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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1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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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이리스는 어때?” 클락이 말했다.
“그건... 안 돼.” 할이 잠시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 “둘이 헤어진 지 좀 됐어. 안 좋게 헤어진 건 아니고 연락도 하는데, 맡길 사이는 아니야. 게다가 민간인이고. 만에 하나 어려진 플래시를 대상으로 누군가 공격하려고 한다면 지키기 어려울 거야.”


빠르게 사족을 덧붙였지만 클락의 얼굴이 이미 당황해서 약간 붉어져있었다. 친구가 없는 자리에서 사적인 일을 나누는 것조차 보이스카웃에게는 조금 남부끄러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머쓱하게 뒷목을 주물렀다. 할이 회의실 의자에 뒤로 기대며 다른 이름을 던졌다.


“비슷한 이유로 배리의 아버지도 어렵겠네. 클락, 너는 어때?”
“나도 괜찮고 아마 로이스도 괜찮겠지만, 나도 빌런이 있고 패트롤 때문에 집을 수시로 비워야 하니... 저 상태의 배리라면 오랜 시간 같이 붙어있을 수 있는 사람이 더 낫지 않을까?”
“수퍼보이가 있잖아.”
“존은...”


클락이 조금 껄끄러워하며 입가를 쓸었다.


“거긴 안 돼.” 브루스가 때를 놓치지 않고 낚아채듯 말했다. “로이스 말로는 수시로 튀어나간다고 하더군.”
“혹시 그 튀어나가는 거에 네 아들 지분이 많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해봤지. 그러니까 적합하지 않다는 얘기를 하는 거잖나.” 클락의 작은 항의를 가볍게 쳐내고는 말을 이었다. “사실, 내 생각에는, 할, 네가 가장 적합해.”

“나??”


의자가 거의 뒤로 넘어갈 뻔했다. 할이 급하게 등받이를 바로세우며 자세를 잡았다.

“무슨 소리야?”


사실은 그렇게 하고 싶었다. 나이가 몇 살인지에 상관없이, 이 자리에서 ‘슬픈 배리 앨런’을 제일 견딜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할이었다. 할이 배리를 알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너무 지난 시점이었다. 이 시기의 배리 옆에 있어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보고 열 살짜리를 맡으라고? 그게 정말 좋은 방법 같아?”
“사실,” 빅터가 존과 시선을 교환했다. “괜찮은 생각 같은데요.”


이 사람들 진심인가? 할이 입을 떡 벌렸다. 친구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과 어린 아이를 다루는 것은 많이 다른 개념이었다. 조카 둘에게 가장 좋아하는 삼촌으로 못을 박아놓은 시점에서 스스로도 그렇게 아이들과 잘 못 지내지 않는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지금 얘기하는 건 내성적이고 상처받은 아이였다. 할의 조카들은, 장담하건데, 성격에 스펙트럼이 있다면 배리와는 양 끝단에 위치하고도 남을 아이들이었다.


"더 중요한 할 일이라도 있나? 당분간은 오아에 나가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만... 내가 애를 잘 다룰 수 있을 지 자신이 없는데. 어른 하나에 애 하나면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지 않겠어?"


브루스가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물론, 네가 애처럼 군다는 점에는 나도 이견이 없지만, 배리가 충분히 어른스러우니까 균형이 맞을 거야."
"푸하! 하하하! ...어, 크흠."


배를 잡고 웃던 클락이 민망한 표정으로 황급하게 기침을 했다.

“...미안. 나도 괜찮다고 생각해. 영특한 아이야. 이해심도 많고. 챙기는 데에 필요한 건 나나 로이스가 도와줄게.”
“하지만...”


할이 다시 한 번 항의해보려고 했지만 브루스가 한 발 더 빨랐다.


“첫째, 앞으로 최소 몇 개월 간 오아에 나갈 계획 없음. 둘째, 따로 지낼 집이 있는 것도 아니지. 배리네 집에서 같이 살면 딱 좋군. 셋째, 여기서 플래시를 가장 잘 아는 건 너고. 또 할 말 있나?”
“하지만-”
“식비, 집세 포함 필요한 모든 돈은 내가 내지. 너한테 들어가는 것까지 포함해서.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도와줄 거야.”
“그... 이미 정해놓고 물어보는 거 아냐?”

지금 누구한테 하는 말이야? 라는 듯이 브루스가 뚫어져라 쳐다봤다. 어련하시겠어. 할이 눈을 굴렸다. 집과 돈을 대주신다는데. 그러면 더 이상 반박할 말도 없었다. 사실 당분간 전선에 뛰어들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다른 멤버들에게 맡기는 것도 미안하긴 했다. 히어로 일과 기억 잃은 어린 영웅을 보호하는 일을 병행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결정된 것 같군요.”
“그러면 데리러 가도록 하지.”


브루스가 찬바람을 일며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한숨 돌릴 타이밍이었다. 모두에게 참 기나긴 하루가 끝나려면 아직도 멀었다.
다른 사람들이 앉아서 쉬는 사이에 할이 급하게 일어나서 따라붙었다. 꼭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얘기가 있었다.


“브루스, 잠깐만.”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로 카울이 살짝 이쪽을 향했다.

“나는 이게 좋은 생각인지 모르겠어.”
“트라우마 때문에?”


할이 쓴 약을 삼킨 사람처럼 고개를 마지못해 끄덕였다. 브루스가 한쪽 입가를 끌어올렸다.


“랜턴, 나는 그 트라우마 때문에 네가 가장 낫다고 생각하는 거야.”
“왜, 경험해 본 사람이 잘 알아서? 내가 얼마나 방황했는지 알잖아. 나는 공군에 들어갈 때까지는 정신도 제대로 못 차렸던 사람이야. 지금의 배리한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고. 트라우마로 치면 네가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브루스가 한숨을 쉬었다. “공군에는 갑자기 들어갔나? 너는 네 아버지의 죽음을 봤을 때부터 목표를 정했고, 그걸 극복했지. 배리와 같아. 노라 앨런 살해 후 센트럴 시티 경찰 수사팀 연구원이 될 때까지 한 길이었어. 나? 나는 극복했다고 하기는 어려워, 랜턴.” 그는 망토와 카울을 차례대로 가리켰다. “나는 아직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그걸 원동력으로 살고 있는 것과 같아. 이것도 극복의 한 방법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내 방법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배리 앨런에게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할이 한 대 맞은 것처럼 깜짝 놀라 상체를 세웠다. 거기까지 고려해서 내린 결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배리와 브루스는 어딘지 모르게 통하는 데가 있었다. 브루스와 범죄나 여러 가지 분야에 대해 몇 시간씩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배리뿐이었고, 그렇게 하면서도 싸움에 가까운 토론으로 번지지 않는 것도 배리뿐이었다. 그래서 그가 더 나은 선택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브루스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말이 잘 통한다고 해서 삶의 결이 같은 건 아니었다. 더군다나 센트럴 시티 출신에게 고담은 지내기 힘든 곳일 것이다.


“결정됐으면, 들어가지.”


말하는 사이에 이미 라운지 앞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멀리 있는 좌석에 제이와 배리가 보였다. 성인 기준으로 만들어진 의자 위에서 바닥에 닿지 못하는 다리가 달랑거렸다. 배리의 앞에는 이미 비워진 접시 서너 개와, 여전히 감자튀김이 쌓여 있는 접시가 있었다. 배리가 부끄러운 듯이 눈을 숙였다. 제이는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죄송해요. 평소에는 이렇게... 먹지 않는데.”
“말해줬잖니. 네 잘못이 아니란다. 우리들의 숙명이지.”


브루스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다가가 배리의 맞은편에 위치한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할은 그 옆자리를 차지했다.


“얼마든지 먹어도 괜찮다. 제이, 훈련은 어떻게 됐나요?”
“이해가 빨라. 많은걸 가르치진 않았지만, 최소한 어디 부딪치지는 않을 거야.”
“고맙습니다. 배리, 들어야 하는 얘기가 있는데, 네가 앞으로 지낼 곳이 필요하거든. 여기는 지구가 아니고, 사람이 상주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 지낼 수 없어. 이해하니?”


“저는 어디로 가나요? 혹시...” 배리는 약간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아빠한테 가나요?”

왜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브루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네가 일반인들 사이에서 지내는 게 좋은 생각인 것 같지는 않구나. 위험할 수도 있거든.”
“나쁜 사람이 저를 공격해서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런 일이 또 생길 것 같지는 않지만, 만약의 경우라는 게 있으니까.”

다행히 상황을 잘 이해하는 것 같았다.

“당분간은 네가 원래 살던 집에 있을 거란다. 물론, 네가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면 언제든 보러 갈 수는 있어.”
“아니, 괜찮아요.”


뜻밖에도 거절이 바로 나왔다. 배리는 손에 묻은 케찹을 휴지로 닦으려 애를 썼다. 일부러 다른 행동에 집중하는 티가 났다. 그들이 알기로는 배리의 부모님이 딱히 자식에게 애정을 주지 않은 적은 없었다. 부부 사이의 문제는 둘째 치고서라도, 최소한 하나 있는 아들만큼은 최선을 다해서 키웠다고 했다. 어머니에게 더 큰 애정이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를 보기 껄끄러워할 이유는 없었다. 할이 의자를 조금 더 바짝 당겨 앉았다.


“왜 보러 가고 싶지 않은지 물어봐도 될까?”

이미 다 닦인 지 오래인데도 손등이 빨개지도록 계속 문지르고 있었다. 제이가 부드럽게 팔을 눌러 제지하자 이번에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저 버릇은 저 나이 때부터 있었군. 할이 생각했다. 서른 살의 배리 앨런도 여전히 가지고 있는 버릇이었다. 뭔가 난처한 일이 생기면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모양이었다.


“...아빠는 잘 계시는 거죠?”
“그럼.”
“그러면... 나중에 봐도 될까요?” 작게 덧붙였다. “정말 이십년이 지난 거라면... 무서워요.”

이런.

“그래, 그렇게 하자. 보고 싶어지면 언제든 말해주렴.”


할이 대답하자 배리가 고마움을 표시했다. 어린아이란 으레 그러곤 한다. 죽음이라는 개념이 뚜렷하지 않은 평범한 가정에서조차도 언젠가 다가올지 모르는, 나를 지켜주던 틀이 변하거나 사라지는 그림을 상상하며 이불 속에서 우울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물론 보통의 아이들은 아침이 되면 언제 울었냐는 듯이 다시 암울한 생각을 깨끗하게 지워내겠지만, 고작 일주일 전에 어머니를 정말로 잃은 아이가 이십 년이 갑자기 훌쩍 지나버린 후의 부모를 직접 대면해야 한다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분일 수 있었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울 새도 없이 빅터와 클락이 들어왔다. 클락은 작은 종이백을, 빅터는 적당한 크기의 상자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게 뭐야?”
“새 신발이 필요할 것 같더군요.” 빅터가 배리의 발을 가리켰다. “아까 신고 있던 건 그을렸잖아요. 사이즈는 맞을 것 같아요.”


이번에는 클락이 품에 안고 있던 종이백을 열어 안에서 옷가지 몇 개를 꺼냈다. 스웨터와 티셔츠, 청바지가 두세 벌씩 곱게 포개져 있었다. 새 걸로 보이는 포장된 속옷도 있었다.


“옷도 가져왔어. 존이 작년까지 입던 건데, 우리 애가 키가 큰 편이라 아마 작지는 않을 거야. 돌려주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아. 혹시 몰라서 속옷도 두 개 챙겼어. 이걸로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고마워.”


브루스가 옷을, 할이 상자를 받아들었다. 상자 안에는 플래시 마크가 새겨진 빨간색 운동화가 있었다. 못마땅하게 눈을 굴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린랜턴 신발을 살 만큼 패션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인가? 초록색도 잘 어울릴 텐데. 플래시한테 플래시 신발을 신기다니 한물 간 유머도 아니고. 하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내용물을 꺼내 얼기설기 꼬인 끈을 풀어내고 다시 제자리에 맞춰 끼웠다.

배리의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부끄러운지 아이의 볼이 약간 달아올랐다. 할이 조심스럽게 그을린 신발 한 쪽을 벗겨내고 발이 다치지 않았는지 확인한 뒤에 새 신발을 신겼다. 반대쪽도 똑같이 끼운 후 어깨 밑에 손을 넣고 몸을 들어 바닥에 설 수 있도록 했다.


“조금만 걸어볼래? 사이즈가 맞는지 보자.”

배리가 제자리에서 종종걸음을 했다.
“...맞는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저...”


말꼬리를 늘이며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눈빛이 물어보는 것을 빠르게 캐치한 할이 웃었다.

“내 이름은 할 조던이야. 아직 말을 안 했었구나. 내가 내일부터 너랑 같이 살 사람이야.”
“...미스터 조던?”

뒤에서 풍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웃음 참기에 실패한 사이보그가 틀림없었다.


“...그냥 할이라고 불러줄래? 네가 날 미스터 조던이라고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
“감사해요, 할.”
“그래.”
“나머지 옷은 내 쪽에서 따로 보내도록 하지.”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모두가 의아한 얼굴을 하고 발언자를 쳐다보았다. 브루스가 당연한 말을 했는데 왜 쳐다보냐는 듯이 들고 있던 옷을 살짝 흔들어보였다.


“옷이 부족하잖나. 아무리 빨리 돌아와도 최소 한두 달 이상 걸릴 수 있다는 전제 하에 훨씬 더 많은 옷이 필요할거야.”
“...그래서 열 살짜리 옷을 네가 골라서 사겠다고? 어디서 사는지는 알고?”
“적당한 브랜드에서...”

“...카드나 줘.” 할이 콧잔등을 엄지와 검지로 쓸었다. 머리가 아팠다. “네 금전감각은 너무... 재벌이야. 네가 재벌인 건 아는데... 네가 말하는 ‘적당한’ 브랜드가 내가 알고 있는 브랜드와 같은 레벨이 아니라는 데에 내 반지를 걸 수도 있거든.”


브루스가 못마땅한 얼굴로 머뭇거리다가 블랙 카드를 내밀었다. 클락이 할의 어깨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는 척을 하며 조용히 속삭였다.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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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안 키우는 거 실화냐? 이쯤 되면 제목 잘못 지음...

 
2021.07.11 23:0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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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너무 좋아서.. 지금 쓰러질것같아요 혹시 지하실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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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2 03:4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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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너무 좋네
[Code: 9daa]
2022.09.06 01:47
ㅇㅇ
모바일
스스로가 어린 아이를 데리고 있기에 좋은 보호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할<< 그치만 그 어린애는 그냥 어린애가 아니고 배리잖아........ 할은 배리 앞에선 슈퍼벤츠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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