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18460932
view 2331
2017.02.24 16:40
IMG_3640.jpg

10) 제자리 걸음

"이제 놓아주자. 니가 그렇게 잡고 있으면 우리 아기도 천국에 못 갈거야."

그가 울음을 그친 뒤엔 내가 이어서 울었고 내가 겨우 눈물을 말릴 무렵이면 그의 눈이 다시 촉촉히 젖었다.

그렇게 몇시간을 우리는 서로의 품을 적시며 울고 또 울었다.

연애 7년차에 찾아 온 권태기로 힘들어하며 서로에 대한 오랜 정과 예의로 근근히 관계를 유지하던 때가 있었다.

아무 문제없는 척, 아무 일도 아닌 척 서로에게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던 때였다.

근면한 연애였다.

매일 사이클에 맞춰 서로를 챙기던 시절, 잠자리마저 서로에 대한 의무로 느끼던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기가 생겼다.

마법 같았다.

아기의 존재하나로 그간의 모든 냉랭함이 사라져 버렸으니 말이다.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의 존재를 고마워했고 사랑했고 그것을 깨닫게 해준 아기에게 감사했다.

아직 성별도 정해지지 않은, 이제 겨우 엄지손톱크기의 아기를 놓고 나를 닮았을 거라는 둥, 절대적으로 딸일 거라는 둥, 당신을 닮아 멋진 목소리를 가졌을 거라는 둥 매일 태어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미니베니라고 부르자. 어감도 좋잖아. 있지. . 아직은 작아서 아무것도 못느낄거라고 병원에선 그랬지만 뭔가 느껴져. 내 안에 자길 닮은 무언가가 자라고 있다는거 말이야. 매일 꿈에 반짝이고 따뜻한 무언가가 품으로 들어와. 우리 아기가 자기가 이렇게 내 품에 있다고 알려주는 것 같아.'

임신 전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배를 그는 만삭의 그것을 만지듯 매일 밤 소중히 쓰다듬었다.

주치의 말론 아직 귀는 없다고 했지만 그는 잔뜩 흥분해 산더미처럼 사놓은 동화책을 매일 읽어주었다.

그의 따뜻한 손과 따뜻한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드는 건 아기가 아니라 매번 내 쪽이었다. 세상 모든 행복이 우리의 20대처럼 우리에게 돌아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느 날 밤이었다.

매일 같은 꿈으로 나를 찾아오던 아기의 모습이 그날따라 조금 달랐다. 따듯한 봄날의 정원 벤치에 앉아있던 나는 그 날도 아기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멀리 먹구름이 보였고 순식간에 검어진 하늘에선 굵은 비가 내렸다. 비는 그칠 줄을 몰랐지만 나는 아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꿈에서 깬 것은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내 머리 위에 번개가 내리친 순간이었다. 온 몸이 식은땀 범벅이 되어 깨어난 나를 베니가 안으며 스탠드를 켰다.

'무슨 일이야. 악몽을 꾼거야?'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베니, 자기. 나 이상해. 추워. 왜 이러지? 무서워.'

안은 팔을 더욱 세게 조이며 몸을 쓰다듬는 손길에도 두려움은 가시지 않았다.

'잠깐. 침대가 왜 이러지?'

그가 두꺼운 이불을 재꼈다.

하얀 시트와 내 하얀 잠옷이 온통 새빨간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안돼!'

나는 그의 팔에 매달려 소리쳤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땐 하얀 천정과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찌르는 곳에 누운 채 였다.

 

오래 전 기억이 났다.

아니 오래는 아니었다. 나에겐 그 날 밤이 일 년 전이고 한 달 전이고 바로 어제였다.

"어떻게 놓아줘.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데. 자기는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

"내가 잔인해? 일년도 더 지났어. 동안 길에서 어깨한번 스친 사람보다 더 낯설게 날 대하는 널 본지도 꼭 그만큼이야. 매일 트집거릴 만들어 날 떠날 궁리를 하는 널! 내가 어떤 심정으로 보고 있는지 네가 알까? 기다리면, 기다려서 네가 다시 내게로 올거란 확신만 있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하지만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네가 점점 멀어지는 걸 나는 어떡해야 하니?"

그의 말이 맞았다. 그는 언제나 맞는 말을 했다. 이번에도 역시 그랬다.

"그런데... 그런데 자길 보고 있으면 자꾸 우리 아기가 생각나.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우리의 문제가 그 애때문이 아닌척 자꾸 둘러 대지만 결론은 항상 같아. 변하지가 않아."

내 어깨에 올려있던 팔이 힘없이 툭하고 떨어졌다.

그는 더이상 말이 없었다.

 

 

11) 어느날의 계획

"형질유전의 특성상 매우 드문 일이겠지만 말야. 나중에 우리 아이는 네 눈을 닮았으면 좋겠어. 베니."

고등학교보다 조금 이르게 시작된 대학 방학으로 내 기말시험 과외교사 노릇을 하고 있는 그에게 내가 말했다.

"이거이거 또 딴짓이야. 책봐. 얼른."

들고 있던 펜으로 내 이마를 툭툭치는 모양이 영락없는 선생님이었다.

"아야"

나는 붉어진 이마를 손으로 감싸고 그에게 눈을 흘겼다.

"너 여름학기 시험 망치면 원서내는데 불리하다는거 알아 몰라. 너처럼 외국학생한텐 더 까다롭다구. 왜 네 시험인데 내가 더 전전긍긍하는거 같다."

그는 올봄부터 쓰기 시작한 검은색 뿔테 안경을 벗으며 찡그리듯 눈을 감았다. 나는 그가 방심한 틈을 타 충동적으로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입을 맞췄다. 그는 더듬거리는 손으로 책상위에 들고 있던 안경을 내려 놓고 나를 안았다. 그의 반응에 한층 들뜬 나는 앉아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그의 무릎위에 올라탔다.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은 어느새 그의 머리 전체를 쥐고 있었다.

입맞춤이 점차 격렬해지고 얽혀있던 혀와 입술 사이로 달뜬 신음이 점점 커지자 나는 도발적으로 그의 허벅지 위에서 몸을 비틀었다. 움찔거리는 근육들이 그가 내게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거짓없이 보여주었다. 그의 뜨거운 숨이 볼을 간질이고 그의 긴 손가락이 몸을 더듬자 나는 그간의 부끄러움 따윈 잊고 그에게 더욱 몸을 밀착했다. 내 또래 고등학생 아이들이 그러하듯 볼붙은 십대의 열정은 한 번의 충동질로 쉽게 이성을 무너뜨렸다. 나의 달리진 상태를 눈치 챘는지 그가 급하게 나를 몸에서 떼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그만 하자."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나는 흐트러진 옷차림 그대로 도발하듯 젖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베니."

".. ... 분위기에 휩쓸린거야. 여기서 더. 더 뭔가를 하게 되면 분명 후회 할거야."

"날 실망시킨 적 한번도 없었잖아."

"오늘이 그날이 되고 말거야."

그는 떨리는 손으로 내 옷을 정돈해 주었다.

나는 보란듯이 그의 손에 뜨거운 입김을 뿜어댔다.

"허니... 제발..."

나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얌전히 그의 손에 몸을 맞겼다.

뾰루퉁해진 나를 보고 그가 나보다 스무살은 더 먹은 듯한 말투로 말했다.

"아무튼 영국의 고등학교란 없느니만 못한 존재라니까. 그 순진하던 애가 이럴 줄 누가 알았겠어."

나는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그의 안경을 그에게 씌워주며 대꾸했다.

"그러게. 베네딕트군이 그 유명한 영국 고등학생일때 이 나라에 없던게 다행이라니까. 안그랬음 지금쯤 생물책이아니라 육아책을 보고 있었을테니 말이야."

"한마디도 안 지려고 하지!"

"다 누구한테 배운 거겠어? 이 먼 타국땅에 의지할 데라곤 베네딕트군 밖에 없는 내가..?"

그는 겨우 식힌 열정의 잔재를 다스리며 나를 품에 안았다.

오누이같은 포옹이었다.

"그런데... 허니. 난 우리 아이들이 전부 허니를 닮았으면 좋겠어. 너랑 똑같이 생긴 작은 천사들한테 둘러싸여 평생을 보내는 것만한 천국은 없을 거야."

나는 그의 목에 얼굴을 비비며 작게 대답했다.

"그게 베니가 원하는 거면. 내가 양보해야지. 왜냐하면 내가 더 많이 사랑하니까."

"평생가도 그럴 일은 없을걸?"

우리는 서로의 몸에 웃음을 묻었다.

"그래도 한명쯤은 베니를 닮은 눈을 가진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어."

나는 웃음이 사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홉번째 아이 정도면 고려해 볼게."

"? 아일 아홉이나 낳으란 말야?"

"아니. 한 열 다섯쯤. 그 중에 하나 정돈 괜찮을 거란 얘기였어."

그가 가셨던 웃음을 다시 웃게 만들었다.

2018.01.01 23:52
ㅇㅇ
모바일
ㅠㅠㅠ 센세의 시간 흐름 구성이 나붕을 미치게 해오ㅠㅠㅠㅠ 농담이라지만 열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을 꿈꾸며 행복했는데 아기 천사를 잃은 모습이 비교되면서 너무 슬퍼오ㅠㅠㅠㅠㅠ
[Code: 58c6]
댓글 작성 권한이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