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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4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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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진실

"회사엔 내가 전화 했어. 적당히. 아프다고 둘러댔어."

술도 한 모금 마시질 않았는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지독한 숙취를 겪는 기분이었다.

그는 늦잠을 자고 일어난 내 앞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단추가 다 채워지지 않은 흰광목 잠옷의 한쪽 어깨가 흘러내렸다.

그는 익숙한 손길로 잠옷의 매무새를 다듬고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그가 다정하게 넘긴 머리를 다시 헝크렸다.

그는 한숨을 쉬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평소처럼 침대에 걸터 앉지 않고 의자에 앉아 나를 마주했다.

비가 왔으면 했지만 창밖은 짜증이 날 정도로 맑았다.

그가 세심하게 쳐둔 커튼 사이로도 넘치는 햇빛이 새어들어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사이드 테이블위에 놓인 쟁반 위엔 감자스프와 레몬이 띄워진 물한잔이 있었다.

그가 물잔을 들어 내게 내밀었다.

괜한 심술로 물잔을 쳐낼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목이 타는 듯 아팠다.

"심술부리지 말고, 마셔. 목마르잖아."

그가 말했다.

나는 퉁명스런 손으로 물잔을 받아들었다.

주방에 있는 컵중 가장 큰 크기의 컵이었다.

그는 나를 너무 잘 알았다.

그의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고 그의 눈이 돌아선 나의 눈을 찾았다.

"착하네."

머리를 흔들어 그의 손을 털어냈다.

"하지마."

그는 순순히 손을 치우고 다시 한숨을 쉬었다.

나는 남은 물잔을 비우는 중이었다.

"내가 너와 얘길하지 않는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해?"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잠깐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그래. 니 말대로 우리 지금 이상하지. 그리고 그 얘길 한다 치자. 무슨 결론이 날 것 같은데. 처음엔 날 원망하겠지. 무조건 덮어 두려고만 한다고. 그리고 어떻게 될까? 넌 다시 널 원망할거야. 니탓이라고. 니가 내 옆에 있을 자신이 없다고."

"아니야."

"결국엔 날 떠난다고 하겠지. 지난 일년동안 우리가 반복했던 그 패턴대로 말이야."

"아니야."

그의 목소리가 거칠어 졌다.

"정말 아니야?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겠어, 허니?"

"아니야."

어느새 내 목소리는 젖어있었다.

"난 잊은 게 아니야."

"그러려고 하잖아!"

"잊지 않았어."

"그럼 피하지마!"

거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눈앞은 눈물로 온통 뿌옇게 젖어 있었다.

그가 나의 어깨를 부여잡고 한동안 어쩔 줄 모르는 눈으로 나를 보더니 바스라질 정도로 세게 나를 품에 안았다.

"잊은 적도 없고 피한 적도 없어. 우리 아기였는데. 허니. 너랑 내가 만든 우리 아기였는데 어떻게 잊어. 내가. 어떻게."

어깨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머리가 들썩였다.

점점 그의 들썩임이 커지고 얇은 내 잠옷의 어깨는 금방 흥건히 젖고 말았다.

 

 

9)기다림

그는 기다리는 걸 잘하는 남자였다.

처음 만났을땐 내가 수줍음을 털고 인사를 받아주길 기다렸고,

겨우 인사를 할 수있게 되자 더뎠던 내 입이 트이길 기다렸고,

더 지나선 내가 자신을 좋아하게 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내가 울며 한국에 돌아 간 뒤엔 나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으며, 우리가 수줍은 연인이 되고 나선 동양적 사고방식 때문인지 쉽게 허락하지 않았던 내 육체의 준비가 끝나길 기다렸다.

그는 내가 자신에게 무리하지 않고 오길 항상 모든 인내심으로 기다려주었다.

그의 약속대로 그가 고등학교를 마치고 18세가 되던 해, 그는 나를 찾기 위해 한국에 왔다.

그 한번의 만남을 위해 그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알게 된 건 후일이었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며 동시에 학생의 신분으론 조금은 벅찬 여행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그가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건,

또 학업에 방해가 되지 않는 수준에서 준비를 하기로 그의 부모님과 약속을 했었던 ,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위해 그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왔는지에 대한 걸 알게 된건 내가 영국으로 돌아간 뒤의 일이었다.

 

유럽여행은 자주 다녔다지만 이렇게 멀리 떠나온 건 그로써도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고작해야 일주일이 전부였지만 그는 그가 이 여행을 계획했던 3 전부터 잊지 않고 있던 일에 몰두 했다.

나를 보는 것.

나를 사랑하는 것.

내가 자신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가까운 궁을 둘러보거나 인사동을 갔던 한두번 빼고는 관광다운 관광을 하지도 못했다.

그는 깨어있는 모든 시간을 나를 보기위해 썼다.

매일 나보다 먼저 일어났고 매일 나보다 늦게 잠들었다.

일주일이 끝나 갈 무렵 그는 그가 계획한 모든 것을 이루었다.

나를 보았고 나를 사랑했고 내가 그보다 더 그를 사랑한다고 믿게 만들었다.

일주일만에, 고작 16살에, 나는 내 인생 전부를 걸어서 사랑할 사람의 존재를 확인했다.

 

마지막 날, 그를 배웅하는 공항에서 나는 3년전의 소녀처럼 울지 않았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아무리 먼 시간이 우리 사이에 있어도 그와 내가 일주일동안 만든 인연의 끈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아쉬운 손을 떨구며 그는 웃었다.

나도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렇게 그를 보내고 부터 우리의 일은 거짓말처럼 술술 풀렸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명문대학에 입학했고, 나의 아버지는 다시 영국 발령을 받으셨다. 나는 꿈에도 그리던 그의 곁으로 갈 수 있었다. 그에게 부족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그만큼은 아니었지만 외국인치고 꽤 좋은 학교에 들어 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와 멀지 않은 학교였다. 우리를 가로 막는 것은 세상어디에도 존재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렀고, 내가 대학생이 되고 처음 맞은 방학이 우리가 우리의 처음을 약속한 때였다. 그러나 갑작스런 상황들로 우리의 처음은 내가 스무살이 되던 해로 미뤄졌고, 그는 한창 혈기 왕성한 이십대의 시간을 나를 위해 눌러두었다. 언제나처럼 그가 제일 잘하는 방식으로 내가, 우리가, 우리의 상황이 준비되길 기다렸다. 그는 기다리는 걸 잘하는 남자였지만 그건 언제나 나에게 한정된 얘기였다.

2018.01.01 23:5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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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ㅜㅜㅜㅜㅜㅜㅠㅠ 마지막 문장은 아기에 대해 암시하시는 건가요 센세?ㅠㅠㅠㅠㅠ 센세의 문장은 담담해서 더 가슴에 와닿는 것 같아오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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