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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4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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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첫입맛춤의 맛

아빠의 파견근무로 3년을 살았다.

회사에서 마련해준 집은 중산층 주택가였고 전학하게 된 학교도 중산층 이상의 자녀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였다. 언어 문제로 한학년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작은 몸집때문에 외양으로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좋은 집안의 좋은 교육을 받은 젠틀한 아이들이었다. 그래도 몸으로든 마음으로든 내가 받은 상처의 크기가 빈민가 아이들이 줬을 법한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딱 반년짜리 지옥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지옥에서 나를 구해준건 베니였다.

친구이자 오빠였고 선생님이었고 보호자였고 한동안의 짝사랑이었다.

나보다 두살이 많았다.

그보다 두살이 어렸다.

이년반의 시간동안 그는 내 세상의 전부였다.

그리고 런던을 떠나있던 몇 년 동안에도 역시 그는 내 세상의 전부였다.

나는 모든 것을 그에게 의지했고 그는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12살의 생일은 날이 따스한 봄의 시작쯤이었다. 초대된 손님은 베니의 식구들이 전부였다. 더도 덜도 없이 딱 적절한 생일파티였다. 주말 늦은 점심식사 준비로 주방이 부산했다.

와인에 재놓은 고기를 담은 트레이가 냉장실에 들어있었고, 오븐에선 베니가 좋아하는 블루베리를 넣은 쿠키가 구워지고 있었다. 키가 작은 나는 거실과 뒷마당 테라스에 파티용 플래그를 달기 위해 낑낑 대고 있는 중이었다.

"왜 주인공이 이런 걸 하고 있어?"

머리 위로 긴팔이 불쑥 넘어와 간신히 잡고 있던 플래그의 리본을 받아 들었다.

균형을 잃은 몸이 작게 흔들려 넘어 질뻔 한 걸 그의 다른 쪽 손이 잡았다.

"조심해야지."

"베니!"

"좋은 꿈 꿨어, 허니?"

그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내려다봤다.

"왜 벌써 왔어! 초대 시간이 두 시간이나 남았단 말야."

그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리본을 묶었다.

"도와주러 왔지. 지금처럼 이렇게 끙끙대고 있을까봐."

나는 눈을 깜빡이며 높이 있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그가 나의 시선을 눈치 채고 나를 다시 바라봤다. 손은 여전히 리본에 댄 채로 말이다.

"... 생일 축하해."

수줍은 축하에 이어 수줍은 입술이 볼에 닿았다 떨어졌다.

"..."

나는 크게 뜬 눈을 깜박이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입술이 반쯤 벌어진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그의 입술이 닿은 부분부터 차츰 온몸을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그때부터 기억이 분명하지 않았다. 반쯤 공중에 뜬 기분으로 시간이 지났던 것 같다.

엄마는 생일이라 들뜬 나머지 얼굴이 붉어진 거라 생각하신 듯 했고 아빠는 옆집의 컴버배치씨와의 대화에 빠져 있느라 내 상태를 눈치 채지 못하신듯했다.

그리고 베니는... 나와 눈 한번 마주치치 못하고 먹는 일에 열중한 척했다.

 

차게 식힌 브라우니에 베니의 엄마가 직접 만든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얹은 디저트의 첫 숫가락을 입에 넣었을 때 아빠가 헛기침을 하셨다.

".. 허니의 생일이 아니더라도 식사대접을 한번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웃으로 이렇게 좋은 친구를 맞이하게 된 건 정말 행운이죠. 우리 허니도 적응하는데 무척이나 힘들어 했는데 베니가 있어서 그나마 이렇게 지내게 된 거구요."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저희도 이사 오자마자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요."

모두가 따뜻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이렇게 다들 모였을 때 할 말이 있어요. 허니에게도 처음하는 얘기네요."

아빠가 테이블 위에 놓인 내 손을 잡으며 웃었다.

"여름이 지나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정식으로 얘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식사자릴 마련한 거예요."

부끄러움에 숙여있던 고개가 단번에 치켜졌다. 치켜진 시선으로 제일 먼저 찾은 건 베니의 눈이었다.

나의 얼굴도 딱 그와 같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쿵하고 심장이 떨어진 듯한 얼굴로 베니가 나를 보고 있었다.

손에 들려있던 포크는 쨍그랑 소리를 내며 접시 위로 떨어졌다.

 

 

6) 달갑지않은 반복

그 어린 날의 나처럼 그를 절실히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목이 아플 정도로 꺾인 목과 돋아올린 발끝으로 겨우 닿았던 그의 눈동자가 태양 같았던 그 시절로 말이다.

길다면 길었고 짧았다면 짧았을 그 시절동안 나는 그에대한 너무 많은 애정을 소비해 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애정은 습관이 되었고 습관은 일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익숙한 것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내가 그랬고 근간의 그도 그랬다.

몇 년전만 하더라도 그것이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적어도 그때의 우리는 아닌척하려는 시도는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금이 간 접시를 가리려 무던히 애쓰던 때가 있었다.

길게 간 금 위에 가니쉬나 소스따위를 보기 좋게 얹어 문제를 가리려던 시도를 하던 때였다.

그나마의 것도 멈춰버린 것이 최근의 일이었다.

 

"... ... 왔어?"

"깨웠구나. 미안해. 다시 자."

"몇시야? . . 1...? 지금까지 회사에 있었어?"

"... . 그랬어. 얼른 자. 베니."

그는 말없이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입에 선 긴 한숨이 새나왔다.

나는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까지. 이 시간까지. 회사에 있었어...? 허니?"

그는 전형적인 영국 남자였다.

문제가 있다고 해도 한계까지 그 문제를 입에 담지 않을 그런 타입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한계가 그에게 온 것 같았다.

웃음이 나왔다. 이제서야 그는 우리의 문제를 문제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안믿네."

"다신 안 그럴 거라고 말해. 그러면 널 믿은 걸로 하지."

그의 목소리가 한층 굳어 있었다.

"다시 그럴거야."

"허니!"

"다시 또 거짓말 할 거야. 또 자기가 이렇게 화낼 때까지 계속 할 거라구.

알잖아. 우리 이상해. 이상한데 매일 이상하지 않은 척하고 있잖아.

그렇게 계속 버티고 있잖아. 서로 어깨너머를 보면서 말하고 짜놓은 메뉴얼이라도 있는듯 지내잖아."

그가 단숨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내 앞에 섰다.

부들부들 떨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내 어깨를 세게 붙들고 자신을 마주하게 했다.

얼마만에 바라보는 그의 눈이었는지 몰랐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분노와 연민을 오고 가고 있었다.

"그렇지? 그렇지? 자기도 알고 있지? 그런 거지?"

나는 그를 다그쳤다.

"너 피곤해서 그런가보다. 자고 내일 얘기해."

흔들리던 눈동자가 이성에서 멈췄다.

"그러지마. 그러지마. 자기. 피하지마. 지금 얘기해."

"얼른 옷 갈아입어. 늦었다."

그의 손이 나의 어깨를 떠났고 그는 나를 지나쳐 주방으로 사라졌다.

당연한 일인듯 나는 놀라지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거칠게 냉장고 문이 열리고 유리병과 유리컵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조용히 그가 말한대로 옷을 갈아입었다.

한동안 우리가 다시 이 일에 대해 이야기할 일은 없을 것이다.

지난 모든 반복의 결론은 오늘과 같았다.

 

 

7)약속

"베니, 혹시 허니 봤니? 애가 아침부터 어딜 갔는지 통 보이질 않는구나."

"제가 찾아볼게요. 대충 짐작 가는 곳이 있어요."

"부탁하마. 4시엔 출발해야하는데 어딜간건지. ."

 

모두가 떠날 때까지 숨어 있으면 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타국에 부모도 없이 홀로 남은 나를 베니의 부모님이 모른 척 하실리 없다고도 생각했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매일 베니와 함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몇시간만 버티면, 반나절만 더 버티면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든 것은 이른 오후의 나무둥걸 아래 커다란 구덩이 안이었다.

 

몸이 가볍게 떠올라 어디론가 움직이는 느낌이 났다.

따뜻하고 푸근할 열기가 몸을 감싸고 귓가엔 규칙적으로 울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아침인가...?'

축 늘어져 있던 팔을 들어 손으로 뻑뻑한 눈을 비볐다.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자 내가 잠들었던 곳이 내방 침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

놀라 몸을 비틀자 앞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어? 움직이지마. 떨어진다구."

"...?"

"거기서 그렇게 잠들면 어떻게 해. 나 말고 다른 낯선 사람한테 발견됐으면 어쩔 뻔 했어?

오늘은 화내면 안되는 날이니까 그냥 넘어간다."

"우리 식구들은? 엄마 아빠는? 출발했어? 가셨어? 한국으로?"

"아니. 기다리고 계셔. 널 두고 어떻게 가시겠니?"

나는 실망감에 힘이 풀렸다.

"내려줘. 걸을 수 있어."

그는 못말리겠다는 듯 한숨과 함께 어깨를 들썩이고는 나를 내려놓았다.

땅에 발을 디딘 나는 원망의 눈초리로 그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왜 그랬어! 찾지 말지. 그럼 나 한국에 안가고 베니랑 있을 수 있는데."

나이론 두살 키로는 머리하나만큼 차이가 나는 마른 소년이 내 어깨를 붙잡고 천천히 눈을 마주했다.

"너 이제 열두살이야.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거 알잖아."

"한국에 가면 다시 못볼지도 모르는데!"

"나 이제 곧 15살이 돼. 허니. 3년만 더 지나면 내 마음대로 어디든 갈 수 있게 된다구."

나는 그의 말에 눈물이 그렁한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 눈을 보더니 안심한 듯 말을 이었다.

"허니가 영국에 올수 없으면... 내가 허니를 찾아갈게. 3년이야. 시간은 금방 갈거야."

"베니가 날 잊으면? 고등학교에 가면 예쁜 블론디들이 엄청 많을 텐데 그런 애들 틈에서 나같은거 잊어버리면?"

웃음이 묻어있던 그의 얼굴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허니. 내가 어떻게 널 잊어. 넌 한국에 가서 멋진 남학생들이 네 주위에 가득하면 날 잊을 거야?"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처음 네게 말을 걸었던 그 순간부터 내 신부는 허니 너 하나 뿐이야.

그리고 신부를 잊어버리는 신랑은 없어."

그는 온통 빨개진 얼굴로 평소 같았으면 단어하나도 말하지 못했을 법한 말을 술술 해댔다.

내 얼굴도 그 못지않게 붉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입을 맞추고 그에게 말했다.

"나도... 나도 베니... 신랑을 잊어버리는 신부는 없어."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한바탕 꾸지람을 들은 후 나는 꾸려둔 짐가방을 가지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마당엔 우리를 배웅하기 위해 온 베니네 식구들과 아빠의 회사 동료 가족들, 이웃들이 가득했다. 나는 울지 않으려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발끝만 바라보다 차에 올랐다.

-

차문이 닫히고 차에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났다.

이제 베니를 보는 진짜 마지막 시간이 된 것이다.

고개를 번쩍들어 차창에 매달려 나처럼 입을 굳게 다물고 눈물을 참고 있는 소년을 올려다 봤다.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창에 댄 손바닥에 그의 손이 겹쳐졌다.

마침내 차가 출발했고 유리 한장을 사이로 마주했던 우리의 손이 헤어지고 말았다.

2017.02.25 16:2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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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졸라 조아 미친ㅜㅜ 얼른 긱사/안방/감옥/고시원/양로원 가서 읽어야지 중간까지 읽었는데 넘나 달달해요 센세 담담한 필력도 존나 내 취향
[Code: 2b51]
2018.01.01 23:43
ㅇㅇ
모바일
ㅠㅠㅠㅠ 함께한 시간이 길어지고 매일 얼굴을 보게 되면 변하는 걸까 ㅠㅠㅠㅠㅠㅠㅠ 센세의 문장을 아껴읽는데 내려가는 스크롤이 너무 매정하네요 ㅠㅠㅠㅠㅠㅠㅠ
[Code: 58c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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