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사람1(에릭):9시 출근, 가게 오픈 10시/ 9시 반 마감, 10시 반까지 가게 청소/술자리 3번 만에 떨어져 있던 기간 동안의 레골라스에 대한 정보 알려줌, 최악이었던 내 첫인상을 그냥저냥 남자사람까진 바꿔놓음, 만만치 않음. 친척이라고 해도 레골라스 너무 아낌. 짜증ㅗ/낸시란 여성과 사귀는 중, 한 번 본 적 있는데 레골라스가 더 예쁨ㅎㅎ/월요일 가게 쉴 때 쉼.


남자사람2(네드): 순딩이. 오전 7시에 출근해서 파이 만듬, 예약 없으면 오후 5~6시 사이에 퇴근. 최근 바나나초코크림파이가 히트쳐서 예약 몰리는 바람에 퇴근 늦어져서 슬퍼함/마틴이란 의사랑 사귀는 데 완전 쥐여 삼. 쯧쯧. 마틴에게 줄 선물 고르는 거 도와줬는데 마틴이 마음에 들어 했나 봄. 날 좋은 사람으로 인식한 거 같음.


내 거(레골라스): 12시 출근, 저녁 10시 반까지 가게에 있음/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일함/예쁨/맨날 예쁨, 어제보다 오늘 더 예쁨/ 번호 따려는 XX가 있어서 내가 물리침. 최근 노리는 인간들이 늘어난 것 같아서 예의 주시 중임. 인간들이 보는 눈은 있어갖고ㅗㅗ



                                                  by 스란두일의 메모 어플








"저 정도면 NPC다 NPC. 저녁 때 우리 가게 오는 손님들은 저 놈 다 알 걸?"

"어....음......나도 저럴 줄 몰랐어."

"암튼 대단하다. 말이 쉽지 여기까지 오는 거 힘들 텐데. 여기서 저 사람 집까지 거리 꽤 되지 않냐?"

"응. 한 시간은 걸릴 텐데."

"왕복 두 시간이네 그럼? 퇴근하자마자 오면 피곤하지도 않나. 너 구경하다가 가게 다 끝나면 한 20분 정도 보나? 넌 얘기도 잘 안하려고 하는데 꼬박꼬박 오는 거 보면 흠, 근성은 있네."


에릭은 스란두일이 레골라스와 어떤 관계였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레골라스가 전에 좋아했던 사람이라고 하긴 했는데, 지금 스란두일이 저렇게 매달리는 걸 봐선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구나 하고 대충 짐작만 할 뿐이었다. 어쩌면 레골라스의 우울증과도 관련 있을지도 몰랐다. 그게 확실하다면 반 죽여 놨겠지만 지금 레골라스에게 하는 걸 봐선 개쓰레기까진 아닌 것 같다. 아주 조금은 괜찮은 사람 같다. 아주 아주 쬐끔.


레골라스는 스란두일이 저런 모습으로 있는 건 처음 보았다. 막 입사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결혼식 전에 볼 때까지도 어디 하나 흐트러짐 없이 반듯하고 깔끔하기만 한 모습밖에 본 적이 없는데, 구깃구깃한 수트에 넥타이는 진작 풀어서 어디 뒀는지 없고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자고 있다. 가게 안에 있는 책을 펼쳐 얼굴에 덮어두고 잘 잔다. 거의 매일 오다보니 가게에 익숙해서져선지 뻔뻔해진 건지 지극히 편안한 듯 깨지도 않는다. 레골라스는 스란두일의 앞에 있던 빈 접시와 빈 유리잔을 치우고 나서 조심스럽게 그를 흔들어 깨웠다.


"스란두일."

"으응, 아우으....어, 벌써 가게 끝났어?"

"네, 정리하고 청소만 하면 돼요. 피곤해 보이는데 집에 가서 쉬세요."

"싫어. 너 끝날 때까지 기다릴 거야."


확실히 사람이 변하긴 한 것 같다. 한창 땡깡 부릴 나이인 3.n세 어린애로. 전에 그가 찾아왔을 때 거절 의사를 전했으니 더는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다음날부터 스란두일은 여기로 출근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레골라스에게 직접적으로 뭘 요구하고 그런 건 아니었고 그냥 와서 레골라스를 보고 가기만 했다. 간혹 에릭이 낸시와 데이트 있다며 혼자 집에 가는 날이 생기면 아주 당연하다는 듯 아파트까지 데려다주기도 했다. 왜 에릭과 같이 사냐면서 투덜대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이도저도 아닌 참 애매한 상황이 매일같이 계속되는 게 불편해서 대체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너 좋아서 그런다고, 보고 싶어서 죽겠는데 그럼 어쩌냐는 소리를 줄줄줄 늘어놓는 통에 민망해서 더 말도 못했다.



스란두일이 매일같이 찾아오기 시작한 초반에 레골라스가 그만 좀 오라고 했을 때에도 다음날만 안 오더니 다시 또 매일같이 왔다. 스란두일은 자기 좋을 말만 골라듣기로 결심한 건지 오지 말란 얘기는 더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레골라스가 정말 스란두일이 싫었다면 대판 싸우든 에릭을 동원해서든 막았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에 스란두일은 약간은 희망을 걸고 있었다. 레골라스가 자신을 쉽게 받아줄 거라고 기대도 안 했고 지금 레골라스가 다른 사람에게 눈 돌리지 않은 것만 해도 엄청나게 감사하고 있다. 레골라스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받아주기만 한다면 시일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다.


"스란두일."

"응, 왜?"

"혹시 이번 주 일요일에요, 시간..."

"어, 돼, 시간 돼, 무조건 돼."

"......"


이래서 아직 세상은 살 만 한 건가 보다.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온다.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다. 레골라스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스란두일 혼자 들떠서 고개를 끄덕거리며 마구 눈을 빛내자 에릭이 혀를 끌끌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란두일은 지금 상투스가 울려 퍼지는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레골라스를 끌어안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이건 무려 데이트 신청이다. 틀림없다. 한 달 반이 넘어서야 찾아온 기회다. 와, 미치겠네.



가게의 셔터까지 내리고 나서 이제 좀 가라고 에릭이 눈치를 주어도 여전히 싱글벙글한 스란두일은 레골라스 곁에서 괜히 미적대며 헤어지는 걸 아쉬워했다. 스란두일은 에릭에게 낸시랑 데이트 좀 자주 하라고 인사 아닌 인사를 건넨 후에야 발을 뗐다. 스란두일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 에릭은 레골라스의 표정을 살피다가 슬쩍 말을 건넸다.


"그래서, 결정 했어?"

"응. 언제까지 저럴 지도 모르겠고, 형한테도 민폐고."

"민폐일 것까진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마. 뭐 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만 그 놈이 이상한 짓 할 거 같으면 바로 부르고. 알았지?"

"아하하하, 이래서 형이 좋아."

"야, 안 돼. 나한테는 낸시가 있어. 우린 이뤄질 수 없는 사이야."

"..... 정말 낸시가 존경스러워. 어떻게 형을 참아내지?"


낄낄대는 에릭을 괜히 툭툭 치면서 장난을 걸었다. 이번 주말이면 어떤 식으로든 끝이 날 것이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스란두일의 고백했을 때 레골라스는 스란두일이 무언가를 착각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고, 누구든 곁에서 항상 보던 사람이 갑자기 없어지면 허전함을 느끼게 마련이니 스란두일도 마찬가지 일거라고 생각했다. 몇 달 간 자신을 찾아다닌 건 놀랍기는 했으나 그것만으로 자신을 좋아한다고 받아들이긴 힘들었다. 스란두일의 감정에 의구심이 들기도 했거니와 그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전혀 상상되지 않는 것도 거절에 한몫했다. 그에게 여태껏 받았던 상처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지만 스란두일이 누군가를 마음에 담고 그 감정을 표현한다는 건 어쩐지 불가능한 일일 것만 같았다.


스란두일의 말이 믿기지도 않았을 뿐더러 자신은 이제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더 이상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스란두일이 자신에게 사과했다고 해서 그토록 비참했었고 서글펐던 감정들이 사라진 건 아니었으나 적어도 그렇게 사랑했던 그가 최악은 아니었다고, 그 정도로 기억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괜찮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야 걸렸지만 자신의 우울증도 많이 나아졌고 어쩌면 스란두일도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바로 다음날부터 쫓아온 스란두일 때문에 다 틀어졌지만. 최근의 스란두일을 보면 자신이 여태까지 알고 있었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뭔가 되게...좀 풀어진 것 같기도 하고 분위기가 유해졌다고 해야 하나? 전과 달리 그다지 위압적이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다. 사람이 저렇게 바뀔 수도 있는 건가 신기하기도 하다.






토요일은 바빴다. 레골라스 말고 스란두일이. 아예 오전부터 가게에 와서 뭘 그렇게 열심히 찾는지 노트북 자판이 춤을 춘다. 최근 데이트 장소로 뜨는 곳과 맛집과 동선을 고려한 코스를 리스트로 작성하는 틈틈이 레골라스에게 작업 걸려는 미친놈들이 있는지 체크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오후쯤 되자 놀랍게도 스란두일은 쇼핑할 게 많다며 일찍 자리를 뜨기까지 했다. 스란두일이 당연히 저녁까지 붙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에릭은 먼저 가는 스란두일을 보며 한마디 했다.


"레골라스.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내일 너 만일 저사람 거절하면 송장 치울 것 같다."

".........."






일요일, 일요일, 아름다운 일요일. 날씨도 좋네~ 이상한 콧노래를 흥얼대면서 흥겹게 운전하던 스란두일은 약속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했다. 레골라스(와 에릭)의 아파트에 주차해놓고 레골라스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두꺼운 눈썹도 다시 결을 다듬어 손질하고 선글라스를 썼다 벗었다 하면서 시계를 흘끔거렸다. 레골라스야 할 말이 있으니 일요일에 봤으면 한다고 했던 것을 스란두일은 드디어 레골라스가 자신을 받아줄 거란 청신호로 받아들였으며 오늘 새롭게 레골라스와 자신의 관계가 정의될 거라고 믿었다. 애인이라든가 연인이라든가 커플이라든가 뭐 그런 것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일말의 불안함이야 없진 않았다. 혹시 레골라스가 정말 자신을 거부하면, 그러면.....물러나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 이상은 괴롭히는 것밖에 더 되지 않으니. 생각만으로도 답답해져 온다. 자신의 감정은 너무 커져버렸다. 상상만으로도 그렇게 들떴던 기분이 갑자기 축 가라앉아버릴 만큼.


조금은 의기소침해져서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들었던 스란두일은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는 레골라스를 보니 다시 설레고 가슴이 벅차오른다. 얇은 니트와 진을 입은 레골라스는 여태껏 보던 모습과는 또 달랐고 오랜만에 나간다는 생각에 들떠보였다. 기분이 좋아 보이니 다행이다. 스란두일은 안전벨트를 매주면서 부디 오늘이 마지막은 아니길 간절히 빌었다.




스란두일이 간 곳은 새로 개장한지 얼마 안 되는 호수공원이었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그런지 주말인데도 사람들이 많이 있진 않았다. 중앙의 호수를 기준으로 숲을 연상케 하는 우거진 나무들은 울창했으며 그 사이사이에 작은 호수들이 자리했다. 작은 꽃무더기들이 군락을 이룬 곳을 지나 호수에서 작은 보트를 타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레골라스는 스란두일이 이끄는 대로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여기도 좋은데 대체 어디를 가려는 건지 궁금해진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활엽수들을 지나 도착한 곳은 인적이 드문 작은 호숫가였다. 공원 한 자락 끝에 자리하고 있는데다가 나무들에 가려져 있어서 마치 아무도 온 적 없는 숲 속에 처음 발을 들인 것 같아 레골라스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나뭇잎 사이로 비춰 들어오는 햇살이 부드럽게 부서지는 모습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스란두일은 검은색 백에서 캠핑매트를 꺼내 잔디 위에 펼쳐놓고 신나서 이리저리 두리번대고 있던 레골라스를 데려와 앉혔다.


“여기 되게 좋아요! 맨날 오고 싶어!”


방싯대는 레골라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던 스란두일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레골라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약간 놀란 것 같긴 했지만 레골라스는 딱히 저지하진 않았다. 오래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손대던 때도 있었으나 지금은 아주 작은 접촉에도 조심스럽고 겁이 난다. 스란두일은 레골라스가 거부하지 않은 것에 약간의 용기를 얻어 조금은 충동적으로 말을 꺼냈다.


“안아 봐도 돼?”


목소리가 떨려 나온 것 같다고, 스란두일은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눈만 깜박대는 레골라스가 보인다. 금방이라도 일어나서 가버릴 것만 같다. 좀 참을 걸, 왜 이런 말을 해서 기껏 좋았던 분위기를 다 망치고, 나란 인간은... 자책하며 어떤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어깨 위로 레골라스의 팔이 감싸져 와서 정말 깜짝 놀랐다. 얘가 지금 날 안은 건가? 어, 어떡하지?? 등 껴안아도 되나? 그래도 되나?


“스란두일.”

“어? 어, 어..”

“매일 오는 거, 이제 안 했으면 좋겠어요.”


선선하게 불던 바람이 갑자기 서늘해진 것 같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레골라스는 오늘 자신을 완전히 거절할 생각이었나 보다. 마지막이란 생각이 들자마자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밀려들어 왔다. 천천히 등을 감싼 손에 좀 더 힘을 주었다. 놓으란 말을 나오기 전의 그 잠시 동안이 너무나 아까워진다. 한 달이 넘게 찾아갔던 건 결국 레골라스에겐 부담만 되었나 보다.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끝의 끝까지 괴로움만 안겨줬던 게 되어버렸다. 아무리 마지막을 슬퍼한다 하더라도 레골라스가 자신 때문에 너무나 많이, 오랫동안 아파했던 것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래도 조금만 더 있다가 말해 주지. 더 좋은 것도 보여주고 맛있는 것도 먹고 그러고 나서, 오늘 남은 반나절만이라도 함께 있다가 말해주지.



“피곤할 테니까, 주말에만 와도 괜찮아요. 기다릴게요.”

“........”

“내 말 듣고 있어요? 힘들 거 같아서 걱정돼서 그러는 건데. 평일에 보고 싶으면 연락해도 돼요. 꼬박꼬박 받을 테니까.”



스란두일은 레골라스를 억소리가 나게 끌어당겼다. 빈틈없이 껴안아 쾅쾅 뛰는 심장박동이 전달될 만큼.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유난을 떠는 게 아니라 방금 레골라스가 한 말은, 그러니까 자신을 받아주는 거라고 해석해도 되는 거겠지? 후우, 사람 간 떨어지게 아주 들었다 놨다 하는 건 어디서 배워 와선, 아주 정신을 못 차리겠다.



“아우, 숨막혀.....! 그만 놔 봐요, 좀! 스란두일!”

“........”

“.......설마 지금 울어요?”



세상에, 처음부터 직접 사귈까요 하고 물어봤으면 기절했겠네, 이 사람. 레골라스는 스란두일의 등을 두드리면서도 여전히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레골라스는 스란두일이 진정될 때까지 한동안 안은 상태로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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