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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1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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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잼~~~~`미안~~~~~~~~~~~~~~~~~~~~~~~``











연휴 D+1

 

 

 

 

늘 칙칙하고 부대낀 도시의 하늘을 바라보는 너는 유독 파랬다. 도시의 왕자님처럼 생겨가지곤 저 멀리 시골의 가을 밀밭이 뙤약볕에 짓눌려 나부끼는 것처럼 먼지 낀 잔디 금발, 끝이 안 보이는 수평선 위의 파란 하늘처럼 뒤집힌 얼굴. 저 하늘 위의 동그란 뭉게구름은 네 궁둥이 턱인지. 입술인가? 잠깐만, 지금 내가 얘와 얼굴을 거꾸로 마주보고 있는 건가? 눈앞인데도 확신이 안 설 정도로 가물가물했다. 짐은 밀밭 옆으로 난 도랑 둑길을 따라 까치처럼 총총 뛰며 레너드와 거리를 두었다. , 어디까지 갈 생각이냐? 퉁명스레 물었지만 그 녀석은 여전히 웃는 낯을 잃지 않았다.

본즈. 할 말이 있어.”

네 녀석이 사고치는 게 하루 이틀인가. 뭔데?”

다른 사람에게는 거짓말했지만, 난 사실 우주가 좋아서 여기 온 거 아냐.”

뭐라고?”

우주에 환장해서 온 거 아니라고. 너한테 그런 척 하느라 힘들긴 했지만, 즐거웠어!”

갑자기 왜 이래?”

이미 내 걸 몰래 봤으니 알 거 아냐. 나도 네 걸 몰래 봤어. 너도 나도 여기 오기 전까지는 시궁창이었잖아. 그런데 멀쩡한 집에서 살면서도 여전히 시궁창 생각을 해. 웃기지?”

거짓말!

 

거짓말. 벌떡 일어나 팔을 뻗자 반동에 밀린 게 데굴데굴 굴러 바닥으로 쿵 하고 엎어졌다. 뭐인가 싶어 깜짝 놀라 내려다보니 금발이었다. ? 깜짝 놀라 시트를 걷어내 보니 여긴 짐의 침대 위였다. 술 먹고 같이 여기서 잔 거야? 방금보다 더 놀라 제 몸뚱이를 식은땀에 절은 손가락으로 비벼봤지만 옷은 벗긴 흔적 없이 멀쩡했다. 다행이다, 잠만 잤구나. 이미 플레이보이로 이름을 날린다고는 하지만 속은 한참이나 어린 애와 자는 건 레너드 자신이 용납 못 할 일이다. 이 녀석이 잘난 얼굴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자야 할 이유나 자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아직 못 찾았으니까. 술김에 일을 치지 않았다는 것에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감사해야 했다.

레너드의 개꿈에 밀려 침대에서 나자빠진 짐은 신음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왜 밀고 난리야, 짜증 잔뜩 어린 목소리를 들으니 갑작스레 찾아온 탈력감에 저절로 숨이 공허하게 새었다. 다행이다. 정말 쓸데없는 꿈이었어. 침대 맡에 팔꿈치를 디뎌 위로 올라온 짐은 눈을 비비고 입을 쩍 벌려 하품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대?”

해가 중천이다. 꼬맹아. 네가 퍼질러 잤던 거야.”

난 조금만 더 잘게. 식사는 알아서 해.”

그렇게 자놓고 뭐가 모자라. 하루를 조금 더 가치있게 보내 봐.”

화폐 기준으로 셀 수 있을 만큼의 생산성을 바라는 거라면 거절한다.”

한 마디도 안 져요.”

시트를 몰아 그 녀석 위로 덮어 준 레너드는 배를 긁으며 주방으로 나와 생수부터 찾았다. 가볍게 두 컵을 연거푸 마신 그는 어제 정리했던 식재료를 꺼내 주방 구석의 가열기를 찾았다. 짐은 진짜로 다시 자는지 침실 밖으로 얼씬도 하지 않았다. 올해 마지막 날이라는데 유달리 특별한 게 없었다. 나이를 먹어서 이젠 한 해 가는 것도 모래알 세는 것처럼 쓸모없게 된 건지, 아니면 잔뜩 마음 속 힘이 빠져 세는 보람을 못 느끼는지. 보통 한 해가 끝나갈 때쯤이면 올해는 어땠는지 정산하고 내년의 계획을 세우지 않나? 난 올해에 뭘 했더라.

생각하는 걸 그만 두었다. 올해 초부터 생각하자니 암담했다. 내년에는 뭘 할 거냐고? 하긴 뭘 해. 공부해야지. 미래의 목표야 스타플릿 아카데미를 졸업해 우주로 나가는 것이다. 그 중간 과정이야 길고 복잡하고 정해진 코스가 있으니 단계별로 꾸준하게 밟으면 될 일이고, 그때그때 단기 목표로 채우면 되겠지. 올해도 일기장 대신 플래너를 쓰게 생겼구나. 삐이익, 커피 메이커가 비명을 지르자 생각에 골똘히 잠겨 테이블에 걸쳐 앉던 레너드는 후다닥 뛰어 손가락 끝으로 커피메이커 전원부를 연타했다.

향이 진하다 못해 독한 커피를 내려 마시자 잠이 확 달아났다. 그런데 왜 꿈 내용은 잊히지가 않는지. 짐을 커피로 깨우려다 만 그는 얼굴 한 쪽을 갸우뚱 기울여 손바닥으로 받쳤다. 환상적이었던 풍경 속에서 자기를 똑 닮은 배경을 친구삼아 달리던 짐은 갑자기 미사일을 쐈다. 진짜 미사일을 쐈다는 게 아니라, 충격발언을 했다고. 환장한 게 아니라니,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이다. 그럼 도대체 뭘 위해 그렇게 공부하고 연습하는 거야? 우주로 나가기 위한 이 교육 과정들을 다 어디로 쓰려고? 그 녀석이 잠들어 있을 침실 문간을 슬쩍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조용했다. 그래, 그저 개꿈일 뿐이지. 저 녀석은 우주에 나가서 이름 날리는 모험가가 되길 꿈꾸는 호방한 어린애일 뿐인걸. 물론 부모님에 대한 콤플렉스도 있지만, 어릴 적 들었던 동화책과 영웅담, 우주의 역사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는 꼬맹이야. 그게 아니면 뭐겠어. 그 허랑방탕했던 모습도, 갑자기 예민하게 행동하는 지점도 모두 간단하게 설명되잖아.

그러니까 내가 뜻하지 않게 보게 된 일기장이나 편지, 가족사진 따위는 꿈에서 죄책감을 자극하는 용도일 뿐이라는 거다. 전혀, -! 그 녀석이 말하고 싶어 안달 난 고백거리를 피곤함에 밀어버린 잔인한 어른 친구가 아니란 거야. 레너드가 혼자 사색하고 혼자 매듭짓는 사이 커피는 다 식었고 그는 엉덩이를 움직여 식사거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짐은 음식 냄새에 곧바로 일어나 주방을 기웃거렸다. 웬일, 웬일. 평소에 카페테리아를 찾아가 뭘 시키기조차 귀찮아하는 레너드의 성깔을 기억한다면 손수 요깃거리를 만들어준다는 게 기적이라는 것쯤이야 추리하는 건 어렵지 않다. 짐의 감탄사를 모조리 들었지만, 애써 모른 척 얼굴 꼴이 말이 아니라며 닦으라고 잔소리부터 늘어놓는 맥코이의 잔소리 악귀 흉내는 그 해의 마지막 날까지도 여전했다.

짐이 덜 깬 잠에 깨작거리는 사이 맥코이는 발코니 문을 슬쩍 열고 나와 전화기를 들었다. 마지막 날에 전화조차 하지 않는다면 부모든 형제든 유감스럽게 여길 일이다. 그들의 생일날에 잠깐잠깐 전화만 했지, 맥코이 가의 생일 하나 없는 연말에는 레너드의 이름으로 된 먼 곳의 메시지 하나 도착하지 않았으니 필시 서운해 할 것이다.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하던 일 다 때려 치고 갑자기 스타플릿 생도로 직업을 바꿨다는데 잘 지내는지 가끔 연락 받는 것 빼곤 뜸한 녀석에게 섭섭한 건 탑만큼 쌓였을 터. 폐인처럼 보냈던 작년의 잠수와 달리 올해는 멀쩡하게 보낼 안부인사다. 차라리 짐 없는 데서 할까 싶다가도 간밤의 꿈이 계속 신경 쓰여 멀리 갈 수도 없었다. 내 집도 아니고 내 가족도 아닌데, 왜 밥 먹는 강아지 뒤에 두고 안절부절 하는 것 같은지. 그는 발코니의 문을 단단히 닫고 구석에 기대서 부모님을 향해 전화 버튼을 천천히 꾹꾹 눌렀다.

[세상에, 레니. 너였구나.]

누나는요?”

[잠시 장 보러 나갔어. 이럴 줄 알면 내일 나가자 할 걸 그랬다. 레니, 리사에게도 따로 연락 할 거지?]

해야죠. 그동안 잘 보내셨어요?”

[우리야 사는 게 늘 똑같지. 우리에게 유일하게 궁금한 게 있다면 네 이야기일 거야.]

들으실 게 뭐가 더 있겠어요. 저도 아카데미 들어온 이후로 매일매일 비슷하게 살아요.”

말하는 동시에 조금 부끄럽긴 했다. 다른 친구들이면 이 나이에 자녀가 있을 법도 하니 어머니의 말씀이 뭘 이야기하는지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저 뭘 먹고 사는지 말고도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주변에 생긴 새로운 친구나 애인은 있는지, 멀리 떨어져서 슬픈 건 없는지 그런 걸 한데 뭉뚱그려 묻는 소리겠지. 자신도 병원에서 일할 때 아이들에게 그렇게 뭉뚱그려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방긋방긋 웃으며 하루에서 일어난 일들 중 가장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본인이 아침에 호흡곤란이 와 간호사와 의사의 명줄을 들었다 놨다 한 것은 하등 쓸모 없는 아픔이었고, 그 소란에 일어버린 소중한 인형이나 시간을 놓친 만화 이야기. 저번에 나왔던 편의 캐릭터가 내뱉은 명대사에 감명 받았던 자신, 뭐 그런 것들. 어머니는 그런 거라도 한참 나이 먹고 목소리 걸걸한 아들에게 바라는 거다. 생각나는 이야깃거리가 없진 않다. 짐에 대한 것들이라면 할 말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그런 걸 어떻게 해, 레너드가 푸스스 웃자 전파 너머 어머니는 침묵했다. 기뻐서 그러시는 걸 거라 혼자 판단했다.

 

*

 

리사 누나와의 통화도, 못 만났던 어릴 적 친구와의 통화도 얼렁뚱땅 마치니 쌀쌀맞게 내려앉은 공기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직 입김은 나오지 않았지만 언젠간 나오겠지 싶을 정도였다. 레너드가 두 팔을 잔뜩 안으로 숙이고 실내로 우다다 뛰어들었지만, 주방이나 거실에서 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나갔나? 그래도 식기까지 모두 씻어 정리한 걸 보니 용무가 있어서 나간 모양이다. 알아서 돌아오겠거니 싶어 어제 자빠뜨렸던 철제 책장을 살피자 굳게 닫힌 서재 문 안에서 그 녀석의 소리가 들렸다. , 맞아. 그럭저럭 지내고 있어. 짐도 자신이 통화하는 틈을 다 제 볼 일을 보내는가보다. 누구를 향해 말할 때와 달리 가라앉아 미끼 없는 낚싯줄 읽는 낚시꾼처럼 무심한 목소리에 레너드는 재빨리 그 자리를 피했다. 이윽고 서재에서 나온 짐을 향해 레너드는 망구스처럼 고개를 쏙 들었다.

통화 다 했어?”

? .”

누구와 통화했는지는 서로 가볍게 얼버무린 둘은 잠시 침묵했다. 이 흐름에 오한을 느낀 레너드가 가방 안에서 가볍게 걸칠 옷가지를 찾자 짐은 자기 옷장 안에 쓸 만한 옷이 있을 것이라 제안했다. 그 녀석의 제안을 따라 옷장을 열어봤지만 생각보다 작아서 그만뒀다. 생도복은 비슷한 사이즈로 입는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은 늘 어깨와 복부의 품이 남아서 날라리처럼 덜렁거렸다. 본인에게만 좀 낑기곤 했지. 옷이 작다는 소리에 짐은 당황한 척도 안 하고 그러려니 했다.

차라리 별일 아니게 놀릴 만한 일이면 좀 좋아, 서로 건드리고 싶지 않아하는 가족 통화는 왜 얻어 걸려가지고. 레너드는 전화기와 패드만 열심히 바라보던 짐의 낌새를 보다 슬쩍 말을 건넸다. 어제 비양심의 어깃장을 놓고 나니 고 녀석은 레너드에게 보여주려던 걸 바로 접어버린 모양이다. 그러니 하릴없는 침묵에 더 어색했고 레너드는 그걸 버틸 수 없었다. 노력한다고는 하지만 상대에게 쉽게 마음 안 주는 철벽 때문에 곧잘 어색하게 만들던 제 버르장머리는 어딜 가고, 이 꼬맹이를 이리도 달래려 애를 쓰는지.

내일이면 새해네.”

그렇지?”

새해 잘 보내라.”

너도 새해 잘 보내.”

새해 선물로 받고 싶은 건 없어?”

…….”

없냐? 진짜로?”

내가 애야?”

표정 없던 얼굴에서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어이없어 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웃으니 다행이다. 레너드가 따라 웃자 패드를 그 보란듯 탁자 가운데에 내려놓은 짐은 카디건을 깊게 여미며 그를 향해 괜한 지청구만 연발했다. 통화 같은 건 안에서 해도 뭐라 안 해. 뭐 하러 밖에서 했어. 괜히 거리를 두었던 게 미안해져 레너드는 어깨만 으쓱였다. 할 말은 고작 내 집이 아니었기에 예의를 차렸다는 게 다였다.

대놓고 네 앞에서 하면 물어봐달라는 것 같잖아.”

짐은 그 말에 잠시 입을 삐쭉하니 내밀었다 쏙 넣었다. 점점 속이 읽히는 반응에 레너드도 같이 삐쭉하니 불만을 입으로만 보일 순 없었다. 조금 더 나이 잘 먹은 쪽이 먼저 표현해야지.

내 일에 대해 궁금해서 그래?”

사실은 좀 그래.”

이렇게 불쑥 인정할 줄 몰랐는데. 그 이유를 묻자 짐은 다짜고짜 오늘 아침의 일을 꺼냈다. , 아침부터 갑자기 거짓말! 이라 소리 지르곤 벌떡 깨더라고. 무슨 꿈을 꿨던 거야? 그 소리를 또 듣고 있었나보다. 등골이 싸했다.

, 개꿈을 꿔서 그랬어. 꿈이 현실인 줄 알고 믿기 싫어서 그런 거지. 나도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냐?”

그래.”

나와 지금 룸메이트 이상의 친구가 되고 싶은 거야?”

그 녀석은 즉답했다.

. 맞아.”

?”

너와 그렇게 되고 싶어서.”

아니, 왜 그러고 싶은 거냐고.”

네가 참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거든. 이기적이지만, 날 감당해줄 수 있는 친구라 생각하기도 했고.”

부끄럽지만 생각해보니 그건 그렇네.”

유머로 던진 자화자찬인데도 왜이리 부끄러운지! 레너드는 슬슬 열이 붙은 턱끝을 손톱으로 긁었다. 이렇게 얘가 솔직하게 나올 수 있을 줄이야. 그는 벽을 조금 낮추고 성루 위에서 허리를 굽혀 물었다.

네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난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시간이 걸려. 시간이 지날수록 관계에는 벽을 세워서 올라올 수 있는 사람만 받어. 나머지는 그저 벽 밖에서 종종 내려다보며 인사하고 사이좋게 마주보며 대화할 수 있는 그 정도의 호의야.”

이 나이 먹고 이런 말 하니 창피하군. 어디에도 대놓고 이야기해본 적 없는데. 이혼하기 직전 파멜라와 대판 싸우고 그녀가 던졌던 비수 중 하나였는데 이렇게 자기 성찰용으로 다시 꺼내볼 줄은 몰랐다.

하지만 내가 의사다보니 밖의 사람들도 모두 중히 여기고 그들에게 가지는 애정의 최저치도 남들보다 높을 수는 있지. 그래도 사실 난 모두에게 친절하고 사랑을 베풀 만한 놈이 못 돼. 감상적이고 정 많다 해도, 어렸을 땐 그랬을지는 몰라도, 지금은 계산도 몰래 해 보고 감정에 이익이 나지 않을까봐 찝찝할 때도 있어. 그러니까,”

아아! 올해 마지막 날인 데다 가족, 친구들과 일 년 만에 통화했더니 사람이 많이 감상적으로 변했나 보다. 모든 흑역사가 이맘때쯤 생긴다더니! 레너드는 제가 말해놓고도 창피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짐은 레너드를 곁눈질하다 씩 웃었다.

그렇게 말하니 내가 벌써 널 길들인 것 같다.”

장난치지 마라. 네가 말한 정도까진 아니야. 네가 특별한 친구라는 건 맞지만,”

하지만 넌 정말로 좋은 사람이야. 벽창호 같긴 하지만.”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퉁명스럽긴, 짐은 장난거리를 한 아름 들고 온 골목대장처럼 키득키득 웃었다. 그 녀석은 책 하나를 레너드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청소하다 내 책장에 손댔잖아. 하지만 내가 정말로 기분 나빠질까봐 말은 안 하고.”

레너드의 소리 없는 비명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짐은 귀 막을 준비를 마쳤지만, 레너드는 벌컥 화를 내는 대신 변명부터 시작했다.

, 그건 내가 고의로 한 게 아니라!”

어찌보면 비겁한 행동이겠지.”

하지만, 짐은 책장에 고이 넣어놨던 책 치고는 관심도 없는 것처럼 책을 거실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그 녀석이 나름 아껴 모은다는 책을 이렇게 대하니 레너드도 기가 찬 모양이다.

사실 이런 일이 생겼으면 하고 바라긴 했어. 실제로 될 줄은 몰랐지만.”

뭐라고?”

널 굳이 여기서 재워준다 한 이유야 알다시피 간단해. 너와 더 친해지고 싶어서였어.”

그 녀석은 책장으로 가뿐하니 달려가 일전에 레너드가 잘 숨겨놓았던 상자를 꺼냈다. 잘 정리된 꼴에 이것도 레너드가 건드렸는지 물었고 레너드는 혼돈에 빠져 고개를 겨우 끄덕였다. 짐은 정직한 대답에 깔깔 웃고는 일기장과 편지들을 꺼냈다.

 

*

 

네 아버지를 넘어 서 봐.”

그가 떠난 후 제임스는 생도들이 엉거주춤 떨어뜨리고 나갔던 스타플릿 함선 모형을 집어서 만지작거렸다. 어릴 적 꿈에 그런 것들이 있긴 했었다.

어머니가 집을 자주 비울 때 같이 있어준 사람은 형이었다. 샘 데이비스? 말도 말자. 그 인간은 점점 몸이 안 좋아지고 농장 관리가 힘들어지면서 성질을 온갖 방향으로 냈고, 막아줄 어머니는 없었다. 이 모든 부재의 상징이자 결정체인 제임스에게 쏟아지는 시선들과 약간씩만 따끔거리는 빈정거림-우습게도 샘이 그 정신에 용케도 폭력을 자제해서 다행이라 회상하곤 한다-의 유일한 방패는 형 조지 커크(주니어). 하지만 그도 어느 순간 지쳐버린 건지 집을 나갔다. 샘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그는 샘을 속으로 경멸해서 그에게 일일이 반응하지 않으려 노력했는걸. 그럼 뭐였을까? 그 모형을 보며 생각건대.

제임스는 여전히 질질 흐르는 코피를 손등으로 쓱 닦으며 피 섞인 콧물을 들이켰다. 커크로 더 이상 살기 힘들다는 그 말, 그 말 그대로였겠지. 나처럼 말이다. 영웅담에 짓눌려 새 삶을 찾으러 간 엄마와 남은 유산인 어린 동생, 몇 촌 떨어진 친척을 난데없이 받아 키우는 삼촌. 유족이지만 부귀영화도 장엄한 행복도 못 누리는 꼴이야 늘 안주거리지 않나. 아무리 아버지의 이름이 수록된 교과서를 들고 나와 별이 수놓은 밤하늘에서 손가락으로 별자리를 찾고 손대중으로 별들의 이름을 댄다 할지라도 아버지의 이야기는 일종의 벽이었다. 문처럼 필요에 따라 열렸다 마는 통로가 아니라 그저 가로막고 사람의 초상 하나만 걸어놓고 숭배하는 것밖에 못하는 숭고한 장애물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거기서 교훈을 찾았다지만, 한참 어렸던 제임스와 조지 커크 주니어에겐 그게 다였다.

자주 집을 비우던 어머니가 보고 싶다 칭얼거리던 동생을 껴안고 나오곤 했다. 옥수수대 아래서 델타 베가를 찾아보라며 랜턴을 사부작거리던 형은 코흘리개 동생에게 제 꿈을 설파했다. 우리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야? 조지 커크, 켈빈 호의 부함장, 많은 사람들을 구했다고 했어. 맞아, 그 전에 아버지는 모험가였어. 전쟁도 했지만, 원래는 저 하늘 위를 날아서 다른 별을 찾아 그 위의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지도를 그리고, 새 별을 찾으면 탐험하고 하던 사람이야. 갑자기 나타난 위협에는 페이저건을 막 쏘고, 페이저건 알지? ! 뿅뿅하고 나오는 거. 맞아, 아버지 아래는 수백 명의 부하들도 있지. 멋있다! 그래도 아버지가 무섭게 명령하는 게 아니야. 그럼 뭐 하는 건데? 그 사람들의 말을 듣고, 가장 좋은 방법을 구하고, 그 사람들이 위험할 땐 아버지가 앞서서 부하들을 구하는 거지. 부하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만, 또 가장 중요할 때 아버지에게 도움도 받는 거야. 멋있지? 제임스는 갓 난 덧니를 손가락 끝으로 긁으며 속삭였다. 그건 친구 아니야? 조지는 그 말에 제 어휘력이 별로인가보다, 하고 멋쩍게 웃으며 동생을 업어 수수대 맨 위로 올렸다. 친구일 수도 있겠다는 형의 동의에 제임스는 기분 좋다며 멍청하게 웃곤 했다. 그렇게 밤에 나가 놀다 지쳐 돌아올 때 그는 제임스를 업고 재우듯 흔들흔들 걸으며 물었다.

너는 뭘 하고 싶어?”

우주에 나갈 거야. 가서 이 세상 모든 걸 다 볼 거야! 적이 있으면 무찌르고, 친구가 있다면 만들고! 아빠보다 더 유명한 탐험가가 될래. 보이스카우트는 시시해.”

너 그러려면 평생 우주에만 있어야겠다. 나 보러 오긴 할 거니?”

쉴 때는 보러 갈게. 형은 봐야지.”

자식. 이제야 형 생각하긴.”

엄마도 보고.”

그래, 그래야지.”

엄마는 언제 와?”

, 그것보단 너는 어떤 탐험가가 되고 싶어? 싸우는 사람? 아니면 지도 그리는 사람? 아니면 우주선을 직접 몰고 다니는 사람? 함장 의자에 앉을 사람?”

탐험가가 그런 것도 다 해?”

물론이지. 그래서 모험가도 다 각각이야. 스타플릿 셔츠도 색깔 여러 개잖아.”

글쎄. 그래도 최고의 탐험가는.”

탐험가는?”

가장 용기있고 자유로운 사람일 거야! 여기저기 다니면서 거리끼는 게 없는 사람! 무서운 게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말이야. 가장 겁 없어야 해.”

나중에 유명해지면 형 이름 꼭 새기고 다녀야 해.”

꼭 새기고 다녀야 해, 아직도 그 목소리가 생생한데. 형은 어느 날 고등학교에서 돌아오며 짐을 싸서 나갔고 샘은 그를 말리지 않았다. 돈 한 푼 쥐어줬을지 의문이지만, 아직도 연락은 가물가물했다. 뭘 하고 사는지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어디 살겠거니 할 뿐이지.

그의 나이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가 왜 나갔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교과서적 유산이든 어머니가 그나마 남겨놓고 떠난 돈으로든, 샘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서든, 스타플릿으로 향하기엔 뚫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사람들이 와글와글 거리는 시내로 나갈라치면 그들은 제임스의 이름을 들으며 속삭였다. 그 조지 커크의 아들이라고. 사람들은 조지 커크의 아들에게 왜 스타플릿에 가지 않느냐 도리어 물었다. 하루하루 샘과 입씨름을 벌이며 농장을 가꾸던 땅꼬마에겐 질리고 또 질리는 질문이었다. 농장 밖에 나가면 어디서든 그 말을 듣는다. 이 조그마한 시골 아이오와 밭뙈기 카운티에 있는 학교에서 제임스 커크를 몰라보는 사람은 없었다. 작고 폐쇄적인 시골 환경에서는 늘 이리저리 말이 퍼지기 마련이었고 형이 집을 나갔다는 것도 빠르게 퍼져나갔다.

유달리 머리가 좋았던 그 꼬맹이가 어른들의 이중적 언어를 알아차리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늘 샘의 빈정거림을 상대하는데 뭐가 어렵다고! 어릴 때는 그의 속내를 간파해서 다 아는 척 대답했다. 그러자 그들은 별 이상한 꼬맹이를 본다며 혀를 차거나 어른 흉내 내느라 고생이 많다며 간식을 얹어주었다. 그게 꽤 수치스럽고 당황스러운 경험인 건 사실이다. 그래서 애써 어린 척 멍청한 척을 했다. 조금 더 공부해서 가려고요! 그 해맑은 대답과 달리 꼬질꼬질한 먼지더미 머리칼을 본 사람들은 쉽게 짐작했다. 위노나 커크가 우울증을 이기지 못해 떠났다더니, 역시 안 좋은 쪽으로 끝이 났구나. 그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성장기를 맞아 제임스가 유달리 커 조지 커크의 나이대가 되자 그들의 태도는 점점 바뀌었다. 샘의 태도도 바뀌었고, 또래의 태도도, 종종 잡일을 하러 나가는 동네 이웃 주민의 태도도 바뀌었다. 그들의 아들 중 하나는 가업을 이어받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시에 나가 공부를 하고 온다 했다. 짐에게 이제 뭘 할 것이냐 묻자 그는 능청스레 스타플릿이나 가 볼까요 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어른의 대답이었다. 이제 슬슬 네 나이가 있으니 미래 생각도 해야지, 조금 더 현실적으로 굴어 봐. 샘 데이비스, 그 인간의 말도 마찬가지. 위노나가 보내주는 돈을 모아놓긴 했지만 현실적으로 굴 때 소유권을 주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준비도 안 하고 살아왔던 주제에 가당찮은 우주라고. 아무나 다 갈 수 있다는 아카데미지만, 웬만한 대학 수준이라는 입학시험에 자기 소개서에 제대로 쓸 말도 없다면 떨어지는 건 따놓은 당상. 무엇하나 잘 보급되지 않은 이 촌동네에 너무 많은 걸 바란 걸지도 모른다. 사람들 모두 단지 아버지의 이름 하나만 딱 써놓고 가는 건 별로다 생각했다.

사실 제임스도 거기엔 동의했다. 어릴 때나 사랑스럽던 아버지의 이야기다. 교과서에 매번 나오고, 그가 어떻게 죽음에 다다랐는지 선생의 입으로 배우는 동시에 선생들이 제 눈치를 보는 걸 매번 확인해야 했다. 원하지 않았는데도 비참한 현실의 주인공이 되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다. 친하지도 않은 급우 녀석들은 진심으로 제임스를 동정했다. 멀쩡히 다 먹고 사는데도 밥을 못 먹는 것처럼, 유달리 그런 수업이 있는 날 근처에 그에게 초대하거나 쪽지를 남겼다. 행방이 잘 안 잡히는 형과 달리 계속 아이오와에 남은 자신을 향해 사람들은 마이크를 멈추지 않았다. 꼭 그를 기억하길 바랐고 생일날에는 축하보단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묵념이 우선이었다. 커크가 뿌리박힌 땅 위 사람들, 어머니를 포함한 모든 이들은 살아있는 커크를 보며 죽은 커크를 더 먼저 떠올렸다. 형은 그걸 이기지 못하고 아예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선 거겠지.

우주? 땅에 발붙이고 사는 동물이라 그런 거, 뭔지 모르겠다. 밤하늘을 수놓던 꿈? 다 엿 먹으라지. 모험? 죽으면 끝 아닌가. 생명을 심어 준 어머니는 자동 응답기를 돌린 것 같은 편지와 함께 돈을 붙여 보냈고-종종 눈물 자국이 보였지만 삐뚤어진 마음에는 그저 가식의 흔적이었다-, 꿈을 심어준 형은 도망치고 없었다. 이것을 남겨놓고 떠나간 아버지의 이야기는 듣기 좋은 남의 이야기였다. 빛 좋은 개살구, 그나마 쓸 만한 건 유전자 잘 받은 얼굴 정도지. 어영부영 흐른 세월과 멀어진 꿈을 탓할 원인을 찾아도 너무나 많으니 느는 건 세월아 네월아 술타령뿐이다.

그리고 이제 곧 교육을 받으러 갈 생도들이 모인 공간 아래서 싸움을 걸었더니, 구세주인 양 훌쩍 모두를 가르고 찾아온 대령이란 사람은 스타플릿에 들어가 보자 했다. 마치 버려졌던 한 어린 양 하나를 구하듯 다정했다. 사람들의 부정적 감정에 능숙한 커크는 단번에 그의 제안이 같잖은 동정이나 자기만족적 시혜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는 진심으로 제임스 커크의 잠재력을 궁금해 한 걸지도 모른다. 그 커크의 피가 어디 가지 않을 거란 생각인지, 아니면 제 아버지의 이름에 먹칠하는 걸 즐기는 어린애를 알아본 경험 때문인지. 그래서 아버지를 이겨보라고. 그의 잘 발달된 직감은 이것이 아이오와 인생 속 절호의 기회라며 쉬지않고 종을 울렸다. 좋아, 한 번 이겨 먹어볼게. 그래서 모두의 코를 납작하게 누르고 내 앞에서 조지 커크 옆에 나란히 제임스 커크라는 이름을 붙여버릴 것이다.

 

노력했는데, 좋은 친구도 만났다 생각했는데 역시나 얼마 못 가 사고를 치고 말았다. 본즈가 학을 뗄 줄 알았지만, 그가 제일 먼저 물어본 건 하나였다. 소명할 수 있느냐. 제임스는 얼떨결에 할 수 있다 대답했고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분명 주위에서 아버지를 꺼낸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본즈에게 귀가 있고 사교성이 있다면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본즈는 시큰둥하니 같이 쓰레기를 빗자루를 쓸고 같이 돌아왔다.

교관은 제임스의 사정을 들어 알았는지, 주변의 증언이라도 들었는지 그에게 근신과 함께 상담을 받길 권했다. 만약 상담이 끝나고 나서도 변화가 없다면 그때는 정말 아웃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쫓겨날 순 없으니 파이크에게 된통 야단을 맞고 틈틈이 상담을 받았다. 아버지를 따라잡을 수 있겠냐 할 줄 알았더니 악의가 뻔히 보이는 유치한 비아냥거림도 못 넘기면서 어떻게 수백 명을 이끌 함장 자리를 노리냔 소리에 도리어 눈물이 찔끔 나올 뻔했다.

파이크의 도움으로 샘에게 제 앞으로 된 펀드의 소유권 이전 소송을 걸었고 돌려받았다. 위노나는 미안하다며 그 동안 못 보냈다던 돈을 얹어 보냈다. 맘 같아서는 다 돌려보내고 싶었지만, 돈이 급했기에 그냥 받았다. 어머니와 편지에 뒤이어 연락도 잘 안 되던 형의 편지도 도착했다. 제임스는 한 번 읽고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돈을 모아 작은 플랫 하나를 구했다. 파이크를 타고 새어 나간건지, 어떻게 알려진 건지, 근신 기간 중에도 형과 어머니의 편지는 계속 도착했다. 읽기엔 버거웠고, 이를 무시하기 위해 텅 빈 공간 안에 잠드려다 문득 발코니로 나와 밤공기를 쐬었다. 도심에서는 아이오와 깡촌과 달리 별 하나 제대로 보기 힘들었다. 난다긴다 하는 함선이 다 여기 있다면서 뭐 이러냐, 별은 우주로 나가서 본다는 주의일까? 별보다 더 빛나는 자동차들의 조명에 그는 어릴 적 별밭을 떠올렸다.

즐거운 모험은 어디로 간 걸까?

한치 앞도 모르지만 도리어 가슴이 뛰는 미지의 우주는?

용기 넘치는 탐험과 그 벅찬 자유를 같이 할 친구들은?

미친 듯이 어릴 적 보았던 책과 지도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잠자리? 연애? 계속 하겠지만 본질적인 쪽은 여기였다. 꿈은 여기서만 꾸면 돼, 함선이나 우주에 비하면 코딱지만하니 성도 안 차지만, 여기를 장식하며 꿈꾸는 걸로도 족하다. 아버지에 대한 동경도, 가슴에 몰래 품고 살았던 그리움도 여기까지다. 아카데미는 다른 곳이어야 했다. 정말로 우주에 나갈 수 있는 발판이었다.

원래부터 열심히 했던 공부지만 더 미친 듯이 집중했다. 교관들 눈에 띄어서 조교 자리를 꿰찼고, 그를 한때 얕보며 콧방귀를 뀌었던 생도들은 제임스의 성적 이야기를 듣고 눈을 휘둥그레 뜨다 혀를 찼다. 머리 좋은 날라리!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었던 벌칸 교관은 종종 그를 눈여겨보았다. 본즈는 이상하게 여기는 눈치였지만, 말리지 않았다.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아카데미 안에서는 고마웠다.

한 해가 다 되어가고 까맣게 모르던 기숙사 폐쇄 공지에 본즈가 갈 곳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그가 조용하니 갈 곳을 고민하는 걸 보고 커크는 그 작은 집을 떠올렸다. 본즈에게 한 번쯤은 보여주고 싶었다. 그 무관심도 어쩔 수 없이 가장한 거라면 좋잖아. 내 진실을 보여준다면 낫지 않겠어?

본즈 네가 이걸 보고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지. 더 친한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거절할 수도 있지. 그래도 더 중요한 건 내가 널 생각한다는 거야. 이기적이지? 그래도 넌 그걸 받아줄 수 있는 좋은 사람이니까.”

그거 너무 고백 같다.”

그래? 여하튼, 넌 내 유일한 친구라는 거지. 물론 그 체콥 꼬맹이하고도 사이가 나쁜 건 아니지만, 걔는 그저 호의적인 관계일 뿐이야. 친구는 너뿐이고.”

네 형, 너랑 똑 닮았네.”

그럴 땐 내가 형을 닮았다고 하는 거야.”

가르치지 마.”

알았어.”

너무 순종하지는 말고! 기분 이상하거든?”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거야?”

평소에 하던 대로 해!”

알았어!”

…….”

너 얼굴 빨개. 내 친구 소리에 그렇게 좋냐?”

, 아니거든!”

내 과거에 감명이라도 받은 거야? 내 입장에서는 부끄럽고 더러운데.”

아니라고! 너는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아냐, 아냐. 됐어. 이 멍청아.”

신년 10초 남았나 봐. 사람들 카운트다운 한다.”

5, 4, 3, 2, 10! 12시가 되자마자 플랫의 상하좌우로 사람들이 신년을 축하한다며 소리 지르는 게 귀청을 울렸다. 사람들이 쏜 폭죽이 발코니를 타고 올라가 펑 터졌다. 세상에서 가장 선명한 색들이 있다면 다 갖다 쓸 것처럼 물들어 큰 다리 위를 수놓는 폭죽놀이에 발코니 문을 연 커크는 레너드에게 손짓했다. 평생 못 볼 장관이니 봐두라는 소리렸다, 레너드는 여전히 겉옷 하나 못 걸친 채로 나와 자정의 탄내를 만끽하며 코를 벌름거렸다. 앞으로 5분 정도는 여기저기서 미친 듯이 쏘아 댈 불빛에 짐은 색깔과 사랑에 빠진 예술가처럼 눈을 반짝였다.

예쁘다.”

, 그런 말은 네가 작업 걸 때나 할 줄 알았는데. 제법.”

멋있잖아. 사실인걸. 사실 샌프란시스코 같은 대도시에서 하는 알록달록한 폭죽은 TV로만 봤지, 실제로는 처음이야.”

진짜로?”

뭐라고?”

탄내가 진동할 정도로 쉴 새 없이 터지는 폭죽 소리에 옆의 말소리도 잘 안 들릴 지경이었다. 다른 플랫의 발코니에서도 사람들이 나와 구경했다. 짐이 잘 안 들린다며 인상을 쓰지 레너드는 숨을 깊게 들이 쉬어 소리를 빽 질렀다.

진짜로 이런 거 생눈으로 처음 보냐고!”

! 진짜로! 그런데 지금 안경을 안 껴서 물감 퍼진 것처럼 보여! 네가 보기엔 괜찮아?”

왜 그런 걸 나한테 물어!”

넌 조지아 도시에서 살았었다매!”

짐은 눈을 큼지막하게 뜨고 팔짱을 낀 채 모든 걸 눈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레너드가 몸을 부르르 떠는 걸 보고서 제 카디건을 그의 어깨에 덮어 씌워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레너드도 같이 불꽃놀이를 보다 짐을 돌아보았다. 얘는 사랑도 사람도 모든 걸 다 겪어본 것처럼 구는데, 뜬금없이 처음 본다는 게 많다. 자신은 짐 커크를 지겹게 봤는데도 이 녀석이 늘 새롭다. 카디건이 작아서 불평을 해도 그 녀석은 여전히 안 들리는지 벌써 발코니 구석으로 가 마천루 사이로 보이는 광장의 불꽃놀이를 염탐했다. 레너드는 반대편 구석에서 팔짱을 낀 채 불빛에 금박지처럼 번쩍이는 그 녀석의 뒤통수만 멀거니 쳐다보았다. 주위의 커플이나 가족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저 건물 아래 사람들도 좋다 웃고 폭죽 소리는 시끄럽고, 제 귀도 멀 지경이었다.

.”

, 색깔 진짜 끝내준다. 본즈, 저거 내가 수업에서 배웠던 성운 색이다. 장미성운, 너네 메디컬 쪽은 이런 거 다 배워?”

자책하지 마.”

장미성운은 알파 분면에서 가장 큰 성운인데-, 사진작가들이 많이 찍으러 온대! 그거 알아? 베타와 감마 사이에도 저런 게 정말 많은데, 흑진주처럼 어두워서 모든 빛이 흡수되어서 별명히 블랙홀이라는 암흑 성운도 있어! 근데 거기까지 가는 항로가 길고 어려워서 잘 가지도 않고, 막상 가서도 잘 못 본다더라.”

넌 내가 봤던 사람들 중에서 꿈꾸는 게 제일 잘 어울리는 녀석이야. 제니만큼….

여하튼! 나중에 함선 타고 가서 사진이나 하나 찍어놓자. 이것보다 수천 배, 수만 배는 클 테니까!”

그러니까.”

찍은 사진 내 개인 로그에 영구 저장해 놓을 거거든!”

너 사랑스럽고 예쁘다고. 내가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잘났어.”

잔뜩 무서워하면서 블랙홀인 거 아니냐고 새파랗게 질린 네 얼굴도 같이 찍어두면 진짜 웃기겠다, 그치?”

…….”

본즈?”

나 귀 아프고 추워 죽겠다. 들어가자.”

뭐라고?”

추워 죽겠으니 들어가자고, 이 자식아!”

성질은!”

2017.02.21 20:5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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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스크롤길이가 혜자예오ㅠㅠㅠㅠㅠㅠ 나붕은 너무 기쁘조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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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1 21:53
ㅇㅇ
노잼이라니 그런말 하지말아요 센세 항상 잘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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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1 22:3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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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제가 제목만 봐도 떨면서 들어오는걸 아셨으면 좋겠다ㅠㅠㅠㅠ 진짜 좋고요 볼때마다 재밌읍니다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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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1 22:3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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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연재도 사랑하고 분량도 사랑하지만 뭣보다 사랑하는건 이 글 속의 본컼 관계가 너무 좋아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어나더 계속 쪄줘서 넘나 감동임 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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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1 22:51
ㅇㅇ
센세 노잼이라니 그런소리 하지 말아요ㅠㅠㅠㅠㅠ내가 이거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데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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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1 23:1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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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가 성실 수인이라니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붕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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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1 23:1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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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즈가 아무한테나 마음을 열지 않는다는 이야기나 커크 과거 이야기나 다 좋다 뭉클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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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1 23:1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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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본즈가 자기 진심을 말하는 거 존나 감격이야 ㅠㅠㅠㅠ 커크는 못 들었겠지만 본즈 쑥쓰러워하는 거 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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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1 23:1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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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잼이에요 센세 지하실에 새 책상 들여 놨어 편하게 앉아서 어나더 쪄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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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1 23:2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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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노잼인데... 붕무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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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2 17:1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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ㅜㅜㅜㅜㅜㅜ미쳤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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