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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ㄴ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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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혼 부생한천 웨이란 주일룡백우




운란이 과연 무슨 일을 예상하며 기다리는지 모르겠으나,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던 예상과 달리 평화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이틀이 흘러도, 닷새가 흘러도, 심지어는 열흘이 흘러도 극적인 사건 같은 것은 없었다. 어쩌면 이대로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야, 한천. 집에 안 가?"

"어? 아, 응... 이제 가야지."


멍하니 앉아있던 한천이 제 등을 툭 치며 묻는 동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덧 집에 갈 시간이 제법 지난 때였다. 휴대전화를 확인하니 역시나 부생에게 퇴근했냐는 문자가 와있었다. 부생은 아무래도 오늘 퇴근이 늦을 모양인가보다. 푸스스 웃으며 답장을 보낸 한천이 몸을 일으켰다.

겉옷을 입고 밖으로 나오니 밤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슬슬 옷 정리를 해야 하나. 시시콜콜한 생각을 하며 차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아침에 부생이 겉옷을 챙기지 않은 것이 떠올라 집에 들러서 옷을 챙겨 찾아갈 생각이었다. 요즘 부생은 한천의 집에서 살다시피 하는 덕에 한천의 옷장에 부생의 옷이 같이 놓인지 오래였다. 그 사소한 사실 하나가 어찌나 가슴 떨리는지, 저도 모르게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기-"


그 순간,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벼락같이 돌아선 한천이 상대가 제 몸에 손을 대기도 전에 그의 손을 낚아채듯이 쥐었다. 한천보다 더욱 놀란 표정의 남자가 눈을 크게 깜빡이다가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길을 좀 물어보려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지만, 인상부터가 선량한 시민은 조금도 수상해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그 여자아이도 마찬가지였으나 한천은 어쩐지 확신이 들었다. 그제야 몸의 긴장을 풀며 남자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죄송합니다, 혹시 다치셨나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많이 피곤하셨나보네요."


예의 바르게 묻는 한천에 금세 놀란 마음을 추스른 남자가 넉살 좋게 답했다. 한천이 멋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자 그를 따라 웃은 남자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여기로 가려고요."

"아, 여기서 금방이네요. 이쪽 길로 직진하시다가 오른쪽으로 돌면 바로 나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여기 처음 와서 길을 잘 몰라요."

"그럼 같이 가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얼른 들어가서 쉬셔야죠."


남자는 정 모르겠으면 경찰서로 가겠다며 손을 내저었고, 그에 작게 웃은 한천이 고개를 꾸벅였다. 마주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천천히 멀어지는 남자를 바라보던 한천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역시 아무리 평화롭다 해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이 평화가 영원하지 않으리란 것을 알기 때문이겠지. 하루빨리 일이 마무리되었으면 하지만, 아직 운란이 말하는 그 시기가 오지 않았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때를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니, 자신도 자신이지만 운란 역시 태연한 척해도 분명 속이 탈 테다.

운란은 한천에게 말하는 내내 차분했지만 한천은 그가 부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또 얼마나 걱정하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애초에 운란이 부생을 아끼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계획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천이 느끼기에 운란은 부생을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런 무모한 짓을 하려는 것부터가 그 증거가 아닌가.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서 생각하던 중, 손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작게 놀란 한천이 고개를 숙였다. 부생의 전화였다. 은근하게 술렁이는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무슨 일 있어요? 목소리가 안 좋네."


그러나 부생은 무척이나 예리한 남자였다. 기계를 통해 걸러진 목소리인데도 곧장 위화감을 느껴 물어보는 것이다. 저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 떤 한천이 이내 작게 웃었다. 목소리만으로 제 상태를 알아내는 것도, 곧장 걱정하는 것도 마냥 사랑스러웠다.


"조금 피곤해서요. 퇴근은 아직인가요?"

-"네, 1시간은 지나야 할 것 같아요. 먼저 들어가서 쉬어요."

"지금 밖에 추워요. 옷 챙겨서 그쪽으로 갈게요."

-"안 그래도 되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벌써 기대에 차 들뜬 목소리에 웃음을 터뜨린 한천이 다시 걸음을 뗐다.


"갈게요. 보고 싶기도 하고."

-"정말요? 나 보고 싶어요?"

"그럼 누가 보고 싶겠어요?"

-"좋다."


헤헤 웃으며 말하는 것이 꼭 고대하던 선물을 손에 쥔 어린아이 같았다. 도대체 음흉한 건지, 순진한 건지. 부생은 참 신기한 남자였다. 밑도 끝도 없이 짙은 소유욕을 드러내며 욕망을 내비치다가도, 이런 사소한 것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얼굴을 붉혔다. 당신의 모든 게 이렇게 사랑스럽고 예쁜데 왜 진작 몰랐을까. 잊을만하면 불쑥 올라오는 후회를 익숙하게 넘기며 차 열쇠를 꺼냈다.


"아무튼, 옷 챙겨서 갈 테니까 기다려요."

-"네, 조심해서 와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 꼭 하고요."

"알겠어요. 네, 금방 갈게요. 알겠대도."


조금만 이상해도 바로 전화하라며 신신당부를 하는 부생에 한천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잠깐의 통화로 금세 기분이 좋아진 것이 어이없다가도 썩 나쁘지는 않았다.


"으아앙!"


막 차에 올라타려는 찰나, 웬 울음소리가 한천의 발목을 붙잡았다. 척 듣기에도 앳된 목소리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주차장 구석에서 어린 남자아이가 쭈그려 앉아 울고 있었다. 서럽게 울며 엄마와 아빠를 찾는 것이, 아무래도 길을 잃은 듯했다. 이 시간에 미아라니, 부모와 아예 떨어진 걸까. 덜컥 밀려오는 걱정에 한천이 황급히 아이에게 다가갔다.


"얘, 괜찮니? 부모님은 어디 계셔?"


무릎을 꿇어앉으며 묻는 한천에 흠칫 놀란 아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운 것인지, 아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한천이 아이의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었다.


"아저씨 경찰이니까 울지 마. 같이 엄마랑 아빠 찾으러 갈까?"

"진, 진짜요? 같이 찾아줄 거예요?"

"당연하지. 우선 일어나자, 이런 데 있으면 감기 걸려."


다정한 목소리로 말한 한천이 아이를 안아 들기 위해 팔을 뻗었다. 동시에 아이의 작은 손이 한천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어린아이에게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악력에 놀란 한천이 몸을 뒤로 물리려는 찰나, 그보다 먼저 아이가 한천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교활하게 번뜩이는 아이의 눈빛에 한천이 인상을 와락 찌푸려졌다.


"너...!"

"멍청한 놈, 한 번 당하고도 또 속니?"


비웃음을 가득 담은 목소리가 속삭였고, 뒤이어 한천이 무너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매캐한 먼지 속에서 멍하니 서 있던 한천은 뺨을 매섭게 갈기는 손길에 정신을 차렸다. 휘청거리며 쓰러지려는 자신을 옆에 서 있던 동료가 부축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도 창백하게 질려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뭘 꾸물대고 있어! 빨리 가자는 말 안 들려?!"


맞은편에 선 남자, 왕 의원이 버럭 소리쳤다. 그의 주위에 쓰러진 세 사람의 밑에서 검붉은 피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순간 올라오는 구역질에 한천이 입을 틀어막았다. 씩씩거리던 왕 의원이 별안간 한쪽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어린아이의 목덜미를 잡아채 끌어당겼다.


"당장 움직여! 안 그러면 이 애새끼도 죽여버릴 거야!"


그가 거의 게거품을 물다시피 소리쳤다. 도저히 사람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때 왕 의원의 우악스러운 팔에 붙들려있던 아이가 위태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살, 살려주세요... 아저씨, 살려주세요..."


아이는 큰 소리로 울지도 못한 채 가련하게 빌었고, 그에 한천은 억지로 정신을 붙잡아 일으켰다. 아이마저 죽게 만들 수는 없었다.




불현듯 눈을 뜬 한천이 곧 거센 기침을 쏟아냈다. 직전까지의 악몽이 온몸을 기어 다니는 것만 같아 속이 뒤틀렸다. 눈물로 엉망이 된 아이의 얼굴이 질끈 감은 눈앞에 아른거렸고, 살려달라 빌던 처절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귓가에 울렸다.


"일어났나?"


그때, 혼란을 가르고 들리는 목소리에 한천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왕 의원이다. 그제야 주위를 살펴보니 왕 의원의 차 안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한천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애써 묻어두던 지난날이 떠오른 탓에 적대심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왕 의원은 그런 한천이 같잖다는 듯 피식 웃을 뿐이었다.


"어린애한테 물러터진 건 여전하군."

"...."

"자네는 옛날부터 그 꽉 막힌 성격이 문제였어. 내가 얼마나 큰일을 맡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깟 하찮은 놈들이나 살리겠다고 고집을 부렸지."


지독히도 건조한 목소리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왕 의원을 노려보던 한천이 문득 쓰러지기 전의 일을 떠올렸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그 아이는 뭐죠?"

"그런 것까지 알 필요는 없네. 자네는 자네 역할만 다 하면 돼."

"그게 무슨-"


한천이 무어라 따져 묻기도 전에 왕 의원이 갑자기 한천의 얼굴을 틀어쥐었다. 그제야 그의 다른 쪽 손에 들린 수상한 작은 병을 발견한 한천이 거칠게 몸부림쳤다.


"뭘 하려는 거야?! 이거 놔!"

"가만히 있어! 다 대업을 위해서니까!"


탐욕에 젖은 왕 의원의 눈이 소름 끼치게 번들거렸다. 올라타다시피 한천을 짓누른 그가 손에 쥔 병을 한천의 입에 쑤셔 넣었다. 한천의 몸부림이 더욱 격해졌지만 왕 의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사람 힘이 이렇게 셌던가? 한천이 패닉에 빠진 사이, 병에 들어있던 정체 모를 것이 입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코를 찌르는 역겨운 냄새에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순식간에 병 속의 액체를 모조리 쏟아부은 왕 의원이 한천의 입을 틀어막았고, 한천은 헛구역질을 하며 왕 의원의 팔을 쥐었다. 하지만 역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한천은 거짓말처럼 의식이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흐릿해지는 시야에 왕 의원의 비열한 웃음이 번졌다.




"한천. 한천, 정신 차려."

"으, 헉...!"


자신의 몸을 흔드는 손길에 퍼뜩 정신을 차린 한천이 거친 숨을 들이켜며 발버둥 쳤다. 그러자 상대가 재빨리 한천을 품에 안고 가슴팍을 쓸어내렸다.


"괜찮아, 나야. 나니까 무서워할 것 없어."

"조, 조운란씨...?"

"응, 나 맞아. 그러니까 진정하자. 이제 괜찮아."


운란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한천을 달랬고, 다행히 빠르게 진정한 한천이 몸을 완전히 늘어뜨리며 운란에게 기댔다.


"어떻게... 어떻게 된 거죠?"

"왕 의원이 또 수작을 부린 거지. 미안해, 예상 못 한 일이었어."


운란은 차갑게 식은 한천의 몸을 좀 더 세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한천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을 알고 황급히 찾아왔을 때, 이미 한천은 주차장에 홀로 쓰러진 채였다. 설마하니 제 경고를 듣고도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이야. 역시 배후에 있는 자는 그가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들이 노리는 것 역시 분명했다. 이런 대담한 짓을 하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도 조급한 모양이지.


"계획이 바뀌었어."

"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시작할 거야."

"하, 하지만 당신 혼자서는 무리라고 했잖아요."

"무리인 거지, 못 하는 건 아니니까."


당황해서 저를 말리려는 한천에 운란은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회를 줬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내 아들을 건드린다면 나도 참을 이유가 없지."

"그래도... 그럼 내 몸을-"

"얘야, 나는 부생은 물론이고 너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단다."


한천의 말을 자른 운란이 낮게 속삭였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이 어찌나 서글프게 빛나는지, 한천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제 팔을 꽉 쥐는 한천에 운란이 애틋한 미소를 지었다.


"너도 부생도 나 때문에 끔찍한 고통을 겪었으니, 너희 둘은 그저 행복하기만 하면 돼."

"...."

"우선 부생에게 가 있어. 그 아이 곁이면 안전할 거야."


한천은 몇 번이고 운란을 말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당신 혼자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려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무력함에 치가 떨렸다.




특조처로 온다던 한천이 갑자기 몸이 안 좋아 집에 먼저 돌아간다는 문자를 남겼으니, 일을 아예 뒷전으로 미룬 부생이 허겁지겁 한천의 집에 들어섰다. 방 문을 벌컥 열자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는 한천이 눈에 들어왔다. 성큼성큼 걸어 한천의 앞에 선 부생이 물었다.


"괜찮아요? 어디가 아픈 거예요?"

"아픈 건 아니고, 그냥 조금 피곤해서... 미안해요."

"뭐가 미안해요. 그보다 정말 안 아픈 거 맞아요? 안색이 안 좋은데."


이미 전화를 했을 때부터 한천의 목소리가 좋지 않음을 알았던 터라 부생은 쉬이 걱정을 거두지 못했다.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을 살피는 부생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한천이 천천히 몸을 기울여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기댔다.


"한천?"

"...."

"...일찍 잘까요?"


별안간 말이 없어진 한천에 잠시 침묵하던 부생이 다정하게 물었다. 한천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 한천을 넘어 침대에 누운 부생이 한천의 손을 가볍게 끌어당겼다. 그러자 순순히 부생의 곁에 누운 한천이 그의 품에 안기며 눈을 감았다. 심란해 미칠 것 같았다. 이렇게나 불안해도 결국 부생에게는 말할 수가 없어 더욱 그랬다. 그저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뿐인데 나도 당신도, 그리고 그 사람도 왜 이렇게 힘든 일만 닥치는 걸까. 언제쯤 마음 편히 행복해하는 당신과 함께할 수 있을까. 과연 이번에야말로 모든 것이 끝나는 걸까. 끝도 없이 이어지는 걱정과 불안에 눈을 질끈 감은 한천이 부생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자신을 마주 안는 팔에 어쩐지 가슴이 미어졌다.




한천은 거친 숨을 내쉬며 숲을 내달렸다. 어린 몸으로는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뒤를 바짝 쫓는 거친 발소리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말도 안 돼, 도대체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분명 그 아이가 죽였을 텐데. 죽는 것을 내 두 눈으로 확인했는데. 정신없이 도망치는 와중에도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자의 발자취를 따라 무수한 생명이 꺼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리 약해졌다 해도 추악한 근본은 여전한 것이다.


"악!"


그 순간, 미처 보지 못한 나무뿌리에 발이 걸린 한천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파드득 몸을 뒤집었을 때, 그자는 이미 한천의 코앞에 서 있었다. 그는 옛날보다 많이 야윈 모습이었지만 한천 정도는 충분히 죽일 수 있을 듯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한천이 한참 뒤에야 목소리를 냈다.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더는 도망치지 않는 것이냐?"

"이 몸뚱이로는 도망쳐봤자 네놈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사실이긴 하지만 포기가 빠르군. 그 애송이가 곁에 없어서인가?"


그가 이죽거리며 한천을 비꼬았다. 몇천 년만에 다시 보는 미소는 여전히 소름 끼치도록 사악했다.


"어떻게 살아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분명 어린아이의 몸인데도 마치 그 옛날처럼 눈을 빛내는 한천에 그가 단박에 표정을 굳혔다.


"제아무리 잘난 너라도 그 어린 황룡이 물어뜯은 내가 살아있는 건 예상 못했나보구나."


그의, 전 귀왕의 눈이 사납고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의 아가리가 찢어질 듯 벌어지며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그를 쏘아보던 한천이 말했다.


"도망칠 힘을 남겨두기라도 했나?"

"갓 태어난 불안한 몸뚱이로 너를 상대하는데 당연하지."

"하지만 션웨이가 분명 너를 죽였을 텐데."

"어리석은 놈. 황룡의 몸속에 내 심장이 고스란히 살아있지 않느냐. 그 심장이 있는 한 나는 절대 죽지 않아."


기분 나쁜 웃음소리에 이번에는 한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빌어먹을 황룡에게 당한 후 곧장 도망쳐 다른 귀족들의 심장과 혼을 취해 목숨을 부지했다. 허나 지금 내 모습을 보면 알다시피, 그런 조무래기들로는 턱없이 부족했지."

"...."

"역시 내 원래 심장이 필요해."


전 귀왕이 탐욕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하니, 한천의 얼굴에 일순간 형형한 기색이 스쳤다.


"그 아이를 건드릴 생각은 하지도 마라."

"연약한 몸을 가지고 잘도 지껄이는구나."


웃음을 터뜨린 전 귀왕이 한천의 얼굴을 한 손에 쥐며 제 얼굴을 바싹 가까이했다. 마주한 눈에서 끝없이 깊은 어둠이 일렁였다. 한천이 주먹을 세게 쥐며 이를 악물었다.


"걱정하지 마라. 나도 내 심장이 션웨이의 몸속에서 어느 정도 힘을 회복한 뒤에 찾아갈 생각이니까."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다."

"알아. 네놈은 그 황룡을 위해서 뭐든지 하는 놈이 아니더냐."


한천의 얼굴을 쥔 전 귀왕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인상을 찌푸린 한천이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잘 들어, 쿤룬."


전 귀왕의 목소리를 통해 불리는 이름은 짙은 혐오와 분노를 가득 눌러담은 채 흩어졌다. 고작 어린아이를 쏘아보는 두 눈이 소름끼치도록 잔인하게 번들거렸다.


"네가 몇 번을 다시 태어나든, 내가 너를 찢어발길 것이다. 이 세상에 발도 못 딛게 할 것이고, 네가 그토록 아끼는 산천초목의 씨를 말릴 거야. 세상에서 너의 흔적을 지워버릴 거라고."

"...."

"네가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 끈질기게 찾아내 죽여주마. 네놈의 그 어린 황룡을 만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거라. 앞으로 영영 만날 수 없을 테니."


전 귀왕의 저주가 한천의, 쿤룬의 온몸을 휘감았다. 쿤룬은 마른침을 삼키며 귀왕의 팔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그렇다면 나 또한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 너를 막을 것이다. 네 뜻대로 하게 둘까 보냐."

"이제 겨우 꽃을 피운 주제에 당당하기도 하지."

"허튼 자신감인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 알지."

"볼 필요도 없다."


입꼬리를 비틀어 웃은 귀족이 쿤룬의 얼굴을 던지듯 놓았다.


"네놈은 내 손에 죽을 거야. 오늘처럼 나를 막을 틈도 없이 다시 꽃잎으로 돌아가겠지."

"아둔하구나. 세상일이 전부 네 예상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것을."

"내가 할 말을 해주는군. 네 무능함에 좌절하며 그대로 사라지거라. 네가 완전히 죽는 날, 나는 내 심장을 가져갈 테다."


결연한 쿤룬의 눈빛에 비웃음을 흘린 전 귀왕이 그대로 손을 치켜들었다. 그의 손에서 날카로운 손톱이 돋아났고, 그것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쿤룬의 작은 몸을 무참히 찢어발겼다.




"한천!"


아득히 멀리서 누군가 제 이름을 부르는 순간, 한천이 번쩍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한천의 몸에 손을 댄 부생이 저만치 나가떨어졌고, 방 안의 거울이나 꽃병 따위가 일제히 깨지면서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온몸이 금색의 빛으로 둘러싸인 한천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턱 막힌 숨을 내뱉었다. 갑자기 지난날의 모든 기억이 머릿속에 휘몰아쳤고, 주체할 수 없는 신력에 몸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한천은 상황을 파악할 틈도 없이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자신의 몸 상태보다, 두서없이 떠오르는 이 기억 따위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내가... 심장인 내가 있어서 전 귀왕이 살았구나..."


바닥에 넘어진 부생이 허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천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부생이 알았다. 부생이 알아버렸다.


"나 때문에 죽지 않았던 거야... 내가, 내가 그놈을 살렸어..."

"션부생."

"나 때문에 당신이 죽은 거야..."


한천이 부생의 이름을 부르는 동시에 부생이 기어코 그 말을 내뱉었다. 한천은 누군가 자신의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통증에 숨이 막혔다. 이불을 세게 쥔 손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션부생, 날 봐. 네 잘못이 아니야, 너는 아무 상관 없어."

"어떻게 상관이 없어? 내가 있어서 그자가 살아있는 건데."

"부생, 제발... 다 설명해줄 수 있어."

"내가 당신을, 엄마를 죽인 거잖아."


다시금 곱씹는 부생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다. 내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살아있어 그자도 살았으니, 결국 내가 죽인 것이 아닌가.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행복을 바랐구나. 내가 저지른 일도 모르고 당신의 곁을 욕심냈구나.


"션부생!"


예고도 없이 홀연히 모습을 감춘 부생에 한천이 버럭 소리쳤다. 그러기 무섭게 다시 신력이 터져 나왔고, 더더욱 많은 기억이 머릿속을 휘저으며 눈앞을 어지럽혔다. 앓는 소리를 낸 한천이 휘청이며 침대 위로 상체를 무너뜨렸다.


"젠장..."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2020.02.16 (01:00:22) 신고
ㅇㅇ
모바일
헐 어떻게 해ㅠㅠ 부생이가 알아버렸어ㅠㅠㅠ 저건 ㄹㅇ 부생이한테 말할 수 없는 얘기였네ㅠㅠㅠㅠㅠ 부생이 혼자 어디갔어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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