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함부로 주우면 안 되는 이야기인데 제목이 너무 길다캄

클리셰 주의




 

1.

에즈라는 정재계에서 알아주는 집안의 사생아였음. 사고치는 것도 수습해주고 돈도 썩을만큼 있는데 그 이상은 안 해주고 기대도 없음. 밀러는 어머니 성인데 시골 마을 출신이었고 외모 말고 다른 건 별로 없어서... 아버지한테 사랑은 많이 받았지만 결국 정부로만 남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매일매일 우울증에 시달렸음. 어린 에즈라가 본 건 아버지에게 울고불고 매달리는 어머니와 가끔 찾아와서 며칠 머물다 그런 어머니를 두고 가버리는 아버지, 그리고 텅 빈 집뿐이었음. 아버지 얼굴도 가물가물했고 술과 약에 취해 한 번도 제대로 안아준 적 없는 가냘프고 아름다운 어머니만이 어린 시절의 기억임. 그리고 어머니가 결국 약에 취해 질식해서 죽은 후론 마음을 더 닫아버림. 당시 에즈라는 막 학교에 다니게 됐는데 집에 돌아와 본 게 어머니의 시체였음. 에즈라는 꼬박 이틀을 어머니의 시체와 함께 있었고 연락이 되지 않자 찾아온 학교 선생과 경찰에 의해 발견됨. 아버지 집안이 워낙 대단했기 때문에 작은 부고 기사 하나로 정리가 되어버림.


시간이 지나서 에즈라도 커서 대학생이 됐음. 어머니가 남긴 유산도 있었고 아버지가 분기마다 넘칠 정도로 계좌에 부어주는 돈 때문에 그냥그냥 세상을 살아감. 성인이 되자 의례적으로 붙여준 시터도 필요없게 됐고 이제 정말 혼자가 된 거. 누굴 만나도 충족이 안 되고 나름 반항하겠답시고 아무렇게나 살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때마저 수습은 아버지가 아니라 비서가 와서 해결했음. 아버지 얼굴조차 까먹고 그저 거울을 볼 때 언뜻언뜻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릴 뿐이었음.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이란 에즈라에게 증오이고 미움이면서 꿈과 환상 같은 거였음.


어쨌든 에즈라는 매우 아름다웠음. 어머니를 쏙 빼닮은 늘씬한 키와 서늘한 눈매, 예쁜 이목구비 덕에 어딜가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지만 본인에게 남는 건 늘 공허함밖에 없었음.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걸 먹고 좋은 차를 탔지만 집에 와봤자 아무도 없는 걸. 사람을 고용해 만들어놓은 멋진 요리들도 몇 입 먹고 버리기 일쑤였고 맥주나 와인을 마시며 게임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하는 게 다였음. 휴학을 하고 나선 더 그랬음. 그렇게 자꾸만 내면으로 침전하고 있던 에즈라가 콜린을 만난 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음.


그날은 에즈라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집 안을 서성이다 택시를 타고 마트로 감. 이런 마트는 제대로 와 본 적이 없었음. 혼자 뭘 살 일이 있었어야 와 보지. 게다가 에즈라네 집이 있는 고급 주택지에선 거리가 꽤 있는 곳이라 더 어색했음. 카트 하나 끌고 돌아다니면서 멍하니 손에 잡히는 거 이것저것 다 쓸어담고 있다가 누군가의 카트랑 부딪힘. 제법 세게 부딪혀서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는데 상대가 미안하다면서 고개를 꾸벅 숙임. 여전히 멍하니 고개만 끄덕이고 가려는데 상대가 에즈라 카트에 산더미처럼 쌓인 물건들을 보고 와, 가볍게 탄성을 지름. 무슨 파티라도 하나봐요? 친절한 목소리였음. 에즈라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카트에 쌓아둔 물건들을 봄. 맥주캔, 와인병, 각종 간식거리들... 이런 것들이야 하나도 안 이상했는데 무슨 집안 꾸미는 인테리어 제품들이랑 장난감 같은 건 언제 집어넣었는지 기억도 안 남. 그 남자 카트는 간소했음. 전자렌지용 라자냐랑 피자, 맥주 캔 여섯들이, 콜라 한 병.


“...파티 안 해요. 그런 거 해 본 적 없는데.”

“근데 뭘 이렇게 많이 샀어요?”

“집에 가서 버려요.”


거짓말은 아니었음. 파티에 초대하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에즈라는 별 흥미가 없었고 가도 혼자 술 몇 잔 마시고 돌아오길 반복했으니까. 집에서 여는 건 한 번도 생각해본 적도 없었음. 이렇게 산 물건들도 어차피 집에 가면 처박아뒀다 가정부가 오면 다 버림. 선물받은 거나 인터넷으로 산 물건들 같은 것도 마찬가지였음. 일주일에 세 번 오는 가정부는 이젠 지쳤는지 뭐라 하지도 않았음.


“난 콜린이라고 하구요. 마트 건너편 쪽 3번가 있죠? 그쪽에 살아요.”

“아, 네... 그래요.”


에즈라는 순간 이름을 말해줘야 하나 고민했음. 이름을 들었으면 말해주긴 해야지. 난 에즈라에요, 툭 말을 뱉곤 에즈라는 카트를 밀고 가던 길 갔음. 쓸데없는 물건 산 거 알았으니 돌려놓을까 하는 마음 잠깐 들었지만 그것도 귀찮고 그냥 가서 버리고 싶었음.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누가 뒤에서 어깨를 와락 붙잡음. 아까 그 남자였음. 그제야 에즈라는 자길 잡은 남자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봄. 어슷하게 시선이 맞았지만 저보단 약간 작았고 얼굴이 작은 편이었는데 눈썹이랑 눈밖에 안 보였음. 그 눈썹이 이리저리 휘었다 펴졌다 하는데 보고 있으니 좀 웃겼음. 한참 눈썹을 움직이며 고민하는 것 같던 남자가 갑자기 지갑을 꺼내 명함을 하나 꺼내 줌.


“...이거 왜 주는 거예요?”

“어... 이번주 주말에 우리집에서 포트럭 파티하거든요. 괜찮으면 오세요. 일곱시에.”


남자는 명함을 주긴 줬는데 왜 줬지 하는 후회가 좀 있어 보였음. 에즈라가 명함을 받자 남자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곤 카트를 밀고 사라짐. 에즈라는 그걸 주머니에 넣고 다시 마트를 한 바퀴 돌았음. 콜라 한 병과 냉동 피자가 새로 카트에 쌓임. 집에 도착해 짐을 현관에 내팽개친 에즈라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데우지도 않은 냉동 피자와 콜라를 먹었음. 차갑고 질겨서 잘 씹히지도 않았는데 어떻게든 꾸역꾸역 먹음. 그리고 주머니에 넣어뒀던 명함을 꺼내서 빤히 쳐다봄. 어디 아픈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몰라. 오지랖도 넓지 챙겨줘야겠단 생각을 한 거 자체가 좀 웃겼음. 그래도 누군가 이렇게 호의를 보인 건 처음이었음. 정확히 말하자면 제 배경을 모르는 누군가. 아버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는 사람대로,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대로 돈을 보고 ‘접근’한단 느낌을 항상 지울 수가 없었거든. 명함엔 콜린 패럴이란 이름과 함께 핸드폰 번호와 호텔 이름이 적혀 있었음. 아마 호텔에서 일하는 남자인가 봄.


왠진 모르지만 에즈라는 금요일 밤 잠을 설침. 좋은 꿈을 꾸었던 것도 같은데 이상하게 찜찜한 기분 때문에 깊이 잠들지 못함. 에즈라는 어머니 꿈을 꾸었음. 얼굴이 흐릿하게 보여서 어머니인진 확신할 수 없었지만 에지, 에지 부르는 목소리가 익숙했음. 저를 에지라 부르는 사람은 세상에 엄마밖에 없었으니까. 에즈라는 결국 자는 걸 포기하고 씻고 나와 냉장고 문을 열어봄. 가정부가 해놓고 간 음식들이 몇 보였음. 잠깐 망설이다가 에즈라는 쇼핑백 하나를 찾아내 음식을 담았음. 진열장에 처박아두기만 했던 와인도 같이.


“포트럭 파티 말이에요. 나 3번가 쪽에 있어요. 그 마트 앞에...”


뜬금없는 말에 전화기 너머 상대는 뭐라뭐라 웅얼거렸음. 콜린이란 남자는 아마 에즈라가 이 동네 사람일 거라 생각했겠지만, 에즈라는 블록을 한참 넘어가야 있는 고급 주택지에 살고 있었고 이렇게 작은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찬 동네를 헤매본 적은 없었음. 택시를 타고 내려 어슬렁거리며 동네를 좀 돌다 결국 마트 앞에 서서 전화를 걸었음. 콜린이 또 뭐라 웅얼웅얼거림. 에즈라는 조금 신경질이 났음. 음식이랑 와인 든 손도 귀찮았음.


“알았어요. 데리러 갈게요, 에즈라... 근데 내가 말한 건 저녁 일곱시였어요...”


잠이 덜 깬 듯 웅얼거리는 소리가 다시 울리고 전화가 끊겼음. 에즈라는 제가 뭔가 나사빠진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단 사실을 퍼뜩 깨달음. 그냥 집에 갈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왠지 그러기가 싫었음. 그리고 십분을 좀 넘게 서성거리는 동안 저 멀리서 자전거가 한 대 열심히 굴러오는 게 보였음. 콜린이었음. 에즈라를 발견한 그가 손을 흔들었음. 자다 깨서 온 게 맞는지 아디다스 츄리닝에 티셔츠 차림이었음. 새벽 공기에 숨결이 하얗게 흐려졌음.


“내 이름은 에즈라 밀러예요.”


콜린의 자전거 바구니에 쇼핑백을 넣으며 에즈라가 중얼거렸음. 상기한 얼굴의 그가 에즈라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음. 눈가가 가느다랗게 접히며 눈꼬리가 내려가는 게 보기 좋았음. 그게 보기 좋아서, 에즈라는 저도 모르게 제 풀네임을 이야기함. 왠지 가슴 근처가 간질간질했음.

 

 

 

2.

에즈라는 살면서 이런 아파트는 처음이었음. 엘리베이터는 끽끽거리는 소리가 났고 이런 걸 계속 타다간 일찍 하느님 보러 가게 될지도 모름. 자전거 묶어놓고 오는 동안 엘리베이터 소리나는 거 보며 우두커니 서 있던 에즈라 등을 콜린이 툭툭 두드림. 이래봬도 고장은 안 나더라구요, 마음을 읽힌 것 같아 에즈라가 고개를 휙 돌림. 콜린은 하하 웃더니 얼른 타라며 등을 밀어 넣었음. 4층. 콜린이 열쇠로 문을 열고 손짓하자 에즈라가 조심스럽게 집에 들어섰음.


드라마에서만 본 것 같은 집이었음. 넓지 않은 거실에 텔레비전, 연결된 플스, 거실 안쪽에 부엌이랑 테이블이 있었고... 뭐 이것저것 복잡함. 에즈라의 집은 이층집이었는데 들여놓은 가구들도 거의 쓸 일이 없었고 집이 워낙 넓어 듬성듬성 있는 탓에 사람 사는 곳 같지가 않았음. 여긴... 너무 사람이 사는 곳임. 이렇게 작은데 어떻게 파티를 한다는 거지? 사실 에즈라는 포트럭 파티 들어보기만 했지 와 본 것도 처음임.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는 에즈라를 알아챘는지 냉장고로 걸어간 콜린이 뭐 마실래요? 큰 소리로 물어봄. 그냥 고개를 젓자 콜린이 머쓱해하며 물 한 잔을 갖다줌.


물 한 모금 마시고 그 다음은 기억이 잘 안 남. 에즈라가 눈을 떴을 땐 밖은 온통 시끄러웠고 사람들로 가득 차 왁자지껄했음. 약 같은 거 탄 것 같진 않고 잠을 설쳐서 그런지 저도 모르게 잠이 든 것 같았음. 누워있는 침대는 콜린의 침대로 보였음. 침대랑 협탁이랑 옷장이랑 이렇게만 있는 진짜 작고 단촐한 방이었고 벽에는 포스터 몇 개만 붙어 있었음. 협탁엔 읽던 거였는지 키츠의 시집이 있었는데 에즈라는 쓱 보고 이름을 기억해둠. 학교에서 분명 배웠던 것 같은데 흘려들었는지 제대로 기억은 안 남.


“어, 일어났어요? 엄청 오래 잤네요! 계속 깨웠는데 안 일어나더라구요. 배고프죠? 뭣 좀 먹어요. 야야, 여기여기, 내가 저번에 말했던 그 마트에서...”


일어나서 좀 멍하니 앉아있다 문을 열고 나오니 거실은 사람들로 왁자지껄했음. 에즈라를 발견한 콜린이 크게 손을 흔드는 게 보였음. 잘 몰랐는데 콜린이 말하는 걸 들으니 배가 고픈 것도 같았음. 무슨 자석에 이끌리듯 에즈라가 얼른 콜린에게 다가감. 떠드는 소리에 비해 사람이 많은 건 아니었음. 거실이 크지 않으니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콜린은 인기가 많아 보였고 옆엔 사람들이 붙어 있었음. 에즈라는 맥주병 하나를 집어들고 얼른 콜린 옆을 비집고 섰음. 아는 사람이 없기도 했지만 왠지 다른 데 있고 싶진 않았음. 그는 나누는 대화를 건성건성 흘려들으며 샌드위치 몇 개와 샐러드를 집어 먹었음. 몇 명과는 통성명도 했는데 듣자마자 바로 잊어버림. 콜린이 많이 먹으라며 계속 음식을 권하자 에즈라는 인상을 찌푸렸음. 못 먹은 사람 같아 보이진 않을 텐데... 그렇지만 계속 권하기도 하고 딱히 할 말도 없고 해서 퀘사디아며 파이며 연어롤이며 한참을 먹었음. 그리고 에즈라는 순간 자기가 엄청나게 많은 음식을 먹고 있다는 걸 깨달았음. 그건 그가 몇 번 겪어보지 못한 일이기도 했음.


“좀 싸줄게요. 며칠 굶은 줄 알았네. 많이 배고팠나봐요? 그러니까 깨울 때 일어났음 좋았잖아요! 점심도 안 먹더니.”

“...아뇨, 음. 네. 좋아요.”


밤이 늦자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고 남은 건 아직도 많이 남은 음식과 술, 잔뜩 쌓인 쓰레기,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낯선 침묵이었음. 서둘러 자리를 치우고 정돈하는 콜린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에즈라는 쭈뼛쭈뼛 그를 도와 정리를 시작했음. 콜린은 그냥 두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부탁도 안 했는데 일회용 용기에 음식을 좀 담은 콜린이 쇼핑백을 내밀었음. 어차피 줘도 안 먹을 게 뻔한데... 그렇지만 거절하고 싶진 않았음.


“샘 이놈은 도움이 안 돼요, 하여튼... 아무튼 에즈라, 오늘 진짜 와줄 줄 몰랐어요. 와줘서 고마워요. 진짜 반가웠어요.”

“음. 그래요.”


다음에 또 봐요, 조심해서 택시 타구요... 콜린이 하늘하늘 손을 흔들었음. 에즈라는 여전히 끽끽거리는 소리를 내는 엘리베이터를 한참 보다가 계단으로 걸어 내려왔음. 택시를 잡을 마음도 별로 안 들어서 한참을 밤거리를 혼자 걷고 또 걸었음. 엄밀히 말하자면 이 동네를, 콜린의 아파트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고 해야 옳을 것임. 콜린이 도움이 안 된다며 혀를 찼던 샘은 콜린의 플랫메이트였고, 진작 맥주와 와인을 잔뜩 마시고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음. 한심했지만, 좀 부럽단 생각이 들었음. 나도 플랫메이트를 들이면 좀 괜찮을까? 잠시 생각하던 에즈라가 어깨를 으쓱했음. 진짜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음.


그날 에즈라는 오자마자 씻고 바로 잠들었음. 평소엔 절대 안 하던 짓들을 해서 그런지 몸이 무겁고 나른했음. 그렇지만 그는 좋은 꿈을 꾸었고, 아침에 일어나선 콜린이 싸줬던 샌드위치를 먹었음. 냉장고에 넣어뒀던 거라 빵은 뻣뻣하고 먹을 때마다 안에 든 속이 비어져 나왔지만 상관없었음. 샌드위치를 다 먹고 나선 가정부가 해 둔 음식도 반쯤 먹어치웠음. 이렇게 뭔가를 많이 먹은 적이 없었는데... 그래도 이상하게 자꾸만 허기가 졌음. 이상한 감각.


거실 소파에 누워 에즈라는 콜린이 준 명함을 또 한참동안 들여다봤음. 그가 일하는 호텔은 에즈라가 잘 모르는 곳이었는데, 아무래도 특급 호텔인 것 같진 않았음. 명함도 콜린 본인을 대표하는 명함이라기보단 홍보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그래도 번호랑 주소는 있었음. 에즈라가 이렇게 신경을 쓰는 이유는 간단했음. 샌드위치를 담아줬던 그릇을 돌려줘야 했음.


“...그래서 이걸 돌려주려 왔다구요?”

“받은 거니까요.”

“세상에, 에즈라. 이건 일회용 용기잖아요. 그냥 버리면 되는 건데...”


에즈라도 그걸 모르는 건 아니었음. 에즈라는 더 멀쩡한 물건들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버려왔으니까. 그냥...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에 그는 입만 벙긋거렸음. 아연한 표정을 짓고 있던 콜린이 한숨을 내쉬며 에즈라를 잡아 끌었음. 그가 일하는 호텔은 작았고 에즈라가 어디 갈 때면 묵는 고급 호텔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커피숍도 있었고 작은 바도 있었음. 그는 컨시어지로 일하고 있었음. 말이 컨시어지지 사실 그냥 잡무 보는 거죠, 콜린이 교대 일을 마무리하고 올 때까지 에즈라는 얌전히 커피를 앞에 두고 커피숍에 앉았음. 그건 콜린과 굉장히 어울리는 직업 같았음. 그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다정했고 눈치 빠르게 일을 해결해주는 것 같았음. 아마 에즈라를 차마 내버려두지 못하고 파티에 초대한 것도 그래서일지 모름. 제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래도 에즈라는 기다렸음. 물에 헹궈서 들고 나온 일회용 스티로폼 용기를 옆에둔 채로. 커피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지만.


그날 에즈라는 콜린과 데이트함. 데이트라고 하긴 좀 뭣했는데 그 단어 말고는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음. 일을 마치고 나온 콜린과 근처 피자가게에서 피자를 먹고 도넛 가게에서 도넛을 먹음. 콜린의 루트는 적당히 정해져있는 것처럼 보였음. 평소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들인데 에즈라는 콜린에게 천천히 먹으란 소리마저 들어야 했음. 뭔가 자존심이 좀 상했지만 이상하게 자꾸 배가 고팠으니까 어쩔 수 없었음.


에즈라는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았음. 그냥 대학생이고 지금은 휴학했고... 정도. 얼굴도 까먹은 아버지가 원해서 경영학 수업을 듣고 있었지만 그거 말하기도 싫었음. 어디 사는지,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그런 것들 전부 다. 에즈라가 그런 걸 말하기 싫어한다는 걸 눈치챘는지 콜린은 굳이 묻지 않았음. 그런데 진짜 할 말이 없었음. 취미나 좋아하는 것들에 관해 말하려고 해도 에즈라는 딱히 그런 게 없었음. 난 게임하고 코믹스랑 영화도 보고... 그래도 얻은 것들은 좀 있었음. 콜린은 삼십대 중반이었고 아직은 결혼 생각이 없으며 고향이 아일랜드라는 것. 에즈라와는 나이 차이가 은근히 꽤 많이 났음. 아이를 좋아하고 강아지도 좋아했음.


“아일랜드요?”

“아일랜드요! 가본 적 있어요?”

“아뇨.”


콜린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음. 그렇지만 안 가본 걸 가봤다고는 할 수 없었음. 그냥 좀 이상했음. 콜린의 억양은 아이리쉬 같지 않았음.


“액센트 때문에 그러죠? 나 완전 아일랜드 액센트로도 말할 수 있어요. 근데 호텔 쪽에서 그거 별로라고 해서...”

“왜요?”

“글쎄요. 아무래도 외국인처럼 느껴지니까? 그치만 더블린 돌아가면 맘대로 말할 수 있겠죠.”


더블린? 갑자기 끼어든 낯선 단어에 에즈라가 인상을 찌푸렸음. 에즈라는 이미 피자 한 판에 도넛 몇 개를 먹어치웠지만 콜린은 도넛을 좀 더 들고 왔음. 커피도 같이. 혼자 기다릴 땐 거들떠도 안 본 커피를 에즈라는 후루룩 마시곤 다시 생각했음. 더블린, 더블린... 더블린.


“돈 다 모으면 더블린으로 갈 거예요. 나 지금은 가족이 없거든요. 누나가 있다고 그랬는데 아마 아일랜드에 있을 거예요. 찾아보려구요.”


그리고 에즈라는 먹던 도넛을 내려놨음. 도넛엔 한 입 베어문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음. 슈가파우더 고운 가루가 흩날려 에즈라가 입고 있던 코트며 진에 점점이 내려앉았음. 콜린이 머쓱하게 웃었음.


“아, 나 이런 이야기 원래 안 하는데! 아무튼 에즈라만 알고 있어요. 샘도 모르니까.”

“...나도 엄마 없거든요.”


제가 뱉은 말에 제가 순간 놀라 에즈라가 입을 꾹 다물었음. 그리고 무서운 침묵이 내려앉았음. 에즈라는 말을 뱉은 걸 순간 너무너무 후회했음. 콜린이 이야기하는 것과 자기가 이야기하는 건 무게가 달라도 너무 달랐음. 콜린은 에즈라를 더 자주 보게 될 거란 생각을 안 해서 외려 가볍게 뱉은 말일 거였고, 에즈라는... 에즈라는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해 본 적 없었음.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자기가 처한 진실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었으니까. 엄마라는 단어만 들어도 시체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틀을 꼬박 울기만 했던 어린 날의 자신이 떠올랐으니까.


“아... 음.”


콜린의 그 맘대로 움직이는 눈썹이 또 이리저리 꿈틀거렸음. 고양이들이 깊은 생각에 빠져있을 때 꼬리가 멋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콜린의 눈썹도 그런 식이었음. 한참 눈썹을 움직이다 콜린이 어깨를 으쓱했음.


“에즈라. 도넛 더 먹어요.”

“네.”


둘 다 딱히 할 말이 없었음. 그래서 에즈라는 마저 도넛을 먹었고, 콜린은 남은 도넛에는 하나도 손을 대지 않았음.


“더블린 언제 가요?”

“한참 후에요.”

“한참 후에 가는 거 맞죠?”

“한참 후에요.”


그 이상한 데이트를 끝내고 헤어지기 전 에즈라는 참지 못하고 몇 개의 질문을 던졌음. 콜린은 웃었고, 손을 흔들었음. 버스를 타러 가는 등을 보면서 에즈라는 우두커니 자리에 서 있었음.


젠장. 욕이 흘러나왔음. 문득 내려다본 손엔 그 일회용 용기가 그대로 들려 있었음.

 

 

 

3.

며칠이 지났음. 에즈라는 늘 그렇듯 집에 틀어박혀 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보고 가끔 근처를 돌아다니기도 하면서 일상을 보냈음.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콜린에겐 별다른 연락이 없었고 연락하지 않은 건 에즈라도 마찬가지였음. 자꾸 연락하면 좀 이상하잖아. 마트에서 카트를 부딪혀서 만난 그냥 잘 모르는 사이이고 찾아간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 만나게 된 거니까. 처음은 콜린이 파티에 초대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그릇을 돌려주지 못해서... 에즈라는 결국 그 일회용 용기를 버리지 못했음. 그건 거실 테이블에 놓인 채 자기 존재를 과시했음. 일회용 스티로폼 주제에.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며칠 동안 에즈라가 거의 잠들지 못했다는 거였음. 도통 잠이 오질 않았음. 간신히 누워도 드문드문한 악몽들이 자꾸만 잠을 설치게 했고 제대로 자지 못해서인지 입맛은 더 없었음. 가정부는 손도 대지 않은 음식을 버리고 다시 만드는 걸 반복했음. 그렇지만 일회용 용기는 버리지 못했는데, 버리려고 손을 대자 에즈라가 빽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었음. 이건 주인이 있어요! 빌려온 거예요! 가정부가 놀란 표정을 지었음. 에즈라가 누군가를 만났다는 걸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도 처음이었고, 일회용 용기에 주인이 있단 말도 이상했을 것임. 드디어 애가 미쳤구나 하는 시선이었지만 에즈라는 상관하지 않았음. 사실이었으니까. 가정부가 돌아가고 난 뒤 에즈라는 문득 일어나 욕실로 가 거울을 들여다봤음. 거의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제대로 자지 못해서 눈밑이 퀭했고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져 있었음. 그는 피자를 하나 시켰고 몇 입 먹고 나머지는 내버려뒀음. 피자를 시켜먹어본 건 또 처음이었지만 빈 속에 기름진 게 들어가자 미식거렸음. 콜라 몇 모금을 마셨지만 그뿐이었음.


“범죄자 아니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에즈라의 말에도 남자는 힐끔거리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음. 어디서 본 얼굴이지... 잠시 마주 뚫어지라 얼굴을 보던 에즈라는 그가 콜린의 플랫메이트라는 걸 기억해냈음. 샘. 맞나? 댄이었나? 젬?


말라붙은 피자 조각과 김빠진 콜라로 간신히 삶을 영위한지 며칠 째. 에즈라는 결국 콜린을 찾아가기로 결심했음. 손엔 그 일회용 용기를 든 채로. 택시를 타고 문제의 마트로 찾아간 것까진 좋았는데 그다음은 기억이 잘 안 났음. 마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자니 자전거를 끌고 열심히 달려오던 콜린의 모습이 생각났음. 어쩔 수 없지. 에즈라의 계획은 간단했음. 콜린의 집으로 가서 관목 뒤에 숨어있다가 콜린을 발견하면 용기를 돌려주는 것임. 자전거를 끌고 가던 콜린 옆에서 터덜터덜 걷던 기억을 떠올려 아파트를 찾는 것까진 성공했는데 큰 하자가 하나 생김. 아파트 앞에 관목이 없었음. 주택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에즈라는 별수없이 가로등 옆에 서 있었음. 그리고 문제의 샘인지 젬인지 댄인지가가 그런 에즈라를 발견한 거였음. 그건 샘의 잘못은 아니었음. 에즈라는 언제 어디서나 화려하게 눈에 띄는 얼굴이었고, 아마 엉거주춤 가로등 옆에 서 있으니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을 것임.


“...콜린한테 돌려줄 거 있어서 그래요.”

“...내가 줄게요.”

“안 돼요. 당사자한테 줘야 돼요.”


옥신각신 하는 동안 에즈라 설득에 실패한 샘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음. 그리고 에즈라의 계획은 다시 산산조각났음. 몇 분 후에 츄리닝 차림의 콜린이 터덜터덜 아파트밖으로 나왔기 때문이었음.


“에즈라!”


콜린은 싫어하지도, 인상을 쓰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음. 그저 웃으며 손을 흔들었을 뿐임. 큰 눈이 둥글게 휘어지는 걸 보자 또 가슴이 간질간질거렸음. 이리저리 뻗은 갈색 머리칼이 바람에 가볍게 흔들림.


“연락하고 오지 그랬어요! 나 나이트여서 오늘 집에 계속 있는데.”


다가오는 콜린을 보고 에즈라가 멍하니 서 있다 불쑥 말을 뱉었음.


“콜린.”


나 배고파요, 그리고... 무지하게 졸리네요.


에즈라가 눈을 뜨자 본 건 또 그 천장이었음. 콜린의 방 천장. 또 콜린의 침대에 누워 있었고. 샘이 투덜대며 토스트에 땅콩버터와 잼을 바르는 동안 콜린은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어 주었음. 눈깜짝할 사이에 그걸 먹어치운 기억은 또 나는데... 정신을 차리면 자꾸만 이곳이었음. 얼마나 잤는지 시간 개념도 잘 들지 않았음. 여전히 협탁에 놓인 키츠의 시집. 거의 다 읽어가는 것 같았음.


“맥주 한 잔 하면 좋겠는데 나 이따가 출근하거든요. 콜라라도 마셔요. 샘은 먼저 출근했어요.”

“...아뇨, 아, 네. 주세요.”


거실로 나오자 콜린은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음. 흔한 리얼리티 쇼임. 주춤거리는 에즈라를 돌아본 그가 옆에 와 앉으라는 듯 소파를 탕탕 두드렸음.


둘은 여전히 별로 많은 대화를 하지 않았음. 콜라를 마시며 쇼를 보다가 콜린이 가끔 웃고, 에즈라는 애꿎은 소파 커버만 쥐어뜯었음. 생각해보면 에즈라는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한 적이 없었음. 그럴 필요도 없었고. 자기가 커뮤니케이션에 그다지 능숙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걸 지적하기보단 어떻게든 비위를 맞추려 애를 썼기 때문이었음. 자기는 그냥 아주 가끔 선심쓰듯 웃어주기만 하면 모든 일이 해결되었고, 그게 안 되면 아버지의 비서가 해결하고... 항상 그런 식이었음. 고등학교 때 아주 잠깐 만났던 여자애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음. 에즈라, 넌 예쁘고 작은 악마 같아. 그때 에즈라는 반응하지 않았음. 그런 말을 들어도 상관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콜린은? 에즈라는 콜린 앞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음. 잘 보이고 싶었음. 예쁘게 보이고 싶고 착하게 보이고 싶고 날 잘 봐줬으면 좋겠고...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사람에게 드는 감정치고는 너무나 이상했지만 그래서 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음.


“...가족을 찾는 건 언제나 내 꿈이었어요. 누나든 엄마든.”


브라운관 안의 도전자가 무언가 미션을 성공한 듯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갈채가 터져나왔음.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던 가족들이 부둥켜안은 채 눈물을 흘리는 것이 극적인 배경 음악과 함께 흘러나왔음. 말없이 그 장면을 보던 콜린이 문득 입을 열었음. 이것이 큰 의미가 없다는 건 에즈라도 콜린도 잘 알고 있었음. 왜냐하면... 어떤 의미가 있는 사이가 아니니까. 중요해 보이는 말들도 서로에게 의미가 되어야 중요한 거지 둘 사이에서는 그냥 흘러가는 단어에 불과할 테니까.


“왠지 그러면 행복해질 것 같잖아요.”

“행복하기란 어려운 일이에요.”


말도 안 되는 일이기도 하지... 에즈라는 뒷말을 꾹 삼켰음. 에즈라에게 가족은 악몽 같은 거였으니까. 잘은 모르지만 콜린의 말들을 들어 알게 된 사실은 그 역시 버림받은 게 분명하단 사실이고, 그건 에즈라와 마찬가지의 공통점이었음. 아마 그래서 끌렸던 걸지도 모른다고, 에즈라는 잠깐 생각했음. 불쑥 튀어나온 에즈라의 대답에 콜린은 놀란 듯 그를 쳐다보다가 곧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음. 그는 결코 강요하지 않았음. 자기랑 생각이 설령 다르게 보일지라도. 웃는 얼굴을 넋이 나갈 정도로 바라보며 에즈라는 처음으로 이 남자가 부럽다는 생각을 했음. 똑같은 부재가 누군가에겐 삶을 사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게.


콜린의 출근 시간에 맞춰 둘은 아파트를 나섰음. 질색하는 에즈라를 데리고 콜린은 낄낄 웃으며 문제의 엘리베이터를 탔음. 끽끽거리는 소리는 여전했음. 그렇지만 엘리베이터는 무사히 둘을 1층에 실어다줬고, 에즈라는 자전거를 타고 간다며 거절하는 콜린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택시를 잡았음.


“나 요즘 잘 못 자거든요. 이상하게 잘 못자요. 밥도 그렇고...”

“밥은 잘 먹던데요!”

“그게... 있어요. 그런게...”


부루퉁해진 에즈라를 보고 콜린은 뭐가 그리 웃긴지 계속 웃었음. 택시비를 낸다며 실랑이를 벌일 기세인 콜린을 호텔로 데려다주고, 에즈라는 자기가 타고 가야한다며 ‘다음에 만나면 주세요’라며 거절했음. 콜린이 서둘러 호텔로 들어가는 걸 에즈라는 뚫어지라 바라봤음. 콜린은 등이 곧고 걸음걸이도 곧은 남자였음. 그리고 그가 문득 뒤를 돌아보곤 아직 멈춰있는 택시를 향해 다시 손을 흔들었음. 에즈라 역시 마주 손을 흔듦. 이윽고 출발하는 택시 때문에 콜린과 그 작은 호텔이 점점 멀어질 때까지 계속.


그날 에즈라는 행복한 꿈을 꾸었음. 행복한 꿈? 그게 뭐지? 뭔지는 몰랐지만 그건 조금씩 실체가 되어 언젠가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있을 것처럼 느껴졌음. 거대하고 행복한 무언가.

 

 

 

4.


- 더블린 언제 가요?

- 아직 안 가요.

- 아직 안 가죠?

- 아직 안 가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에즈라가 책상에 푹 엎드렸음. 그는 자기가 약간 강박증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음. 그게 언제부터 생긴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거슬러 올라가보면 아마 죽은 엄마의 손을 잡고 내내 울었던 그때가 시작이었을지도 모름. 그 골치 아프고 피곤한 감각은 에즈라의 내면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다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툭툭 튀어나오곤 했음. 예를 들자면 미들스쿨 시절 엄마처럼 돌봐줬던 선생이 사줬던 샤프 펜슬을 지금까지도 쓰고 있다는 거나... 안의 스프링이 고장이라도 난 것인지 필기를 하고 있으면 심이 툭툭 빠져나오기 일쑤였지만 에즈라는 여전히 그걸 사용 중이었음. 사거나 선물받거나 한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는 것도 어쩌면 그 연장선일지 몰랐음. 좀 더 애정을 주고 좀 더 집착하고 좀 더 생각하게 되는 게 싫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에즈라 밀러는 다시 자꾸만 튀어오르는 그 감각들을 꼴사납게 견디고 있었음. 원인 제공자는 아마 속도 모를 게 분명했음.


그래도 콜린은 여전히 다정하고 친절하고 섬세했음. 시도 때도 없이 더블린에 언제 가느냐 물어도 늘 무시하지 않고 대답을 해줬음. 질문은 언제나 같았고 대답도 같았지만 적어도 에즈라 앞에선 귀찮은 내색을 하지 않았음. 둘은 가끔, 종종, 그리고 자주 만났고 그건 에즈라가 결국 재등록을 결심했을 때에도 변함없었음. 다시 학교로 돌아가기로 한 건 별로 큰 뜻이나 결심이 있어서는 아니었음. 함께 피자를 먹고 도넛을 먹다 (콜린의 그 코스는 여전했음) 콜린이 한 말 때문이었음. 음, 에즈라. 다시 공부는 안 할 거예요? 했으면 좋겠는데.


에즈라는 이 관계가 다소 이상하다는 걸 인지했음. 그리고 이게 과연 서로에게 좋은 영향일까 생각해보면 답을 내릴 수가 없었음. 샘은 이제 자신과 콜린의 집에 찾아오는 에즈라가 익숙해지다 못해 당연한 존재로 여겼고 가정부 역시 에즈라가 시켜먹는 피자나 사들고 오는 중국 요리, 나뒹구는 콜라캔 같은 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음. 그래도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는 건 좀 놀란 것 같긴 했지만. 콜린과 어쨌든 꾸준히 만나게 되면서 에즈라는 예전보다 잘 먹었고 잠도 잘 잤음. 마음이 편해지고 있는 걸까. 적어도 에즈라 본인에게는 좋은 영향인 게 틀림없어 보였지만 콜린에게도 그럴까? 만날 때마다 드는 생각도 그랬음. 이건 데이트일까. 콜린이 웃는다. 나 때문에 웃는 걸까. 날 귀찮아하거나 사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닐까. 그렇지만 콜린은 웃는다. 눈을 접으면서. 다소 작은 입이 크게 벌어지고 눈가에 가늘게 주름이 잡히고... 그 모습을 떠올리며 에즈라는 웃었음. 자기도 모르게.


“뭐가 고장이 나면... 어떻게 해야 하죠?”


접시에 음식을 담던 가정부가 눈썹을 꿈틀거렸음. 에즈라가 말을 건 건 극히 드문 일로, 이곳에서 일하게 된지 한참이 됐지만 손에 꼽힐만한 일이었음. 토요일이었고, 에즈라는 또 어딜 간다며 음식을 좀 넉넉히 해달라 부탁한 참이었음. 접시의 음식을 따로 통에 담던 에즈라가 꾹 입을 다물었음. 제 안에 가득 들어찬 각종 의문들을 함께 물어보고 나눌 사람이 없다는 건 그에게도 힘든 일이었으니까. 물론 콜린이 있었고 (믿음이 가지 않는 건 둘째치고 어쨌든 샘도 있었지만) 이건 콜린에겐 물을 수 없는 말이었음. 콜린 빼면 다 됐음. 샘도.


“버려야지.”

“버리기 싫으면요?”

“그럼 고쳐야지.”

“못 고치면요? 못 고치면 어쩌죠?”

“그럼 그냥 가지고 있어야지.”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말을 건네자 에즈라가 고개를 끄덕거렸음. 단호하고 결정적인 대답이었음. 고장난 게 물건이 아니라 마음이고, 이걸 고장이라 부르는 게 맞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콜린을 좋아해. 택시를 잡으며 에즈라는 생각했음. 오늘은 콜린의 비번이었음. 샘이 벌인 포트럭 파티가 오늘도 열릴 예정이었고... 마음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과 별개로 심장 어딘가가 따끔거리며 아파오는 것 같았음.


파티는 늘 그렇듯 성공적이었음. 거기 모인 사람 대부분은 사실 에즈라를 잘 몰랐고 그건 에즈라도 마찬가지였지만, 어쨌든 콜린과 샘이 떠들어댄 덕분에 모두는 복학을 축하한다며 한 마디씩 덕담을 건넸음. 아직도 추웠지만 곧 봄이었고 곧 학기는 시작될 예정이었음. 학교에 가는 게 딱히 좋진 않았지만 콜린이 원하니까. 사실 콜린은 그냥 해 본 말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남들 하는대로는 하고 싶은 마음도 내심 있었음.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더 나은 사람. 더 예쁘게 보이고 더 잘 보이고... 콜린이 슬쩍 연어롤이 담긴 접시를 에즈라 앞에 끌어다놨음. 채썬 야채를 연어에 말아 소스를 뿌린 것뿐이었지만 늘 손이 갔음. 에즈라가 빙긋 웃었음. 사실 에즈라가 아니라도 베풀 법한 호의였지만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음.


“그래서 그때 카트가 딱 부딪혔는데...”

“새벽에 왔다니까요. 근데 오자마자 잤어.”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모르는 사람을 위해 콜린이 예의 그 첫만남을 길게 설명하기 시작했음. 샘이 끼어들어 낄낄 웃었음. 에즈라가 고개를 갸우뚱했음. 그때 샘도 있었나? 기억이 잘 나지 않았음. 에즈라의 관심사는 온통 콜린이었으니까. 에즈라는 열심히 먹었고, 노력해서 웃었고, 그래서 매우 피곤했음. 콜린과 둘이서 시간을 보낼 때랑 다른 사람들이 있는 거랑은 달라도 너무 달랐으니까. 사람들은 도저히 접점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어리고 눈에 확 띄고 예쁜 청년이 콜린과 아는 사이가 된 걸 쉴 새 없이 궁금해했음. 콜린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게 좋았기 때문에 에즈라는 매번 그 이야기를 얌전히 듣고 있었음.


“운명 같은 만남이네.”

“맞아요.”


감탄한 듯 뱉은 말에 불쑥 대답한 건 에즈라였음. 순간 묘한 정적이 흐르며 사람들의 시선이 확 쏠리는 게 느껴졌음. 에즈라가 이곳에 와서 한 건 인사와 고맙단 대답밖에 없었기 때문에 다소 당황한 것 같았음. 그렇지만 역시 가장 당황한 건 에즈라 본인이었고, 그리고 콜린이었음.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다행스럽게도 누군가 테이블 위에 소다수를 엎지름. 사람들은 다시 왁자지껄해졌고, 에즈라는 입 안의 샌드위치를 천천히 씹었음. 에즈라도 콜린도 더 이상 말은 없었음.


“아까 일은 너무 신경쓰지 말아요. 농담 잘 하거든요. 일부러 그러려던 건 아니고...”


사람들이 돌아가고 난 뒤, 에즈라는 남아 뒷정리하는 콜린을 도왔음. 샘은 늘 그렇듯 취해서 잠들어 있었고. 테이블을 정리하고 바닥을 청소하는 동안 에즈라는 내내 쭈뼛거렸음. 뭔가 중요한 순간이 온 것 같은데. 그리고 그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아 덜걱거렸음. 에즈라를 힐끔 쳐다본 콜린이 쓰레기봉투를 정리하며 말을 던졌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평소와 같은 목소리 그대로. 에즈라는 갑자기 목이 타는 걸 느꼈음. 갑작스레 밀려온 갈증이 목을 간질이고 점점 아래로 타고 내려가 명치 근처를 꾸욱 짓눌러왔음. 콜린, 제대로 되지 않는 단어가 음절 단위로 부스러진 채 혀끝에서 맴돌았음. 콜린.


“신기하긴 하잖아요. 영화처럼 짠, 이렇게. 카트가 부딪혀서...”

“좋아해요.”


콜린이 손을 멈췄음. 비닐 부스럭대던 소리가 멈추자 무섭게 가라앉은 침묵 속에 들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음. 에즈라는 순간 현기증을 느끼고 휘청거렸음. 바로 이 감각, 이 감정. 택시를 타고 오며 생각했던 바로 그것. 그리고 그건 말이 되어 나오자 거대한 실체가 되어 에즈라와 콜린 둘을 다 내리눌렀음. 꺼내게 되는 순간 취소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버린 감정이었음.


“에즈라.”


한참의 시간, 사실은 짧았을 테지만 에즈라에겐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콜린이 먼저 입을 열었음.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 한숨이 섞여있음을 에즈라는 곧바로 간파했음. 크고 둥근 눈이 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다정해서 훅 숨이 막혀왔음.


“내가 에즈라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어요. 주변에... 이야기할 어른이 많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날 많이 따른 걸 테구요. 물론 후회하진 않아요.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다정한 사람이었음. 정말로.


““나는 에즈라가 더 많은 사람을 만나봤으면 좋겠어요. 학교로 돌아가라고 한 것도 그래서고. 에즈라는 더 많은 사람을 만나야해요.”


잘 모르면서 함부로 이야기한 거라면 미안해요, 콜린이 입을 꾹 다물었음. 그건 완곡한, 그렇지만 단호한 거절이었음. 미안하다는 말이 사실 여러 의미를 갖고 있다는 걸 에즈라는 알았음. 콜린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음. 그의 주변엔 사람이 없었고, 어른은 더더욱 없었고... 어쩌면 성급하고 치기 어리게 제 마음을 착각하거나 결정해버린 걸 수도 있었음. 그렇지만...


터덜터덜 집을 나오는 길에 늘 그렇듯 콜린은 아파트 밖까지 배웅을 나왔음. 문을 쾅 닫아버려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음.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겨울 추위에 손가락이 곱아들어가는 게 느껴졌음. 하지만 추운 건 아무것도 아니었음. 그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고... 에즈라가 코를 훌쩍거렸음.


“...콜린, 날 좋아하죠? 그러니까... 그런 거 말고. 그냥요.”

“당연하죠. 당연하죠, 에즈라.”


조심해서 가요, 택시에 올라타는 동안 콜린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음. 멀어지는 등을 보면서 에즈라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음. 내내 그렇게 앉아있다 그는 집이 나오기 전 한 블록 앞에서 미리 내렸음. 집으로 걸어가는 길은 매섭고 차갑고, 외로웠음. 그래서 에즈라는 길 가운데에 선 채 한참을 흐느꼈음. 몰려오는 건 깊은 후회였지만, 다시 되돌린다 해도 이 말을 하지 않았을 거란 보장은 없었음. 아니, 어떻게든 하고야 말았을 거였음. 어떻게든. 고장난 무언가를 버리지도, 고치지도 못한다면... 가지고 갈 수밖에 없으니까.


- 학교는 잘 다녀요? 친구들은 많이 만났어요?

- 날이 많이 풀렸네요. 감기 조심해요.

- 샘이 이사갔어요. 동부로요. 자긴 캘리포니아가 싫대요.

- 에즈라. 부담스러웠다면 미안해요. 항상 건강해요.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에즈라가 화면을 껐음. 항상 건강하란 말을 마지막으로 콜린에겐 더 이상 연락은 없었음. 아마 계속 답을 보내지 않아서일 거고, 연락을 계속하는 게 에즈라에게 혹시나 상처가 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게 틀림없었음.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에즈라가 훅 마지막 연기를 뿜고 담배를 비벼 껐음. 피우는 것마저 재미없어져서 끊었던 걸 다시 피우게 된 게 좀 됐음. 연기는 너울너울 퍼지다 사라졌지만, 마음 한 구석은 여전히 매캐했음.


돌아간 학교는 예상 그대로였음. 재미도 없고 흥미도 없고. 콜린에게 따로 보고할 것도 아니었으니 다닐 필요도 없었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꾸역꾸역 아침마다 학교로 기어나갔음. 에즈라는 수업은 듣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출석만큼은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음. 전엔 출석도 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쨌든 돌아온 에즈라 밀러가 매번 얼굴을 내미는 것 자체가 교수들은 신기한 모양이었음. 자기가 뭔 소리를 쓰는지도 몰랐지만 아무튼 에세이도 제출하라는 건 다 했고 멍청히 앉아있을지언정 모임에도 얼굴은 비췄음. 기대가 워낙 없으니 성실하게 보였던 건지 아니면 에즈라가 사실 경영학 천재인지는 몰라도 그는 생각보단 나쁘지 않은 점수를 받았음. 그렇지만 그걸 말할 사람이 없었음.


딱히 이 상황이 엄청 슬픈 건 아니었음. 생각지도 못하게 튀어나온 본심을 죽도록 후회하긴 했지만 타이밍이 그랬던 거지 고백 자체를 후회한 건 아니었음. 마음을 후회하는 건 더더욱 아니었고. 아마 콜린은 자길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겠지. 이런 걸 한두 번 겪은 게 아닐지도 몰랐음. 자기 상태를 뭐라 설명해야 할지 에즈라는 알 수 없었음. 그저 예전처럼 잘 못 잤고, 먹을 것도 잘 넘어가지 않았으며... 에즈라는 날이 풀렸다며 콜린이 거짓말을 했단 생각이 들었음. 분명 이제 여름이 다가오는데도 새벽에 종종 알 수 없는 추위 때문에 깨곤 했으니까. 집 안은 분명 딱 상쾌한 온도로 맞춰져 있었는데도 등이 서늘했음. 그럴 때면 에즈라는 에어컨을 끄고 잠을 청하곤 했음. 하나도 달라지지 않아.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어... 콜린과 만나기 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어. 그는 끊임없이 중얼거렸음. 그렇지만 알고 있었음. 만나기 전과 지금은, 그냥 콜린과 연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같았지만 그 외엔 하나도 같지 않다는 걸. 에즈라 밀러는 콜린 패럴을 알아버렸음. 일단 그렇게 됐으니 세상은 절대로, 절대로 전과 같을 수 없었음.


“너 진짜 성 밀러 맞아? 그거 너무 궁금했어.”


여름 세션까지 들을 정신은 아니었지만 세미나 모임이 있단 소리에 에즈라는 또 그걸 기어나갔음. 무시하면 되는데 이상하게 무시가 안 됐음. 그는 자기 자신이 너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었음. 콜린이 학교 열심히 다니라고 해서 망정이지, 사람을 죽이라고 했으면 인구 반을 없애버렸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음. 지구가 쪼개져도 절대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사람 1순위였을 에즈라가 터덜터덜 나타나 뒷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자 강의실 안 시선이 확 모였다 흩어졌음. 같이 프로젝트를 하거나 모임이 있을 때 몇 마디 말을 나누는 것 말곤 대화도 안 해봤으니 친구들 많이 사귀었냐는 물음에는 대답을 할래야 할 수가 없지... 아마 콜린이 다른 질문을 했어도 답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렇지만 그런 작은 반항으로 마음을 접는단 생각은 틀려도 너무 틀린 것 같았음.


“밀러 맞아.”

“그래? 그렇구나.”


브레이크 타임 때 와서 말을 걸었던 여자애가 뒤를 돌아보자 뭉쳐있던 학생들이 저들끼리 속닥거리는 게 보였음. 내기에 잘못 찍힌 건지 아니면 유난히 씩씩해서인지 몰라도 골치 아픈 질문할 사람으로 걸린 거겠지.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별것 아닐 질문이었겠지만 에즈라는 무슨 의도로 이런 질문을 했는지 순식간에 알 수 있었음. 머리가 좋은 편이었으니까. 아마 배경이나 집안 같은 것에 관해 프래터니티 쪽에서 먼저 말이 돌았을 게 분명했고... 에즈라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음.


“밀러 맞아. 엄마가 준 거 그거 하나거든.”


한 번도 제대로 안아준 적 없이 약에 취해 죽었지만 그래도 엄마는 엄마였으니까. 아빠는... 내 아버지는 돈을 주지. 에즈라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가려는 말들을 꾹 눌렀음. 애정을 갈구했지만 돌아온 건 시체와 망각이란 생각에 헛웃음이 새어나왔음. 갑자기 웃기 시작한 에즈라를 보고 당황한 그녀가 서둘러 무리들 틈으로 돌아가고, 에즈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강의실을 나왔음. 없어진 걸 보면 교수가 뭐라 할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음.


- 날 좋아하기는 하는 거냐고 물어봐주세요.

- 항상 에즈라씨를 위해 여러가지를 하고 계시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에즈라는 아버지의 비서에게 메시지를 보냈음. 아버지의 전화번호는 알고 있었지만 에즈라는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었으니까. 비서에게 물어보는 게 더 빠를 거였음. 그리고 차고에 차를 주차했을 즈음 에즈라는 답장을 받을 수 있었음. 교묘한 대답이었고, 결국 원하는 답은 아니었음. 어머니를 사랑하기는 했느냐고 물어보는 게 나았을까. 그렇지만 그때에도 비슷하게 답을 피하는 메시지가 온다면 그대로 죽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에즈라는 그냥 포기하고 집에 들어가 씻고 잠들었음. 눈물도 나지 않았고 배도 고프지 않았음. 혹시라도 울고 싶어질까 생각했지만 그렇게 슬프지도 않았음. 그리고 그날 에즈라는 얼굴도 보이지 않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제게 손가락질을 하는 꿈을 꾸었음.


“또 뭘 그렇게 사요?”


에즈라가 자신의 계좌들을 따로 확인한 적은 거의 없었음. 학교로 다시 돌아간 에즈라가 나쁘지 않은 성적을 받은 것에 대한 보상인지 아니면 그런 대답을 한 것에 대한 보상인지, 평소보다 과한 액수가 들어왔다는 알람을 쓱 보고 꺼버린 게 다였음. 에즈라가 다시 음식을 잘 먹지 않게 되자 가정부는 남은 음식과 사들인 물건들을 버리는 걸 반복했음. 방학이 시작하자 집밖으로 다시 안 나가는 것도 그랬고. 그 몇 달이 아주 잠깐의 일탈이었지. 그리고 에즈라는 누워서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보다 갑자기 일어나 마트로 향했음. 무슨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머리는 텅 비어버린 것 같고 몸에 힘도 잘 들어가지 않았는데 옷만 꿰어입고 그대로 뛰쳐나간 것임. 굳이 ‘그 마트’에 가서 다시 물건들을 쓸어담는 건 에즈라가 계획한 일은 절대 아니었음. 오히려 에즈라는 두려운 마음으로 손까지 덜덜 떨며 물건을 집어 카트에 던지는 걸 반복했음. 무서워, 무서워... 아무도 자길 해치지 않는데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데도 무서움을 참을 수가 없었음. 그런데 멈출 수가 없었음. 왜 여기로 와서 이러고 있는지, 그 우연이 다시 일어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어나지 않는다면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버지에게 완곡하게 널 그다지 사랑하는 건 아니라는 대답을 들을 때보다 지금이 더 눈물이 났음. 빨리 사서 나가야지, 빨리... 그렇지만 그럴 거면 왜 여길 온 거지? 난 대체 뭘 바라고 있는 걸까. 서둘러 시리얼 상자 대여섯개를 한꺼번에 카트로 처박았을 때 목소리가 들렸음. 그 목소리.


“이거 집에 가서 다 버릴 거예요?”

“......”

“놀랐으면 미안해요. 너무 반가워서...”


에즈라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음. 푹 숙인 고개 때문에 보이는 건 스니커즈와 아디다스 츄리닝. 그리고 약간 더 시선을 올리자 냉동 라자냐와 피자가 든 마트 바구니. 조금만 더 올리면... 에즈라는 고개를 들지 못했음. 고개를 들어 보게 될 것이 너무나 두려워서. 야금야금 마음에 들어앉아 결국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 집어삼켜버린 사람이 사실은... 그리워서.


“에즈라?”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에즈라는 콜린의 옷깃을 꽉 부여잡았음. 어린애가 움켜쥔 것을 절대 놓지 않는 것처럼. 손가락 마디가 다 하얗게 변해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가려던 콜린이 놀란 듯 우뚝 걸음을 멈추어 섰음.


“에즈라? 왜 울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야. 안 울어요... 그렇지만 대답 대신 입만 뻐금거렸음. 지금의 꼴을 보면 절대 믿지 않겠지만 에즈라는 정말로 울고 있는 게 아니었음. 그는 웃었음. 진심으로 웃었고... 그저 푹 숙인 고개 때문에 바닥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는 것만 그 말을 듣고 알아차렸을 뿐이었음.

여전히 옷깃을 잡힌 콜린이 어정쩡한 자세로 등을 쓰다듬어주는 게 느껴졌음. 허리를 숙여 제 얼굴을 들여다보는 콜린의 얼굴이 보였음. 휘둥그레 뜬 갈색 눈.


에즈라는 그 언젠가, 그게 무엇인진 모르지만 막연하고 거대하게 다가온 어떤 존재에 대한 꿈을 꾼 적이 있었음. 뭔지는 몰라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있을 것처럼 느껴졌던 무언가. 행복의 실체 그 비슷한 것. 손에 넣으면 행복해지겠지,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야, 나도 행복해질 자격이 있어...나도. 에즈라가 손에 꾹 힘을 주었음. 에즈라 밀러에게 그건 콜린 패럴이었음.

 

 

 

5.


“당분간 어디 갈 거예요.”

“네가? 어딜?”

“아직 안 정했어요. 한... 3주 정도? 한 달? 그 동안은 안 오셔도 돼요. 제가 연락할게요. 돈은 다 쳐서 드릴거고... 여름인데 휴가 다녀오세요.”


뜬금없는 말에 가정부가 눈썹을 꿈틀했다 가만히 에즈라를 훑어보았음. 그녀가 나름대로 오래 이곳에서 일한 건 에즈라의 영역을 절대 침범하지 않기 때문이었음. 질문도 하지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고. 좋게 말하면 쿨하고 나쁘게 말하면 차가운 성격에 외로울 때도 있었지만 에즈라는 그게 더 편하다는 걸 바로 깨닫게 되었음. 게다가 이런 상황을 맞이하다보니 그 성격은 너무나 다행스러웠음. 너 요즘 좀 이상한데... 하는 시선으로 다시 에즈라를 빤히 보던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음. 유급 휴가라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음.


음식도 거의 넘기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한지 거의 일주일 째. 그 사이 에즈라가 한 일은 오로지 생각이었음. 생각에, 생각에, 다시 생각. 그리고 계획.

문제의 마트에서 콜린과 다시 만나고 난 후 둘은 자연스럽게 다시 가까워졌음. 꺼림칙하다면 꺼림칙해야 하는 일이지만, 콜린은 티를 내지 않았고 에즈라는 필사적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음. 샘이 이사를 가고 나서 콜린은 새로운 하우스메이트를 구하지 않았다고 했음. 거기서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에즈라가 까득 입술을 씹었음. 에즈라와 달리 콜린은 항상 사람이 주변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었음. 그렇지만 에즈라는 콜린 역시 알 수 없는 상실감과 외로움에 늘 시달린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되었음. 그게 에즈라와는 좀 다른 방향으로 나타났던 것뿐. 에즈라는 샘이 없어 텅 빈 콜린의 아파트에 종종 놀러가 잠들었음. 콜린은 침대에서 자라고 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어서 에즈라는 소파에서 쿠션을 안고 잠이 들곤 했음. 좁고 딱딱한 소파였지만 집보다 잠이 더 잘 왔음. 하지만 에즈라는 꼭 새벽에 한 번씩 깼고, 그럴 때면 문 너머에서 잠들었을 콜린을 상상하곤 했음. 어떻게 자고 있을까. 잠버릇은 심할까. 나는 이렇게 콜린을 생각하는데 콜린은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겠지. 내가 좋아한다고 했던 걸 진지하게 생각하고는 있을까. 차라리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지내는 지금이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 에즈라는 지금도 충분히 행복했음. 최고로 행복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예전보단 충분히. 샘이 아니라 콜린이 포트럭 파티를 열기 전까지.


- 또 파티해요? 이 동네 사람들 파티 되게 좋아하네요.

- 이래저래 좋잖아요. 앨리스가 임신했대고, 나도 좋은 일 있으니까.

- 좋은 일이요?


에즈라, 잘 들어요. 사실 보육원이랑 기관이랑 수소문 다 했었는데 힘들 거란 이야기만 들었었거든요. 그래서 사설에 넣어봤었는데... 말도 말아요, 거기 비싸요. 그런데 어제 연락이 왔어요. 잘 하면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재잘재잘 떠드는 콜린의 얼굴을 보며 맥주를 마시던 에즈라가 툭 캔을 바닥에 떨어뜨렸음. 손이 미끄러졌냐며 호들갑을 떨며 분주히 바닥을 닦는 콜린의 팔을 잡은 에즈라가 간절히 물었음. 무슨 연락이요? 무슨 연락이 왔는데요? 그리고 콜린이 활짝 웃었음.


- 누나요.


그다음 콜린이 털어놓은 이야기들은 띄엄띄엄 분해되고 부서진 채라 에즈라의 기억 속엔 완전한 문장이 몇 없었음. 아일랜드계 이민자였던 어머니, 사고, 누나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누나는 입양이 됐고... 아무래도 더블린으로... 나도 일 잠깐 쉬고... 아직 확실한 건 아니라 그쪽에 연락은 안 해 봤는데... 에즈라는 웃지 못했음. 창백하게 핏기가 빠져 굳은 에즈라를 보며 콜린이 고개를 갸웃거렸음. 정확히 남은 단어는 그거 하나였음. 더블린.


“건물 뭐 보이는데요? 아, 알아요. 내가 데리러 갈게요...”


언젠가의 데자뷰. 데리러 가는 사람과 온 사람이 바뀌었다는 것 말고는 상황이 똑같았음. 집에 초대하겠다는 에즈라의 말에 콜린은 잠시 놀라 있다가 곧 웃었음. 자주 사람이 드나들던 콜린의 집과 다르게 에즈라의 집은 누구도 온 이 없던 미지의 영역 비슷한 거였음. 가정부나 비서, 택배원, 피자 배달부 정도만 드나들던 차갑고 초라한 공간. 물론 에즈라의 집은 콜린의 집보다 훨씬 크고 넓었으며 잘 꾸며져 있었지만 에즈라는 제 집이 초라하단 표현 말곤 어울리는 말이 딱히 없다고 생각했음. 집은 차가웠고 쓸쓸했고 무엇보다 외로웠음. 온기도 없고 행복도 없는 공간 안에 오로지 혼자 갇힌 채로. 에즈라는 제가 살고 있는 건 맞나 종종 생각하곤 했음. 먹고 자고 숨을 쉬었지만 이게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사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 죽는 날에 그저 가까워지고 있는 게 아닐까. 에즈라는 정말로 행복해지고 싶었음. 한 번만이라도 행복해지고 싶었음. 그럴 수만 있다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들만큼.


“우와. 집 되게 좋네요. 정말 여기 살아요?”


그리고 에즈라 밀러의 행복이, 집에 발을 내디뎠음. 








막차라도 얹어본다 에즈라콜린 외않파?

진도 지지부진하지만 아직 끝은 아니야 그럼 20000





2017.01.22 23:0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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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지지부진하지만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아직 끝은 아니야 어나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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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2 23:03
ㅇㅇ
허미 내 센세 미쿸간 줄 알았는데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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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2 23:3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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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나이거진짜너무기다렸어ㅠㅠ끝아니라고해줘서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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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2 23:4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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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내센세 돌아왔구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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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2 23:5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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ㅜㅜ 기다리다 죽어버릴거 같아....제발 어나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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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4 16:1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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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외않와?빨리 써...빨리...기다리다 지쳐 주글것갇아 씨펄 존나 너무 좋다고 에즈라 망가진것ㄷㅗ 콜린이 그걸 추스려주는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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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6 02:2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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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센세 내맘 알지? 떠나지마ㅠㅠ떠나면 안돼 에즈라랑 콜린이랑 행복하게 사는 것 까지 다 써줄거지?센세 믿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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