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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1 21:23
전편: https://hygall.com/319709397
15.
그래도 그 날 -술에 떡이 되어 진상부린 날- 이후로 좀 더 자주 옆집에 들락거리게 되었다. 대학교에 간 이후에는 확실히 뜸해졌던 왕래가 이젠 이전과 비슷한 정도는 되었다. 가끔 같이 저녁을 먹었고 아주머니가 장 보시는 걸 도와드렸으며 어느날은 그냥 바냐와 수다만 떨다 갔다.
바냐는 우리 대학에 바이올린으로 수석입학했다. 나는 그냥, 그저 그런 평범한 영문학과 학생(대충 성적 맞춰 넣었다). 과가 갈리니까 공통 분모는 줄었지만 덕분에 할 이야기가 더 많았다. 바냐는 자기 방 책상 의자에 앉고 나는 바닥에 누워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그런 일상이 이어졌다.
16.
나보고 자주 오라던 비범한 꼬맹이는 집에 잘 없었다. 도서관에 가서 공부한다나 뭐라나. 밤 10시에 도서관 문 닫을 때 쯤 돌아온단다. 이제 갓 중학교 입학한 학생의 스케줄 치고는 빡빡하지 않나? 싶지만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했다.
그래도 기특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 나는 한번씩 바냐네 집에 가면 꼭 꼬맹이 몫의 초콜릿을 그 애의 책상 위에 두고 왔다.
17.
파이브는 헛웃음을 지었다.
-열심히 하나보다. 힘내! (웃고 있는 고양이 그림)
솔직히 고양이 그림인지는 한참 있다가 알았다. 악필과 평범함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점에 있는 필체가 퍽 귀여웠다. 옆에는 초콜릿들이 종류별로 열 다섯 개쯤 있었다. 파이브는 그 메모를 조심히 떼어 자신의 수첩 맨 뒤에다 붙였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얼굴이었다.
18.
아무리 친해도 그렇지 집 주인이 없는 남의 집에 앉아 있는 것은 퍽 민망한 일이다. 더구나 그 집의 아들을 마주친 경우라면.
-어, 안녕.
-? 혼자 있어?
-음,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인 건 알겠는데 아주머니가 집에 먼저 들어가 있으라고 하셨어. 아주머니 곧 오신대. 바냐도.
알겠어. 꼬맹이는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이제 교복이 퍽 잘 어울리구나, 실없이 생각했다.
19.
-요즘 일찍들어오는구나. 이제 도서관은 안가니?
-응.
-왜 안가니?
-그냥. 도서관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게 낭비같아.
-헐.
옆에서 듣고 있던 바냐가 외마디 감탄사를 질렀다. 나도 속으로 '헐' 이라고 외쳤다. 너 벌써부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니...? 너 아직 열 넷이야 임마. 잔소리가 안개처럼 피어올랐지만 한마디도 못했다. 쫄려서.
-그래. 알아서 하렴.
아주머니가 갈비찜을 내 밥그릇 위에 하나 얹어주시며 여상하게 말했다. 이 비범한 꼬맹이의 어머니가 되려면 저정도 말은 대범하게 넘길 수 있어야하나 보다. 조금 질려서 고개를 돌리자 질려 죽겠다는 얼굴을 한 바냐와 눈이 마주쳤다. 풉, 하고 웃음이 터졌다.
-그러고 보니 벤은 영문학과지?
-네? 네... 그렇죠.
-잘 됐네, 파이브. 영어 모르는 거 있으면 벤한테 좀 물어보고 그래.
-아니, 뭐. 그렇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꼬맹이 쟤가 더 잘할지도 모르는데... 어려서부터 옆집 인간 1로 살면서 천재영재 소년 파이브의 명성을 익히 들어왔던 터라 감사하긴한데,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요즘은 경영학과 애들이 우리학과 애들보다 영어 더 잘한대요.... 뒷말을 웅얼웅얼 삼키는데 아주머니가 갈비찜 감자를 내 밥그릇에 얹어주면서 한 마디 더 얹으셨다.
-어휴, 벤. 너는 어릴 때부터 너무 겸손하더라. 너무 그러는 것도 안 좋아.
-맞아. 답답하게.
옆에서 바냐가 거들었다.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슬쩍 꼬맹이 눈치를 살폈다. 꼬맹이의 눈이 반짝 하는 것 같았다. 그럴게요. 대답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평이해서 잘 못 보았나보다, 했다.
19.
그 이후로 바냐네 집에서 꼬맹이를 자주 마주쳤다. 정말로 일찍 집에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서로 하는 말이라고는 겨우 안녕, 안녕, 나 갈게, 응 따위였지만 그래도 자주 얼굴은 봤다. 야, 꼬맹이. 나 약속 지켰다. 자주 놀라오라는 말, 나 지금 지키고 있다!
20.
어쩌다가 파이브의 영어 과외를 하게 되었다.
생략이 너무 많은 건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 때 식탁 위에서 한 '겸손한' 대화 이후로 말이 계속 이어져서 정신차리고 보니 꼬맹이 방 안이다. 그게 전부다. 정말로 어어어 하다보니까 깜찍한 디자인의 '중학 영문법'을 책상 위에 펴놓고 있고 옆에는 비범한 옆집 꼬맹이가 앉아있다. 아...
차라리 죽여줘....
21.
파이브는 오늘 또 기분이 안 좋아보였다. 파이브 앞자리에 앉은 디에고는 파이브 언짢음 단계 중 5단계임을 깨닫고 (10단계까지 있다. 나름 세분화되어있다.) 오늘은 숨소리조차 내면 안되는 날이구나, 했다.
-하아....
흐으으음... 허어.....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한숨소리가 있는 건지 실험해보기라도 하는 듯 옆에서 10분째 한숨을 내쉬고 있으니 예민한(!) 루서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어봤다.
-왜, 뭐 때문에 기분 안 좋은데.
파이브가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자기 팔을 두드렸다. 솔직히. 조금 쫄았다.
-어느 정도가 평범하게 멍청한 수준이지?
-?
-적당히 멍청해 보여야 과외를 계속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너무 모자라게 보이면 안된다고. 어?
파이브가 자기 앞자리 옆자리를 보더니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니들은 특출나게 멍청해서 도움이 안 돼.....
가만히 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두 남중생이 억울하게 눈을 마주쳤다. 아니 왜 갑자기 딜을 박고 그러냐.....
22.
-파이브는 성적이 꾸준하네.
파이브가 눈을 깜박였다. 모의고사를 쳐도 80점. 다른 학교 시험을 쳐봐도 80점. 2학년 모의고사를 쳐도 80점. 심지어 단어시험을 쳐도 80점이다. 이렇게 하기도 힘들겠다.
-그...그러게.
-계속 점수가 제자리 걸음이라 좀 걱정되겠다.
물론 나도. 아무리 조금 낮은 가격의 과외라 해도-아, 과외비. 정말 치열한 사투였다. 더 주려는 쪽과 덜 받으려는 쪽의 전투와도 같은 협상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도 돈을 받고 있고 심지어 아는 사이이기까지 한데 성과가 없어서야 아주머니 뵐 낯이 없었다.
-괜찮아.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곧 오를거야.
그래. 수학에서는 타고난 신동이라고 들었다. 다른 과목에서 딱히 걱정하는 것을 못 봤으니 아마 국어도 잘할 것이다. 그렇담 오르는 건 금방이리라. 잠시 정체기인 모양이다. 암. 그렇고 말고.
그래도 사기진작이 필요할 것 같긴 했다. 비범한 영재 소년이라는 타이틀에 다소 걸맞지 않는 영어 점수가 아닌가. 그런데도 꼬맹이는 태평했다. 물론 벌써부터 조급할 필요는 없지만 너무 의욕이 없는 것도 좋지 않으니까.
-음, 이번 중간고사 때 90점 넘으면 소원들어줄게. 어때?
-...아무거나?
-어... 적정 가격 이내에서?
-그래. 좋아.
빠르게 딜을 마친 꼬맹이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책을 내려다봤다. 뭐야, 이 심플한 협상. 슬쩍 꼬맹이의 얼굴을 살폈더니 뜻밖에도 은근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다행이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나보다.
23.
파이브가 백점짜리 시험지를 들고왔다.
-야, 잘했다! 진짜 잘했어! 아구~ 기특해! 진짜 대단해!
나는 흥분해서 거의 이 시험지를 이마에 붙이고 마을 한바퀴 돌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우리 꼬맹이가요, 글쎄 백점을 맞아왔지 뭐예요? 천재 아닐까요? 영재로는 좀 부족한 것 같은데.
-중학교 시험인데 뭐.
-야, 중학교 시험이래도 하나도 안틀리기가 어디 쉬운 줄 알아?
아니다, 코팅을 해서 대대손손 남기는 쪽이 더... 옆에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데 정작 꼬맹이는 침착했다.
양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고 나서야 아, 좀! 하면서 반응을 보였다.
-형.
-응?
-소원은?
-아 맞다. 소원들어주기로 했지. 무슨 소원 할거야?
24.
-진짜로?
동네에서 유명한 수플레 팬케이크 집 앞에서 나는 다소 늦은 듯한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 다섯번째야.
...한번 했다고는 안했다.
아무튼 여기는 내가 바냐랑 자주 오는 곳이다. 생긴것과는 어울리지 않게-물론 내가 이렇게 말하면 바냐는 '뭐래, 너 완전 설탕 수인이잖아. 네 별명 몰라? 영문과 허니' 라면서 웃는다. 그래, 나도 웃긴 거 알아.-나는 단 것을 좋아한다. 특히 이집은 내가 우주에서 가장 완벽하다고 평가하는 수플레 팬케이크를 판매하는 곳이다. 정말 의외였다. 늘 블랙커피에 아메리카노가 다 뭐야, 에스프레소를 마실 것 같은 꼬맹이가 여기 수플레 팬케이크를 사달라고 하다니.
-너 단 거 좋아했어?
-뭐... 싫어하진 않아.
그렇다고 막 엄청나게 사달라는 뜻 아니야. 꼬맹이의 눈썹이 살짝 찌그러졌다. 아마 내가 꼬맹이 책상에 초콜릿을 잔뜩 올려다 둔 것을 말하는 모양이다. 알겠어, 알겠다고.
25.
-그런데 소원치고는 많이 소박하네. 소원 말고 그냥 같이 가달라고 했어도 왔을텐데.
팬케이크 하나를 쭉 반으로 자르며 말했다. 그 말에 꼬맹이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누가 봐도 정말이냐는 듯, 의심스러운 얼굴로 내 표정을 열심히 살피는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아니, 진짜로.
-...몰랐네. 아쉽게.
-물려줘?
-아냐, 됐어.
입에 단 게 들어와서 그런가, 이 곳 인테리어가 워낙 러블리해서 그런가. 나보다 한참 어린데 한참 어려운 비범한 꼬맹이가 퍽 귀엽게 느껴졌다. 아직 젖살도 덜 빠졌고 팔에 솜털도 안 가셨다. 정말로 어리구나, 싶어졌다.
그래, 애는 애지.
26.
-그런데 왜 여기로 오자고 그랬어? 단 거 그렇게 안 좋아한다며.
생크림을 푹 찍었는데 이상하게 대답이 늦어 꼬맹이를 쳐다봤다. 꼬맹이는 눈을 끔벅이다가 생크림을 조금 덜어 발랐다.
-그냥.... 한번쯤 와보고 싶었어. 애들이 다 맛있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혼자 오긴 그렇잖아.
그런가. 남자 중학생의 감수성에는 카페 혼자 오기가 영 어려운 일인 모양이다. 나는 천재적인 납득능력으로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그래도, 네 덕분에 여기 오랜만에 오네. 바빠서 잘 못 왔거든.
그 말에 꼬맹이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피어올랐다. 퍽 흐뭇한 얼굴이었다.
-알아.
-안다고?
꼬맹이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그야, 인스타에 맨날 여기 팬케이크 먹고 싶다고 하잖아.
-너 인스타 안하잖아.
-누나가 그러던데.
아하. 나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너랑 내가 취향이 비슷해서 참 다행이야, 라고 하자 꼬맹이는 또 웃었다.
아직 파이브는 14, 벤도 20 와나 이걸 언제 키워서 잡아먹노
+)아맞아. 파이브 바냐한테 들은 거 아님. 벤 인스타 염탐하는 비계하나 따로 있음.
파이브벤
15.
그래도 그 날 -술에 떡이 되어 진상부린 날- 이후로 좀 더 자주 옆집에 들락거리게 되었다. 대학교에 간 이후에는 확실히 뜸해졌던 왕래가 이젠 이전과 비슷한 정도는 되었다. 가끔 같이 저녁을 먹었고 아주머니가 장 보시는 걸 도와드렸으며 어느날은 그냥 바냐와 수다만 떨다 갔다.
바냐는 우리 대학에 바이올린으로 수석입학했다. 나는 그냥, 그저 그런 평범한 영문학과 학생(대충 성적 맞춰 넣었다). 과가 갈리니까 공통 분모는 줄었지만 덕분에 할 이야기가 더 많았다. 바냐는 자기 방 책상 의자에 앉고 나는 바닥에 누워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그런 일상이 이어졌다.
16.
나보고 자주 오라던 비범한 꼬맹이는 집에 잘 없었다. 도서관에 가서 공부한다나 뭐라나. 밤 10시에 도서관 문 닫을 때 쯤 돌아온단다. 이제 갓 중학교 입학한 학생의 스케줄 치고는 빡빡하지 않나? 싶지만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했다.
그래도 기특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 나는 한번씩 바냐네 집에 가면 꼭 꼬맹이 몫의 초콜릿을 그 애의 책상 위에 두고 왔다.
17.
파이브는 헛웃음을 지었다.
-열심히 하나보다. 힘내! (웃고 있는 고양이 그림)
솔직히 고양이 그림인지는 한참 있다가 알았다. 악필과 평범함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점에 있는 필체가 퍽 귀여웠다. 옆에는 초콜릿들이 종류별로 열 다섯 개쯤 있었다. 파이브는 그 메모를 조심히 떼어 자신의 수첩 맨 뒤에다 붙였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얼굴이었다.
18.
아무리 친해도 그렇지 집 주인이 없는 남의 집에 앉아 있는 것은 퍽 민망한 일이다. 더구나 그 집의 아들을 마주친 경우라면.
-어, 안녕.
-? 혼자 있어?
-음,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인 건 알겠는데 아주머니가 집에 먼저 들어가 있으라고 하셨어. 아주머니 곧 오신대. 바냐도.
알겠어. 꼬맹이는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이제 교복이 퍽 잘 어울리구나, 실없이 생각했다.
19.
-요즘 일찍들어오는구나. 이제 도서관은 안가니?
-응.
-왜 안가니?
-그냥. 도서관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게 낭비같아.
-헐.
옆에서 듣고 있던 바냐가 외마디 감탄사를 질렀다. 나도 속으로 '헐' 이라고 외쳤다. 너 벌써부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니...? 너 아직 열 넷이야 임마. 잔소리가 안개처럼 피어올랐지만 한마디도 못했다. 쫄려서.
-그래. 알아서 하렴.
아주머니가 갈비찜을 내 밥그릇 위에 하나 얹어주시며 여상하게 말했다. 이 비범한 꼬맹이의 어머니가 되려면 저정도 말은 대범하게 넘길 수 있어야하나 보다. 조금 질려서 고개를 돌리자 질려 죽겠다는 얼굴을 한 바냐와 눈이 마주쳤다. 풉, 하고 웃음이 터졌다.
-그러고 보니 벤은 영문학과지?
-네? 네... 그렇죠.
-잘 됐네, 파이브. 영어 모르는 거 있으면 벤한테 좀 물어보고 그래.
-아니, 뭐. 그렇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꼬맹이 쟤가 더 잘할지도 모르는데... 어려서부터 옆집 인간 1로 살면서 천재영재 소년 파이브의 명성을 익히 들어왔던 터라 감사하긴한데,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요즘은 경영학과 애들이 우리학과 애들보다 영어 더 잘한대요.... 뒷말을 웅얼웅얼 삼키는데 아주머니가 갈비찜 감자를 내 밥그릇에 얹어주면서 한 마디 더 얹으셨다.
-어휴, 벤. 너는 어릴 때부터 너무 겸손하더라. 너무 그러는 것도 안 좋아.
-맞아. 답답하게.
옆에서 바냐가 거들었다.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슬쩍 꼬맹이 눈치를 살폈다. 꼬맹이의 눈이 반짝 하는 것 같았다. 그럴게요. 대답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평이해서 잘 못 보았나보다, 했다.
19.
그 이후로 바냐네 집에서 꼬맹이를 자주 마주쳤다. 정말로 일찍 집에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서로 하는 말이라고는 겨우 안녕, 안녕, 나 갈게, 응 따위였지만 그래도 자주 얼굴은 봤다. 야, 꼬맹이. 나 약속 지켰다. 자주 놀라오라는 말, 나 지금 지키고 있다!
20.
어쩌다가 파이브의 영어 과외를 하게 되었다.
생략이 너무 많은 건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 때 식탁 위에서 한 '겸손한' 대화 이후로 말이 계속 이어져서 정신차리고 보니 꼬맹이 방 안이다. 그게 전부다. 정말로 어어어 하다보니까 깜찍한 디자인의 '중학 영문법'을 책상 위에 펴놓고 있고 옆에는 비범한 옆집 꼬맹이가 앉아있다. 아...
차라리 죽여줘....
21.
파이브는 오늘 또 기분이 안 좋아보였다. 파이브 앞자리에 앉은 디에고는 파이브 언짢음 단계 중 5단계임을 깨닫고 (10단계까지 있다. 나름 세분화되어있다.) 오늘은 숨소리조차 내면 안되는 날이구나, 했다.
-하아....
흐으으음... 허어.....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한숨소리가 있는 건지 실험해보기라도 하는 듯 옆에서 10분째 한숨을 내쉬고 있으니 예민한(!) 루서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어봤다.
-왜, 뭐 때문에 기분 안 좋은데.
파이브가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자기 팔을 두드렸다. 솔직히. 조금 쫄았다.
-어느 정도가 평범하게 멍청한 수준이지?
-?
-적당히 멍청해 보여야 과외를 계속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너무 모자라게 보이면 안된다고. 어?
파이브가 자기 앞자리 옆자리를 보더니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니들은 특출나게 멍청해서 도움이 안 돼.....
가만히 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두 남중생이 억울하게 눈을 마주쳤다. 아니 왜 갑자기 딜을 박고 그러냐.....
22.
-파이브는 성적이 꾸준하네.
파이브가 눈을 깜박였다. 모의고사를 쳐도 80점. 다른 학교 시험을 쳐봐도 80점. 2학년 모의고사를 쳐도 80점. 심지어 단어시험을 쳐도 80점이다. 이렇게 하기도 힘들겠다.
-그...그러게.
-계속 점수가 제자리 걸음이라 좀 걱정되겠다.
물론 나도. 아무리 조금 낮은 가격의 과외라 해도-아, 과외비. 정말 치열한 사투였다. 더 주려는 쪽과 덜 받으려는 쪽의 전투와도 같은 협상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도 돈을 받고 있고 심지어 아는 사이이기까지 한데 성과가 없어서야 아주머니 뵐 낯이 없었다.
-괜찮아.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곧 오를거야.
그래. 수학에서는 타고난 신동이라고 들었다. 다른 과목에서 딱히 걱정하는 것을 못 봤으니 아마 국어도 잘할 것이다. 그렇담 오르는 건 금방이리라. 잠시 정체기인 모양이다. 암. 그렇고 말고.
그래도 사기진작이 필요할 것 같긴 했다. 비범한 영재 소년이라는 타이틀에 다소 걸맞지 않는 영어 점수가 아닌가. 그런데도 꼬맹이는 태평했다. 물론 벌써부터 조급할 필요는 없지만 너무 의욕이 없는 것도 좋지 않으니까.
-음, 이번 중간고사 때 90점 넘으면 소원들어줄게. 어때?
-...아무거나?
-어... 적정 가격 이내에서?
-그래. 좋아.
빠르게 딜을 마친 꼬맹이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책을 내려다봤다. 뭐야, 이 심플한 협상. 슬쩍 꼬맹이의 얼굴을 살폈더니 뜻밖에도 은근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다행이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나보다.
23.
파이브가 백점짜리 시험지를 들고왔다.
-야, 잘했다! 진짜 잘했어! 아구~ 기특해! 진짜 대단해!
나는 흥분해서 거의 이 시험지를 이마에 붙이고 마을 한바퀴 돌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우리 꼬맹이가요, 글쎄 백점을 맞아왔지 뭐예요? 천재 아닐까요? 영재로는 좀 부족한 것 같은데.
-중학교 시험인데 뭐.
-야, 중학교 시험이래도 하나도 안틀리기가 어디 쉬운 줄 알아?
아니다, 코팅을 해서 대대손손 남기는 쪽이 더... 옆에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데 정작 꼬맹이는 침착했다.
양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고 나서야 아, 좀! 하면서 반응을 보였다.
-형.
-응?
-소원은?
-아 맞다. 소원들어주기로 했지. 무슨 소원 할거야?
24.
-진짜로?
동네에서 유명한 수플레 팬케이크 집 앞에서 나는 다소 늦은 듯한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 다섯번째야.
...한번 했다고는 안했다.
아무튼 여기는 내가 바냐랑 자주 오는 곳이다. 생긴것과는 어울리지 않게-물론 내가 이렇게 말하면 바냐는 '뭐래, 너 완전 설탕 수인이잖아. 네 별명 몰라? 영문과 허니' 라면서 웃는다. 그래, 나도 웃긴 거 알아.-나는 단 것을 좋아한다. 특히 이집은 내가 우주에서 가장 완벽하다고 평가하는 수플레 팬케이크를 판매하는 곳이다. 정말 의외였다. 늘 블랙커피에 아메리카노가 다 뭐야, 에스프레소를 마실 것 같은 꼬맹이가 여기 수플레 팬케이크를 사달라고 하다니.
-너 단 거 좋아했어?
-뭐... 싫어하진 않아.
그렇다고 막 엄청나게 사달라는 뜻 아니야. 꼬맹이의 눈썹이 살짝 찌그러졌다. 아마 내가 꼬맹이 책상에 초콜릿을 잔뜩 올려다 둔 것을 말하는 모양이다. 알겠어, 알겠다고.
25.
-그런데 소원치고는 많이 소박하네. 소원 말고 그냥 같이 가달라고 했어도 왔을텐데.
팬케이크 하나를 쭉 반으로 자르며 말했다. 그 말에 꼬맹이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누가 봐도 정말이냐는 듯, 의심스러운 얼굴로 내 표정을 열심히 살피는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아니, 진짜로.
-...몰랐네. 아쉽게.
-물려줘?
-아냐, 됐어.
입에 단 게 들어와서 그런가, 이 곳 인테리어가 워낙 러블리해서 그런가. 나보다 한참 어린데 한참 어려운 비범한 꼬맹이가 퍽 귀엽게 느껴졌다. 아직 젖살도 덜 빠졌고 팔에 솜털도 안 가셨다. 정말로 어리구나, 싶어졌다.
그래, 애는 애지.
26.
-그런데 왜 여기로 오자고 그랬어? 단 거 그렇게 안 좋아한다며.
생크림을 푹 찍었는데 이상하게 대답이 늦어 꼬맹이를 쳐다봤다. 꼬맹이는 눈을 끔벅이다가 생크림을 조금 덜어 발랐다.
-그냥.... 한번쯤 와보고 싶었어. 애들이 다 맛있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혼자 오긴 그렇잖아.
그런가. 남자 중학생의 감수성에는 카페 혼자 오기가 영 어려운 일인 모양이다. 나는 천재적인 납득능력으로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그래도, 네 덕분에 여기 오랜만에 오네. 바빠서 잘 못 왔거든.
그 말에 꼬맹이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피어올랐다. 퍽 흐뭇한 얼굴이었다.
-알아.
-안다고?
꼬맹이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그야, 인스타에 맨날 여기 팬케이크 먹고 싶다고 하잖아.
-너 인스타 안하잖아.
-누나가 그러던데.
아하. 나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너랑 내가 취향이 비슷해서 참 다행이야, 라고 하자 꼬맹이는 또 웃었다.
아직 파이브는 14, 벤도 20 와나 이걸 언제 키워서 잡아먹노
+)아맞아. 파이브 바냐한테 들은 거 아님. 벤 인스타 염탐하는 비계하나 따로 있음.
파이브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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