ㅇㅇ
이야.. 노부... 완전 로맨티스트잖아ㅠㅠㅠㅠ 느그 케이 좋아한다 노부야ㅋㅋㅋㅋㅋ
[Code: 7b02]
2023.03.19 19:2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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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가 어르고 달래주고 투정 부리라고 즈그 케이 받아주니까 노부 품에서 오열하는거봐ㅠㅠㅠㅠㅠ 앞으로도 참지말고 노부 품에서 투정부리고 울고싶으면 울고 하고싶은말 있으면 다해ㅠㅠㅠㅠㅠ
[Code: 7ebd]
2023.03.19 19:2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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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사랑해ㅠㅠㅠㅠ 억나더ㅠㅠㅠㅠㅠ
[Code: 7ebd]
2023.03.19 19:37
ㅇㅇ
아이고 첫희락기 창고에서 보내고 그냥 넘어가게된게 서운했구나 그래도 노부가 그거 다 알아주고 이벤트 열어줘서 다행이다ㅠㅠ
[Code: 9473]
2023.03.19 19:4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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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노부가 케이 마음 공공연히 몰래 달래주는 거 너무 멋있다..... ㅠㅠ.... 센세 항상 고마워 덕분에 오늘 하루가 행복해
[Code: 8e5a]
2023.03.19 19:5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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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노부 자기 마음 인정한 이후 계속 벤츠였지만 존나 벤츠 그잡채 ㅠㅠㅠㅠ 연주로 희락기 축하해주는 거 존나 멋져 내센세도 너무 멋져
[Code: 5920]
2023.03.19 20:0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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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놉맟이라면 상상못할 염천 너무좋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5ca7]
2023.03.19 20:1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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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그 케이 들떠서 웃음 못참았다는거 노부도 알게됐으면 좋겠다 저랬다는 얘기 들으면 노부도 좋아할 것 같아ㅋㅋㅋ
[Code: 8b35]
2023.03.19 20:2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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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진짜 글이 너무 아름다워요........
[Code: db6f]
2023.03.19 20:3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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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어떻게 이러지????? 고소할거야 센세....글 읽다가 좋아서 죽을 것 같을 때마다 이마쳤더니 지금 이마 없어졌어요ㅠㅠㅠㅠㅠ
[Code: 4e38]
2023.03.19 20:3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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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는 금 아름다운 것도 대박인데 케이와의 사랑을 담은 연주라니 완전 애처가 다됐다ㅠㅠㅠ언젠가 케이 남무 보고 감탄했으면 좋겠다ㅠㅠㅠㅠㅠ
[Code: 4e38]
2023.03.19 21:06
ㅇㅇ
감히 현생이 내 센세를 힘들게 하다니 센세가 언제와도 부케비는 항상 기다리니까 미국만 가지말고 부케비들이랑 억나더로 함께해요
[Code: 3cfb]
2023.03.19 22:18
ㅇㅇ
연회에 대해 왜 대답없었나 했더니 연회도 즈그 케이 걱정해서 하기 싫어한 거라니 노부 진짜 벤츠... 마치다도 자기 속상한데도 노부 입장 계속 생각해주고 노부 마음 이해해주는 벤츠 놉맟 쌍방벤츠.... 노부가 연주해줬으니까 케이는 어서 시문 읽어주자ㅠㅠㅠ
[Code: 317d]
2023.03.20 15:2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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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 둘이 너무 달달하다 센세…
[Code: 0665]
2023.03.20 23:2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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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너무 아름답다는거 딱이다 센세글 읽으면 그 상황의 놉맟 마음이 그대로 너무 잘 와닿아서 읽는 내가 애틋하고 아련하고 행복해짐.... 읽을 때마다 눈물나요 센세ㅠㅠㅠㅠㅠ
[Code: 65b3]
2023.03.20 23:2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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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마치 특징이라고 해야하나 글 속에 너무 잘 녹아있어서 또 존좋ㅠㅠㅠㅠㅠ케이 성격은 말할 것도 없고 또 노부 가수도 하니까 금 켜는 걸로 녹아내다니 센세는 천재인가...?
[Code: 65b3]
2023.04.01 23:05
ㅇㅇ
센세 기다리고 있어요ㅠㅠㅠ
[Code: 53dd]
2023.04.02 22:2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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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보고싶어ㅠㅠ
[Code: 8977]
2023.04.06 20:34
ㅇㅇ
센세 기다릴게ㅠㅠㅠㅠ
[Code: 7b47]
2023.04.20 00:5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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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보고시퍼...
[Code: d41c]
2023.07.09 15:5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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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그케이 위해서 서프라이즈 세레나데 해주는 노부........
ㅠㅠㅠㅠㅠㅠ케이 항상 너무 짠했는데 언젠가 꼭ㅠㅠ보상받길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5270]
2023.07.09 15:5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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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도 센세의 글을 읽는 순간 여기도 비가 그쳤다....너무 신기하다...내센세는 신이다
[Code: 5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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